26세 황강공(黃岡公) 휘(諱) 계휘(繼輝)

 

▶문화재 :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10호
▶지   정 : 1984년 7월 26일 지정
▶장   소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13-1
선생의 묘소는 거정터에 있고, 신도비는 1604년 건립하였는데 당초 마을 안에 있던 것을 마을입구에로 옮겼다.


▣가선대부 대사헌 증 이조판서 계휘 신도비명(嘉善大夫大司憲贈吏曹判書繼輝神道碑銘)
   공이 3, 4세에 문자를 알고 7, 8세에 문의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거의 다 읽었고 점차로 장성하여서는 제가서를 두루 열람하여 일견에 열 줄을 함께 내려보고 한번 보면 다 기억하였다. 무신년 한해동안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어지가 내렸다. 기유년 봄에 정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참방하였다. 윤원형이 자기의 신분을 위하여 서얼도 청반에 참여시키자는 의논을 수창하니 이를 반박한 차자가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더욱 강직하여 심정의 직첩을 돌려줄 수 없다고 힘써 논쟁하니 옛 직신의 풍도가 있었다.

 

공이 김공 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함을 주장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서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내고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황해도 관찰사, 이조참의로 좌우승지를 거쳐서 대사간이 되었으며 가선에 승진하여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뒤로 대사간을 네 번, 대사헌을 세 번이나 지냈다. 평생 치가에 뜻을 두지않고 조선의 유업외에는 한 식구의 먹을 것이나 한 이랑 밭이라도 증산한바 없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재주있는 이를 사랑함을 지성으로 하고 내몸을 낮추어 아랫사람을 대하되 나이와 지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의 착한 일을 반드시 들어내며 착하지 못한 일은 듣지 않은체 하며 더욱 종척과 향당사이에 두텁게 하니 유식한 사람은 그 의리에 복종하고 무식한 사람은 그 어질고 온후함을 그리워 하였다. 이에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서 애사를 쓰니 이에 이르되, 몸은 능히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 하나 뜻은 물욕으로 인하여 변하지 아니하며 도량은 사람이 엿볼 수 없고 말씀은 겨우 입에서 나오는 듯 하나 들끓던 공론이 끝나고 조정에 가득찬 의논이 결정되도다 바야흐로 공의 앞날을 기대했는데 벌써 공을 문자중에서 그리게 되니 무궁한 슬픔을 어찌하랴.
知中樞府事 崔  撰略

 

 

27세 문원공(文元公) 휘(諱) 장생(長生)

 

▶문화재 :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47호
▶장   소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사   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199쪽 하]


▣가의대부 형조참판 증 영의정 시 문원공 장생 신도비명(嘉義大夫刑曹參議贈領議政諡文元公長生神道碑銘)
  선생이 명종 무신년에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장중하여 망령된 말과 실없는 장난을 즐기지 아니하고 처음에 귀봉 송익필에게 사자서(四子書)와 근사록을 읽고 마음에 즐겨 행하고 익히니 대사헌공이 기뻐하여 말씀하되 「내 아이가 벌써 학문을 아니 내 근심이 없다」라고 하였다. 자라서는 율곡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도의의 요령을 들으니 선생이 심히 중하게 여겼다. ○선생의 서제(庶弟)가 계축(癸丑: 1613)년에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고문으로 죽었는데 곧 육시(戮屍)하고 대역죄(大逆罪)로 결론이 내림에 선생이 문을 닫고 마땅히 연좌(緣坐)되리라 하니 친척들이 걱정하며 화가 풀릴 계책을 세우자 하나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되 「화와 복은 천명이니 인력으로 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법관이 말하되 「법률상에 연좌되지 않는다」하고 대신의 의논도 또한 같은지라 일이 드디어 끝났다. 처음에 광해군이 죄수를 친국하면서 고변한 사람에게 묻되 「김(金)모도 이 일을 아느냐」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되 「김모는 어진이라 모등이 꾀하는 것을 들어서 알까 염려 하였다」하여 죄를 면하였다. 드디어 고향에 돌아와 세상을 잊고 문을 닫고 외인과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오직 경서와 고훈에 잠심(潛心)하고 습독하므로 스스로 즐겼다. 금상(今上: 인조)이 왕위에 오른뒤에 하교하되 「김장생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 이름을 익히 들었다」하고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여 부드럽게 부르니, 선생이 만언소(萬言疏) 열세가지를 조목으로 들어 진주하였다. 시강 강학관에 책립되고 가선에 승진하고 동지 중추부사를 배수하였다. 때 마침 호구(胡寇)가 서울에 침범하므로 상감은 강도(江都: 江華)로 파천(播遷)하고 세자는 조관(朝官)을 나누어 가지고 남하하였는데 선생으로 하여금 호소사로서 간신히 병정과 식량을 모집해 가지고 분조(分朝)에 가서 세자를 뵙고 강도에 이르니, 화의가 결정되었고 적은 물러 갔다. 상감이 불러 위로하고 장려하니 선생이 「적세도 완화되었고 신의 병이 중하니 돌아가겠다」하고 또 「강화론은 임시 권도에서 나왔고 척화론도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상소하였다. 신미년 8월 3일에 별세하니 명하여 가로대,
홍의9弘毅)하여 치원(致遠)하고 목눌(木訥)이 인(仁)에 가까우니 성훈(聖訓)이 빛나고 사과(四科)의 열에 증자(曾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마침내 공자의 전통을 얻었도다. 아- 선생은 자질이 진중하고 기품이 순후하며 확연히 정중하고 전일하였도다. 일찍이 진유를 스승삼아 잠심하고 구(矩)는 모나고 규(規)는 둥글도다. 세상의 학자들은 허공에 의지하여 먼 곳을 달리고 화려한 빛을 밖으로 펴는데 선생은 이와 달라 마디만큼 쌓고 저울 눈금만큼씩 쌓아서 뒤에 하고 먼저 할 것을 알았도다. 황중(黃中: 충심)으로 이치를 통하고 아름다움이 사지(四支)에 통하여 혼연한 덕성이 온전하고 늦게 성주를 만나 융숭한 예로 대접하고 벼슬을 주니 하전(厦 : 임금이 거쳐하는 집)에서 도유(都兪: 감격하고 즐기는 뜻)하였도다. 나라에 대로(大老)가 있어 수하고 또 강녕하니, 붉은 얼굴과 흰 머리요 사림의 첨앙함이 산과 같고 또한 뫼뿌리 같으니 큰 별이 하늘에 있음이로다. 날이 기울고 들보 부러짐에 애영(哀榮: 슬픔과 영화로움)이 구비했네 저 재여(宰如)한 무덤의 큰 비에 명을 새겨 만년까지 보이네.
新豊君 谿谷 張維 撰略

 

 

28세 문경공(文敬公) 휘(諱) 집(集)

 

▶문화재 :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296호
▶장   소 :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사   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29쪽 상]


▣신독재 문경공 집  신도비명 (愼獨齋文敬公集神道碑銘)
   우리 문원공 사계선생은 학문이 이루워지고 도가 높아 유학의 종사가 되었고 또 아들이 그 전통을 이었으니 신독재선생이다. 서제(庶弟) 고( )가 남의 무고를 입어 일이 장차 예측키 어렵게 되었음에 선생이 대궐로 들어가 아우 참판공 반(槃)과 더불어 대죄하니 상감이 말씀하기를 「고( )가 진실로 망언을 하였으나 그 부형은 모두 어진고로 특별히 용서한다」하였다. 상(上)이 이르되 「비록 적도이나 현자를 두려워 할줄 아니 국가에 유익함이 이와 같다」이르고 선생이 상소하여 여가를 빌어 수묘할 것을 윤허받았다. 이어 승진하여 이조판서를 삼으니 선생이 세 번 상소하고 면고(面告)하여 사양하였다. 상감이 말씀하되 「더불어 천위(天位)를 같이하고 천직을 다스리지 못함은 왕공(王公)이 어진 사람을 높이는 도리가 아니다」하니 선생이 더욱 감격하여 사은하였다. 본조의 상례는 틀린곳이 많으므로 주자의 논설을 상고하여 책 한권을 만들어 진상하였다. 대개 율곡선생이 석담에서 강도함으로 임금 섬기고 백성 다스리는 일을 책임으로 알고 수사낙건(洙泗洛建: 수사는 공자 맹자이고 낙양의 정자와 건양의 주자)의 도를 세상에 밝히니 사계선생이 순박하고 진실한 공적을 쌓아 그 종통을 얻었고 선생이 또 이어 문로가 심히 바르니 거의 전함에 유감이 없다. 명하노니, 아- 저 석담은 도학의 근원이로다 누가 그 종통을 받았든고 오직 문원공일세 높고 높은 그 뒤를 선생이 이어서 순수한 자질로 정도를 닦았으니 그 도가 이루어졌도다 총명한 재변은 세상이 능하다 하였네 기록할 일 없다마라 인을 드러내지 않았도다 아름답다 선생은 오직 진실을 힘썼도다 학문이 전일하고 행실이 돈독하며 효도하고 우애하였도다. 노년에 어버이를 모시니 양세가 도학의 종장이다 태산은 무너졌으나 동량은 남아있네 학이 구고(九 : 깊은 연못)에서 우니 옥백(玉帛)이 서로 달리도다 임금앞에 계책을 진달하니 순(舜)과 우(禹)가 주고 받던 일이로다 성상이 보위에 올라 제일 먼저 불렀도다 정사고 묻고 학문도 물으니 어진 지혜를 아뢰었네 사람들이 선생이라 하니 참으로 의롭고 인하도다 장차 왕실을 도와 이 나라 사람을 화하려 했는데 일이 크게 그릇되어 향리에 돌아오니 하정배도 눈물을 머금고 선비들도 탄식하네 이미 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옷)으로 돌아오니 내 마음 누누(縷縷: 가늘고 긴모양)하도다 깊은 못에 임하고 엷은 얼음을 밟은 듯 알뜰하고 조심하여 늙어도 쉬지 않았네 조예와 늙어도 쉬지 않았네 조예 법도가 있도다 어찌 이동(異同)이 없으랴마는 마침내 흠이 없었도다 어찌 백년을 살아 우리 후생을 일깨워 주지 않았는고 천호산 봉우리가 높이 솟았으니 억만년이 지나도 길이 길이 그 영조(塋兆)는 남는 것일세.
門人 尤菴 宋時烈 撰略

 

 

28세 허주공(虛舟公) 휘(諱) 반(槃)

 

▶문화재 : 대전광역시지정 문화재 제7호
▶장   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선비촌
▶사   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31쪽 상]


▣이조참판 증 영의정 반 신도비명 (吏曹參判贈領議政槃神道碑銘)
   공의 휘는 반이요, 자는 사일이니, 사계선생의 계자다 공이 선조 경진년에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황강공이 어루만지며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집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하더니 점점 자람에 탁연히 조성하여 신독재 집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갑자년 이괄의 반란에 상감이 공주로 판천할 때에 공이 어가를 따라 공주에 있으면서 정시 제3명으로 뽑혔고 옥당에 들어가 여러 요직을 거쳤고 병조참판, 대사간, 동부승지에서 형조에 옮겼고 병자호란 때 적병이 갑자기 몰려와 상감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는데 성이 위급한지라. 공이 상감에게 아뢰어 수레를 타고 성에 올라 친히 독전하여 삼벽제장과 힘껏 싸웠으며 공의 아들 익희(益熙)가 독전어사로 남성을 지키는데 공이 이르되, 「우리는 직책에 죽어야 할것인데 다만 명백하게 취의(就義)하여 이 마음을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상감에게 호진(胡陣)에 가서 화친을 청하라고 권하나 정온(鄭蘊)이 홀로 반대하며 죽기로 맹세하여 공의 의견과 같이 시종 변치 않았으나 마침내 화친이 이루어짐에 서울로 돌아오다. 마침 한재중에 강론할 때 시전 운한장(雲漢章)을 인용하여 깨우침이 간절하니 상감이 감동하여 다 가납하고 대사헌에 옮겼다. 경진(1640)년 4월에 졸하다. 명(銘)하노니,
선조가 나라를 다스릴 때 군현이 천양하였으니 우계 율곡의 도학이요 황강의 문장이로다 연원이 흘러내려 사계를 보았고 형제가 쌍벽으로 가풍을 이었으니 나가면 세상에 쓰여 견줄 사람이 없었다 간난(艱難)한 때를 만나 행한 도가 더욱 굳었도다 난리에 임금을 모실적에 대의가 일월같이 빛났고 간사함을 우정(禹鼎)에 빛인 듯 밝아 음사(陰邪)가 스스로 나타나네 임금의 은정이 두터웠고 선비의 중망이 모였도다 사헌부의 수반이요 이조의 차석이다 중도에 밟은 자취 천리에 빠른 걸음이었다 저 고림은 융성한 무덤인데 청오(靑烏: 선인)의 도움으로 현당(玄堂: 무덤)이 편안하네 돌을 깎아 글을 새김에 조금도 꾸밈이 없다 내후천년(來後千年)에 군자는 반드시 공경하리
淸陰 金尙憲 撰略

 

 

29세 도헌공(都憲公) 휘(諱) 익경(益炅)

 

▶장   소 :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건업리
▶사   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60쪽 상]


▣증이조판서 행 대사헌 익경 신도비명(贈吏曹判書行大司憲益炅神道碑銘)
   공의 휘는 익경이요 자는 계명이니 효성은 하늘에서 냈다. 9세에 선비(先 : 어머니)상을 당했고 12세에 부친상을 당함에 애모하여 고기를 먹지 않으니 백씨와 중씨가 민망히 여겨 손을 잡고 권하니 공이 자기 옷소매를 깨물며 먹으려 하지 않거늘 중씨가 옷소매를 당기니 이가 부러져 피가 남에 업드려 우니 보는이 슬퍼하지 않는자가 없었다. 18세에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그때 영남사람 류직(柳稷)이 이율곡과 성우계를 모함하므로 성균관 유생들이 유직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거절하니 상감이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공이 그때 성균관의 물의를 관장한지라 풀어줄 수 없음을 역설하니 성균관생이 독서를 철폐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공이 제생들을 거느리고 항소를 올려 상감의 뜻을 거스렸으나 오히려 굴하지 아니하니 선비들이 중하게 여겼다. 문경공이 일찍이 공을 칭찬해 말하기를 "천품이 도에 가까운데 문예가 그치고 말았으니 애석하다."하였고 창주공이 이르기를 "마음에 한점의 티끌이 없고 행실이 염백하니 이른바 빙청옥결(氷淸玉潔: 얼음처럼 맑고 옥과 같이 깨끗함)한 사람이 바로 아우 같은 사람이라고."하였으니 이 두분의 말씀으로 공의 인품을 알 수 있다. 공이 혹 글을 읽다가 오열하는 때가 있으니 엿보면 반드시 옛 사람의 부모 섬기는 귀절이라 그러므로 친구들이 차마 부모의 유사를 들려주지 못하였다. 묘소있는 곳에서 상주(喪主)를 보면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고 일찍이 자손을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부귀를 많이 원할것이 아니라 우리집의 고귀함은 시례와 청전(靑氈: 청색의 모단, 즉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공이 명가의 자손으로 일찍이 현달하였으되 아성이 염정하고 영리를 즐기지 않고 정결한 한칸 집에서 담박하기 한사와 같아 너그럽고 즐겨서 한가롭게 평안을 얻으니 능히 인수를 누렸어야 할것인데 중년수도 못하였으니 어찌 절통치 않겠는가.
尤菴 宋時烈 撰略

 

 

 

 

29세 충헌공(忠獻公) 휘(諱) 익훈(益勳)

 

▶장   소 :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무수리
▶사   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57쪽 하]


▣가선대부 형조참판 광남군 시 충헌공 익훈 신도비명(嘉善大夫刑曹參判光南君諡忠獻公益勳神道碑銘)
   공의 사람됨이 영명하여 뛰어난 정신이 얼굴에 넘치고 그러나 일을 만나면 바람이 일고 물러서고 추탁하지 않으므로 젊어서 성상의 지우를 받아 일찍이 간성의 물망이 있더니 만년에 편안하고 슬픈 지경이나 어렵고 위태로울 때를 만나면 내 몸을 잊고 충성을 다하여 간흉 소탕하기를 농부의 잡초뽑듯 하더니 불행이 당인의 무고로 대죄를 몰려 결국 흉도의 손을 빌어 죽었으니 아- 어찌 특별히 공에게만 불행했는고 명(銘)하여 이르노니,
성주의 총명은 일월이라 백성이 다 우러러보고 문정선생은 대현이라 어찌 거짓을 말하리오 또 우리 숙부의 지공함으로도 먼저 공의 과실없음을 말했으니 이 모두 백세를 지났어도 의문이 없으리니 어지 나의 붓을 기다리랴 아- 군흉이 죽었으니 원한이 풀렸고 대륜이 밝았으니 유원이 밝혀졌네 공의 억울하고 신원한 일을 보는 자로서 누가 이 비에 감동함이 있지 않으랴
영의정(領議政) 소재(疎齋) 이이명(李 命)이 신도비문을 짖고 손남(孫男) 진상(鎭商)은 글을 쓰고 종증손 보택(普澤)은 전액(篆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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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창주공(滄洲公) 휘(諱) 익희(益熙)

 

▶문화재 : 대전광역시 지방문화재 제5호
▶장   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가정동 산 8-9 국립과학공원 뒤
▶사   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54쪽 상]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행 이조판서 문정공 익희 신도비명(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行吏曹判書文貞公益熙神道碑銘)
  공의 휘는 익희요 자는 중문이며 호는 창주다. 어렸을 때에 사계선생이 그 총명함을 보고 원대한 기대를 가졌다. 공이 이미 시례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장계곡 유와 정기옹 홍명에게 가서 고문을 배웠고 18세에 진사시를 거쳐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으로부터 한림원을 거쳐 옥당의 벼슬에 있으면서 시무를 들어 수천언을 상감에게 올렸고 또 경연진강 때 음운이 명랑하고 의리가 명백하니 인조가 가상히 여겼다. 병자(1636)년에 노인(虜人)이 참람하게 황제라 칭하고 사신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협박하니 공이 이때에 옥당에 있었는지라 동료들과 함께 척절(斥絶: 배척)하는 소(疎)를 올리니 의리가 극히 준엄하여 이때 온나라가 동조하며 뽐냈으나 호국사신이 오니 모두 두려워 도망하되 공은 태연하기 평소와 같았다. 다시 글을 올려 포빙악화(抱氷握火: 춘추전국시 월왕 구천의 복수고사 겨울에 얼음을 안고 여름에는 불을 갖이며 복수하는 오월의 관계하던 옛말)을 인용하며 치욕 면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하니 상감이 원수로 명하여 군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겨울에 호군이 쳐들어 오니 조정의 의논이 화친을 주장하는지라 공이 탄식하며 이제는 저 오랑캐의 무리가 되리니 차라리 정의를 지키다가 죽는 수 밖에 없다라고 동료들과 함께 상감을 뵙고 아뢰기를 "금후에 화친으로써 말하는 자는 반드시 죄로써 다스린 뒤에 적을 쳐야 한다하고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독전어사가 되었다. 효종이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는 도로써 왕위에 임하려 하므로 공이 일심으로 도움이요 을미(1655)년에 공이 조문차로 나에게 왔을 때에 의하여 상감의 뜻을 말씀해 주었고 그 뒤 상감의 부름을 받고와서 전후말을 올리니 상감이 위연히 탄식하며 김익희의 말도 항상 이러했는데 어찌 빨리 죽었는고 하므로 나도 문물을 머금고 나왔는데 외로운 몸이 누구와 더불어 동사할 사람도 없고 상감도 빈천(賓天: 승하)하니 아- 이 어찌 홀로 동방만세의 통한뿐이랴.
宋尤菴 時烈 撰略 (창주공 산소, 신도비, 재실 주변 만여평은 대전광역시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30세 문충공(文忠公) 휘(諱) 만기(萬基)

 

▶문화재  : 경기도 도지정 지방문화재 제131호
▶장   소 :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사   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79쪽 하]


▣광성부원군 문충공 서석 휘 만기 신도비명(光城府院君文忠公瑞石諱萬基神道碑銘)

 

   공의 의표가 풍유하고 침정하여 사리에 밝고 굳세어도 너그러우며 효우는 천성이었고 학업은 번거롭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어도 이루어졌다. 시례의 가문에서 생장하여 조상의 정훈을 이어받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일찍이 남한성 장대에 올랐다가 선현들의 업적을 이을 뜻이 있어 그 분발하고 격렬함이 조정에 서서 문무를 겸할만한 의리가 있으니 그 본래 간직한 포부를 가히 알 수 있도다. 효종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쇠약해지고 국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양난할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고 사화가 잇따르니 공이 충심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케하고 훈업을 이룬뒤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일이 없는 듯이 자처하려 했으나 나라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악같이 우러렀고 비록 공을 좋아하지 않는이도 처음에는 헐뜯었으나 아무리 살펴도 추호도 흠잡을 곳이 없으므로 결국은 공을 따랐다. 그러나 공은 관심을 갖지 않았고 더욱 겸손하고 침착하여 착한 말씀이 흠이 없었다. 그러나 당초에 집에서 기대하던 것에 비하면 태산 정상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아- 애석하도다. 그 문장은 모두 이치에 맞고 사리는 법칙에 맞아 아담하고 정제되어 작자의 규범을 갖추었다. 어렸을 때 외조부 해숭위(海崇尉)와 숙부 창주공 두 분이 우두머리로 인증하였고 또 경서 사기외에도 제가서를 달통했고 일찍 채서산(蔡西山) 뒤로는 선비들이 종률(鍾律: 음률)에 발명이 없음을 한탄하여 종묘의 악장을 고정하니 증거가 정확하여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으니 이 어찌 요새 선비들중에 일변에만 치우치는 자와 비교가 되리오 공의 평생에 저작한 글은 제자들이 수집한 몇 권의 책이 감춰져있다. 공이 나를 노선생의 문인이라 하여 외람되게도 존경을 받았으나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공의 자상한 일은 아는 사람은 나만한이가 없다하여 제고들이 나에게 묘문을 청하였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문을 지었고 소재(疎齋) 이이명(李?命)이 시장(諡狀)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