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 溪 先 生   年 報

 

* 皇明 世宗肅皇帝 嘉靖27年 戊申(1548)明宗恭憲大王 3年

  7월 辛巳(8일) 申時에 先生이 서울 황화방 정능동(현 서울시 중구 정동) 집에서 탄생하시다.

 

* 己酉(1549) 선생 2세

 

* 庚戌(1550) 선생 3세

 

* 辛亥(1551) 선생 4세

 

* 丁巳(1557) 선생 10세

  선생은 어릴 때 행동거지가 점잖고 말과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버릇없이 굴지 않으므로 견식이 있는 사람은

  이미 그릇됨을 알았다.

 

* 戊午(1558) 선생 11세

 - 9월 을유(12일)에 어머니 平申山氏가 별세하다.

 - 겨울에 어머니 신씨를 연산 거정리 선산에 장사하다.

 

* 己未(1560) 선생 13세

 - 12월에 어머니에 대한 상복을 벗다.

 - 龜峰 宋先生의 문하에서 학문하다.

이에 앞서 아버지 黃岡公이 尹元衡의 무리에게 미움을 사서 외직으로 축출되어 선생은 서울에서 할아버지 찬성공이

기르게 되었는데, 어리고 잔약하고 어머니가 없는 것을 가련히 여겨 항상 슬하에 두고 밖의 스승에게 보내지 않았다.

조금 성장하매 스스로 분발하여 글을 읽고 뜻을 격려하고, 세속의 추향과 좋아하는 것은 일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처음으로 송구봉에게 종학하여 사서 근사록 등의 글을 배우는데 전심으로 연구하고 더욱 부지런히 하여 이로부터

학문이 날로 진취되니 황강공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학문이 이미 이와 같으니 내게 아무런 근심이

없다.” 고 했다.

선생이 일찍이 문인 송문정공 시열에게 말하기를, “나는 근사록을 구봉에게서 배웠는데 구봉은 매우 영매하여 글을

보면 막힘이 없어 남도 자기와 같은 줄 알고, 한번 지나면 전혀 해설해 주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정신이 아득하여

배우지 아니한 것 같더니 물러나 정좌하여 보고 또 본 것을 다시 보면서 辛苦하였으며, 읽고 생각하며, 생각하며 읽

기를 밤낮으로 계속하였더니 점점 깨달은 바가 있었으나, 천 백번 생각하여도 마침내 깨닫지 못한 것은 묻기를 청하

였으니 글 읽기를 나같이 부지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송문정공이 그 문인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선생에게 듣기를, ‘어려서 송구봉에게 가서 글을 배울 때 간장도 없이

소금으로 밥을 먹었었다. 해를 넘겨 귀로에 한 婢家에서 비로소  나물국이 있는 식사를 하였는데 그 아름다운 맛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고 하시니 선생에 각고의 학문을 가히 알 수 있다.” 고 했다.

 

* 辛酉(1561) 선생 14세

 - 찬성공의 知禮 임지로 따라가다.

 - 12월 丁丑(22일)에 찬성공이 졸하다.

   선생은 황강공이 상제로 연산 거정리 선묘 아래에서 居憂하매 함께 계셨다.

 

* 壬戌(1562) 선생 15세

 

* 甲子(1564) 선생 17세

 - 황강공을 따라 서울집으로 돌아오다.

    이때에 황강공이 복직의 명을 받았다.

 

* 丙寅(1566) 선생 19세

 - 창녕조씨의 부인을 맞이하다.

    첨지중추부사 諱 大乾의 딸이요 판돈녕부사 昌陽君 諱 光遠의 손녀다.

 

* 穆宗莊皇帝 隆慶 元年 丁卯(1567) 선생 20세

 - 율곡 이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다.

이로부터 성학의 깊은 뜻을 상세히 듣고 마음을 가다듬어 힘써 행하고 자기의 임무를 매우 진중히 하였다.

이선생이 해서로 돌아가매 곧 따라가 그 문하에 머물면서, 전에 배운 것을 강구하고 새로 얻은 것을 연마하였다.

더욱 예학에 정통하여 절목이 다 갖추어졌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거론하매 이선생이 항상 믿음직하게 여겨

특별히 기대하였다.

 - 6월에 큰아들 '은'이 태어나다.

 - 土亭 李之函(諡號는 文康, 본관은 韓山, 벼슬은 현감)을 保寧에 가서 뵙다.

이때에 토정이 窮民의 생계를 위하여 해변에서 소금을 굽는데 연기가 눈에 가득하여 사람이 오래 감내할

수 없으나, 선생은 조금도 얼굴 빛을 고치지 아니하고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 하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가매,

토정이 멀리 바라보며 송별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덕인이라 하였다.

이일은 연조가 미상하나 선생이 젊은 때의 일이므로 여기에 쓴다.

 

* 戊辰(1568) 宣祖昭敬大王 元年 선생 21세

 

* 己巳(1569) 선생 22세

1월 乙卯(11일)에  할머니 이씨가 졸하다.

이때에 선생이 해서에 있었는데 홀연히 슬픈 감정을 느껴 눈물을 금하지 못하더니 며칠이 못되어 부음이 이르렀다.

사람들은 지극한 정성은 미리 아는 증험이라고 하였다.

 

* 庚午(1570) 선생 23세

 

* 辛未(1571) 선생 24세

 

* 壬申(1572) 선생 25세

 

* 神宗顯皇帝 萬曆 元年 癸酉(1573) 선생 26세

 

* 甲戌(1574) 선생 27세

 - 6월에 둘째아들 集이 태어나다.

곧 愼獨齋 문경공이다. 선생께서 자질이 대현이 될 만하다 생각하시더니 마침내 정훈을 이어 유종이 되었다.

 

* 乙亥(1575) 선생 28세

 - 가을에 황강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다.

관서는 본래 번화한 곳이라 대소 유흥객들이 날마다 음악과 여색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데, 선생은 매양 어버이를

모시고 있어 여가가 있으면 여러 사람들과 수작을 하지만 조금도 오만하지 않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은 조금도 마음에 지니지 않으니, 보통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 하여 모두들 칭찬하였다.

선생이 송문정 시열에게 말하기를, “내 젊었을 때 색욕을 금하고 공부에 전념하였으므로 비록 오래 관서에

머물렀으나 끝내 마음에 잡된 생각을 가져 본 바 없었다.”고 하였다.

 - 큰 딸이 태어나다.  뒤에 감찰 徐景휼(霱) 대구인에게 출가하다.

 

* 丙子(1576) 선생 29세

 -둘째 딸이 태어나다.(일찍 죽음)

 

* 丁丑(1577) 선생 30세

 -4월에 石潭으로 율곡선생을 찾어뵙다.

이선생이 구봉에게 보낸 서신에 이르되, “金希元이 와서 20여일을 머물며 조용히 학문을 강구하다가

그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간 후로는 서로 기를 만한 도움이 없었다.” 하였다.

선생이 율곡을 왕래한 것이 이뿐이 아닐텐데 이 글이 특히 율곡의 서찰에 있으므로 기록한다.

 - 6월에 禹伏龍(호는 懼庵, 본관은 단양, 강화유수, 충청감사 역임)을 방문하다.

定性書 및 맹자의 生之謂性章을 강론하다.

 

* 戊寅(1578) 선생 31세

 - 창능 참봉에 추천 받다.

이때 조정에서 학행이 있는 선비를 찾아 등용할 때 이조판서 李後白이 聖經에 침잠하고 옛 교훈을 독실하게

믿는다는 천거 이유를 삼으니, 임금이 영상 洪暹(섬) 조상 盧守愼과 상의하도록 명하자 다같이 마땅하다하여

제수되었다. 선생이 체임되어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추모하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시일이 지났으나 성의껏 수호하여 마멸되지 않게 하였다.

 

* 己卯(1579) 선생 32세

 

* 庚辰(1580) 선생 33세

 - 2월에 셋째 아들 槃이 태어나다.

 - 5월에 坡山(현 파주)으로 牛溪 成渾先生을 찾아뵈었다.

선생이 일찍이 송문정 시열에게 말하기를, “나는 율곡에게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진실로 복종하여 항상 더 할

바가 없다고 여겼으나, 우계에 대하여는 차등적인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하인이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그 후에 자주 왕래하여 그 기모를 살펴보고 그 의론을 들은 후에야 율곡이 도의로서 사귄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 구봉에게 글을 올리다.

人心•道心을 논하였다. 구봉이 또 선생의 글에 답하기를, “보내준 편지가 곡진하여 나의 학업에 보탬이 되니

탄복 탄복 하는 바입니다. 남이 異論을 제기하매 자기만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력이 풍부한

사람으로서는 갖기 어려운 일이니 매우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고 하였다.

 

* 辛巳(1581) 선생 34세

 - 가을에 황강공을 따라 燕京에 가다. 돈녕부 참봉으로 교체되다.

이때에 황강공이 宗系辨誣 改請의 일로 연경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선생이 배행하게 되자 이조에서 제사의

관원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다하고 교체 임명했다.

 - 율곡선생이 시를 주어 송별했다.

 - 11월에 셋째 딸이 태어나다.

후에 淸寧君 韓德及(청주인으로 우의정 應寅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 壬午(1582) 선생 35세

 -4월에 황강공을 따라 귀국하다.

이 행차는 일만여리 왕복이었다. 힘껏 부양하여 성효가 간절하고 지극하여 심지어는 식사할 때도 옆에서

점검하여 건강의 안후를 살피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승진의 명이 있었다.

이는 筵臣이 재행이 탁월하다고 말한 때문이다.

 - 戊申(21)일에 아버지 황강공이 별세하다.

황강공이 특진관으로 입시하여 경연중 갑자기 중풍이 일어나 가마를 타고 집에 돌아오자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문병하고 虎皮를 하사하다. 부음을 듣고 특별히 棺槨을 하사했다. 율곡선생이 筵中에서 말하기를, “김모는 어진

사람인데 크게 쓰지 못했으니 贈爵하고 그 喪葬을 후하게 내려야 합니다.” 고하니 임금이 듣고 대신에게 문의하여

관원에게 명하여 장사를 도와주라 하였다.

 - 6월에 황강공을 거정리 先兆 뒤에 장사하다.

어머니 신씨를 뒤에 합폄하였다.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가례대로 하고, 아울러 廬墓 아래에서 지냈다.

 

* 癸未(1583) 선생 36세

 - 贊成公(휘는 鎬로 선생의 조부)의 묘갈명을 율곡선생에게 지어주기를 청하다.

 - 구봉에게 편지를 올리다.

小喪후 練服하는 일을 논하니 구봉이 답하되, “전후 두 차례의 서신이 情禮가 극진하니 예학에 진보가 있음을

깊이 탄복한다.”고 하였다.

 - 「상례비요」를 완성하다.

이글은 본래 申義慶이 가례의 상례편에 따라 고금의 예와 제가의 말을 참고하여 조목을 따라 증보하였으며, 간혹

시속의 제도에 맞추어 실용하기 편의하게 하고자 하다가 미처 수정하지 못하여 빠진 대목이 많았었다. 이에 선생이

다시 그 글을 취하여 보충하고 삭제하며 교정하여 책을 완성하였다. 吉祭와 改葬 두 조항은 가례에 없는 것을

古禮와 丘氏儀節에서 첨부한 것이다.

경신년에 兩湖유생이 이 책을 출간하게 되매 선생이 서문을 지었고, 그 후에 선생은 초본이 갑자기 출간되어 혹

미진한 사례가 있을까 하여 수정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節文과 度數가 주밀하고 자상하여 절실한 것과 變禮와

疑文의 형평을 결정하여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은 참고, 비교하여 형평을 맞추고 세밀히 분석하였으니 추록한 것은

舊本에 비하여 거의 열에 이삼은 된다. 무자년에 文敬公(愼獨齋)이 序後와 小識를 하였고, 선생이 뒷날 개정한

것을 다시 간행 하였다.

 

* 甲申(1584) 선생 37세

 - 1월에 율곡선생의 영전에 곡배하다.

이때에 선생이 아버지 복중에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黃勉齋가 그의 스승, 朱子에게 입은 복제에 따라 복을 갖추고

왕림하였으며, 朔望때마다 그 복을 입고 哭하였다. 그 뒤로도 忌日을 당할 때마다 목욕재계하고 소복을 입었으며

늙도록 폐하지 않았으며, 그 자손에게도 至親과 같이 대우하였다. 구봉선생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 6월에 아버지 황강공의 복을 마치다.

 - 순능참봉에 제수되다.

얼마않가서 병환으로 교체되다.

이조에서 왕자 사부에 추대하려고 하자 지난날 아버지 상중에 있으면서 율곡의 초상에 따라간 일로 부모의 상을

삼가지 않았다고 하여 저지하려는 자가 있었다. 혹자는 “옛날에 증자는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도 친구 子張의

장례에 가서 조문 하면서 ‘내가 조문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였으니, 친구 간에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스승에게

있어서랴. 이는 저지할 것이 아니라 권장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지하는 자가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끝내 추대되지 못했다.

 - 平市署 奉事로 승진되다.  전의 명을 따른 것이다.

 

* 乙酉(1585) 선생 38세

 

* 丙戌(1586) 선생 39세

 - 봄에 벼슬을 버리다.

이때에 李潑(호는 東菴, 본관은 光州, 동인의 중심인물), 鄭仁弘(호는 萊菴, 본관은 서산, 대북의 영수)등이 율곡,

우계, 思菴(이름은 淳, 시호는 文忠, 본관은 충주), 송강 등 제현을 모함하여 황강공에까지 미치니 延平 李貴가

여러 유생들과 소장을 올려 변론하였으나, 時輩들에게 더욱 의심과 미움만 더하니, 그 화가 구봉에게까지 미쳤다.

이로 인하여 선생이 벼슬을 버렸으니 을축년 李玉汝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하다.

 - 4월 己丑(25일)에 부인 曺氏의 상을 당하다.

6월에 거정리 선영에 장사하였다.

 - 活人署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니 교체되다.

 

* 丁亥(1587) 선생 40세

司圃署別提, 司饔院 奉事에 제수되었으나 다 사직하고 나아가지 아니하다.

 

* 戊子(1588) 선생 41세

 - 童蒙敎官에 제수되다.

 - 가르치심이 법도가 있어 성취한 자가 많았다.

 - 둘째부인 順天金氏를 맞이하다. 秀彦의 따님이고, 節齋  忠翼公 宗瑞의 후손이다.

 

* 己丑(1589) 선생 42세

 - 여름에 적소로 가는 重峯 趙憲을 송별하다.

중봉이 諸賢이 무고를 당한 것과 군소배들이 기만하는 폐단으로 나라가 병이 들었다는 상소를 하였다가, 吉州로

귀양가게 되어서 선생이 중도에 나가 전송하였다.

 - 10월에 松江 鄭澈을 高陽으로 가서 뵙다.

전에 송강이 정인홍의 무리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參贊에서 물러나 호남에 있은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들의

죽음을 당하여 고양에 와서 장사를 치루었다. 송강의 아들은 곧 선생의 妹壻이므로 찾아뵈었다. 이즈음에

鄭汝立(본관은 동래, 己丑獄死를 이르킴)의 謀反사건이 발생하매 송강이 변을 듣고 달려가고자 하여 선생에게

문의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임금이 불러서 가는 것은 가하거니와 지금 들어가려면 자취와 행동을 시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니 송강이 말하기를, “역적이 君父와 중신을 해코자 하거늘 서울 가까이 있으면서 변을

관망하고 들어가지 않는 것이 가할까. 그대의 말은 다만 혐의만 피할 뿐이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때에

공이 들어가면 반드시 벼슬을 맡겨 또한 공신이 될 것이나 큰 獄事를 면키 어려울 것이요. 만일 애매하게 말려

드는 자를 일일이 공평하고 진실하게 처리하여야 할 터인데 李潑, 白惟讓 같은 사람을 공의 힘으로 능히 그

죽음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송강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과 같이 하면 끝내 혐의만 피할 뿐이요,

신하의 의리는 아니다.” 하였다. 송강이 다시 우계선생에게 물으니 우계는 의리로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 후에 소인배의 무리들이 마침내 그 때 옥사를 다스린 일로 송강을 모함하여 화를 입혔으니,

자세한 사실을 선생이 찬한 송강 行錄에 나타나 있다.

 

* 庚寅(1590) 선생 43세

 - 5월에 작은 부인의 아들 榮이 태어나다.

 - 12월에 관례에 따라 通禮院 引儀로 승진되다.

 - 송강과 더불어 時事를 논하다.

송강이 묻기를, "臺諫에서 銓曹가 일찍이 정여립을 외직으로 천거한 것을 논죄하고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銓官이 어찌 그가 장차모반할 것을

알았으리오. 이는 公罪에 해당하오니 공죄로 사람을 사형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니, 송강이 말하기를,

"공죄로 파직되고 사직되는 자가 많이 있는데 鄭賊(정여립)으로 만일 軍兵을 거느리는 소임을 맡겼더라면 나라의

피해가 적지 않았을 것이어늘 비록 공죄라 하더라도 죄를 들추어 탄핵하는 것이 어찌 방해가 되리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근일 논란과 啓請으로 혹 죽음에 이른 자까지 있는데, 만일 임금께서 진노하여

하옥하고 중죄로 다스린다면 대간들이 다시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저일은 하지 않는것이 옳습니다." 하니,

송강이 말하기를, "이는 우계의 지론이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비록 우계의 말이라 하더라도 쫓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銓官은 곧 李山海(호는我+鳥 溪, 시호는 文忠, 본관은 한산, 대북파의 영수)등이었다.

黃愼(호는秋浦, 시호는 文敏, 본관은 창원)이 정언이 되어 마침내 논죄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고

곧 高山현감으로 補하니 이산해의 참소 논의가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하였다.

#이 일은 월일은 미상하나, 이 해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이에 기록한다.

 

* 辛卯(1591) 선생 44세

 - 봄에 다시 宗契를 모이다.

황강공이 종인과 더불어 정능에서 종계를 모여 왔는데 중간에 폐하고 행하지 아니하다가 이에 제종으로 더불어

모였다.

 - 아들 集이 司馬試에 합격하다.

 - 윤 3월 인진(27일)에 山현감에 제수되다.

 - 4월에 坡山으로 우계선생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다.

선생이 장차 정산 임지로 나가게 되매 가서 사례한 것이다. 이때에 왜국(일본)과 틈이 나서 조야가 위태로운 일이

있을까 걱정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만일 불행히도 나라에 변이 일어난다면 선생은 지위가 재상의 서열에 있으니

마땅히 나아가 국란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우계가 말하기를, “국란이 있을 때 나아가는 것은 정당하나

나는 본래 山野人으로서 초야에 있어 일을 맡아 관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옛 사람 江萬里 같은 자들도 일찍이

난국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니 내 또한 그윽히 마음속에(그들과)비겨 본다.” 하였다.

 - 정산현감에 부임 하다.

쇠잔하여 가는 것을 살리고 폐단을 바로 잡고 한결같이 忠恕로써 정사를 살피니 방백이 선정을 나라에 알렸다.

선생은 泉谷 宋象賢(시호는 忠烈, 본관은 여산, 동래부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과 더불어 막역한 벗이었는데

이 때 왜국과의 사이에 틈이 더욱 깊어져 송공이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詩를 지어 보내 그의 뜻을 보이니, 선생이

刻하여 관아의 벽상에 걸었다. 대개 송공이 성을 지키다 죽기로 결심한 것을 믿었음이다.

 

* 壬辰(1592) 선생 45세

 - 아들 集이 杞溪兪氏에게 장가가다.

좌의정 泓(호는 松塘, 시호는 忠穆)의 딸이다.

 - 4월에 왜란을 만나다.

왜장 豊臣秀吉이 큰 병력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에 가까이 쳐들어오니 임금이 서울을 떠나매 팔도가 창란하였다.

任所가 큰 길에서 멀지 않았으며, 전란이 치열하여 백성들이 생명을 견디기 어려웠다. 선생이 대응하고 안정시키

기를 모두 편의에 알맞게 하고 서울과 지방의 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마음을 다해 周恤하니 관리와 백성들은

안정되고, 나그네들은 유리표박하는 자가 없었다.

 - 5월에 큰 아들 '은'이 죽다.

큰아들 '은'은 서울에 있었는데 적을 피해 동으로 가다가 망우리에서 그 부인과 陰城 朴氏와 세 살 어린 아이와

같이 적에게 죽었으며, 서동생 燕孫이 경상도 관찰사 金晬(호는 夢村, 시호는 昭懿, 본관은 안동, 벼슬은 호조판

서와 영중추)의 幕裨로 왜병을 치는데 역전하다가 죽었다. 이때에 선생은 관아에서 잠시 꿈에서 깨어 종일 슬퍼

하셨으니 흉함이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음을 뒤에 알았다.

 

* 癸巳(1593) 선생 46세

12월에 송강의 부음을 듣다.

 

* 甲午(1594) 선생 47세

 12월에 작은 부인의 아들 檠이 태어나다.

 

* 乙未(1595) 선생 48세

아들 槃이 安東金氏에게 장가들다.

僉樞 進礪의 딸이다.

 

* 丙申(1596) 선생 49세

 - 4월에 만기가 되자 사임하고 연산 집으로 돌아왔다.

 - 12월에 庚午(8일)에 戶曹正郞에 제수되다.

 

* 丁酉(1597) 선생 50세

 - 봄에 호남의 군량 조달의 명을 받다.

이때 왜구가 재침하니 천병(중국병사)이 남하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때에 金晬(호는 夢村,

시호는 昭懿, 본관은 安東, 임진왜란때 경상도 관찰사)가 호조판서로 동행하였는데, 송강의 거취 및 무고를

입은 참상을 서로 논의하였다. 자세한 것은 송강행록에 있다.

 - 겨울에 일을 마치고 복명하다.

얼마 안되어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니 연산으로 돌아왔다.

 - 海西黃鳳 근처에서 우거하다.

이때에 왜군의 경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湖中에서 옮겨 사시니 문인 李楘(문과 대사헌)등이 스스로 따라

왔다. 새로 난리를 겪어서 선비의 학문이 피폐하고 해이해졌는데 선생은 날로 문인 자제와 더불어 강마하기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비록 음식을 먹지 못할 때가 있어도 태연하였으니 먼데서 와 배우는 자가 많았다.

 - 12월 壬戌(6일)에 단양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다.

 - 율곡선생의 행장을 짓다.

 - 작은 부인의 딸이 태어나다.

후에 李楢(본관은 德水, 판서 安訥(눌)의 아들)에게 시집가다.

 

* 戊戌(1598) 선생 51세

 - 4월 戊午(4일)에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다.

 - 甲申(30일)에 호조정랑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다.

 - 6월에 우계선생이 죽으니 조문하다.

 - 선생께서 근사록에 공력을 써서 오랫동안 거려 고금. 선유의 設을 취하여 차례대로 가려 찬입하고 간혹 자기의

소견을 붙여 의심나고 어두어 읽기 어려운 것을 해석하였고, 또한 守夢 鄭曄(본관은 草溪, 벼슬은 우참찬)에게

교정하도록 하였다.

 - 9월 丁酉(15일)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너무 빨리 승진되었다는 의론이 있어 면직되다.

 

* 己亥(1599) 선생 52세

 - 1월 壬辰(11일)에 양근 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아니하다.

 - 2월 辛酉(11일)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다.

 - 戊寅(28일)에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다.

누차 은명을 사양하기가 미안하므로 취임했다.

 - 6월 戊子(11일)에 안성군수에 제수되다.

경기도는 난리를 겪은지가 얼마 안되어 백성이 피폐했는데 선생이 마음을 다해 무마하니 수년도 안되어 거의

복구 되었다. 후에 제생이 선생을 추모하여 서원(道基書院)을 세워 享祀하였다.

 - 8월에 송구봉 선생이 죽으니 조문하다.

병술년 간에 구봉이 李潑의 무리들에게 모함을 받아 화가 장차 측량할 수 없는지라 몸을 피하여 은신코자 하나 갈

곳이 없게 되매 선생이 정성껏 주선하여 집에서 쉬게 하고 봉양하기를 오직 정성껏 하였다. 이때에 구봉이 沔川에서

우거하다가 졸하니 葬祭하는 절차와 제반사를 선생이 몸소 다하셨다.

 - 9월에 「家禮輯覽」을 완성하다.

가례란 글은 초고와 망실된 나머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읽는 자들이 터득할 수 없음을 병통으로 여겼다. 선생은 모든

해설가들의 말을 가지고 조항에 따라 해석하여 그 장구를 분별하고 빠진 대목을 보충하여 다 이루어지자「가례집람」

이라 명칭 하였다. 또 圖說 한 편을 지어 책머리에 적어 놓았는데 고금의 의식에 대해 증거 할만한 것들이 손바닥을

펴 보는 것처럼 명확하였다. 드디어 서문을 지어 첫 머리에 실었다. 이로부터 돌아가시던 해까지 더 보충하지 않고

결국 확정되었다.

 

* 庚子(1600) 선생 53세

 - 여름에 「小學續編」의 서문을 쓰다.

우계 문인 韓嶠(호는 東潭, 본관은 청주, 유학자)가 소학에 入敎. 明倫. 敬身 세 편을 주자의 해설을 모아 續編이라

명칭하고 선생에게 정정하기를 요청하고 서문을 받았다. 仁祖朝에 선생께서 상소하여 소학을 강론하라고 청하고

또 속편도 取해 보도록 하였다.

 - 10월에 작은 부인의 아들 杲가 태어나다.

 - 金宇顒(호는 東岡, 시호는 文貞, 본관은 의성, 曺植의 문인)이 지나다 들렸다.

그와 함께 계미년의 三司와 己丑獄事를 논하였다.

 

* 辛丑(1601) 선생 54세

 - 1월에 「小學集註」에 발문을 쓰다.

율곡선생이 일찍이 諸家註疎에서 정미하고 긴요한 말만 뽑고 혼란한 말은 삭제하고 간혹 미비한 점이 있으면

자신의 의견을 보충하여 이 소학집주란 책을 만들었다. 선생께서 그를 위하여 발문을 지었고 또 고증한 바

있어 세상에 함께 전한다. □ 선생이 申湜(호는 用拙齋, 본관은 고령 退溪문인)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옛날 鰲城  李子常(이름은 恒福, 시호는 文忠, 본관은 慶州)이 소학의 모든註는 각각 장단이 있으니,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 한 권의 책을 만들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율곡이 벌써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오성이 구해 보고는 좋게 여겨서 都監을시켜 印出했다. 이 보다 앞서 내가 소학을 읽고 나의 의견을 책장머리에

대충 주를 달아 놓았는데 오성은 또 이 주까지 인출하도록 했다. 인출을 다 마친 후에 내가 비로소 알고 오성에게

이야기하기를, ‘율곡 선생의 주를 버리고 나의 해설을 인출 한 것은 미안하다. 나의 해설이 비록 옳다하더라도

본주는 위에 박히고 나의 설은 아래에 박히는 것이 좋을 뻔 했다.’ 고 했었다. 오성은 이르기를, ‘일을 이미

마쳤으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기」에 이르기를, ‘不勝喪이란 말은 不慈不孝에 비한다.’ 했는데,

주자는 이르기를, ‘아래로는 자손에게 전할 수 없기 때문에 不慈에 비하고, 위로는 조상을 받들 수 없기 때문에

불효에 비한다.’ 고했다. 程子가 말한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대개 부모나 아들이 병이 들어

누웠는데 몹쓸 의원에게 맡겨 약을 쓰다가 잘못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不慈와 不孝인 것이니 견준다는 比자의

말은 타당치 아니하다. 나중에 二程粹言을 상고해보니 病臥라는 말 위에 身자가 있으니 이것이 더욱 명확한

증거였다고 했다. □ 이 편지는 연도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까닭에 여기에 부록한다.

□ 선생이 논한 바는 간행한 고증 속에 실려져 있다.

 - 9월에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오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周易口訣」을 교정하는 設局이 있어 선생께서 특별히 부름을 받았다.

 - 10월 乙未(1일)에 종친부 典簿로 교체 배수되다.

경직과 주역구결국의 일을 겸하게 되니 병으로 봉작치 못했다.

□ 이때에 임금이 삼공에게 명하여 학행이 있는 사람을 각각 천거하라 하였는데, 영의정 이항복이 선생을

   으뜸으로 천거하였다. 또 임금이 재상 회의에서 淸白吏를 뽑으라 명하니 이공이 廉謹으로 이름을 밝히고자

   청하니 허락하여 선생이 柳成龍, 李元翼, 李光庭, 李基卨 등 12명과 더불어 피선되었다. □ 白沙 李文忠公이

   일찍이 말하길, “학문이 순수 독실하며 師法을 고치지 않아 훗날 제향을 받을 자는 아마 金鐵原일 것이다.”

   하였다. (이는 선생이 철원부사를 역임한 후의 일일 것이나 정확한 년도는 알지 못하므로 여기에 기록한다.)

 

* 壬寅(1602) 선생 55세

 - 봄에 벼슬을 해임하고 연산으로 돌아가다.

이때에 적신 鄭仁弘이 用事하며 큰 함정으로 사류를 금고하니 선생은 서울에 머물기를 기뻐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시골집으로 갔다.

 - 8월에 溪上에 집을 짓다.

계상에는 옛날 崔淸江의 雅閒亭이 있었는데 선조 좌의정공(國光)이 題詩하였고, 선생의 伯祖 庶尹公이 소유하게

되어 선생이 집을 지었다. 임진란때 정자가 불탄 것을 선생이 옛 자리에 작은 堂을 짓고 養性이라 편액을 하여

기문을 짓고 다시 옛 시를 달았다. 당세의 諸名公이 많이 이어 읊었다.

 - 황강공의 家狀을 완성하니 象村 申欽에게 청하여 행장을 짓다.

 - 10월에 손자 益烈이 태어나다.

 

* 癸卯(1603)년 선생 56세

 - 5월 庚午(15일)에 익산군수에 제수되다.

 - 큰딸 徐景霱(휼)의 妻가 죽다.

 

* 甲辰(1604) 선생 57세

 - 황강공 신도비 명을 簡易 崔岦에게 짓도록 하고 誌文을 月沙 李廷龜에게 청하여 짓다.

 - 申子方 應榘에게 답서를 보내다.

신공은 우계의 문인인데 李潑과의 친교가 잘못되어 이론이 율곡선생의 뜻과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병술년을 당하여 李廷平이 소장을 올려 변명할 때에 신공이 고의로 가로 막아 이루어지지 못하매 선생이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己丑年이후로 松江이 仁弘의 무리에게 무고와 훼방을 입어 연루의 화가 세상에

넘쳐 그와 관련된 화가 우계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공이 우계의 아들 文濬과 함께 그 사이의 사실을

지연시켜 우계의 화를 완화하려고 이간하는 계책을 써서 동인의 원한을 오로지 송강에게 돌리기로 도모하매

선생이 깊이 그 소행을 나쁘게 여겨 답서에서 간절히 질책하였다.

또 다시 서신을 보내 師門의 자제를 선도하지 못한 것을 거듭 질책하였다.

 - 申敬叔 欽에게 편지를 보내다.

대략에 “송강이 간악한 무리들에 의하여 죄를 얻어 헤아릴 수 없는 악명이 퍼져 온 세상의 사람들이 감히 항의할

자가 없었다. 우계도 그 때에 (송강과)조정에서 함께 참여하였으니 그와 같이 논의한 바를 모를리 없거늘 이제 그

자제와 문생들끼리 교분을 끊고자 하여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니 世道의 험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옛 말에 이르되 죽은 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산 사람이 부끄럽지 않다 하였는데, 만일 송강이 다시

살아난다면 산 사람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으며, 아울러 申子方 등에게도 보여주게 하였다.

  - 9월에 작은 부인의 아들 榘가 태어나다.

 

* 乙巳(1605) 선생 58세

 - 아들 槃이 司馬試에 합격하다.

 - 10월에 파직하고 연산에 돌아가다.

후에 익산 제생이 추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향사했다.

 - 先憂錄의 서문을 짓다.

重峰이 일찍이 스스로 기록한 전후 章疏의 이름을 선우라 하였는데 선생이 서문을 지었다.

 

* 丙午(1606) 선생 59세

 - 6월에 작은 부인의 아들 槼가 태어나다

 - 申敬叔 欽에게 답서를 보내다.

이때에 난리를 겪은지가 점점 오래되어 다시 宗廟를 건립코자 하는데 신공이 예조 판서로서 선생에게 古禮를

묻기에 선생이 종묘의 고제 및 始祖 昭穆의 예와, 난리를 겪은지 얼마 안되고 역사는 거대하니 경솔히 행할

일이 아니라는 뜻을 갖추어 편지를 보냈다.

 - 가을에 黃思叔 愼이 방문하다

송강의 일에 대한 말을 하였으니 송강행록에 있다.

 

* 丁未(1607) 선생 60세

 - 崔汝允 命龍에게 답서를 보내다.

理氣에 대해 변론하다.

 

* 戊申1608) 선생 61세

 - 2월에 선조대왕이 승하하다.

 - 막내 子婦의 상을 당하다.

 - 李聖徵 廷龜에게 서신을 보내다.

전 좌랑 姜沆(호는 睡隱, 본관은 晋州, 임란때 일본에 잡혀갔다옴)이 왜적의 포로가 되었으나 굴복하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본국으로 돌아왔으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가 있어 홀로 褒장을 받지 못하니 많은 사람의 평판이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에 이공이 병조를 맡고 있어서 선생이 글을 보내 변론하였다.

 

* 己酉(1609) 光海君 元年 선생 62세

 - 5월 壬寅(22일)에 翊衛司  翊衛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아니하다.

 - 8월 甲戌(26일)에 淮陽부사에 제수되자 누차 사직하였으나 불허하다.

 - 10월에 肅謝하다

 - 11월에 부임하다.

 

* 庚戌(1610) 선생 63세

 - 10월 庚辰(9일)에 철원부사로 교체되다.

조정의 의론이 회양지방은 북관의 요로로, 마땅히 무인을 써야 한다하여 바꾸었다.

 - 11월에 손자 益熙가 태어나다.

 - 작은 부인이 딸을 낳다

후에 李名鎭(碧珍人)에게 출가했다.

 - 監司 申湜(호는 用拙齋, 본관은 고령)의 釋宮에 관한 물음에 답서를 보내다.

이때에 퇴계서원을 춘천에 짓는데 신공이 옛날 석궁을 모방하여 강당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그 제도를 몰라

선생에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선생께서 儀禮와 朱子大全에 따라 그 제도를 자세히 보이고 그대로 짓도록

했다. 그 후에 黃山書院을 지을 때에도 선생이 또 이 제도로 강당을 지었다.

 

* 辛亥(1611) 선생 64세

 - 11월에 숙부 첨추공(이름은 殷輝니 천안군수를 엮임)의 상을 당하다.

선생이 행장을 찬했다.

 

* 壬子(1612) 선생 65세

 

* 癸丑(1613) 선생 66세

 - 3월에 작은 부인이 아들 棐를 낳다.

 - 5월에 서동생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자 서울에서 待命하다 해직되어 溪上 옛 집에 돌아오다.

적신 李爾瞻(호는 觀松, 본관은 廣州), 벼슬은 예조판서)이 광해군의 마음을 사려고 영창대군 의(玉+義)를

살해할 음모로 사형수였던 박응서를 회유하여 변란을 무구하게 하니 이에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선생의

서동생 慶孫, 平孫등도 역시 구인되었으니 대개 선생과 仙源 金尙容(시호는 文忠, 본관은 安東, 벼슬은 형조

판서로 선생의 서매가 김공의 첩이였다)에게 까지 파급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경손 등이 모두 고문을 받아 죽었는데 戮屍論까지 들어 역적을 다스리는 률법으로 온 집안을 연루

시키려 하니 친구들이 두려워하여 혹자는 화를 면할 방법을 모색하려 하기도 하나 선생은 불허하고 말하기를,

“사생은 운명에 매인 것이다. 어찌 인력으로 면할 수 있겠는가.” 했더니 마침 해당 관서에서 법적으로 연좌될

수 없다하고, 大臣의 건의로 인하여 사태는 무사하게 일단락되었다. 시골집으로 퇴거하여 문을 닫은 채 외인과

접촉치 않고 오직 경서를 연구함으로서 스스로 즐겼다. □ 경손이 고문을 당할 때, 광해가 응서에게 묻기를,

“김모도 이 일을 알고 있었느냐?”고 하니, 응서가 대답하기를, “김 모는 현인이므로 죄인들이 계획할 때 김모가

들어서 알까 두려워했습니다.” 하였고  鄭浹도 심문을 당하는데 이와 같이 말했다. 임금의 장인 柳自新(본관은

문화, 文陽府院君)의 妻 정씨가 광해에게 인사하니 광해가 묻기를, “김 모를 잡아다 문초고저 한다.” 하니

정씨가 말하기를, “김 모는 당대의 大儒로 많은 선비들이 숭앙하는 바이거늘 만일 잡아다 문초한다면 크게

인심을 잃을 것이요.” 하니 광해의 뜻이 드디어 풀어졌다. 선생은 누이와 동생들에게도 우애가 늙도록 독실하

였는데 경손 등이 비명으로 죽음을 당하매 그 마음 아파하는 정이 오래도록 끈이지 않고 항상 말씀하실 때나

잠자는 때에도 저절로 나타나시니 측근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누이동생 정씨의 부인이 죽다.(송강의 큰 아들 진사 起溟의 처다)

 - 서제 義孫이 죽다.

 

* 甲寅(1614) 선생 67세

申敬叔(이름은 象村, 본관은 平山, 시호는 文貞, 벼슬은 영의정)을 춘천 유배지로 방문하다.

 

* 乙卯(1615) 선생 68세

 - 3월에 손자 益兼(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절사, 시호는 忠正)이 출생하다.

 - 숙부 목사공(이름은 公輝, 파주목사)의 상을 당하다.

 

* 丙辰(1616) 선생 69세

 - 李子常(이름은 恒福, 호는 白沙, 시호는 文忠, 본관은 경주, 벼슬은 영의정)에게 편지를 보내다.

이공이 율곡선생의 비문을 지었는데 선생이 添책. 修潤할 곳을 글로 논하였다.

이것은 이공이 丁巳年 귀양가기전의 일이나 연도가 미상하여 여기에 쓴다.

 

* 丁巳(1617) 선생 70세

 - 송강의 행록을 짓다.

송강이 소인배들의 참소를 당하여 姦魁(괴)로 지목되고 사람을 빠뜨리는 큰 함정을 만드니, 뜻을 같이 한 옛

친구들 까지도 혹은 분별없이 그들과 동조하여 비방하고 배척하며 시세에 따르는 자가 있고 당시 송강의 姓名을

말하기조차 꺼린 지가 이미 오래였다. 선생은 그가 충직하면서 모함을 당한 것이 안쓰러워 항상 그 본마음 바탕을

변명하여 훼방하는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아랑곳 하지 않다가, 이에 그 아들 弘溟의 청을 받고 行錄을 지었다.

행록이 이루어지자 象村 申公에게 보내어 보이니, 신공이 답서에 말하기를, “다 당시에 듣고 본 것을 증거삼아

실상을 뽑아 썼으니 무슨 시비가 있어 가히 평론 하리오, 또한 편중하고 공정치 아니한 곳이 없는데, 鄭生이

형에게 부탁하는 바는 그 애매한 사정을 변명하여 정론을 세우고자 함인데, 이제 행록에 송강의 흠집을 지적한

한 곳이 많으니, 정생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였다. □ 송문정공 시열의 어록에 이르기를, “선생의 議論이

忠厚하고 화평하여 절대로 뼈에 사무치는 말씀을 아니 하나 옳고 그름과 사특하고 바름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극히 엄정하여 칼로 자르는 듯하였으니, 鄭畸菴 홍명이 송강 유고를 印出하여 보냈는데 그 발문에 孼(얼)臣이

나라의 권세를 잡았다는 구절이 있는지라 선생이 곧 붓을 들어 그 옆에 얼신은 바로 李山海다 라고 註를 달았다.

” 고하였다.

 - 3월에 淸坐 宋福汝 爾昌과 降仙東臺의 명승지를 관람하다.

이곳은 黃澗. 永同 두 고을 사이에 있다. 여러 문생들도 함께 수행하여 여러 날 노닐다 돌아왔다.

 

* 戊午(1618) 선생 71세

 - 「經書辨疑」가 이루어지다.

선생은 늘 독서할 때면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傳心致志하면서 글자마다 그 해설을 구하고

글귀마다 그 뜻을 찾았다. 만약 마음에 쾌한 감이 있지 않으면 우러러 생각하고 숙이면서 읽어 꿰뚫어지게 통한

다음이라야 그만 두었다. 밤낮을 쉬지 않고 침식을 잊으면서까지 했는데 질병이 아니고서는 폐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한결 같으면서 제일 小學을 학자의 기본으로 삼고 믿어 행하면서 몸이 끝나도록 표준으로

삼았고,  밤마다 中庸. 大學. 心經. 近思錄 등 서적을 외우면서 돌려 가면서 읽고 외우기를 자기의 말처럼 외웠다.

이 경서변의란 글은 독서하는 여가에 손수 기록해서 그 취지를 발명하고 그 의문점을 辨釋하였다. 註說이 혹

다르거나 音義가 혹 괴벽한데 이르러도 모두 절충하고 고증하였다.

또한 당시의 제공과 함께 강론하기도 했는데 문인 후생의 말일지라도 빠뜨리지 않았다. 서문이 있다.

 - 4월에 鄭道可(이름은 逑, 호는 寒岡, 시호는 文穆, 본관은 청주, 퇴계문인)에게 편지를 보내다.

한강은 퇴계의 문인인데 이때에 공주목사로서 퇴계가 논한 喪祭禮問答을 간행했는데 중간에 古禮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선생께서 정공에게 편지를 보내 힘써 고증하도록 하였다.

 

* 己未(1619) 선생 72세

 - 李聖徵에게 답서를 보내다.

율곡선생의 행장과 碑銘의 문지를 論하다.

이성징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울러 鄭時海 曄과 金餘慶 玄成에게도 보이다.

다시 율곡 선생의 비명 문자를 논하였다.

 - 11월에 손자 益勳이 출생하다.

 

* 庚申(1620) 선생 73세

2월에 宋福汝 爾昌의 아들 冠禮에 참여 하다.

송공은 곧 공의 從妹夫이며 그 아들은 同春堂 宋文正公 浚吉이니 선생이 관례를 행하고 문경공이 도왔다.

申敬叔에게 답서를 보내다.

이때에 신공이 적소에 있다가 朝令으로 納贖 방환되매 선생이 서신으로 그 구차함을 말하니 신공이 서신으로

해명하매 선생이 또한 답하였다.

 

* 熹宗哲皇帝 天啓 元年 辛酉(1621) 선생 74세

7월에 전주에 가서 崔汝允의 상에 조문하다.

최공은 곧 선생의 문인으로 호는 石溪이니 학식과 行義가 있어 선생이 특히 사랑했는데 그가 죽자 痛惜하여

마지못하다가 가서 곡하고 또한 장례에 참여하였으며 제문과 挽詩가 있고 또 묘갈문을 지었다.

 

* 壬戌(1622) 선생 75세

 - 3월에 제문을 지어 金而中 權의 관 앞에서 치전하다

김공은 율곡의 문인으로 廢母論을 배척하다가 務安으로 귀양 가서 죽었는데 畿內로 返喪할 때 선생이 중도에 나가

영전에 치전하였다.

 - 7월에 구봉의 詩集에 발문을 짓다.

구봉의 문인 沈宗直이 鴻山 원이 되었을 때 시집을 간행하여 발문을 지었다.

 - 宋福汝, 李聖兪, 時稷과 함께 黃山 아래서 배를 타다.

 - 金巘에게 답서를 보내다.

또 問目에도 답하였다.

 - 12월에 둘째 子婦의 喪을 당하다.

 

* 癸亥(1623) 仁祖大王 元年 선생 76세

 - 1월에 四端七情辨을 지어 韓士仰(이름은 嶠, 호는 東潭, 본관은 청주, 유학자)에게 보이다.

변의 대략에 이르기를,

“퇴계선생이 말한 四端七情이 互發한다는 말은 그 근원이 權陽村(이름은 近, 시호는 文忠, 본관은 안동,)의

 入學圖說에 있는데 그 圖中 四端은 左邊에 쓰여 졌으며 七情은 右邊에 쓰여 졌다. 鄭秋巒(만) (이름은 之雲,

 본관은 경주, 金正國의 문인, 명종때 학자)은 양촌을 따라 圖를 지었고 퇴계도 추만에 따라 도를 지었는데

 이 호발이란 말은 여기에서 기인된 것이다. 퇴계는 사단은 理拔而氣隨之요, 칠정은 氣發而理乘之다 했는데

 이는 양촌이 좌. 우로 나누어 적어 놓은 뜻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語類중의 주자설은 대개 인심이란 형기에서

 발하고 道心이란 의리에서 발한다 하였으니 語勢가 다른데 어찌 퇴계설과 한 뜻으로 볼 수 있겠는가. 대개

 五性 이외에 다른 性이 없고 칠정 이외에 다른 정이 없다. 孟子가 칠정 속에서 선정을 갈래내어 사단이라

 지목했으니 칠정 이외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善惡의 端緖가 어느 것인들 情이 아니겠는가. 악한

 것도 본래는 악하지 않은데 다만 이 형기에 가려서 過不及이 있어 악하게 되는 까닭에 程子는 善惡이 모두

 天理라 했고, 朱子는 天里로 말미암아 人欲이 있다고 했다.

   사단과 칠정이 과연 두 개의 정이며 理와 氣가 과연 호발할 수 있겠는가. 이 사단칠정을 두 개의 정이라고

  하는 것은 理氣에 대하여 투철하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늘 공에게 이렇게 이야기했고 공도 역시

  退陶가 갈라 대립 시킨 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 도리어 좌.우에 분대한 것으로 주자의 本意에 공이 있다고 하니,

  후학들이 先賢의 학설에 대하여 무조건 잘못이라고 해서도 안되지만 또한 옳지 않은줄 알면서 잘못 찬미해서도

  안된다." 라고 하였다.

 - 3월 甲辰(14일)에 司憲府掌令에 제수되어 상소 사직 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이때에 인조가 반정하고서 즉시 下敎하기를,

“김 모는 내가 잠저에 있을 때 그 이름을 익히 들었다.”고 하며

이미 이 직책을 제수해 놓고 召命하였으나, 선생이 노병으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優批를 내렸다.

壬子(22일) 李玉汝(이름은 貴, 호는 黙齋, 시호는 忠定, 본관은 연안), 金冠玉(이름은 瑬, 호는 北渚, 시호는

文忠, 본관은 순천), 崔子謙(아름은 鳴吉, 호는 遲川, 시호는 文忠 본관은 전주), 張持國(이름은 維, 호는

溪谷, 시호는 文忠 본관은 덕수)에게 편지를 보내다.

군주의 덕을 보필하여 인도하고 백성을 구원하며 廢朝를 보전하고 刑獄을 공정하게 하며, 인재를 발탁하여

쓰며, 국가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탐욕한 풍속을 크게 혁신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여

각 조목별로 논하였다. 또 말하길,

“靖國(중종반정)時 奏聞에 폐조의 죄악을 말하지 않고 양위 하였다고 핑계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의심을

  받아 즉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 번에는 반드시 직언하여 지난 잘못을 되밟지 말며, 아울러 제공에게

  경계하길 힘써 근신토록 하여 靖國三大將(중종 반정 공신)의 잘못을 밟지 않게 해야 한다. 끝까지 잘 처리

  하여 인심이 흡족한 뒤라야 가히 후일에 할 말이 있고 師友를 배반함이 없을 것이다.” 하니,

여러 元勳들이 글을 보고 탄복하여 드디어 상달하니 임금이 극진히 칭찬하며 지당한 말로 여겼다.

 - 乙卯(25일)에 가마를 타고 상경하라고 명하다.

임금은 선생이 늙고 병이 많으므로 특별히 하교하였다.

 - 4월 丙寅(7일)에 소명을 받아 올라오다.

 - 己巳(10일) 진위에 도착하여 병으로 장계를 올려 사직하다.

임금이 회유하기를,

“사직치 말고 속히 상경하여 나의 갈망에 부응토록 하라.” 했다.

 - 癸酉(14일)에 陳啓 하여 사직하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기를,

“내 즉시 보고 싶었으나 마침 國忌로 齋戒중이라서 실행치 못하였을 따름이니 감찰의 직무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 完豊府院君 李曙(호는 月峰, 시호는 忠正, 본관은 전주)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癸亥년 반정 초에 백성들이 변역의 소식을 갑자기 들었고, 임금의 성덕은 알지 못하니 상하가 놀라고

 시끄러워 向背를 정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위세로 진압하여 복종케 할 수도 없으니, 일이 지극히 어렵다고

 까지 말하게 되었다. 完平 李相國 元翼(호는 五里, 시호는 文忠 본관은 전주)은 先朝의 원로인데 영의정으로

 배직하여 부름을 받아 여주로부터 조정에 들어오매 인심이 비로소 안정되고, 이어 金沙溪, 鄭愚伏 經世(시호는

 文莊, 본관은 진주), 張旅軒 顯光(시호는 文康, 본관은 인동), 鄭桐溪 蘊(시호는 文簡, 본관은 초계)이 차례로

 조정에 들어오자 인정이 편안해지면서 누구나 마음으로 왕실을 향하고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게 되니, 현인이

 국가 안위에 관계됨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 5월 甲午(5일)에 상소하여 私廟의 親祭때의 祝文칭호를 논하다.

임금이 내일 사묘에서 친제를 행사하려하매 예조 판서 李廷龜, 부제학 鄭經世와 三公이 같이 의논해서 말하기를,

현 임금이 宣祖의 친손으로서 왕통을 이어 받았으니 旁손孫으로서 入後한 이와 같지 않다. 본생 아버지에게는

 양쪽에 顯考의 칭호를 다는 혐의가 없으니 祝에 마땅히 본 생부에게 考라 일컫고 자신은 子라 일컬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이를 불가하다고 여겨 드디어 상소를 올리어 말하기를,

“예에 入後한 자가 아들이 되지만, 제왕의 계통은 비록 형으로서 아우를 계승하고 숙부로서 조카를 계승하더

 라도 다 父子의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노나라 僖公이 형이요 閔公은 아우로되 春秋에 이르되, ‘희공을 민공

 보다 올려 배향했다. ’ 하였으니 공자의 깊은 뜻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左氏傳에 이르되, ‘거슬러서야 옳겠

 는가 비록 아들이 성인에 나란하더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를 할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민공이 아우

 이나 아버지와 동등하게 인정하고 희공이 현이지만 아들에게 나란하기 때문입니다. 公羊이 말하되, ‘제사를

 거스린다 함은 아버지 사당에 먼저하고 할아버지는 뒤에 함이다.’ 하였으니 실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닌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라고 한 것은 신하는 자식과 같은 관계이기 때문에 계승관계로 부자관계를 삼는

 것이다. 漢나라 宣帝가 昭帝의 뒤를 있고 그의 生父를 皇考라 일컬었더니, 范氏가 말하기를, ‘선제는 昭帝의

 孫子가 됨으로 자기의 生父를 皇考라고 칭함이 옳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이를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小宗으로

 大宗의 계통에 병합시켰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程子도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선제가 생부를 황고라 칭함은

 인륜을 어지럽게 하고 예문에 실착됨이 진실로 너무 심하도다.’ 하였으니, 선제가 손자 항렬로 할아버지를 이어

 국통을 계승하였으니 생부를 考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과연 범씨와 정자의 설과 같은 즉 지금 임금이 대원군

 에게도 考라 칭함은 불가함이 명확합니다. 임금이 선조에 대하여 비록 친손이 되지만 이미 왕위에 오르셔서

 선조의 왕통을 이었으니 名號와 倫序에 다시 의론할 수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미 대통은 계승

 하였고 또 私親을 考라 함은 正統을 전일 하지 않게 하면서, 두 갈래의 근본을 두는 혐의가 되니 예를 헤치고

 인륜을 어지럽게 함이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이제 아버지(考)와 아들(子)로 칭호를 정하면 필히 삼년상을

 하여야 하는데 입후하여 대통을 잇고서 私家의 아버지를 위하여 삼년상을 입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예관이 정자가 말한 본뜻을 살피지 못하고 이에 말하기를, ‘考라 칭하고 또 皇자를 첨가하여 명분과 위치가

 너무 융성하기 때문에 정자가 예에 어긋났다고 한 것이지 考자를 쓴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나,

 무릇 皇字는 大字 顯字의 뜻이니 곧 虛字입니다. 정자의 의도로는 다만 생부에게 考字를 첨가할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니, 이는 千萬世의 정론이니 어찌 정자의 정론을 어기고 특별한 의견을 내세워 성인스러운

 시대의 大禮에 미진한 일이 있게 하리오. 예관의 뜻은 考位가 궐했음을 이유로 삼으나 帝王家는 다만 국통을

 계승함으로서 주장을 삼으니 비록 숙부가 조카를 계승하고 형이 아우를 계승하더라도 부자의 도리가 있는

 것이니 어찌 고위가 궐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한즉 전하가 宣廟에게 비록 부자의 이름은 없으나 부자의

 의리가 있음인데 예관이 이 뜻을 정밀하게 살피지 못하고 별난 이유를 붙이어 전전 굴려서 그릇되게 하니 신은

 윽이 의혹이 됩니다. 이제 마땅히 정자의 말에 의가하여 숙부라 칭하고 姪이라 칭한다면 명분과 의리가

 명확한 증거가 있으니 의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상소에 답하기를,

“살펴서 자세히 읽었는데 무릇 사람이 할아버지가 있은 후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는 없는 이치가 있겠는가.

 예관의 소견은 실례됨이 없는 것 같다.” 하였다.

문성전에 입시하여 奏剳를 아뢰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온 뒤로 나라에 제례가 있어서 곧 나와 면대하지 못한 것은 정성스러이 대하려는

 본디의 마음에 어긋나게 되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소신은 귀가 어두워 임금의 말씀을 자세히 들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소신이 이제 나이 76세이니, 비록 직책을 받들고 있는 처지라도 오히려 致仕해야 마땅하거늘 하물며

 신은 田野의 사람으로 결코 중임을 감당하기 어렵고, 게다가 憲府는 養病하는 자리가 아니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私家에 있을 때 공의 학문이 고명하고 숙덕이 있음을 듣고 항상 한번 보기를 원했는데 금일에야

 다행스럽게 보게 되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은을 크게 입사와 오랫동안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문득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성상 임금의 얼굴을

 한번 보고 물러가려 했는데 이제 감히 말씀드리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질병은 날이 가면 나을 테니 벼슬을 받아 임함이 가하리로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현부의 소임은 결코 노신이 감당할 수 없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직책을 나는 오히려 경의 덕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거늘 도리어 이를 사양 하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私廟의 일은 조정과 해당 관서에서 주관하는 관원이 있으니 신이 참람하게 의논할 바가 아니나 몸이

 사헌부의 직책에 있으므로 같이 생각한 것을 진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심히 옳았으나 이미 정하였기 때문에 따르지 못하여 심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소신은 치아가 다 떨어지고 또 귀가 어두워 말씀으로는 아뢸 수가 없어 간략히 기록한 바 있어 올리오니

 보아 주소서.” 하고 奏剳를 꺼내 올렸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왕이 정치를 하는 요점은 학문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데, 학문의 도란 다름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토론하여 의리의 정밀함을 탐구해서 반드시 자신에 체험하고 사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일이 없을 때엔

 이 마음이 渾然하고, 惺惺하여 어둡지 않아서 맑기가 고인 물과 같습니다.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면 公. 私와

 義理의 분별을 살피며, 사사로움을 이김에 맹렬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善을 확충하기에는 넓히지 못할까

 두려워한다면, 날마다 언어와 행동하는 사이에 저절로 天理의 바름을 얻게 될 것이니 이는 堯舜이 이른 바

 ‘오직 精하고, 오직 한결같다.’ 는 것이요, 공자가 이른바 ‘사사로움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 는 것이며,

 子思기 이른바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를 삼간다.’는 것이요, 孟子가 이른바 ‘放心을 거두고 四端을

 확충시킨다.’는 것이니, 천고의 성현이 서로 전하는 요지와 비결이 여기에 넘지 않습니다. 하물며 임금의

 一念 사이에도 국가의 치란과 흥망. 성쇠가 매어 있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으리오.”

임금이 글을 다보고 말하기를,

“이 밖에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번의 反正은  綱常을 바로 잡고 사직을 편안케함이니 千古에 없는 盛擧이 옵니다. 金瑬, 李貴, 崔鳴吉,

 張維는 신과 친한 사이로 일찍이 사사로운 서신으로 天覽을 지극히 번거롭게 하여 지극히 황송하오나,

 신의 所懷는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금일 이후에 만일 미진함이 있으면 후세의 의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재주와 덕이 없어 눈앞의 일도 많이 궐하고 있는데 日後의 일이야 말할 겨를이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들으니 요즈음 논어를 강하신 다는데 신의 생각에는 大學이 聖學에 가장 절실하니 원컨대 논어를 다항 후에

 곧 대학을 강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大學衍義를 겸하여 강하니 어찌 대학을 강함과 다름이

 있으리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衍義란 대학에 비하여 절실하지 않은 것 같으니 대학과 다릅니다.” 하였다.

朴知誡(자는 仁之, 호는 潛冶, 시호는 文穆, 본관은 함양)가 朱子書를 강할 것을 청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서는 산만하여 치밀함이 없어 경서에 비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제왕의 學이 비록

 범인과 다름이 있으나 선후 次第가 일찍이 같지 않음이 없습니다. 무릇 배움이란 필히 小學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니, 대개 인륜과 일용 綱領에 대단히 좋으니 인군은 마땅히 강의와 실천을 해야 합니다. 心經과

 近思錄도 마땅히 차례차례 강해야 할 것입니다. 배우는 근본은 먼저 공경을 주로 하고 귀신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 공부가 가장 긴요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학문뿐만 아니라 만일 공경함이 없으면 마음이 專一치 않으니 무슨 일인들 할 수 있으리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聖志를 굳게 세워 三代를 본받기를 기약하소서.”하였다.

박지계가 선비의 풍습을 바로 잡을 것을 청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의와 염치는 四維가 正됨하면 士習도 바로 잡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즉위 초에 田結과 收布를

 감하라고 명하니 인심이 환희하더니, 이제 환수하라는 영이 있은 즉 中外의 백성들은 실망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미수된 것을 감면케 하였는데, 오히려 監軍 해야 할 일 있다. 하기에 다만 수납된 것만을 수송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백성은 믿음을 잃으면 원성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금을 다 감하여줌이 옳으나, 만일 이미 거둔 것을 환급하여 주고 또 감군으로 인하여 다시 수납하면 더욱

 백성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므로 이미 거둔 것만 유보하여 감군에 쓰고 이후로는 수납치 않으리라.” 하였다.

선생이 閔聖徵(자는 士尙, 호는 拙噇, 시호는 肅敏, 본관은 여흥, 벼슬은 형조판서)의 절약, 검소의 말에

인하여 여쭈어 말하기를,

“절약하고 검소함은 모름지기 위로부터 선행한 연후에야 신하나 백성이 본받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서 절검하면 곧 아래 사람이 자연히 본받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소신이 言官이되어 筵中에 출입할 수 있으니 영화로운 행운이 극진하오나 80세세에 병들고 귀가 어두우니

 대궐에 올 때마다 좌우의 市中 사람들이 눈여겨봅니다. 신은 생각건대 시중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반드시 팔십

 노인이 무슨 할 일이 잇어 또 상경하는가라고 할 터이니 매양 한 번 오려고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부끄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그러리오. 무슨 부끄러움이 있으리오. 비록 질병이 있으나 조리를 잘하여 공무를 집행하되 내 말을 따라

 하루 건너 집무해도 괜챃을 것이다. 국정은 언어로써 酬酌(수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귀가 어두워도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글로써 상통하면 될 것이다.” 하고, 임금이 승지에게 전교하기를,

“이분에게 여름옷을 갖추어 보내도록 해당 부서에 말하라.” 하였다.

 - 乙卯(26일)에 병으로 사직하니 司齋監 僉正으로 바꾸어 배수하시다.

6월 辛酉(2일)에 성균관 司業과 元子僚屬에 제수하니, 상소 사직하였으나 허락지 않았다.

筵臣의 건의로 특별히 성균관 사업을 신설하여 많은 선비를 가르치게 하고, 또한 원자를 輔導하라 명하였다.

이조에서는 당하관으로 청하였는데 임금이 僚屬으로 재가하니 선생은 간곡히 사양했으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때 사부에 임명된 제공들이 모두 당시 일류의 선발이었으나, 선생은 노성한 명망으로서 매양 왕세자의 강하는

곳에서 文義를 해석 하는 이외에 일에 따라 권면하고 경계하니 세자가 더욱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다.

李玉汝 貴와 金冠玉 瑬에게 편지를 보내다.

글에 이르기를,

“폐인이 진실로 죄가 있으면 법관이 법으로 논함이 마땅하거늘 兩司에서 물러나 움추림은 진실로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큰일을 당함에 자세히 살펴 벼슬에 나가는 것은 그 例요, 쫒아 나가게 함에 이르러서는 협박

 하는 듯 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기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닌가. 땅을 파고 도망 나가서 망명이라 한다면

 옳거니와 반역이라 함은 불가하니, 이미 망명이라 했다면 옛날에도 부자의 親義로 논의한 사례가 있으니

 임금이 허락지 않은 뜻은 아름답고 지극하거늘, 하필 고집하여 꼭 이루겠다 하리오. 근일에 인심을 면밀히

 살펴보면 모두 불쾌한 뜻이 있으니 宗社의 안위는 인심의 향배에 있으니, 만약 후일에 患이 될까 염려된다면,

 禍機는 매양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잠복해 있는 것이지 어찌 반드시 이 사람에게서 생기겠는가. 바깥 여론이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모두 불가하다고 여기는데 令公들은 살피지 못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비록

 생각은 있으나 누가 감히 공을 위하여 말하겠는가. 나는 혐의가 없어 감히 이 일을 고하노라.” 하였다.

이때에 폐세자 지(祗)가 적소로 부터 도망하다가 붙잡혔는데 법대로 집행할 것인가 세자라는 은전으로

대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서로 달랐다. 그러므로 선생이 이 편지를 썼다.

 - 己卯(20일)에 부름을 받고 謝恩하고 晝講에 入侍하다.

선생이 말하기를,

“小臣이 맡은 司業과 元子 보도의 직책은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일에 상소를 올린 것도 노병 때문만이

 아닙니다. 보통의 직책이 아니기에 비범한 사람이라야 되는데 소신은 결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오래도록 나가지 못하였는데 오늘 소명을 받자와 감히 공무를 집행하려는 뜻으로 숙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날마다 있는 직무가 아니니 공무를 집행하는 것을 사양하지 말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신이 맡은 직은 별도로 설치한 직이기에 공무집행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신이 다행이도 과거에

 급제했다면 혹 司藝와 直講사이에 벼슬 받음이 가하나, 원자를 敎誨함은 수시로 참여할 수 있지만 司業은

 신이 학식이 없으니 어떤 유생들이 소신에게 배우겠습니까. 만약 신에게 와서 묻는 자가 있다면 가히 응대할

 수는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士習이 전과 다름이 있으니 長老를 가려서 이 임무를 맡겨야 많은 선비들이 보고 감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즉위한 지 한 두 달은 인심이 합하여 모이더니 이제 희망을 잃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가?”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편하고 슬픔은 수령에게 있음이니 수령을 잘 택해야 하는데 근일에 보낸 수령은 혹 그 직책에

 걸맞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금일에 쓸 만한 사람은 다 조정에 모였고 조정은 재주에 따라 공평하게 할 사람이 없으니 이조판서申欽

 (平山人)도 임금이 위임하지 않는 고로 국사를 담당 할 뜻이 없습니다.” 하였다.

신흠이 말하기를,

“김 모는 소신과 친척이오나 신의 역량을 알지 못하고 그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신은 식견이 짧아 능히

 임무를 감당치 못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號牌의 법은 우연한 계획이 아니니 비록 행하더라도 마땅히 수십년 된 후에라야 가하거늘 지금 안정되지

 못한 인심을 가지고 졸연히 이것을 행하니 신은 그 가한 것을 알지 못 하겠고 반드시 인심이 어지러울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지 못함이 아니고 호패법을 쓰지 않으면 充軍을 할 수 없어서 부득이 한 일이로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시골 사람들이 모두 궁중(담안)이 엄하지 못하다고 말하니 그러한 이유를 신은 감히 알지 못하지만

  폐조(광해)의 일은 마땅히 경계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잡인이 출입한다는 말이요?”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런 말도 있기는 합니다.” 하였다.

沈詻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문안 드리는 종의 출입으로 인하여 나온 말입니다. 대개 사람을 쓰고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사람을 기용했다 할 수 없으니 김 모의 말한 바를 임금이 마땅히 유념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에 말해서 금단하라.” 하였다.

 - 8월 戊辰(10일)에 주강에 入侍하다.

선생이 말하기를,

“侍臣이 俯伏함은 고례가 아니요. 前朝에도 역시 이와 같지 아니 하였는데 중간에 잘못된 습성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찌 한갓 부복으로써 敬謹함을 삼으리오. 소신이 처음 입시하여 반드시 임금의 얼굴을 보고자

 여러 차례 우러러 보니 마음에 심히 미안하였습니다. 그러나 臣子가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보는 것은 공손치

 못한 일이 아닙니다. 신의 아버지 역시 재상인 고로 故事를 들을 수 있었고, 또 신은 李珥 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일찍이 묻기를, ‘경연관이 부복해서 임금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까?’ 하니, 李珥가 답하기를,

 ‘어찌 그러하리요. 나는 말할 때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본다.’ 하였습니다. 요사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임금과 신하는 반드시 안면을 막지 않은 연후에야 정의가 서로 두터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어나 앉아서 사리를 말하되 생각하는 바가 있거든 다 말하라.”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 鄭澈 (호는 松江, 본관은 迎日)과 서로 좋아하였고 또 그의 아들이 신의 妹夫가 되는 고로 신이

 그 사람됨을 잘 압니다. 정철은 실로 忠淸하고 효우한 사람인데 己丑獄事(鄭汝立의 모반으로 일어난 옥사)때

 심히 중한 죄를 얻었는데 그때 옥을 다스림에는 별로 과오는 없으나, 다만 당시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가 즉위한 후에 柳永慶(호는 春湖, 본관은 전주, 벼슬은 우의정, 소북파의 영수),洪汝諄

  (자는 士信,, 본관은 남양, 벼슬은 지중추부사, 骨北派)등은 다 복직되고 홀로 정철, 李海壽(호는 敬齋, 본관은

  전의, 벼슬은 예조참의로 율곡과 도의교)등만 은혜를 입지 않았으니 극히 원망되고 민망합니다. 조정의 체모에

  흠이 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뒤에 마땅 처리하리라.”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어느 때 처리하겠습니까? 유영경은 같은 이가 역모함은 신이 알지 못하거니와 조정을

 혼탁하고 어지럽힘이 심한데 이러한 사람이 먼저 恩典을 입고 정철만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등차가 있는

 대우는 두렵건대 어느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쓸 만한 사람이 다 조정에

 모였으나, 다만 영수가 없이 각자 제 마음으로 주장하면 국사가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군자가 조정을 당해

 서는 반드시 영수가 있고, 소인이 조정을 당해서도 역시 영수가 있는데 지금은 영수 노릇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국사가 되리오.” 하고, 또 말하기를, “소신은 근력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기에 오히려 나와 반열에 따를

 수는 있지만 나이 많고 병이 중하고 귀가 더욱 어두운데 관작을 탐하고 연연하면 또한 스스로 구차한 혐의가

 있을 것이니 사람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또 원자를 가르칠 때 질문이 있으나, 귀가 어두워 능히 응대하지

 못하면 더욱 편안치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 사람이 무슨 논란이 있겠는가. 혹 있을 것 같으면 곁에 小官을 두어 말을 전하면 되리로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근래의 욕심은 고향에 돌아가 죽고자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원하옵건대 말미를 얻어 하향하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향해서 제사를 행하고자 하는가?”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묘제와 시제를 오래도록 행하지 못하여 내려가서 행하고자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범사는 마땅히 균평하여야 하거늘 兪伯曾(호는 翠軒, 시호는 忠景, 본관은 기계)과 趙廷虎(호는 南溪,

 본관은 白川, 벼슬은 대사간)가 같은 일로 연좌 되었는데 유백증은 敍用되고 조정호는 파직되니 사리가

 균평치 않사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호는 동을 물으면 서를 답하니 백증과 같지 않느니라.”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은 그 사람을 사형한 연후에야 그 재산을 몰수함인데, 지금 朴自凝은

살려두고 그 재산을 몰수하니 떳떳한 법이 아니옵니다. 자응이 비록 朴承宗(호는 退憂堂, 본관은 밀양,

 벼슬은 영의정)의 아들일지라도 대비를 폐할 때 그는 이의를 제기했는데 오히려 죄를 받았으니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래서 용서한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 들으니 請罪를 한 朴東亮이 남의 이름을 빌려 상소를 올렸다 하니 극히 불미한 일입니다.

박동량의 유죄 무죄 간에 그가 스스로 상소를 올렸다면 오히려 가하려니와 대신 상소를 올리게 함은

 습성이 좋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가두어 다스리고자 한다.” 하였다.

선영에 돌아가 성묘할 것을 상소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성묘하려는 뜻은 잘 알았으니 오랫동안 머물지 말고, 잘 다녀오라.” 하고 역마와 제수를 주라 명하고

 물러나던 날에는 특별히 궐내에서 술을 대접하였고, 원자 또한 면대하여 “원컨대 오래 머물지 말라.” 하였다.

  - 10월에 상소로 陳謝하고 겸하여 民事를 펴 말씀하다.

 疎 가운데에 水災와 凶荒의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西軍을 정선하여 부임시키되, 그 수를 감하고 서변의 군량미

 상납이 번거로움을 제하고 백성의 資送하는 고통을 풀어 주시고 선후의 시간차를 두어 발송토록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차례차례 주선케 하라 하고, 또 收布와 신유년의 田結을 쓴 폐단을 논하고 청하기를 取民 • 役民을 한결

 같이 때에 따라 하고 들어올 것을 침작하여 쓰고 헛된 비용이 되지 않도록 힘쓸 것을  하였으며 또 도망간 군사

 중 나이 육십 이상은 다 돌아가게 하고, 이웃 경계에 출몰하는 자는 돌아와 모이게 할 방책을 강구하고, 각도에

 재앙이 있는 곳은 일일이 답사하여 조사하여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끝으로 大同法의 득실을 논하고 그

 원칙과 변통을 마땅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이 없게 하라는 뜻을 말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소장을 살펴보고 잘 알았으니 깊이 아름답게 여겨 행할 것이며, 조목을 들어 진달한 일은 마땅히 헤아려 처리

 하겠으니 속히 상경하여 나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힘써 경계할 것을 진달하다.

선생이 비록 恩眷에 감격하되 노쇠한 나이로 도로에서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상소로 해직을 빌고

인하여 잠규(箴規)를 진언하여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張子는 말하기를, ’자기 마음으로서 엄한 스승을 삼으라.‘ 하였으니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모든 일상의 일에 움직임이나 행하심이 반듯이 마음의 명령에 따라 그 공사와 시비를 살펴서 행하면 비록

 적중하지는 않더라도 멀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들으니 司馬溫公(송나라의 학자, 이름은 光)이 말하기를

 ’내 다른 남보다 나을 것은 없으나 단지 내 평생에 한 일을 남에 대하여 말 못할 것은 없었다.‘ 하였으니,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깊은 밤 사사로이 한가한 때 혼자 있어 마음이 누구러질 때 한 조금만 생각이나, 미세한

 일이라도 모두 정성껏 공경하여 귀신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으면 비록 많은 신하들을 대하더라도 숨기는 일이

 없어 심신이 편안 할 것이옵니다. 신은 어릴 때부터 이 二說을 항상 교훈삼아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하였으나

 실천하지를 못했는데 이제 감히 올리게 되었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답하되,

“소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내 심히 서운하도다. 늙었다고 사직치 말고 부디 속히 상경하여

  나의 소망에 응하도록 하오. 소중에 진달한 바는 마땅히 생각하고 생각하겠노라.” 하였다.

喪禮諺解에 서문을 쓰다.

종실의 德信正이 家禮의 상례편을 언해하여 선생이 서문을 지었다.

 - 윤 10월 壬辰(6일)에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다.

답하여 말하기를,

“소를 살폈고 누차 상소한 바를 내가 잘 알고 있으며, 오래 올라오지 않는것은 필시 날이 추워

 출입을 못하는 것 같으나, 나의 마음이 허전한 것 같으니 사직치 말고 봄이 되면 올라와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甲子(1624) 선생 77세

 - 2월 庚寅(6일)에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다.

이때에 역적 李适(본관은 고성, 인조때의 반란자)이 부원수로서 군사를 이르켜 모반하니, 서울에 방비령이

내렸고 선생은 소를 올려 늙고 병들어 바삐 달려가서 묻지 못하고 대죄하였다.

 - 大駕를 日新驛 앞길에서 맞이하여 拜하다.

적병이 곧장 서울을 향해 쳐들어오니 임금이 남으로 행차하거늘 선생이 마침내 공주에서 임금을 맞이해

뵈었는데 조정의 상하가 믿고 중히 여겼다. 수일을 지나매 적이 평정되니 장계를 올리려 들어 왔다.

 - 庚子(16일)에 행궁에 입시하다.

선생이 나아가 말하기를,

“난적은 어느 대에도 없으리오마는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차후에 국사가 더욱 걱정됩니다.

  민심을 급급히 수습하지 않을 수 없으니, 宗廟의 제향과 어찬의 물품과 심지어 특별한 진상과 초하루 진상

  까지도 다 제감하여 백성의 힘을 덜어줌이 가하리다.” 하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도성에 돌아간 뒤에도 삼사년 동안 진상을 마땅히 감하리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國用이 다했으니 백관 녹봉을 나누어서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는 곳 連山은 여기에서 거리가 몇 리나 되는고?”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여기서 두 번 쉴 거리입니다.” 했다.

임금은 말하기를, “나를 따라 서울에 가서 元子를 가르침이 가하다.”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여기로 내려온 후로 미안한 듯 하와 聖敎에 따르려 하오니 다만 늙고 병들어 가히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백성의 세금이 廢朝에 비하면 겨우 십분의 二三에 해당하나 폐조에서

  시달림을 받던 나머지라 백성의 힘이 다 하였는데 지난해 흉년이 더하여 백성이 더 곤궁하고, 宣惠廳의

  八斗米가 너무 많은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다만 稅米와 함께 일시에 바치게 됨으로 백성이 더욱 지탱하지

  못하여 원망하는 바가 많습니다. 臣은 그 폐단을 눈으로 직접 보고 지난해 가을에 소장을 올린 바 있사옵니다.

  이제 賊變으로 공주 근처의 七八邑 儒生들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臣에게 장수가 되어 달라고 청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80老人이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랴. 그러나 大駕가 남으로 내려오시면 가히 편안하게 집에 있지

  못할 것이요, 마땅히 천안이나 직산 사이에서 맞이할 것이니 그 때에 동행하는 것이 옳다.’ 하고, 곧 통문을

  보내어 공주땅 岬寺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유생은 많이 모였으나, 백성은 혹 불손한 말을 배앝으니 민심이

  임금을 원망하는 것이 크게 두렵습니다.” 하였다.

朴知誡(호는 潛冶, 시호는 文穆, 본관은 함양)가 말하되, “土賊의 변이 가히 염려됩니다.” 하고,

선생도 말하기를, “박지계의 말이 옳습니다. 역적이 다시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모릅니다.” 했다.

承旨 權盡己는 말하기를, “도성에 돌아갈 계획이 23일인데 이 날이 敗日이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이 관계되리오.” 하고, 박지계는 말하기를, “마땅히 음양가를 불러 물어보자.”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이는 마땅히 아륄일이 아니요. 임금은 마땅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닦을 따름이지 陰陽說을 어찌 믿으리요.”

 하고, 또 말하되, “국가의 비용이 비록 다하였다 하나 지난 가을에 받아드린 宣惠廳 쌀 四斗을 만일 절약

 한다면 아직도 비용을 지탱할 것이니 봄에 바칠 四斗米도 경감시킬 수 없겠습니까? 宗廟 제사에 쓰는 곤이

 값이 베 두 세필과 같으니 종묘에 제사에 어찌 꼭 곤이를 써야 하리요.”하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곤이를 제하고 다른 물건으로 대응하라." 했다.

아들 槃 이 문과에 올랐다.

이때에 大駕가 공주에 머물고 있어 과거를 실시하고 선비를 뽑았다.

어가를 따라 서울에 돌아왔다.

 - 戊申(24일)에 尙衣院 正으로 제수하고 인하여 司業을 겸했다.

특별히 戶曹에 명하여 奴馬와 양식을 주었다.

 - 3월 壬申(18일)에 經筵에 입시하다.

임금께서 도성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經筵을 열고 선생을 인견하여 강석에 참여케 했다. 임금께서 論語

南人有言章을 읽는데 그 주에 “무당과 의원은 비록 賤役이나 더욱이 恒心이 없을수 없다.” 하는 구절이 있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이 尤字는 신이 생각하건대 冘字의 誤字인듯 합니다. 冘는 猶字의 古字로 尤와 冘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유를 우로 쓴 곳은 詩, 書, 中庸惑問, 易學啓蒙 등에 나타남이 한 곳뿐이 아니로되, 啓蒙에는

 先儒 李滉이 冘字로 고쳤습니다. 文勢로 볼 때 만일 유자로 생각한다면 그 뜻이 아마도 성인의 道는 오히려

 恒心이 없을 수 없는데 무당이나 의원에게 이르러서는 더욱 恒心이 없을 수 없다라는 뜻이 되어 이치에 해

 됨이 큽니다.” 하니, 임금은 답하지 아니하였다.

李貴 가 말하기를,

“당초에 적의 괴수를 베어 오면 논공행상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제 臺諫이 도리어

  奇益獻(호는 晩全, 본관은 행주, 벼슬은 우의정)과 李守白 등을 죄주라 청하니 失信함이 큽니다. 비록 대간의

  말일지라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李貴의 말이 偏重합니다. 요사이 대간이 이 일을 의논하되 오늘에는 파직을 청하고 내일에

 告身을 삭탈하고 또 내일에 귀양을 청하여 일정한 의견이 없으니 이는 다 임금께서 대간의 말을 듣지 않고 서로

 당기며 결정하지 못하므로 이러한 어지러움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赦令하고자 하여

임금은 判義禁 李廷龜에게 말하기를, “죄인들을 속히 적어 올리라.” 하니,

李貴는 말하기를, “다 석방함이 마땅합니다.” 하거늘,

선생은 말하기를,

“어찌 가히 다 석방하겠습니까. 중죄는 헤아려 옮기고 가벼운 자만 석방함이 가합니다.

  廢朝 때의 後宮과 宮女는 다 석방하여 집에  돌려보냄이 가하지만, 저 부인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權淑儀는 連山에 정배되어 고생함이 가궁합니다.” 하였다.

李貴가 말하기를, “죄인을 귀양 보내는 것은 國脈에 손상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그 죄로써 죄주는데 국맥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괴로운 역사가 漕軍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저의 한 몸을 보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일가나

 이웃까지도 그 해를  입고 유리하니 보기에 참혹한지라 臣은 생각건대, 바닷가에는 私船을 빌려 上納하고

 산골은 무명베로 상납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牙山倉에 수납한 것이 십에 일할은 되는데 官에서도

 또 私船을 빌려 상납하게 하면 세미 운반하는 군졸의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십여년 전부터 海運判官에 알맞은

 사람을 얻지 못해 첫 배에는 군졸이 다 배를 타지만 다음에 쌀을 실은 배가 많지 않으므로 군졸이 반이나

 소용이 없음에도 判官이 사사로이 이들에게 쌀을 받은 것이 수백 석에 이르렀고 이를 모두 사용했으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별도로 조례를 세워 금년에 남은 군졸은 명년에 배를 타계하여 돌려가며 교체

 하면 그 역사는 쉴 수 있습니다..” 하였다.

 - 己卯(25일)에 司憲府執義로 제수하고 겸직은 예전과 같다.

 - 庚辰(26일)에 소를 올려 사직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 번 아뢰니 휴가를 주다.

 - 4월에 命 에 肅命하고 거듭 引避하다.

憲府로 가라는 말씀이 미안하고, 憲府가 重臣에게 배척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사표를 올리고 돌아가 성묘함을 빌다.

명하여 휴가를 주고 말과 산소에 올릴 제물을 주었다.

 - 癸丑(30일)에 배알하여 사직하고 남으로 돌아오다.

임금은 술과 약을 주고 원자는 임금의 속히 오라는 말씀을 전하였다.

 - 5월 癸酉(20일)에 상소로 해직을 구하다.

임금이 답하기를 네가 진술한 소를 자세히 보고 너의 간절한 뜻을 다 알았으니 너는 나의 지극한 뜻을

받아드려 속히 올라오라 했다.

 - 6월 甲辰(22일)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열 세가지 일을 아뢰니 그 절목은 곧 큰 근본을 세우고,

舊業을 넓히며, 洪範을 높이고, 小學을 강하며, 효도를 다하고, 제사에 공경하며, 九族을 친하고, 群臣을

본받으며, 친히 정사를 듣고, 民弊를 고치며, 宣惠廳을 파하고, 軍政을 닦으며, 禁衛를 엄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너의 소장을 보고 너의 임금 사랑하고 나라 걱정하는 충성을 가상하게 여기노라.

  조목으로 아뢴 열 세가지 일은 실로 이 몸을 닦고 폐단을 구원하는 계책이니 내가 어찌 감히 가슴에 담고

  힘써 행하지 아니하랴. 本職을 교체하는 일은 내 마음에 매우 섭섭하도다. 이와 같이 극심한 더위에 올라오기

  어려 울듯 함으로 지금 우선 너의 뜻을 좇으니 가을에 서늘하면 올라와서 나의 지극한 바램을 들어다오.“ 했다.

李聖徵, 申敬叔, 李玉汝, 吳汝翼, 吳允謙, 鄭景任, 鄭經世, 趙飛卿, 趙翼, 鄭子容, 鄭弘溟, 崔子謙, 張指國에게

서신을 보내다.

처음 영월군수 박지계가 소를 올려 私廟를 세워 生父의 사당을 만들고 三年服을 입고 百官도 따라 복입을

것을 청한 일이 있다. 또 李義吉이 계속해서 소를 올려 추존하자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니,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적에 月沙 李公이 禮曹判書로 있었는데 와서 작별하며 말하기를, “私廟 論議가 일치되지 않아

임금께서 시비를 알고자 하시니 원컨대 이 예를 발명할 수 있을  만한 것을 모아 보여 주십시오.” 하니 이에

선생은 經史와 선유의 말을 考證하여 조목조목 변론하여 한 통의 글을 지어 제공에게 보냈다.

□ 선생은 이미 제공에게 보내는 글을 짓고 인하여 이 예를 의논해 지은 것과 왕복한 글을 차례로 편록하여

    이름을 「典禮全書」(혹은 問答)라 했는데 유고를 인쇄할 때에 선생의 증손 光城府院君 萬基가 尤菴

    송문정공에게 품의했으나 감추어 두고 간행하지 않았다.

 - 8월 己酉(27일)에 특별히 通政大夫 工曹參議로 승진 되었다.

좌의정 尹昉(호는 稚川, 시호는 文翼, 본관은 해평, 관은 영중추부사)과 예조판서 李廷龜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지금의 어진 이는 김 모와 張顯光인데 다 쓰이지 못했습니다.” 하니, 이에 이르러 이 명이 있었다.

 - 9월 庚申(9일)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생각한 바를 아뢰다.

이때에 憲府에서 內奴를 가두고 다스리는데 일이 慈殿에까지 관련되자 임금은 엄한 교지를 내려 준엄하게

힐책하였으며, 政院에서 전교를 그대로 돌려보내니 또 추고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상소 중에 이를 언급

하였으니, 그 대략에 말하기를,

  " 廢朝 때에 인심을 잃은 것을 이루다 헤아릴 수 없고 內奴의 폐단이 많았으나 당시 법관이 推考당한 일이

    있었음을 어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위에 聖明하신 임금이 있으므로 아래에서 법을 집행 할 수

    있거늘 전하께서 도리어 엄한 힐책을 하시니, 이는 진실로 慈旨를 승순함에서 나오는 것이나,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전하의 이거조는 효유하고 인도하는 의리에 혐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臺閣에서 不法한 일을 눈으로 보고도 袖手傍觀한다면 장차 저 대각을 어디에다 사용하겠으며,

    승지가 임금의 과실도 承順하고 바로 잡아 보필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出納을 공손한 일이라

    한다면 한 명의 司謁로써 족하리니 어찌 꼭 승지라야 하리요. 이는 비록 작은 실수라 하나 그 병통의

    근원을 찾는다면 오로지 私意에서 나온 것이니 만일 작은 일이라 하여 소홀하게 여기면 마음에서 생겨서

    정사에 발하고 일을 해칠 것이니, 관련 되는 바 작지않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病根이 있는 바를

    자세히 살펴 털끝 만큼이라도 제하지 못함이 있다면 반드시 응징하고 막아 끊어 자라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보니 내 마음이 반듯하도다. 너는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 疏 끝에 진술한 일은 마땅히 깊이 유념하리라. " 하였다.

辛酉(10일)에 교지를 내려 특별히 부르다.

사직하는 疏를 本道에 올렸는데 미처 啓聞하지 못하였을 때, 역마를 타고 올라 오라는 유지가 있었다.

 - 10월에 부르심에 응하다.

 - 壬辰(11일)에 晝講에 入侍하다.

임금께서 孟子를 읽는데, 滕文公이 물어 말하기를 "齊나라를 섬기리까 楚나라를 섬기리까." 한데 이르니

先生이 말히길,

 "滕나라는 작은 나라로서 강국의 사이에 끼어 있어 비록 王政을 행하고자 하나 능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임금께서 王政을 행하려 한다면 능히 막을 자가 없는데 무엇을 꺼려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니

임금은 답하지 아니하였다.

선생은 應敎 李潤雨가 아뢴 바를 인하여 말하길,

 "小臣은 전에 수령이 되었을 때에 비록 대단한 범죄가 없으되, 암행어사가 도내에 왔다 하면 꺼려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자주 보내면 수령이 뜻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길,

  "田結에 빠진 이가 자못 많아 민간에 세금이 고르지 못하니, 만일 밭을 헤아린다면 세금이 균일할 것이요

   민심 또한 이를 원합니다. " 하고, 또 말하길,

  "소신이 시골에 있으면서 보았는데 大同法 세금은 과중하여 백성의 원망이 많으니 가히 행하지 못하리다.

   李時發(본관 慶州, 관은 형조판서)이 새로 호서로부터 왔으니 반드시 알 것입니다." 하니,

    李時發이 말하길, "백성들은 과연 원망하고 있습니다. 淸州의 백성들은 무명베로 상납하려 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길

   "청주는 뱃길이 좀 멀어서 그러하오나, 臣의 뜻에는 무명베로 상납하면 백성은 또 지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민간에 무명베 한필 값이 쌀 열말이요 全羅道에서는 대부분 열두서너 말까지 하는데 이제 조정에서

   정한 것은 다만 닷말이니 이로써 표준을 삼는다면 백성이 반드시 곤핍합니다." 하니,

    時發이 말하길, "그러나 大同法은 革罷할 수 없습니다." 하거늘

    先生이 말하길 "이는 본래 백성을 위해 만든 것인데 백성이 원망하면 파함이 옳을 듯합니다." 했다.

 - 丁酉(16일)에 元子 講學官을 겸하다.

    知經筵 李廷龜가 아뢰길,"工曹參議 金某는 연로한 사람으로서 여러번 恩命을 받아 병을 참으며 올라 왔으니

    마땅히 經筵에 출입하게 하고, 또 元子를 輔導하게 하면 도움이 더욱 많으리다. 전에 元子僚屬으로 재가

    했는데, 지금은 진급도 되었으니 僚屬이라 칭함이 미안한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길

  "그 칭호를 고쳐 參講이라 하라. 나도 때때로 인견하여 가까이 하려하나 요사이 經筵을 드물게 열었기

   때문에 미루어 오다가 오늘까지 왔다." 했다.

吏曹가 아뢰기를, "칭호를 고치려면 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해야 합니다."하니,

대신은 講學官으로 하자고 청하여 재가했다.

교체하여 龍驤衛 副護軍으로 제수했다.

李師魯(이름은 德洙, 호는 怡愉堂, 본관 韓山, 벼슬은 강원도 관찰사, 선생의 문인)에게 편지를 보내다.

安邦俊(호는 隱峰, 본관은 竹山, 벼슬은 參議)과 상의하여 趙重峰(이름은 憲)의 東歸封事를 刊行하라고

권하였다.

 - 11월에 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구하다.

비답하기를,

 "너의 소를 보니 내 마음이 허전하다. 네가 비록 연로하나 근력은 쇠하지 않았으니 물러갈 계책만 생각하지

  말고 元子를 가르쳐 나의 바램에 부응하라." 하였다.

 

* 乙丑(1625) 선생 78세

 - 1월 戊午(9일)에 龍驤衛 副司直으로 제수하다.

 - 丁丑(28일)에 특명으로 嘉善大夫에 오르다.

世子를 책봉한 은혜로 임금은 先生과 吳允謙과 鄭經世와 鄭曄에게 친히 주니, 대개 가르친 공을

기록함이었다.

 - 2월 辛巳(2일)에 소를 올려 새 加資를 사양하다.

비답하기를,

  "소를 보고 경의 생각을 잘 알았다. 경등은 元子 가르침은 지성으로 하였기에 아름답게 여긴지 오래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 乙酉(16일)에 同知中樞府事로 배수하다.

 - 癸巳(14일)에 글을 올려 사은하고 겸하여 생각한 바를 아뢰다.

소의 대략에,

   "臣이 한번 서울을 떠나면 길이 天顔이 막히리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殿下께서 더욱 聖學에 힘쓰시고 더욱

    聖德에 나아가시어 정대하게 마음을 보존하시고 편벽된 사심을 끊으며 明斷으로 일을 다스려 헛되이 노니는

    실수를 경계하시고, 사람을 임용하되 오직 실지를 보고 허위에 현혹되지 마시며 아랫사람을 접하되 성심을

    다하여 힘쓰십시오. 불쾌한 표정을 들어 내지 마시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마십시오.

    도를 지키는 선비를 가벼이 여기지 말며 採納을 힘써 널리 하시고 栽擇은 힘써 정밀하게 하여 선입감을

    주장하여 여러 의논을 막지 말며, 규례에 얽매여 事機를 잃지 마시고  큰 뜻을 분발하여 지극한 이치에

    이르소서. 臣은 비록 풀처럼 말라 죽을지라도 다시금 유한이 없으리다." 했다.

임금은 가상하게 여겨 비답하기를,

   "나의 마음이 허전하니 물러나 돌아갈 것을 생각지 말고 소분한 뒤에 곧 올라와서

    나의 바램을 위로하라."했다.

 - 戊戌(19일)에 同門 여러분과 같이 소를 올려 스승의 원통함을 신원하다.

전에 東人들이 龜峰 宋翼弼을 죽이려고 安家에 사주하여 송사를 일으켜 위법으로 도리어 천인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누명을 벗지 못했다. 선생은 兵判 徐渻(호는 藥峯, 시호는 忠肅, 본관은 大邱)과 都憲 鄭曄(호는 守夢,

본관은 草溪)과 菁川君 柳舜翼과 濟用正 沈宗直과 연명으로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 등은 젊어서 宋翼弼에게 배웠는데 翼弼은 文章과 學識이 一世에 띠어나 李珥ㆍ成渾과 講磨하는 교우가

  되었는데 李潑(호는 東菴, 본관은 光州)과 白惟讓 등이 珥와 渾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翼弼까지 꼭 죽이려했던

  것입니다. 翼弼의 부친 祀連은 옛 정승 安塘 (호는 永慕堂, 시호는 貞愍, 본관은 順 興)의 庶妹의 아들이지만

   祀連의 어머니는 이미 양민으로 환속되었고 祀連도 雜科出身이니 二代를 이어 양민이 되었습니다. 또 60년의

   연한을 지내면 還賤하지 못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 있는데도 潑 등은 기회를 타 사주하여 법을 무시하고 還賤

   했습니다. 대저 법은 祖宗의 金石같은 법이어늘 祀連이 아무리 선비들에게 죄를 얻었고 翼弼이 비록 시대의

   노여움을 샀다 할지라도 어찌 가히 일시의 私憤으로 祖宗의 金石같은 법을 굽혀 가면서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宣祖大王께서 옛적에 서쪽 행재소에 계실 적에 그 원통함을 호소함으로 처음 풀어줄 단서를

   발언했지만 刑官이 미쳐 명을 받들 겨를이 없이 우성 도성에 돌아가서 결정한다 했는데, 그 뒤 신의 스승은

   죽었고 다시 알리는 자도 없어 마침내 묻어둔 결과가 되었습니다. 죽은 스승은 옛일을 널리 알고 지금 일에

   통한 학문으로 살아서 聖主의 알아주는바 되지 못했고 죽어서 노예의 천한 이름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다만

   신 등의 숨은 아픔이리오. 국법이 무너짐을 또 식자가 깊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했다.

비답은 該曹에 내렸다고 했다.

 - 己亥(20일)에 조정에 사례하고 世子의 특령으로 나아가 뵙다.

世子는 말하길,"오래 머물지 말고 성묘하고 소분한 뒤에 속히 올라오기를 원한다." 했다.

 - 4월 壬辰(15일)에 상소하여 사직하다.

비답해 말하길, "경의 소를 보니 나의 마음이 허전하도다. 속히 올라와서 나의 소망을 위로하라." 했다.

 - 5월 庚申(23일)에 經筵 特進官으로 재가하다.

李玉汝에게 글을 보내다.

龜峰의 신원하는 일을 의논하였으며, 또 金瑬에게도 글을 주어 이 일을 말했다.

 - 6월에 崔楊浦 澱의 유고에 跋文을 짓다.

 - 7월 丙子(30일)에 상소하여 사직하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길,

  "경의 소장을 보니 나의 마음이 허전하다. 경은 사양하는 말만 하지 말고 속히 와서

   나의 소망을 위로하라."했다.

 - 10월에 손자 益煦가 출생하다.

 

* 丙寅(1626) 선생 79세

 - 1월에 申敬叔의 편지에 회답하다.

이때 임금께서 啓運宮 喪을 만났는데 服制에 대하여 혹은 不杖期에 해당한다 하고, 혹은 杖期에 해당한다 하고

혹은 3년에 해당한다 하여 조정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마침내 장기로 결정하매, 申公은 右相으로 있었는데

계운궁의 병환이 위중하니 창졸간에 일을 당할까 걱정되어 글로 물으니 先生은 답서에서 朱子말씀에 大統을 잇는

자는 所生父母에게는 不杖期라는 말을 인용해 杖期는 예에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

 - 2월에 서울에 가다.

임금께서 복중임으로 궐하에 나가 위문하기 위함이었다.

 - 壬辰(19일)에 사직서를 올리니 世子는 여러번 사람을 시켜 기거를 묻다.

노병이 심하여 능히 朝班에 나가지 못하므로 교체를 청했다.

세 번 告하니 行護軍 遞授하다.

 - 癸卯(30일)에 남으로 내려오다.

政院에서 아뢰길,

 "김 모가 오늘 내려간다 하는데, 오늘날 宿德老成한 분으로 그 보다 뛰어난 분이 없고 조정에 있게 하면

   유익함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비록 山林에 있을지라도 당연히 불러야할 것인데 이제 이미 왔다가 문득

   돌아가니 聖上께서 어진이를 탐하고 덕을 좋아하는 道에 당치 않은 듯 하오며 去留에만 맡기면 아주 가는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옳으니 만류함이 가하다." 하거늘 政院에서 임금의

   명으로 글을 보냈으나 선생은 벌써 한강을 건넜더라.

3월에 상소하여 사직을 사례하고 인하여 힘써야 할 일을 전달하다. 지극한 정을 억제하여  聖躬을 보호하는

도리를 갖우어 말하고, 끝에는 신이 오늘 變例에 대략 소견이 있으나 전일 소장에 이미 진달했으므로 감히 다시

哀苦하신 中에 어지럽히지 못한다고 했다. 이때에 啓運宮 복제가 마침내 杖期로 정해졌으므로 소 가운데 말했다.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고 지성을 다 알았으나 경은 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곧 돌아가니 마음이 허전하다.

   소장의 말은 마땅히 유념하리라." 했다.

 - 黃山書院을 세우다.

黃山은 兩湖의 사이에 있는데 강산이 좋고 또 溪上과 가깝다. (溪上은 養性堂이다.) 丙午년간에 門人 宋興周,

崔命龍 등이 先生에게 품하여 書堂 두어칸을 지어 講學하는 곳을 만들고자 의논하니, 선생은 가서 그땅을 보고

경영하라 했는데 곧 東人의 沮戲로 인해 이루지 못하였다가 이에 이르러 書院을 세우고 栗谷과 牛溪 두 선생을

봉향했다. 宋明 甫(이름은 浚吉,호는 同春), 李士深(이름은 厚源, 호는 迂齋, 시호는 忠貞, 본관은 全州,

靖社功臣)에게 회답하는 글에 자상하게 나타나 있고, 선생도 돌아가신 뒤에 함께 배향 됐으며, 그 뒤 靜菴ㆍ

退溪 두 先生과 尤菴 宋文正公을 入享했으며, 竹林이라 賜額했다.

여름에 崔子謙의 편지에 답하고 아울러 張持國, 鄭子容에게도 보이다. 崔公이 生父의 稱考와 喪服의 논의를

주장하여 箚子의 초본을 보내면서 질의하여 선생이 조목에 따라 변론하였다.

 - 7월 壬午(12일)에 龍驤衛 副司直으로 옮겨 제수하다.

 - 8월 辛酉(21일)에 상소하여 時事를 논하다.

이때에 조정의 논의가 군사비가 부족하니 號牌法을 강구하여 행하고 어사를 파견하려하므로, 선생이 변방의

근심이 더 시급하고 믿어야 할 것은 민심인데, 장차 어수선한  틈에 선후완급의 차서를 잃을 것을 고려하여

이미 筵中에서 아뢴 바 있었다. 이제 다시 소장을 올렸다.

왕이 비답하기를,

  "상소문을 살펴보고 경의 나라 걱정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겨 어사를 파견하지 않기로 이미 정하였노라." 하였다.

    12월에 상소하여 延平府院君 李貴의 箚語를 올려 典禮를 논하면서 선생이 변론했던 말을 인용하여 자기주장을

    삼으니, 선생이 이에 상소하여 변론 하였다.

임금께서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보고 경의뜻을 자상하게 알았노라." 하였다.

 

* 丁卯(1627) 선생 80세

- 1월에 私廟의 稱號를 논하다. 韓士仰의 서신에 답서를 보내다.

- 丁亥(19일) 兩湖 號召使를 배수하다.

임금의 詔旨에

  "국가가 불행하여 도적이 변방을 침범하고 義州를 잃어, 宣川과 定州까지 들어왔으니 만일 적들이 兩西

    (浿西와 關西)를 뚫고 내륙까지 깊이 들어 온다면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은 오직 남방에 있으니 환란을

    염려하는 도리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경으로 호소사를 삼아 官印을 내려 보내니, 경은 의병을 모아

    인솔하여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庚寅(22일)에 교지를 받고 곧 狀啓를 올리고 가까운 곳부터 出次하다. 장계에 대략 말하기를,

   "이제 신의 일신상에 결정적인 어명을 받았으니 신이 비록 늙고 귀가 어두우나 어찌 감히 심력을

    다하여 전하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은 곧 의병을 모집하여 심력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다가 죽을 각오입니다." 하였다.

 - 辛卯(23일)에 幕府를 설치하고 兩湖에 檄文을 보내다.

선생이 임금에게 장계를 올린 후에 전부사 宋興周를 부사로 삼고, 전 지평 尹烇으로 종사관을 삼고, 전 군수

宋爾昌, 전 박사 宋國澤, 처사 柳楫으로 참모를 삼고, 전 별좌 安邦俊, 전 현감 高循厚로 의병장을 삼으니,

제공이 다 의병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또 전 현감 奇廷獻, 朴之孝, 鄭敏求, 전 별제 申滭, 진사 柳玶, 朴忠廉,

具瑩, 유학 高傳敏, 柳 述, 尹熲, 金海壽, 李復吉, 金峻業 등으로 유사를 삼아 의병과 군량과 병기 등을 召幕 하되

說諭하여 자의로 수합토록 할 것이며 절대로 강권을 써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말 것이며 관군외의 忠義衛와

儒生으로서 한적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고을 원과 상의하여 편의에 따라 응모하도록 할 것이며 사냥하는

私砲手도 다 뽑아 정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安邦俊이 寶城에 사는지라 선생이 서한을 보내 격려하고, 高循厚는 광주에 살았다. 광주 의거는 제공의

집에 오히려 그 당시의 글들이 전해져 선생이 조치한 바를 대략 알 수 있으나, 양호의 의병장과  유사로 선정된

자 이들만이 아닐 것이나 다 전하지 않는다.

 - 2월에 공주에서 세자를 맞아 뵈었다.

이때에 임금께서는 廟社와 慈殿을 받들어 江都로 납시고 세자는 分朝하여 남하하매 선생이 병기와 군량

모은 것을 行朝에 바치고 몸소 分朝에 의병을 인솔하고 나아가 알현하니, 세자께서 나아오라 하시고

위로함이 지극하였다.

 -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가다.

하룻밤에 賊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다는 헛소문에 놀라, 分朝의 여러 재상이 창황하여 세자를 嶺海로 옮겨

모시고자 하니 인심이 물끓듯하여 와해 될 기세가 있으므로, 선생이 먼저 도체찰사를 만나보고 그 잘못된

계책을 힘써 말하고 세자 뵈옵기를 청하여, 그 이해를 조목조목 진달하니, 세자께서 首肯하여 말하기를

내 뜻 또한 그러하다 하였으며, 이윽고 와전된 말이 잠정되었다.

호남에서 청주로 가면서 모든 의병을 모아 江都로 향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때에 閔聖徽(호는 拙堂, 시호는 肅敏, 본관을 驪興, 金尙憲과 같이 淸나라에 잡혀갔다 왔으며 호조,

형조판서 역임)가 湖南伯이 되매, 선생이 군문에 관한 일로 여러차례 서신으로 상의한 바 있었으니,

  "내가 礪山에 이르러 큰 비에 막혀 이틀을 머물다가 오늘에 恩津을 지나서 청주로 향하며, 모든 의병을 모아

   몸소 인솔하고, 임금 명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뿐이다." 하였다.

 - 3월 乙亥(8일) 行在所에 가다.

 - 2월 望後로부터 화의가 장차 성립되게 되매, 호소사가 모집한 군사를 보내지 말라는 명령이 내리매, 선생이

마침내 門人들과 같이 강도로 급히 갔다.

 - 庚辰(15일)에 임금을 배알하고 사퇴할 뜻을 진언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늙어 병중인 사람으로 이러한 위란을 당하여 국사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으니 내 심히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노라." 하니

선생이 말하되,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망극 하옵니다. 신은 늙고 병들고 재주가 없어 감당할 수  없는 소임을

   맡아 한갓 분주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저의 세력이 조금 누그러졌으니 사직하고 돌아가 향리에서 죽을까

   합니다."하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적병이 아직 경내에 있으니 직명을 띠고 돌아가 急한 일이 있으면 終始 진심을 다 함이 옳을 것이로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신이 세자를 모시고 公州에서 全州로 갔었는데 세자의 자질이 영특하여 인심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번 변란시 그곳 인심은 어떠하였는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전라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곳이 본래 사대부가 많아 심히 나쁜데에 이르지 않았으며, 오직 內浦와

    淸州는 인심이 좋지 않아 의병이 때로 불손한 말을 많이 쓰고 남을 모해하는 투서가 많아 서신이 십분

    開諭하여 겨우 이해 시키니, 사람들이 모였다가 곧 돌아 갔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講和한 것이 진실로

    임시방편으로 나온 것이니, 斥和의 의론이 없지 않을 것이오니 그 말이 비록 과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납하소서." 하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그 의론은 심히 옳다 하더라도 혹자는 타당치 않은 말로 항복한다는 말을 가첨하는 것은 극히 그릇된

   말이니, 척화한다는 의론을 어찌 감히 그릇되게 할 수 있는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尹煌(호는 八松, 시호는 文正, 본관은 坡平)의 말이 참으로 과격하나 역시 꺽어서는 않됩니다.

    그는 신과 나이는 틀리지만 成渾의 사위요, 姜碩期(호는 月塘, 시호는 文貞, 본관은 衿川으로

    우의정을 지냈으며 선생의 문인이자 從妹의 아들)는 신의 族親이요, 또한 신에게서 수학한 사람으로 신이

    익히 잘 아는 자이니 결코 不善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저 스스로 앞장서서 말하는자를 혹 罷斥하라 하거나

    외직으로 補하라 한다면 심히 미안한 일이오며, 그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받아드리지 아니하면 그만이지

     問罪까지 한다면 후에 누가 임금께 진언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명을 받을 때

    할 일이 많아 미쳐 狀啓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이제 진달코저 하나 귀가 심히 어두어 할 수 없습니다. 신의

    노병이 이와 같으며 賊勢 또한 느슨해졌으니 사직토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다시 적의 동태를 보아서 사면하여도 늦지 않은 일이요."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적이 급히 撤歸한다는 보장이 없고 설혹 철귀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침범할 것인데, 우리 군사가

    평소 훈련되지 못하여 믿을 수가 없으니 심히 염려되는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도승지에게 일러 김 모가 노병한 사람으로 국사를 위하여 올라 왔으니 該曹에 말하여 衣資를

    보내라 하시고 豹皮를 내려 주셨다.

  - 4월 戊申(12일)에 소장을 올려 호소사를 해직하여 주기를 청하다.

선생이 이미 황산서원에 돌아와 머물면서 兵糧을 구분하여 처리 하고 帳目을 수정하여, 드디어 소장과

官印을 구비하여 올려 보냈다.

 - 5월에 宋福汝의 喪에 조문하다.

선생이 송공의 병이 위독함을 듣고 급히 가서 문병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부음을 듣고, 다시 돌아가서

조문하였고, 후에 선생이 송공의 행장을 지었다.

 - 9월에 尹德耀 煌의 서신에 답하다.

척화의 일과 전주 分朝 때의 일을 논하다.

 - 손자 益熙(호는 滄州, 시호는 文貞, 대제학, 이조판서등 역임)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 毅宗 烈皇帝 崇禎 元年 戊辰(1628) 선생 81세

 - 9월에 형조참판에 배수되다.

 - 10월 丁酉(10일)에 상소하여 사직하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소장을 살펴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자세히 알았으며, 나는 경이 올라오기를 바랄뿐이니 모름지기

   사양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서 내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 丁巳(30일)에 두 번째 상소를 올려 사직할 뜻을 밝히다.

 - 12월 戊戌(12일)에 龍驤衛 副護軍으로 교체하여 제수하다.

소장이 올라가매 임금께서 傳旨를 내려 말하되,

  "늙고 병든 몸에 날도 추우니 쉬 올라 오기 어려울 것이므로 遞差한다." 하였다.

 

* 己巳(1629) 선생 82세

 - 1월에 삼정승과 판의금부사 제공에게 서신을 보내다.

이때에 宋匡裕가 尹雲衢을 포함하는 告變文을 올리니 林㙔와 趙平 등 무고한 선비를 끌어 넣었는데, 광유는

송구봉의 孼孫이므로 선생이 본래 그 흉악함을 잘 알고 있어, 호남 근방에서 무고 하는 전말을 자세히

들은지라, 제공에게 통보하여 그 진위를 明辯하여 연계되는 화가 없도록 권유하였다.

 - 윤 4월 丙辰(1일)에 임금이 특별히 유지를 내려 부르다.

追崇하자는 의논이 융성한 후로 임금의 소명이 오래도록 있지 않았는데 이때 경연의 신하가 풍속을 厚重히

하자는 일을 의논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길,.

  "김 모와 張顯光(자는 德晦, 호는 旅軒, 시호는 文康, 본관은 인동이며 벼슬은 우참찬)은 宿德한 사람으로

   조정에 올라오기를 좋아하지 않고, 온다 하더라도 곧 돌아가려 하니 이 이유는 내가 정성이 박하고 예가

   소홀한 소치인 듯 하니 어떻게 하면 서울에 오래 머물도록 하겠느냐?" 하니,

우상 李廷龜(호는 月沙, 시호는 文忠, 본관은 延安)가 말하되,

   “김 모는 본래 향리 사람이 아니니 임금께서 특별한 정성으로 예우하신다면 아마도 올라올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곧 政院에 명하여 하유하기를,

  "경은 덕을 쌓은 耆儒로서 국가 구제에 뜻을 두었으니,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마땅히 조정에 있어서 나라

   사람의 矜式이 되도록 하여야 할 터인데 오랫동안 향촌에 머물며 올라오지 않으니 이는 나의 성의가 淺薄하고

   예우가 소홀한 소치로 심히 부끄럽게 여겼도다. 이제 계절도 화창하여 행로가 어렵지 않을 터이니 경은 가마를

   타고 올라와서 나의 목마른 소망을 이뤄주기 바라노라." 하였다.

처음에는 나귀를 타고 오도록 하였다가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가마를 타고 오도록 하였다.

 - 丙子(21일)에 상소하여 사양하니, 임금께서 친서를 내려 다시 부르다.

친서에 이르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니 내 마음이 허전하도다. 경은 일국의 大老요, 덕행이 뛰어났으니 서울에 와 있으면

   士大夫의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흉금을 털어놓고 나를 깨우치는 바가 많으므로 내 곁에 자리를 마련하여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바램 에 부합토록 하라." 하니,

선생이 스스로 생각건대 이미 황혼길에 들어 정력이 쇠잔하니 임금의 융숭한 총애라 하더라도 자신의 거취에

失節이 있을 수는 없어 드디어 연하여 소장을 올려 향리의 편안한 몸이 되기를 역설하였다.

 - 5월 己酉(25일)에 두 번째 소장을 올려 사양하다.

임금의 비답에

   "경의 상소를 보니 내 마음이 허전하도다.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서늘한 가을 후에 올라와서 나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 8월 甲戌(22일)에 세 번째 소장을 올려 사양하다.

임금의 비답에

   "경의 상소를 살펴보고 내 마음 허전 하였노라. 마땅히 더 사양하지 말고 빨리 상경하라." 하였다.

 - 9월에 鄭時晦(이름은 曄, 호는 守夢, 본관은 草溪, 벼슬은 우참찬)의 近思錄釋疑에 서문을 짓다.

선생이 일찍이 편찬한 근사록 석의 한 권을 鄭曄에게 감정하도록 부탁한 바 있었는데, 그 후에 정공이 선현의

정론을 수집하여 차례대로 정리하고 보완하였으며 간혹 선생의 논설을 부기하여 네권으로 편찬하였는데

정공이 죽은 후 선생이 처음 보시고, 이에 서문을 지었다. 또 그 가운데 혹 의심이 있는 구절은 정공의 생전에

서로 논평하여 결론 짓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 甲辰(23일)에 네 번째 소장을 올려 사양하다.

임금의 비답은 전하지 않는다.

王言帖의 서문을 짓다.

선생이 평일에 받은 임금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 諸子에게 명해 수집하여 書帖을 만들고 서문을 지어,

전후 출처 시말을 대략 서술하였다.

戒懼愼獨分動靜說을 변론하여 梁振翊에게 보이다.

변론의 요약에 이르기를,

  "주자께서 초년에 생각한 바가 中庸集註와 異見이 있었는데, 胡季隨가 말하기를, '戒懼란 欲情이 發하기전에

   함양하는 것이고, 愼獨이란 이미 발한 후에 성찰하는 것이다.' 하니 주자가 그 말이 가장 옳다 하였고,

   율곡도 이 說을 聖學輯要 중에 수록하였으니, 대개 계구신독을 動과 靜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그런데

   集註와 상이한 것은 집주에 常存敬畏라 한 것은 서 있을 때도 경외하고, 앉아 있을 때도 경하고, 말할 때나

   식사할 때도 경외하여 비록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또한 감히 소홀이 할 수 없는 일이니, 動으로부터 靜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계구하여야 한다 함이다. 下文에 이른바 旣常戒懼라 한 것은 또한 동정을 겸하여 말한

   것이요, 於此尤加謹焉이라 한 것은 動하는 곳에서 더욱 신중 하라는 뜻이다. 或間에서 '中'과 '和'를 상대적

   으로 말한 것은 中은 靜함이요 和는 動함이므로 계구로써 靜할 때의 공부로 삼은 것이지 그렇다고 愼獨할 때라

   하여 계구의 공부가 없겠느냐." 하였다.

 - 12월에 손자 益炅(벼슬 강원도 관찰사, 대사헌)이 출생하다.

 

* 庚午(1930) 선생 83세

 - 3월에 鄭景任(이름은 經世, 호는 愚伏, 시호는 文莊, 본관은 晋州, 벼슬은 이조판서, 대제학) 에게

서신을 보내다.

문인 宋文正 浚吉(호는 同春, 문묘배향)이 세마의 벼슬을 받고 취임치 않으니, 선생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겼는데, 정공이 취임을 권유한다는 말을 듯고 서신을 보내 책하되, "宋明甫(송준길의 자)는 학문에 뜻을

두고 벼슬에 뜻이 없으니 그 뜻이 착하거늘 공은 그 뜻을 꺽으려 하니 이는 남의 아들을 해치는데 이르지

않겠는가." 하니 정공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죄하였다.

 - 4월 辛酉(12일)에 嘉義大夫에 승진되다.

이때는 노인을 우대하는 典例로 승진되었다.

 - 가을에 문인 송시열과 格致와 四七心性情意의 뜻을 논하였다.

송문정공이 어려서부터 선생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이때에 喪制를 겨우 마치고 다시 와서 수학할 제,

선생이 심히 기특하고 장하게 여겨 순순히 번석하여 개론하였다.

 - 10월에 讀書講義에 서문을 짓다.

이 책은 趙遴이 지은 책인데 선생이 서문을 지었다.

 - 11월에 宋戶部 憲의 禮設에 跋文을 쓰다.

宋憲은 中國사람인데 우리나라의 사신으로부터 典禮論을 듣고 禮設을 지어 보이되,  追崇하여 사당에

모시는 일은 마땅히 義로써 일으켜야 한다고 하매 선생이 글을 지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론하였다.

張持國에게 서신을 보내다. 서신은 유실되었다.

이때에 穆陵(선조대왕 능)을 遷窆하는 예를 행할 때 임금이 갖추어야 할 緦麻服을 虞祭  후에 除하기로 하니,

선생이 그 실례됨을 槪念하여 장공에게 서신을 보내 古禮와 주자의 예론을 들어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 辛未(1631) 선생 84세

 - 張持國의 서신에 답신을 보내다.

이때에 추숭하자는 의론으로 온 조정이 계속하여 다투었으므로 임금께서 선생에게 미안하다는 교지가

 있었는데 말하기를,

   "온 조종이 추종하는 자인 김 모의 정원군을 叔이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말을 지금에는 오히려 처음부터

    막으려는 계략이라고 까지 하고 있다." 하였다.

崔鳴吉(호는 文忠, 본관은 全州)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김모는 신의 스승으로 年德이 높고 학술이 순후하여 국민이 모두 추존하는 바요, 임금께서도 깊이

    推獎하시면서도 전하께서 이따금 이의를 제기하여 허물을 돌리려는 듯하시니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

    선비를 추숭하고 道를 중히 여기는 뜻이 이로 인하여 다소라도 해이해 지면 世道의 걱정이 실로 이루다

    말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李貴의 차자에도 역시 聖敎中에 김 모를 경시한 구절은 자못 미안한 일이라 하였는데 대개 선생의 논리는

대통을 승계하는 일이 중요하고, 私親을 숭봉하는 일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홀로 衆說을 배척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리게 되었고, 이론이 또한 선생을 비방하는 자가 많았으나 선생은 확실하게 初志를 지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5월에 풍습증을 앓았다.

선생이 본래 건강하여 질병이 없었는데 이에 작은 병환이 있어 집안사람들이 손님을 사양하고 정양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생이 듣지 아니하고 날마다 문인과 더불어 강론하기를 거두지 않이하고 起居興寢을 평상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 8월 甲辰에 正寢에서 考終하시다.

8월에 이르러 병세가 위중하더니 3일 時에 안정한 정신으로 유연히 세상을 떠나니 그 때에 둘째 아들

문경공이 옆에서 모셨다. 문인과 더불어 선생이 평일에 정한 바 喪禮를 한결같이 지켰으니, 家禮를 주로

하되 의례를 참고한 것이다. 셋째 아들 참판공이 관직에 있어 조정에 있다가 병환이 위급함을 듣고 급히

달려왔으나 미치지 못하고 殮殯한 후에 당도하였다.

 

○ 문인이 服을 갗춘자 수십 백인으로 白布巾에 首絰을 가하고 흰띠를 두르고 吊喪하였으니, 대개 勉齋가

    晦庵의 복을 입은 제도를 따른 것이요, 또한 선생이 栗谷선생에게 조상하는 故事를 따른 것이다.

    訃音이 조정에 돌리매 예관을 보내 致祭하고 賻助를 후히하다.

    예조좌랑 徐挺然이 내려와 예를 행하였으니 곧 9월 壬辰(21일)이다.

    왕세자가 宮官을 보내 致祭하였다.

    세자가 講學하기를 거두고 소복을 입고 宮僚들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어려서 학문에 나가게 된 것이 김공이 가르쳐 주신 은혜이니 어찌 잊으리오." 하였다.

    弼善 鄭弘溟(호는 畸庵, 시호는 文貞, 본관은 延日, 松江의 아들)이 내려와 예를 행하였으니 곧

    9월 甲戌(3일)이었다.

     나라에서 본도(충청도) 道伯에게 호상하고 營葬하는 일을 명하다.

    참찬 張維가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아뢰기를,

     "김 모의 宿德은 斯文에 유공하니 마땅히 追典을 더하고 또한 장례를 도와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어명이 있었다.

    10월 己未(19일)에 鎭岑縣 城北里 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새로 터를 잡았다. 이 장례식에 멀고 가까운 데에서 문상하는 사람이 거의 천명에 달했다.

    壬申(1632) 4월에 부인의 묘를 옮겨 좌편에 합장하였다.

    家狀을 이루다.

    胤子 文敬公 集이 지었다.

    甲戌(1634)에 諸生이 溪上에 서원을 세웠다.

    문인 李恒吉 등이 원근의 선비들과 창립하여 낙성하게 되었고 5월 丁亥에 神位를 奉安하여

     의절에 맞게 향사하였다.

    顯宗 庚子(1660)에 나라에서 遯巖이란 額號를 내리고 관원을 보내 致祭하였고, 우암 송문정공이

    廟庭碑文을 찬하였다.

○ 그 후에 諸生이 愼獨齋 文敬公을 배향하였고 同春堂 송문정공과 우암 송문정공도 추배하였다.

○ 이 밖의 서원으로는 益山의 華山과 安城의 道基 서원은 선생을 專享한 곳이요, 礪山의 竹林과 懷德의 崇賢,

    光州의 月峰, 燕岐의 鳳巖 서원은 幷享하였으며, 海州의 紹賢과 公州의 忠賢은 朱子를 모신 서원에

    배향되었고, 坡州의 紫雲과 鳳山의 文井, 靑松의 屛巖 등 서원에는 율곡 선생을 모신 서원에 배향되었다.

    월봉서원과 문정서원에는 文敬公이 또한 배향되었다.

    8월에 神道碑銘을 이루다.

    문인 溪谷 張維가 찬하였다.

    乙亥(1635)에 墓誌銘을 이루다.

    淸陰 金文正公 尙憲이 찬하였다.

    丙子(1636)에 資憲大夫 이조판서의 증직을 명하다.

    筵臣들이 증직할 것을 건의한 때문이다.

    辛巳(1641) 1월 乙酉(9일)에 連山縣 南牛首里 高井山 坤坐原에 遷葬하다.

    곧 先祖妣 許氏의 묘 뒤 서북쪽이며, 黃公의 묘와 겨우 一里쯤에 접하니,

    城北은 宅兆가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甲申(1644)에 墓表 陰記가 이루어지다.

    문인 畸庵 鄭弘溟이 찬하였다.

    庚寅(1650) 孝宗大王 元年 4월에 行狀이 이루어지다.

    문인 尤庵 宋文正公 時烈이 찬하였다.

    丙申(1656) 12월에 諡狀이 이루어지다.

    문인 同春堂 文正公 浚吉이 찬하였다.

    丁酉(1657) 10월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겸영경영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를

    증직하고 文元公이라 시호를 내리다. 이는 경연의 신하들의 건의에 의한 것이며, 처음에 소관 司議가

    시호를 文元이라 하는 것이 적응하다고 임금께 올리니, 동춘당 송문정공도 소장을 올려 先朝에서 位相에

    적응하게 한 故事를 인용하여 선생의 덕이 '文  元'과 서로 맞는 일이라 하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

    道德博聞曰文이라 하고, 主義行德曰元이라는 뜻이다.

    乙巳(1665) 顯宗大王 元年(현종 원년은 庚子(1660)인데 착오인듯) 4월에 임금이

    溫陽 온천에 갔다가 近臣을 보내 묘소에 致祭하다.

    辛酉(1681) 肅宗大王 7년 12월에 영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선생을 당연히

    文廟에 從祀하여야 함을 논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栗谷ㆍ牛溪 양 선생의 從祀를 윤허하였는데, 송문정공이 인하여 소장을 올려 선생의

    從享 陞躋할 것을 변론하고 斯文에 유공함을 개진하였으니, 그 대략에 '朱子'가 禮書를 證定하다가

    반도 못 이루고 죽게 되매 勉齋가 이어서 이루려 했으나 禀證하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 있어 이른 바

    千古의 한이 되는 일이더니, 문원공 臣 김 모가 程朱의 학문을 문성공 李珥에게서 얻어서 이미 그 학설을

    다 이어받았고 마음속에 증험하고 몸소 행하여 만년에 오로지 禮書에 뜻을 두었으니, 대개 면재가 쓴

    예서에 감개스러움이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편찬한 諸書가 상세하게 분석되어, 물을 담아도 샐틈이 없어 國朝典章과 私家經變으로 하여금 다

    折衷한 바 있고, 오로지 程朱의 說을 주로 하여 비록 道가 다른 사람들도 따라 행하지 않는 집이 없으니

    그 공이 가히 크다 이를 것입니다. 대개 鄭玄의 무리인 諸儒는 周禮를 註釋한 글의 공로로써도 오히려

    聖廡에 배향되었는데, 하물며 문원공은 東方의 예가로 대성한 분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지난해 章甫들이 간혹 신에게 하는 말이 문원공 같이 사문에 유공한 분이 문묘에 배향하는 공론이 아직

    적적하니 이 어찌 그대로 있을 수 있느냐 하기에 신이 만류하여 말하기를, "이 말이 비록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으나 반드시 온 나라가 한가지로 말한 후에라야 가히 百歲 후에라도 의혹이 없을 것이요, 또한 兩賢

    (율곡, 우계)에 대한 요청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순서가 있어야 할 것이라." 하여 그 의론이 그쳤으나

    이제 兩臣의 종사도 이미 윤허한 바 있으니, 신이 외람되이 通變의 물음을 받자 왔으니, 만일 이때에

    阿好한다는 혐의만 생각하고 끝내 전하에게 한  말씀 드리지 아니하고 公議만 기다리게 되면 신이 전날에

    만류한 일이 士林들에게 무궁한 한이 될 것입니다. 신의 소청은 감히 聖明께서 독단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縉紳 館學에게 널리 의논하고, 또한 外方의 선비들에게도 널리 자문을 구하여 異說이 없은 연후에 또한

    古義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金壽恒(호는文谷, 시호는文忠, 본관은安東), 判府事 金壽興(호는退憂堂, 시호는文翼, 본관은安東),

    鄭知和(호는南谷, 본관은東萊), 우의정 李尙眞(호는晩庵, 시호는忠貞, 본관은全義)은 다 선생의 德과 功이

    從享함에 適應하나 마땅히 신중을 기하여 거행하여 사체를 신중히 하자는데 의론을 모았으나, 좌의정 閔鼎重

    (호는老峰, 시호는文忠, 본관은驪興), 司業 李翔(본관은牛峰, 벼슬은大司憲)은 곧 陞享하기를 청하기에 임금이

    교서를 내려 말하길,문원공의 학문과 도덕이 고명함은 내 진실로 잘 아는 바이나 다만 종향하는 일은 사체가

    지중한 일이니 경솔히 陞配할 수 없으므로 大臣들은 의논을 모아 후일을 기다림이 또한 마땅하다 하였다.

    그 후에 館學과 八道 儒生들이 해마다 소장을 올려 청하였다. 대개 從祀하자는 공의는 인조 乙亥에 처음 제기

    되어 이때에 와서 선비들의 여론이 일제히 일어났다.

    乙丑(1685)년 겨울에 임금이 문집을 발간하라 명하다.

    선생이 평소에 저술을 일삼지 않아 遺草 약간 권이 家藏되어 있었는데, 임금이 筵席에서 하교하기를,

     "문원공의 문집을 보고자 한다." 하여 玉堂으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니 우암 송문정공이 편찬하고 近思와 함께

    疏章도 갖추어 진상하니, 임금이 예관에 명하여 인쇄 간행하게 하고 經書辨疑ㆍ家禮輯覽ㆍ疑禮問解 차례로

    간행하게 하였다.

    선생은 예학에 공력이 더욱 깊고 攷證이 精博하여 사람이 變禮와 의심난 글이 있으면 반드시 就正하였으니

    문경공과 문인들이 선생이 문답한 것을 한데 모아 분류하여 편집한 책이 곧 疑禮問解이다.

    丁酉(1717) 2월에 임금이 온천에 갈 때 近臣을 보내 묘소에 致祭하다.

    5월 癸酉(20일)에 文廟에 從祀할 것을 명하고 예관을 보내 家廟에 致祭하다.

    지난 庚辰年에 유생 鄭雲翼 등의 疏請으로 인하여 該曹에 처리토록 명하니, 예조에서 대신과 儒臣들을

    청하여 의론하였다. 대신 李世白(호는 雲沙, 北溪, 시호는 忠正, 본관은 龍仁)ㆍ申琓(호는 絅庵, 시호는 文莊,

    본관은 平山)과 儒臣 權尙夏(호는 遂庵, 시호는 文純, 본관은 安東)가 논의를 올려 종사하기를 요청하였다.

    이 해 2월에 館學儒生 趙謙彬(자는 益甫, 金昌協 문인) 등이 전에 소청한 것을 다시 청하니 이에 임금이

    특명을 내려 縟儀를 거행했다.

    이때에 선생의 宗家廟는 이미 四代가 지나 선생의 사당은 증손 都正 萬增의 집에서 봉사하였는데, 대신들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선현들에게 종향하는 사당은 옛 제도가 가묘를 不遷한다고 하니, 종손에게 명하여 다시

    봉사하도록 하고, 이틀전 辛未(18일)에 예관이 내려와 임금의 교서를 낭독하고, 치제하였다. 치제할 때

    주인으로 宗孫 相說에게 除職承事를 명하였으나 나이가 어리어 五代孫 天澤이 攝祀로 제주를 맡았다.

    庚午(1750) 英宗大王 26년 9월에 임금이 온천에 갈 때 근신을 보내어 선생의 묘소에 치제하다.

    癸卯(1783) 正宗大王 7년 1월에 임금이 閣臣을 보내어 石潭書院에 치제하다.

    主享과 配享에 각기 제문이 있었는데 모두 임금이 지었다.

    丁卯(1867) 洪廟 4년 12월에 地方官을 보내 家廟에 致祭하다.

     작년 洋擾에 宗家가 連山의 묘소 아래에 피난하여 우거하였으므로 大臣들이 경연에서 致祭할 것을 건의하매,

    지방관을 보내 致祭하도록 허락하였다.

    乙酉(1885) 4월에 禮官을 보내 家廟에 致祭하다.

    이때 宗孫 永耈가 報恩郡守가 되어 祠板을 모시고 관아로 갔다. 그의 胤子 德洙가 癸未 年柑製 文科에

    합격하였는데, 이 해에 이르러 榜을 붙였다. 임금이 특별히 풍류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致祭하였다.

    壬子(1732)에 선생의 년보를 간행하다.

    선생의 외증손 芝湖 李選(본관은 全州, 우의정厚源의 아들,이조참판)이 처음 연보를 편차하다가 일을 마치지

    못하고 海上(張機의 적소)에서 죽을 때 영결의 글을 지어 선생의 현손 鎭玉과 鎭泰에게 연보 초본과 같이

    주어 부탁하였는데, 그 후 절차를 수정하고 윤문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돌려가며 간직하다가 이제

    여러 후손들이 끝내 이루지 못할까 걱정하여 유고와 다른 기록에서도 증거 될 만한 것을 고찰하여 약간 조항을

    증보 편찬하여 印刊하였다.

○ 191년 후 壬戌(1922) 全書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