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주공파 및 문경공파 재실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선생의 부조위 사당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염수재내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198쪽 下참조]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47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27세 문원공 諱 장생(長生)은 황강공 諱 계휘(繼輝)의 아들, 조선조 중기(1548∼1631)의 대유현,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557년 열 살의 나이에 구봉(龜峰)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장성하여 율곡(栗谷)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이요, 예학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부조위 기일 : 음 8월 2일, 정경부인 음 4월 24일]

 

염수재(念修齋)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199쪽 上참조]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47호]

 

   염수재 사진 보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27세 문원공 諱 장생(長生)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1백년은 국내외로 다난(多亂)했던 시기이다.

  안으로는 반세기에 걸친 사화가 지나자 당쟁이 시작되고 동서의 분당과 남북의 분파가 대립되었으며 광해군의 폭정과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등을 겪었다. 밖으로는 임진왜란(1592)을 비롯하여 정유재란, 정묘호란등 남과 북으로 부터의

  외침이 쉴사이 없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화를 겪은 사림들은 정치에 뜻을 버리고 산림에 숨어 살며 학문과 교육에

  힘쓰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학문 경향도 철학적 사색과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 것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선생의 고택(古宅)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두마면 금암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00쪽 下참조]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134호 ]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27세 문원공 諱 장생(長生)은 1628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말년에 두마면에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와 같이 천자가 돈후하여 도에 가깝고 저술을 일삼지 않고 글을 읽다가 얻는 것이 있으면 기록하였으니 경서변의(經書辨疑),

  의례문해(疑禮問解), 서소잡록략,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등을 저술하였는데

  이를 사계전서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선생 고택(古宅)의 성례당(省禮堂)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두마면 금암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01쪽 上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27세 문원공 諱 장생(長生)은 연산에서 10여년간 은거하며 경서와 고훈을 잠심 탐독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니

  중자(仲子) 김집, 송시열, 송준길, 강석기, 신흠, 장유, 정홍명, 이유태, 최명길, 이경석 등 수백명의 기라성 같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사계선생은 1657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 해주 소현서원,

  파주 자운서원 등 10여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우리나라 예학의 종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선생 고택(古宅)내 구로정(九老亭)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두마면 금암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01쪽 下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27세 문원공 諱 장생(長生)이 노년에 인근의 노인들을 청하여 농사의

  경영과 담소를 나누고 당대의 석학들과 학문을 논한 정자가 퇴락되어 정자의 옛터에 후손이 선생을 추모하여 다시 지었고

  정자 주변에는 기화 요초가 자라고 있으며 선생이 당시 명나라에서 선사받은 연산홍은 현재에도 꽃을 피우고 있다.

  연못의 백련은 선조 25년 선생이 청양 현간 재임시 심었던 것을 논산으로 오면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

 

임리정(臨履亭)
   
 소재지 :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02쪽 上참조]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67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임리정은 조선조 대유학자이며 예학의 태두인 사계 선생이 인조 4년에 건립한 강학장소이다.

  임리정이란 사서삼경중 하나인 시경의 여림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氷)의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깊은 못가에 서있는 것과 같이 또한 얼음장 밟는 것과 같이 항상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황산정이라 편액했으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약식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 기와집이다.

 

염선재(念先齋) 재실(齋室) 안채.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두마면 금암리 45번지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03쪽 下참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5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효열부(孝烈婦) 정부인 순천김씨 재실(齋室) 안채.
  贈 정부인 순천김씨는 충익공(忠翼公) 김종서의 6세손인 수언(秀彦)의 딸이다.

 

염선재(念先齋)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두마면 금암리 45번지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04쪽 上참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6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

  효열부(孝烈婦) 정부인 순천김씨가 17세때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충익공을 신원 하려면 명망이 있는 군자를 만나야 하는데,

  현재 온조정의 덕망이 사계 김공 보다 나은 이가 없다. 그런데 김공이 지금 아내를 잃고 혼자이니 네가 만일 김공의 아내가

  될 수 있다면 사적(私的)으로 우리 가문을 이롭게 함이 될 것이다」말하였다. 이에 순천김씨가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니 그 때가

  사계선생께서 정경부인 창녕조씨를 상배하고 홀로 계신 때였다.

  정부인 순천김씨는 남편을 공경하고 제사를 받듬에 능히 여자의 도리를 다하고 자녀를 법도로 가르쳤다.

  1631년 사계선생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정성으로 간호하고 하늘에 빌기를 대신 죽게하여 달라 하였다.

  선생이 돌아 가시자 조석 상식을 몸소 하고 죽은이를 산 사람 모시듯 예를 다하였다. 길제를 지낸 후에 제 자손을 부르시고 말하기를

 「너희 집에 들어온지 46년이나 되었는데 이제 회갑이 지났으니 상수이고 여덟 자녀를 두었으나 다행이 다 성취를 시켰고

    너의 아버지의 삼년상, 담제까지 마쳤으니 더 이상 살아 있어야 할 의미가 없다」하고 죽기를 맹세하니 자손들이 울며 만류하기를

    70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말씀드리니 「사람이 죽고 사는데는 때가 있는 것이니 지금이 내가 죽을 때이다」

  하고 목욕한 후 이불을 펴고 옷을 갈아 입고 누워서 그대로 음식을 끊으시고 죽었으니 나이 62세였다.

  이에 여러 일가와 고을의 군자들이 효도중에 효며, 열녀중에 열이로다 하고 극찬 하였다.

  그후 연산(連山) 유림 이인식 등의 상언으로 나라에서 효열(孝烈)의 정려를 내리고 정부인에 贈 하였다.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선생의 부조위 사당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27쪽 下참조]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294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경공파 파조]

  28세 문경공(文敬公) 諱 집(集)은 문원공 諱 사계(沙溪) 장생(長生)의 둘째아들, 1574년생으로 자는 사강(士岡), 호는 신독재이다.

  송익필과 아버지 사계선생에게 글을 배워 6세때 이미 작문을 할줄 알았다. 1591년 진사시에 합격,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부임치 않았고, 인조반정후 학행으로 부여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선생은 그후 선공감 첨정, 지평,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통정대부, 승정원 부승지, 경연참찬관, 원손보양관, 공조참의,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네차례 사양하였으며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무 7조를 올리니 왕이 탄복하였다.
 
 [부조위 기일 : 음 5월 13일]

 

추원재(追遠齋)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28쪽 下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경공파  파조]

  28세 문경공 신독재 선생은 대사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 세 번 면대하여 사양하였다.

  1653년 숭정대부로 승진되니 상소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의례경전 11권을 해석했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중대한 의논이 있으며 왕이 낭관을 보내어 자문하였다.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선생의 고택(古宅)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28쪽 下참조]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294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경공파 파조]
  1656년 윤 5월 13일 별세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김집은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에서도 중망이 있었도다"하고 특별한 예우로

  장사를 치루도록했다. 장사날 선비들이 모여들어 문물로 조곡하며 "이제 도학이 없어졌다"하며 한탄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효종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묘(文廟)에 종향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돈암서원등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신독재 전서가 있다.

 

술선재(述先齋)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선비촌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30쪽 下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파조]

  28세 허주공 諱 반(槃)은 문원공 諱 장생의 셋째아들, 조선조 중기(1580∼1640)의 문신으로 자는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舟)다.

  1605년 진사. 1624년 문과에 급제, 사인, 보덕, 성균관 전적등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전한, 부제학이 되었다.

  1636년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했다. 다시 대사간으로 부임하자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가 화친을 반대했다.

  가선대부로 승진 대사헌, 예조참판, 병조참판,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정사 영사의 원종훈에 기록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증직되었다.

  [세일사 : 음 10월 12일]

 

긍사재(肯思齋)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가정동 산 8-9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54쪽 下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29세 문정공 창주(滄洲) 諱 익희(益熙)는 허주공 諱 반(槃)의 둘째아들, 조선조 중기(1610∼1656)의 문신으로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이다.

  진사에 합격하고 1633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부교리겸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때 임금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독전어사로 척화를 주장했다. 그후 군기시정, 응교,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삼사에 들어가 보덕을 겸했다. 1646년 동부승지 승문원 부제조를 거쳐 태안군수로 옮겨 선정을 베풀어 백성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인조가 죽자 효종의 부름을 받아 우부승지가 되어 북벌계획을 도왔다. 그후 강원 감사가 되어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대사간, 형조참의, 대사성, 도승지,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이듬해 양관대제학에 임명 되었고 곧 사양하니 형조판서, 이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창주공 산소, 신도비, 재실 주변 만여평은 대전광역시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세일사 : 음 10월 13일]

 

승선재(承先齋)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선비촌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56쪽 下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29세 충정공 諱 익겸(益兼)은 허주공 諱 반(槃)의 셋째아들, 조선조 중기(1616∼1637)의 충신으로 자는 여남(汝南)이다.

  1635년생으로 생원시에 장원하고 진사에 합격하였다. 건주(建州) 오랑캐의 오만무도 함을 논박하였다.

  병자호란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침범하자 아버지 허주공은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갔고 공의 어머니 贈 정경부인 연산서씨와

  어린 아우 및 가솔을 거느리고 부인과 강화도로 갔다. 공은 소수의 선비들로 군대를 편성하여 오랑캐와 대적하고 싸우다

  세부족으로 강화도가 점령되자, 선원(仙源) 김상용과 함께 남성 후문에서 분신자결 하였으니 향년이 23세였다.

  보조공신 의정부 영의정 광원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충신의 정려를 받았다.
  후에 강화도 충열사, 논산의 충곡사에 배향되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으며 충정(忠正)의 시호를 받았다.
  
[세일사 : 음 10월 13일]

효경재(孝敬齋)
  
  소재지 :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삼리 349번지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60쪽 下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

  29세 도헌공 諱 익경(益炅)은 허주공 諱 반(槃)의 여섯째 아들, 1629년생으로 자는 계명(季明)이다.

  진사에 합격 세마요, 문과에 급제 강원도 관찰사, 이조, 호조, 예조, 병조참의를 지내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효경재는 도헌공 諱 익경(益炅)과 配 정부인 파평윤씨의 세일사를 봉행하는 재실이다.
 
 [세일사 : 음 10월 5일]

 

경모재(敬慕齋)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80쪽 上참조]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제131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충정공파]

  30세 문충공 諱 만기(萬基)는 충정공 諱 익겸(益兼)의 장자. 조선조 중기(1633∼1687)의 문신으로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이다.

  1652년 생원,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666년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대사간이 되고

  곧 좌승지로 옮겼다. 이듬해 예조참의, 광주부윤, 1671년 예조참판에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부총관, 관상감 제조,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양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했다. 이듬해 병조판서, 지춘추관사를 겸했고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 이듬해 영돈녕부사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숙종의 국구(숙종의 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가 되어 광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1680년 분충효의 병기협모 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풍정도감 도제조를 지냈다. 국구가 된 후 사화가 있따르니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편안케하고 훈업을 이룬뒤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니 선비들이 산악같이 우러러 보았다.

  경서, 사기 제가서에도 달통하였으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증직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문집 16권이 있으며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광산김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편간 하였으니 서석보(瑞石譜)라 이른다
 
 [세일사 : 음 10월 16일]

 

30세 지중추부사공 諱 만증(萬增)의 재실(齋室)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고리실)
    [사진 : 광산김씨 유적보감 하권 281쪽 上참조]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파/창주공파]

  문정공(文貞公) 창주(滄洲) 諱 익희(益熙)의 아들, 자헌대부 중추부사공 만증(萬增)과 配 정부인 반남박씨의 세일사를 받드는 재실이다.
  
[세일사 : 음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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