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 史 돋 보 기

제목: 조선왕조실록(諱 鎭圭)
이름: 孤巖/準一


등록일: 2015-12-04 16:07
조회수: 936 / 추천수: 57


조선왕조실록(諱 鎭圭)

전 판서 김진규의 졸기 숙종 42년 병신(1716, 강희 55)   6월 3일(신묘)

전(前)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9세였다. 김진규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일에 부지런하였다. 일체 법을 지켜서 흔들리는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하지 못하였고, 늘 청검(淸儉)으로 스스로 행실을 닦으니 귀하여지고 나서도 집은 매우 가난하여 입고 먹는 것이 빈한한 선비와 다를 것이 없었다. 또 시감(試鑑)이 있으므로 여러 번 과시를 관장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으나, 성질이 자못 집요하고 남에게 이기려고 힘쓰는 병통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흠잡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독하여 입으로 불러서 유소(遺疏)를 썼는데, 죽고 나서 소가 올라갔다.
그 소에 이르기를,
“신(臣)은 은혜를 받은 것이 망극한데도 임금을 섬긴 것은 변변치 못하니, 구구한 정성이 그 기대에 어그러진 것을 스스로 드러낼 수 없을 만큼 거의 소원(疏遠)한 신하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한 가닥 남은 목숨이 장차 다하여 성명(聖明)을 영결(永訣)할 때를 당하게 되니, 또한 어찌 차마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번 아뢰지 않고, 끝내 의리와 분수를 스스로 저버리겠습니까? 그러나 정신이 혼미하고 숨이 가빠서 대강만을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절선(節宣)하는 방도를 더욱 삼가서 건강이 회복되는 보람을 빨리 거두고, 후손에게 편안함을 끼칠 계책을 깊이 생각하여 더욱 국운(國運)을 튼튼히 하며, 자칫 본말(本末)이 전도되는 것을 잊지 말아서 대의(大義)가 없어지지 않게 하고, 정사(正邪)가 뒤섞이는 것을 통절히 경계하여 간사한 사람이 자취를 물러나게 하소서. 성학(聖學)에 힘쓰고 소민(小民)을 화합하며 변경(邊境)을 튼튼히 하고 먼 곳까지 경영하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몸소 유(類)에 따라 미루어 유의하셔야 하겠기에 신이 감히 상세히 아뢰지 못합니다. 하늘을 우러르고 대궐을 향하여 상소하면서 눈물이 흘러 못 견디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보고 탄식하고 상심하여 하교하기를,
“유소(遺疏)를 살펴보건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죽음에 이르러 더욱 깊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으랴마는, 그 말은 남고 그 사람은 죽으니 슬픔이 더하다.”
하였다.【원전】 40 집 588 면



[김진규(金鎭圭) 인물정보]
* 1658(효종 9)∼1716(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만기(萬基)이고,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며,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

   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 1682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86년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함에 따라 지평으로 기용되었다.
*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자, 1695년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에 의하여 척신(戚臣)으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 1699년에는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명목으로 윤증(尹拯)을 공박하였다.
*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 1713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으며, 그밖에도 홍문관의 여러 관직과 사인·빈객·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
   판서·좌참찬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재직중일 때 소론에 의하여 유배당하였다가
   2년 뒤 풀려나왔다.
*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를 많이 작성하였으며,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
  능하여 신사임당(申師任堂)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 글씨로는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대헌심의겸비(大憲沈義謙碑)·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가

   있다.
* 정치적으로는 대표적인 노론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처지를 충실히 지켰다. 거제의 반곡서원(盤
  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 영조가 1766년 치제(致祭)하였으며, 1773년 그 문집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친제(親製)하였

  다.
* 문집으로 《죽천집》, 편서로 《여문집성 儷文集成》이 전한다.
* 가족사항
  부(父) 김만기(金萬基) 조부(祖父) 김익겸(金益兼) 증조부(曾祖父) 김반(金槃)
  외조부(外祖父) 한유량(韓有良) 처부(妻父) 이민장,정소하(李敏章,鄭昭河)
  자(子) 김양택(金陽澤) 형(兄) 김진구(金鎭龜)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朝鮮金石總覽, 竹泉集, 儷文集成, 陶谷集, 疎齋集]

숙종 12년(1686)10월 20일(정시 문과를 실시하여 김진규 등 7명을 뽑다)
정시 문과(庭試文科)를 실시하여 김진규(金鎭圭) 등 7명을 뽑았다.【원전】 39 집 80 면



12월 18일(신계화를 승지로, 김진규를 지평으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원전】 39 집 88 면



숙종 20년 갑술(1694)5월 19일(정중휘·민진후·김진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수찬(修撰)으로 삼고~원전】 39 집 309 면



윤 5월 7일(수찬 김진규가 그 부친 김만기의 무죄를 상소하다)
수찬(修撰) 김진규(金鎭圭)가 그 부친 김만기(金萬基)를 위해 상소하여 신변(伸辨)하기를,
“신은 들으니, 군간(群奸)들이 반역의 옥사를 일으킴에 있어 김덕원(金德遠)이란 자가 훈신(勳臣)을 모함하여 이렇게 말을 하였다 합니다. ‘김석주는 허적(許積)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김만기가 허적과 김석주의 둘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이사명(李師命)과 그 아들 김진구로 하여금 밤낮으로 김석주의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여 말을 조작하고 위기의식을 조장하며 온갖 못하는 짓이 없었고, 또 무사(武士)들로 하여금 김석주의 집 정원에 왕래하도록 하여 이사명의 무리가 허적이 보낸 자객(刺客)이라고 지적하니 김석주가 이에 크게 의구심을 품고 겁을 내게 되었다.’ 하고, 또 ‘김만기는 이입신(李立身)으로 하여금 기찰(譏察)하도록 하였다.’고 말했다 하며 또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합니다. ‘김만기의 이간하고 위기의식을 조장하려는 계획은 최후의 수단까지 모두 동원하여 김석주가 궁중에 병졸을 잠복시켜 놓았다는 말을 만들어내어서 역적 허견(許堅)의 귀에 들어가도록 퍼뜨렸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변경의 수비를 위해 체부(體府)를 설치하였고, 허견·이태서(李台瑞)·정원로(鄭元老)의 무리는 몰래 서로 모의하여 이를 빙자해 후일 환란을 방어하는 자료로 삼으려 하였다.’ 아! 김석주가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곳은 왕실이었으며, 허적은 역적 허견을 자식으로 두었으니 당연히 서로가 미워했을 것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의 이간시키고 위기의식을 고취하기를 기다렸겠습니까? 혹시 김덕원이 일찍이 김석주의 속이 깊어 참고 견디어 비록 허적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조금도 그 형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바로 참으로 서로 친밀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아니면 역적 허견을 위해 유세(遊說)를 하려고 하다가 제대로 설득이 되지 않자, 김석주가 허적을 미워하는 것을 가지고 그 원망을 선신(先臣)에게로 돌리게 된 것입니까?



그리고 또 이른바 자객(刺客)의 설은 ‘이사명의 무리’라는 것을 가지고 증거를 삼는데, ‘무리’라는 것은 이것이 이사명의 친속(親屬)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친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윗 문장의 문세(文勢)로 볼 때 혹시 신의 형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만일 그의 친속이나 친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지금 이 사명은 비록 죽었다 하더라도 그 친속과 친구는 반드시 생존한 자가 있을 것이니, 그 말이 허위인가 사실인가 하는 것을 들어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신의 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자식을 이끌어 아버지를 증거대는 것으로서 이것이 어찌 인간의 도리이겠습니까? 더구나 선신과 김석주는 다같은 척신(戚臣)으로서 서로 다정한 사이였습니다. 하필이면 불안하고 어긋난 한 방법으로 이런 괴상하고 추잡한 일을 하여 마치 적국(敵國)이 군진(軍陣)에 임하고 보루(保壘)를 마주하여 반간(反間)을 행하는 것처럼 하였겠습니까?



대저 이른바 ‘기찰(譏察)’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입신(李立身)이 국가를 위한 정성으로 자부하며 생사(生死)를 돌아보지 않고 분주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남의 지휘(指揮)를 받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그 당시에 허적과 허견과 이남(李?)의 대단한 기세(氣勢)는 하늘에까지 치솟아 생살 화복(生殺禍福)이 그 손아귀에 있었지만 선신(先臣)은 은택(恩澤)으로 인한 봉작(封爵)으로서 산지(散地)에 국처(局處)하시어 사람을 움직일 만한 권력이 없었으니, 어떻게 사람으로 하여금 생사(生死)를 잊어버리고 지휘를 받도록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일 허견과 이남(李?) 등이 흉역(凶逆)의 모의가 없었다면 이입신이 비록 공과 상을 희망하려 했다 하더라도 어찌 기찰(譏察)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 김덕원이라는 자는 어찌하여 허견과 이남(李?)의 흉역으로써 죄를 삼지 않고, 도리어 허견과 이남을 기찰한 사람의 죄과만을 따지며 이내 또 선신(先臣)을 억압 견제하여 그들을 지시(指示)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들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가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궁중의 병졸을 잠복시켰다는 말은 바로 정원로가 체부(體府)를 다시 설치하는 장본(張本)으로 삼고자 하여 스스로 지어낸 것이니, 선신(先臣)하고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이 말은 아마 여러 신하들의 공사(供辭)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을 것이니 선신(先臣)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명백할 것입니다.”하고,



끝부분에 가서는 또 민암이 지은 반교문(頒敎文) 가운데 들어 있는 ‘선왕(先王)이 문례(問禮)하는 날을 당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하늘을 속이었습니다.’ 하는 문구를 변명하여 무릇 수백 마디에 달하였다.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지난날 간흉(奸兇)들이 선경(先卿)을 훼상(毁傷)한 것은 그 용의(用意)와 설계(設計)가 지극히 음밀(陰密)하였으며, 결코 일시적인 의논의 참독(慘毒)일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나의 이 말은 실로 천고(千古)의 단안(斷案)이 될 것이니, 어찌 단지 선경만 그 받은 무함을 깨끗이 씻을 뿐이겠는가?”
하였다.【원전】 39 집 314 면



6월 8일(김진규를 헌납, 이여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는 헌납으로~【원전】 39 집 330 면

8월 2일(엄집·김성적·김진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이인엽(李寅燁)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원전】 39 집 342 면



8월 26일(김진규·양성규·송정규·이삼석·김홍정·심극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헌납으로~【원전】 39 집 346 면



11월 7일(윤덕준·김진규·민진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겸사서(兼司書)로~【원전】 39 집 358 면



숙종 21년(1695)4월 12일(김진규를 사인으로, 이태룡을 장령으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사인(舍人)으로~【원전】 39 집 373 면

4월 19일(김진규를 사간으로, 조태채를 부수찬으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사간으로~【원전】 39 집 375 면

6월 8일(이돈·김진규·조태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숙의 최씨를 귀인으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부응교로【원전】 39 집 381 면

숙종 22년(1696)10월 13일(이유·김진규·이건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보덕(輔德)으로~【원전】 39 집 435 면

숙종 24년(1698)8월 27일(민진후·정호·김진규·이기홍·서종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부교리로~【원전】 39 집 501 면

숙종 25년 기묘(1699)1월 8일(이건명을 사간, 김진규를 승지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승지(承旨)로 삼았다.【원전】 39 집 522 면

3월 28일(김진규가 상소를 올려 이봉서 등이 송시열을 비난한 것에 대해 변론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진규(金鎭圭)가 상소를 올려 이봉서(李鳳瑞) 등이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한 말에 대해 변론하고, 인하여 윤증이 배사(背師)한 잘못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아비를 비방하여 배척한 것이 무슨 깊은 원한이기에 젊어서부터 복종하며 섬기고 참아 오면서 묵묵히 시변(時變)을 헤아리다가 비로소 비방을 일삼았으니, 이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높이는 두 가지에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가볍게 여겨서라면, 군신(君臣)의 대륜(大倫)도 이로 인하여 흐려지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이봉서를 엄히 배척하지 않으시니, 처음과 달라지신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이봉서 등의 상소 내용이 과격했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기필코 죄를 준 뒤에야 마음이 통쾌하겠는가?”하였다.【원전】 39 집 526 면

숙종 27년(1701)1월 18일(윤세기를 승지로, 김진규를 대사간으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원전】 39 집 587 면

7월 7일(최규서·최창대·김진규·홍중하·서종헌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奎)를 대사성(大司成)으로,【원전】 39 집 602 면

숙종 28년(1702)2월 2일(김진규·이만견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奎)를 홍문관 제학(弘文官提學)으로~【원전】 39 집 673 면

4월 17일(참찬관 김진규가 동몽 교관을 뽑아 인재를 기르자는 뜻을 진달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참찬관 김진규(金鎭圭)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특별히 뽑아 인재를 기르자는 뜻을 상세히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가 참으로 옳다. 뽑아서 임명하도록 신칙(申飭)하겠다.”
하였다.【원전】 39 집 679 면

5월 21일(참찬관 김진규가 춘추 대의를 통절히 진달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김진규(金鎭圭)가 글의 뜻을 인하여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통절(痛切)히 진달하고, 효종(孝宗)이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경영하려던 일을 모두 들어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힘쓰라고 아뢰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원전】 39 집 682 면

7월 23일(김진규·김우항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원전】 39 집 692 면

9월 3일(김진규를 동경연관, 순안 현령 김주신을 돈녕 도정, 이유를 가례 때의 정사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동경연관(同經筵官)으로 삼고~【원전】 39 집 698 면

11월 28일(부제학 김진규 등이 홍문록을 작성, 이의현 등 7인을 뽑았다)
부제학(副提學) 김진규(金鎭圭)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하여 이의현(李宜顯)·이해조(李海朝)·조태일(趙泰一)·박필명(朴弼明)·이집(李?)·김흥경(金興慶)·이만견(李晩堅) 등 일곱 사람을 뽑았다.
【원전】 39 집 702 면

[주]홍문록(弘文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選擧)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弘文館員)이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고 함. 관록(館錄). 본관록(本館錄).

12월 13일(김진규를 겸예문관 제학으로, 여필용을 승지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겸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으로~【원전】 39 집 703 면

숙종 29년(1703)5월 6일(부호군 김진규가 상소하여, 《경서변의》를 축조하여 변파하였다)
이보다 먼저 승지(承旨) 김만채(金萬埰)·판서(判書) 김진귀(金鎭龜) 등이, 이탄(李坦)의 상소에 그 선조(先祖)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무함 인증(引證)한 까닭으로써 사직하는 상소 끝에 밝게 드러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부호군(副護軍) 김진규(金鎭圭)가 또 상소하여 이탄과 이익명(李翼明)이 인용한 《경서변의(經書辨疑)》를 축조(逐條)하여 변파(辨破)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신의 조부의 도학(道學)은 진실로 이이(李珥)의 적통(嫡統)을 이었는데, 그 근본은 주자(朱子)에게서 나왔습니다. 때문에 의심스러운 것을 분변한 글은 주자의 본뜻[本旨]를 밝힌 것이 아님이 없는데 그것을 새로운 말을 창작하여 주자를 배반하는 것에 비하였으니, 주색(朱色)과 자색(紫色), 모[苗]와 가라지와 차이뿐만이 아닙니다. 이탄 등은 사사로움을 비호하기에 급하여 망령되게 인증하여 혹은 그 글의 세(勢)를 갈라서 찢고, 혹은 그 뜻을 억지로 누르며, 혹은 자획(字劃)의 그릇된 곳을 분변한 것을 지적해 비평하기도 하고, 혹은 언두(諺讀)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을 주워 모으기도 하였습니다. 심한 경우는 신의 조부의 말이 아닌데 신의 조부에게서 나왔다고 일러 날조하고 꾸며 만들어서 천총(天聰)을 가리고 여러 사람의 눈을 막기를 노렸으니, 이는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큽니다. 원하건대, 밝은 교시를 내려 거듭 분변해 물리침을 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세당이 경(經)을 헐뜯고 성인을 업신여긴 죄가 명백히 드러나서 숨기기가 어려운데도 이탄 등이 문도(門徒)임을 핑계대고서 방자히 변명 비호하는 계책을 써서 서로 잇따라 상소하고 선정(先正)을 속여서 끌어대어 그 현혹(眩惑)하는 일을 행하려고 하였는데, 한 부(部)의 《변의(辨疑)》는 내가 이미 살펴보았다. 선정은 평소에 주자를 존신(尊信)하는 마음으로서 주자의 본지(本旨)를 더욱 밝히는 뜻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조금도 박세당의 하는 짓과 근사한 것이 있지 않는데, 이탄의 무리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그것이 누구를 속이는 것인가? 이제 상소의 변명을 살펴보니, 명백하고 통쾌하다고 말할 수 있다.”하였다.【원전】 40 집 25 면

5월 11일(김우항·김진규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대사성(大司成)으로【원전】 40 집 25 면

9월 16일(이집·이광좌·김진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진규(金鎭圭)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원전】 40 집 47 면

숙종 30년 갑신(1704)7월 24일(예문 제학 김진규를 반궁에 보내어 시사하게 하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김진규(金鎭圭)를 명초(命招)하여 반궁(泮宮)에서 시사(試士)하게 하였는데, 수위를 차지한 오명항(吳命恒)에게 급제를 내렸다.【원전】 40 집 98 면

숙종 31년(1705)1월 3일(호조 참판 김진규가 형 김진구의 유지를 따라 말을 내려준 은전을 사양하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김진규(金鎭圭)가 소를 올려 말을 내려 준 은전(恩典)을 사양하고, 또 그의 형 김진구(金鎭龜)의 유지(遺志)를 진달하니 답하기를,
“말을 내려 준 은전은 우연한 것이 아니니, 경(卿)은 사양하지 말고 받아가도록 하라. 그리고 아래 항목의 일은 돌이켜 생각하건대 가엾게 여길 만하므로, 특별히 값을 지급하라는 명을 정지시켜 그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 대보단(大報壇)을 건축할 때 석재(石材)가 부족하여 민간(民間)에서 사들여 사용한 적이 있었다. 김진구(金鎭龜)가 그의 아비에게 물려받은 집터의 석재(石材)를 단소(壇所)에 바치고 값을 받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오히려 억지로 주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진구는 이미 죽었고 김진규(金鎭圭)가 그 형의 평소의 뜻으로 사양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였다.
【원전】 40 집 130 면

숙종 35년(1709)9월 12일(좌의정 서종태가 정제두와 김진규를 서용하기를 청하다)
~또 아뢰기를,
“김진규(金鎭圭)는 사람됨이 고체(固滯)하여 의논을 할 적에 너무 지나친 주장을 하니, 진실로 병통(病痛)이기는 합니다마는 장점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임금의 과실은 일에 따라 솔직하게 아뢰었고, 문학(文學)에 뛰어난 점은 시험을 주관하는 데에 자못 공정하게 하여 청고(淸苦)한 한 대목이 또한 족히 숭상할 만합니다. 그의 병통은 놓아두고 그의 장점만 취하는 것이 진실로 사람을 쓰는 도리에 방해로울 것 없을 것입니다. 당초에 죄명(罪名)이 이미 뚜렷하게 드러나지도 않았고, 이제는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견복(牽復)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역시 영구히 버리려는 것은 아니다. 척리(戚里)인 신하로서 주장하는 의논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억제하려는 것이다.”
하였다~【원전】 40 집 333 면

숙종 36년(1710)6월 3일(김진규·최석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대사성(大司成)으로~【원전】 40 집 354 면

6월 19일(김진규·신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대제학(大提學)으로~【원전】 40 집 356 면

숙종 37년 신묘(1711)12월 27일(대제학 김진규를 명초하여 성균관에서 시사하다)
대제학(大提學) 김진규(金鎭圭)를 명초(命招)하여 감귤(柑橘)을 내려 반궁(泮宮)에서 시사(試士)하게 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조문명(趙文命)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원전】 40 집 425 면

숙종 38년(1712)7월 12일(김진규·이집·노세하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의 망단자(望單子)를 대신(大臣)에게 물어 종2품(從二品) 중에서 가망(加望)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진규(金鎭圭)와 윤지인(尹趾仁)을 가의(加擬)하자, 김진규를 임명하였다.
【원전】 40 집 448 면

8월 13일(정릉을 참배하는 제문을 전 대제학 김진규에 명하여 짓게 하다)
임금이 장차 정릉(貞陵)을 전알(展謁)할 것인데, 대제학(大提學)과 제학(提學)에게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전 대제학 김진규(金鎭圭)에게 명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원전】 40 집 458 면
[주]전알(展謁) : 궁궐(宮闕)·종묘(宗廟)·문묘(文廟)·능침(陵寢) 등을 참배하는 일.

9월 18일(원성유·김진규·민진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원전】 40 집 462 면

11월 10일(이희조·김진규·이교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원전】 40 집 470 면

12월 12일(김진규를 우참찬으로, 원성유를 공조 참의로 삼다)
김진규(金鎭圭)를 우참찬(右參贊)으로【원전】 40 집 474 면

숙종 39년(1713)1월 18일(김진규·이건명·송상기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좌참찬(左參贊)으로【원전】 40 집 483 면

4월 10일(김진규·이이명·김우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진규(金鎭圭)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원전】 40 집 493 면


숙종(1713)11월 28일(이택·김진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진규(金鎭圭)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원전】 40 집 526 면



숙종 40년(1714)9월 10일(강화 유수 김진규가 강화도의 형편과 이해(利害)에 대해 진달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진규(金鎭圭)가 본부(本府)의 형편과 이해(利害)를 조열(條列)하여 진달하여 별단(別單) 5폭(幅)을 올렸으니, 첫째는 ‘수비(守備)’, 둘째는 ‘군제(軍制)’, 세째는 ‘기계(器械)’, 네째는 ‘양향(糧餉)’, 다섯째는 ‘풍습(風習)’이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본부(本府)는 강과 바다가 에워싸 험고(險固)한 요새(要塞)를 이루었고, 한수(漢水)와 임진강(臨津江)이 모여들어 기보(畿輔)를 제어(制御)했으며, 5도(道)의 뱃길의 요충(要衝)에 자리잡아 서남방을 호령하니, 왕씨(王氏)가 이곳에 들어와 거의 40년 동안 사직(社稷)을 보존한 것이 어찌 그 연유가 없겠습니까? 정축년의 난(難)은 그 책임이 사람들의 계모(計謀)가 잘못된 데 있었고 지리(地利)가 믿지 못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수비(守備)에 그 편의(便宜)를 잃고 군제(軍制)에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으며, 군량은 점점 감소해 줄어들고 병기(兵器)는 쓸 만한 것이 적은데다, 토민(土民)의 풍습이 악한 데 이르러서는 위급할 때 힘을 얻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듯하므로, 신이 감히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삼가 장계(狀啓)의 별단(別單)의 규례를 본떠 별폭(別幅)에 써서 예람(睿覽)하시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니, 성상께서는 또한 깊이 유의(留意)하시고 그 이해(利害)를 모두 궁구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우선 어좌(御座) 곁에 두시고 조용히 열람하신 후에 천천히 묘당(廟堂)에 내리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원전】 40 집 539 면


영조 28년 임신(1752)5월 23일(고 판서 김진규의 처 정씨에게 정려를 명하다)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처 정씨(鄭氏)에게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정씨는 고 상신 정철(鄭澈)의 6대 손녀인데 집안에서의 기거하는 의범(懿範)이 일문의 긍식(矜式)이 되었었는데 홀로 된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을 다지고 미음도 마시지 않아 결국 따라 죽었다. 이에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그 실상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원전】 43 집 448 면

영조 34년 무인(1758)10월 14일(고 판서 김진규·고 판서 민진후의 인물에 대해 말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는 그 당시 고집(固執)이 있다는 명망이 있었고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였으니, 정말로 구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고 판서 민진후(閔鎭厚)의 나라를 위한 피끓는 정성도 또한 그와 서로 비슷하였다. 김진규의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는 매우 깨끗하다. 문청이라는 시호를 얻는 것은 희귀하다고 할 만하다.”하였다.【원전】 43 집 701 면

영조49년(1773)2월 24일
임금이 재물을 지급하여 고(故)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문집 발간을 돕게 하고 친히 서문을 지었다.
【원전】 44 집 448 면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화가(畵家)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그림은 품격이 매우 높았으며, 채녀(彩女 궁녀)와 수선화를 잘 그렸으나 재주껏 그리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두서(尹斗緖)가 그의 채녀도(彩女圖)를 보고서 선비의 그림 중에서 제일로 꼽았다.



[죽천집 ( 竹泉集 ) ]

본집은 原集 35권, 別集 1권, 附錄 3권 합 21책으로 되어 있다. 맨 앞에 1773년의 英祖 御製 序文이 있고, 目錄은 각 권별로 실려 있다.


原集 권1~5는 賦, 詩이다. 권1 賦는 巨濟 유배 시절 지은 〈幽海賦〉 등 3수이다. 권2부터 실린 380여 題의 詩는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관직에 나오기 이전, 기사환국으로 巨濟에 유배된 5년간, 갑술환국 이후 관직 생활 중 1706년 충청도 德山 유배 때와 1708년 放歸田里후 廣州와 龍山 우거 시절, 이후 내외 관직 생활 중에 지은 시와 絶筆詩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巨濟에서 지은 시가 두 권 반 가량으로 가장 많고 德山에서 지은 시도 다수 실려 있다. 관직 생활 중 지은 시는 대부분 挽詩나 送別詩인데, 몇 수 안 된다. 次韻詩는 주로 伯兄 金鎭龜, 李頤命, 鄭澔, 金昌協 등과 나눈 것이다. 저자의 自註가 많은데, 권5의 〈送從子普澤赴伊川〉(1708) 註에 ‘時余寓江上’이라 되어 있고, 〈李僉正弘廷挽詞〉(1715)에도 후에 기록한 自註가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저자가 1716년에 졸하기 전에 자신의 詩作을 정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권6은 記(4), 題(3), 雜著(5), 議(3)이다. 巨濟에서의 〈竹泉記〉, 德山에서의 〈望鷄龍山記〉, 師任堂 草蟲圖와 尤庵先生書의 題後, 巨濟 시절 四慝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뱀을 잡으면서 지은 〈擊蛇文〉과 全鰒 따는 잠수부의 인생론을 적은 〈沒人說〉 등이 있다. 議는 추각한 부분으로, 愼妃의 追復과 崔錫鼎이 낸 建祠行祭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과 顯宗에게 徽號를 追上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권7은 筵奏(14), 擬奏(3)이다. 筵奏는 대부분 淸, 倭와의 현안 문제와 관련한 것이고, 宋時烈의 孝宗 廟庭 追享을 반대한 奏辭도 들어 있다. 추각한 부분인 〈晝講時奏辭〉, 〈賓廳引見…〉, 〈請柳烈婦…〉, 〈請尹廷俊…〉, 〈癸巳七月…〉 가운데는 宋時烈의 뜻을 이어 內修外攘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 晝講 奏辭, 宮庄의 賣買를 개혁해야 함을 논한 賓廳 奏辭, 烈婦 柳氏의 旌閭, 李适의 亂 때 절의를 세운 尹廷俊의 贈諡를 청한 奏辭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擬奏는 漢 나라 때의 故事 3건을 놓고 지은 것이다.


권8~10은 策問(3), 頒敎文(3), 敎書(2), 書契(2), 玉冊文(1), 樂章(2), 箋(7), 序(6)이다. 권8 策問은 1699년과 1702년에 낸 것이다. 권9의 頒敎文은 1705년 禪位 備忘記의 환수 뒤 내린 것 등이고, 敎書는 황해 감사 尹世紀 등에게 내린 것이고, 書契는 日本國王과 對馬島主에게 보낸 것이다. 권10의 玉冊文은 숙종 즉위 40년 上尊號 때 中宮殿에 지어 올린 것이고, 樂章도 그때 지은 것이다. 箋은 1694년에 仁顯王后 復位 때와 保社勳의 복구 때 올린 것 등이다. 序는 淮陽 府使 시절 지은 「淮陽誌」, 「丁丑救荒錄」 등의 서문, 「江都誌」, 「梧灘集」(沈攸) 서문 등이다.


권11~12는 祭文(60)이다. 鄭澈, 沈攸, 李東溟, 李翊, 昭顯墓, 金載顯, 金壽增 등의 치제문, 北郊, 先農壇의 기우제문, 宗廟, 社稷, 昌陵, 明陵, 崇陵, 貞陵, 康陵 등의 친제문, 宋時烈의 淸州書院, 金壽恒의 珍島書院의 제문, 亡室 李氏, 伯氏 金鎭龜, 숙모 李夫人, 숙부 金萬重, 祖考 등 친족에 대한 제문 등이다.
권13은 書(13)이다. 아들 金星澤의 婚書를 비롯하여, 遯巖書院에 尤庵은 배향하되 美村 尹宣擧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하여 連山 유생에게 보낸 편지가 있고, 徐宗泰, 從叔 金萬增, 再從姪 金天澤, 再從弟 金鎭成 등에게 보낸 편지가 한 편씩이고, 李頤命에게 보낸 편지가 4편이다. 대부분 안부를 묻고 勸勉, 策勵하는 내용이다.


권14~30은 疏(174), 箚(3), 啓(17)이다. 각기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疏箚는 본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686년의 지평 사직소부터 1716년의 遺疏까지 실려 있는데, 대부분 사직소이다. 또 1697년 淮陽의 민폐를 진달한 상소, 1699년 尤庵을 배척한 李鳳瑞 등을 疏斥한 상소, 戚里로서 驕橫한다는 朴泰昌, 李肇 등의 소척을 받고 지은 상소, 1702년 成均館 講製 규례의 복구를 청한 상소, 謁聖試 考官 때의 합격자가 모두 考官의 親屬이라는 崔世鎰 등의 소척을 받고 지은 상소, 1703년 李坦 등이 고조부 金長生의 「經書辨疑」를 誣引한 것을 변석한 상소, 李景奭 碑文의 일로 지은 상소로 인해 儒生이 空館하고 李海朝 등이 소척함에 따라 올린 상소, 1705년 稱慶을 반대한 일로 申浯의 소척을 받고 지은 상소, 1711년 鳳城 査官이 白頭山까지 살펴보겠다고 하는 것을 막도록 청한 상소, 1712년 科獄 按問의 일을 사양하여 올린 상소, 이 일과 관련하여 李世德 등의 소척을 받고 올린 상소, 1713년 즉위 40년 賀班에 不參한 뒤 自列한 상소, 李眞望이 李景奭의 일로 공척하자 변론한 상소, 1714년 江華 留守로서 民弊를 진달한 상소, 1715년 科獄이 다시 일어나자 변론하여 올린 상소 등이 실려 있어 저자의 정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권19의 〈牌招後引嫌辭職疏〉, 권27의 〈辨趙挺豪構誣疏〉, 〈陳情乞遞摠管疏〉, 〈被李蓍亨李眞望詬辱乞遞疏〉, 권28의 〈代再從弟鎭望辨誣疏〉가 추각된 상소이다.


箚는 1702년 敬寧殿(仁顯王后) 練祭를 친행하도록 청한 차자 등이고, 啓는 1698년 承暉殿의 화재 후 진계한 계사, 1702년 倭館의 수리 비용이 남용된 일로 진달한 계사, 1710년 海寇 防守의 계책을 진달한 계사 등이다.


권31은 家狀(1)이다. 부친 金萬基에 대한 것으로, 후에 추각된 부분이다.


권32는 墓表(16), 墓碣銘(1)이다. 烈婦 盧分陽과 池完禮, 외조부 韓有良, 막내동생 金鎭符, 鄭雲龍, 李必天, 외조모 李氏, 金壽民 등의 묘표는 초간본 권31과 32권에 실렸던 것이고, 朴命龍, 백형 金鎭龜, 叔祖 金益勳, 李世華, 李光稷, 尹集 등의 묘표와 李杭의 묘갈명이 추각되었다.


권33~34는 墓誌銘(13)이다. 洪相元, 외삼촌 韓斗愈, 李慶涵, 弟婦 張氏, 亡室 李氏, 長女, 金時傑, 張世明, 亡弟 金鎭瑞 등에 대한 것이다.
권35는 行狀(3), 碑銘(1)이다. 외조모 德水李氏, 조모 海平尹氏, 숙부 金萬重에 대한 행장과 趙憲의 淸州 戰場紀蹟碑銘이다. 숙부 행장은 추각된 것이다.


맨 뒤에 閔鎭遠이 1729년에 쓴 跋文이 있다.
別集은 傳(1), 序(2), 祭文(2), 疏(11), 啓(5), 諡狀(1), 碑(1), 墓誌銘(2)이다. 金得男傳, 李頤命 使燕 送序, 「滄洲遺稿」(金益熙) 後敍, 大報壇 親祭文 등이 있다. 疏는 1695년 南九萬이 己巳年의 죄인을 疏釋하도록 청한 筵說에 반대하여 올린 상소, 1704년 大報壇 工役과 관련하여 올린 상소 등이다. 啓는 1703년 즉위 30년 稱慶 陳賀를 반대하여 올린 계사, 大報壇 역사 감독의 草記와 節目, 1705년 禪位의 명을 환수하도록 청한 계사 등이다. 그리고 尹棨의 시장, 柳星彩의 신도비명, 부친과 金盛迪의 묘지명이 있다.
附錄은 권1에 李頤命이 지은 行狀, 권2에 鄭澔가 1720년에 짓고 金陽澤이 1754년에 追錄한 墓誌銘, 李宜顯이 지은 墓表, 권3에 鄭澔, 金春澤 등이 지은 祭文, 肅宗의 賜祭文, 金昌集, 李健命, 李縡 등이 지은 挽詩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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