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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왕조실록(諱 陽澤)
이름: 孤巖/準一


등록일: 2015-12-05 07:23
조회수: 790 / 추천수: 57


조선왕조실록(諱 陽澤)

[영돈녕부사 김양택의 졸기] 정조 1년 정유(1777, 건륭 42)  8월 22일(을묘)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양택(金陽澤)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정의 늙은 신하가 이제는 영원히 갔으니 부의하는 절차를 전례에 비추어 거행하고 3년 동안은 녹봉(菉俸)을 주라.”하였다. 김양택은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이다~
뒤에 그의 아들 김하재(金夏材)가 복주(伏誅)하게 되고~【원전】 44 집 692 면



[김양택(金陽澤) 인물정보]
* 1712(숙종 38)∼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사서(士舒), 호는 건암(健庵).
* 김장생(金長生)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이었던 만기(萬基)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진규(鎭圭)이다.
* 1741년(영조 17)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헌납·부제학을 거쳐
   원손사부(元孫師傅)·대사성·우빈객(右賓客)·대제학을 역임하였다.
* 1767년에 우의정이 된 뒤, 1776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 그러나 아들 하재(夏材)가 역신(逆臣)으로 몰려 벼슬을 추탈당했다가 뒤에 다시 복관되어 영돈녕부사
  (領敦寧府事)가 되었다.
*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가 대제학을 역임,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가족사항
   부(父) 김진규(金鎭圭) 조부(祖父) 김만기(金萬基) 증조부(曾祖父) 김익겸(金益兼)
   외조부(外祖父) 정소하(鄭昭河) 처부(妻父) 홍우집(洪禹集)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영조 19년(1743)10월 24일(계유) 한림 권점을 마치고 김양택 등 4인을 선발하다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마치고 김양택(金陽澤) 등 4인을 선발하였다【원전】 43 집 117 면

영조 25년(1749)6월 19일(김양택·이이장을 부교리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이이장(李彛章)을 부교리로 삼았다.【원전】 43 집 344 면

8월 24일(이기진·김광세·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교리로【원전】 43 집 350 면

영조 26년(1750)1월 11일(조재호·윤급·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부수찬으로【원전】 43 집 360 면

6월 12일(이극록·이명희·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헌납으로【원전】 43 집 370 면

영조 28년(1752)11월 5일(영변 부사 김양택이 고을의 폐단에 대해 상서하다)
영변 부사(寧邊府使) 김양택(金陽澤)이 상서하여 고을의 폐단에 대해 말하였는데, 첫째는 화전(火田)에 세금을 부과하는 폐단이요, 둘째는 군액(軍額)을 채우기 어려운 폐단이며, 셋째는 고을의 촌락이 점차로 비어가는 폐단이었다. 왕세자가 답하기를,“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원전】 43 집 467 면

영조 29년(1753)2월 21일(서명빈·김양택·김이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대사간으로【원전】 43 집 480 면

8월 7일(김양택·권혁·조명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원전】 43 집 494 면

10월 27일(권해·이우·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승문 부제조로【원전】 43 집 501 면

영조 31년(1755)6월 18일(황해 감사 김양택이 역적들을 백령도·초도에 이배치 말도록 상서하다)
황해 감사 김양택(金陽澤)이 상서하기를,
“예로부터 흉추(凶醜)를 절도(絶島)로 편배(編配)한 것은 대개 나라 안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처럼 감률(減律)하여 노예를 삼은 역얼(逆孼)들은 으레 모두 거친 섬으로 보내 엄히 수금(囚禁)했던 것입니다. 다만 본도의 백령도(白翎島)와 초도(椒島) 등지는 다른 도와 다름이 있어서 빙둘러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가 바라보여 한 번의 항해로 통할 수가 있으며, 매년 봄·여름 고기를 잡을 때면 황당선(荒唐船)이 출몰하지 않은 날이 없어서 섬 사람들이 항상 보아 괴이하게 여겨 놀라지 않아 습속처럼 서로 익숙해 물정(物情)이 생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도망한 도적이나 주인을 배반한 노예가 모여 드는 숲이 되어 복용(服用)과 언모(言貌)가 교화(敎化) 밖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뭇 역얼을 성교(聲敎)를 드물게 입은 땅에 내쳐서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져 한 촌락(村落)을 이루었습니다. 저들 나라를 원망하고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이미 세상에 끼이지 못할 것을 알고서 효경(梟?)같은 성품과 살무사 같은 독(毒)을 몰래 품고 있으니 어찌 뜻밖의 근심이 없을 줄을 알겠습니까? 더군다나 이 두 섬에 백성을 모아서 진(鎭)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황당선을 막아 내쫓을 터전을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농기구와 창자루를 잡고 오랫동안 추격하여 쫓는 역을 하느라 생산하는 일을 할 겨를이 없어 자신의 호구(糊口)도 오히려 곤궁함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제 수십명의 역적 종자를 이들에게 주어 접대하고 지키게 한다면 그 형세가 반드시 아침 저녁 사이게 지탱하지 못하고 서로 잇달아서 흩어지게 될 터이니, 이는 해방(海防)을 중히 여기고 섬 백성을 돌보는 도리에 있어서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하여 유사(有司)에게 하령하여 금년 두 섬에 편배(編配)한 자를 한결같이 다른 도의 절도(絶島)로 이배(移配)하고, 이후에는 마땅히 편배해야 할 무리를 다시는 초도(椒島)와 백령도(白翎島) 두 도에 보내지 말아서 변방의 근심을 끊고 민폐를 없애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하였다.【원전】 43 집 587 면
[주]효경(梟?)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破?)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져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

12월 2일(김양택·윤학동·오연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부제학으로~【원전】 43 집 602 면



영조 32년(1756)10월 26일(재실에 나가 충청 감사 김양택·황해 감사 심발을 소견하다)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충청 감사 김양택(金陽澤)과 황해 감사 심발(沈?)을 소견하고 격려·신칙하여 보냈다.【원전】 43 집 635 면

영조 33년(1757)7월 18일(김양택·유언국·김광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대사헌으로【원전】 43 집 657 면


영조 34년 무인(1758)7월 5일(남유용·김양택을 원손 사부로 삼다)
남유용(南有容)과 김양택(金陽澤)을 원손(元孫)의 사부(師傅)로 삼았다.【원전】 43 집 692 면

8월 10일(김양택을 대사성, 채제공을 도승지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을 대사성으로~【원전】 43 집 695 면



11월 13일(문형의 권점을 행하게 하여 김양택을 대제학, 남유용을 울산 부사로 삼다)
임금이 전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에게 명하여 문형(文衡)의 권점(圈點)을 행하게 하였는데, 남유용이 여러 번 소패(召牌)를 어기니, 임금이 연달아 엄한 하교를 내리자, 남유용이 어명을 받들고 권점하였다. 이리하여 남유용은 6점(點)이 되고, 윤봉조(尹鳳朝)·김양택(金陽澤)·윤급(尹汲)은 4점이 되고, 오수채(吳遂采)·이성중(李成中)은 3점이 되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권점을 비록 거행한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명령을 내리면 밤이 깊더라도 이를 거행해야 한다. 사체(事體)의 명분과 의리가 모두 한심한 형편이니, 남유용을 내쳐서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보임(補任)하고, 김양택을 대제학으로 삼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명하여 권점록(圈點錄)을 가져다가 이존중의 이름 그 아래 부분을 지우고 ‘비록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의 글이 있다고 하더라도[雖有韓柳之文] 삼십 년 고심(苦心)을 마땅히 지켜야 한다.[?載苦心宜守].’라는 열 두 글자를그 아래에 쓰게 하였다.【원전】 43 집 703 면

영조 35년(1759)2월 19일(세손의 권강을 위해 유선에 김양택·서지수를 임명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상당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세손(世孫)을 책봉(冊封)한 뒤에는 권강(勸講)이 가장 급하니, 좌우 유선(左右諭善)과 좌우 권독(左右勸讀)을 가설(加設)해야겠다. 유선(諭善)은 대제학 김양택(金陽澤)과 부제학 서지수(徐志修)로 삼고, 권독에는 전 집의 김원행(金元行)과 전 장령 송명흠(宋明欽)으로 삼는다. 상견례(相見禮)는 없게 하고 비록 책봉하기 전이라도 임무를 보살피게 하라.”하였다.~【원전】 44 집 4 면

3월 10일(공묵합에 나가 대제학 김양택에게 입격한 자에게 상을 주도록 명하다)
임금이 공묵합에 나아가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응제 시권(應製試券)을 상고하여 입격(入格)한 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상(賞)을 주라고 명하였다.【원전】 44 집 5 면

영조 36년(1760)3월 12일(천망을 거치지 않고 특명 제수된 대제학 김양택의 상서)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윽이 예문관의 고사를 살펴보건대, 문형(文衡)의 관직이란 일찍이 한번 역임한 자를 더러 다시 제수하더라도 반드시 추천과 권점의 과정을 다시금 거친 뒤에야 비로소 하비(下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성법(成法)으로서 아주 엄격하여 3백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 아직 고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받은 은제(恩除)가 아무리 역임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천망(薦望)을 거치지 않고 곧장 특명으로 제수하신다면, 엄격한 격례(格例)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원전】 44 집 32 면

9월 10일(대제학 김양택에게 태학에 나가 선비를 시험케 하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에 나아가서 선비를 시험하게 하였다.
【원전】 44 집 45 면

영조 37년(1761)2월 19일(좌유선에 서지수를, 우유선에 김양택을 단부하다)
좌유선(左諭善)에 서지수(徐志修)를, 우유선(右諭善)에 김양택(金陽澤)을 단부(單付)하였다.
【원전】 44 집 58 면



8월 4일(홍계희·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겸우유선(兼右諭善)으로【원전】 44 집 74 면

8월 11일(좌빈객 김양택이 상서하여 사면하다)
좌빈객(左賓客) 김양택(金陽澤)은 우빈객(右賓客) 이익보(李益輔)와 인척(姻戚)이 된다고 상서(上書)하여 사면(辭免)하였으나, 왕세자(王世子)가 허락하지 않았다.【원전】 44 집 75 면

9월 4일(김양택을 이조 참판으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원전】 44 집 77 면

10월 17일(이규채·김양택·김상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발탁 제수하여 공조 판서로 삼았으며【원전】 44 집 82 면

12월 22일(김양택을 병조 판서로, 이섭원을 대사간으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을 병조 판서로~【원전】 44 집 89 면

영조 38년(1762)5월 3일(병조 판서 김양택이 노원·청파의 마위전을 논으로 만들 것을 앙진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양택(金陽澤)이 노원(蘆原)·청파(靑坡)의 마위전(馬位田)에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 것을 앙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 판서가 진달한 바가 훌륭하니, 바로 그 아비의 아들이라 할 만하다. 문한(文翰)에 능숙한 사람은 사무에 소활(疎闊)하기가 쉬운데, 이처럼 직무를 수행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원전】 44 집 97 면

6월 9일(이방엽·황인검·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이조 판서로【원전】 44 집 103 면

10월 18일(주강에서 《대학》을 강하다. 대제학 김양택에게 과차를 명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과차(科次)를 명하고, 제술(製述)에 응시하여 입격(入格)한 사람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원전】 44 집 116 면

영조 39년(1763)6월 12일(이최중·이규채·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예문 제학으로【원전】 44 집 138 면

6월 19일(홍자·남태기·김양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형조 판서로【원전】 44 집 138 면

7월 10일(정하언·한종제·김양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판의금으로 삼았다.【원전】 44 집 141 면

7월 12일(김양택·이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이조 판서 겸 수어사로~【원전】 44 집 141 면


10월 30일(김양택을 판윤으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을 판윤으로 삼았다.【원전】 44 집 150 면

영조 40년(1764)2월 27일(중신 김양택을 보내 강도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유택하 등 4인을 뽑다)
중신 김양택(金陽澤)을 보내어 강도(江都)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유택하(柳宅夏) 등 4인을 뽑아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원전】 44 집 160 면

영조 41년(1765)10월 29일(민홍렬과 김양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양택(金陽澤)을 좌빈객으로 삼았다.【원전】 44 집 209 면



영조 42년(1766)4월 26일(내국 제조 심수의 체차를 허락하고 김양택을 대신하게 하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심수(沈?)의 체차(遞差)를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을 이에 대신하게 하였다.
【원전】 44 집 219 면

영조 42년(1766)10월 25일(행 사직 김양택을 우의정으로 제배하다)
임금이 익릉(翼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김양택(金陽澤)을 특별히 우의정으로 제배(除拜)하고 하교하기를,
“옛날을 추억하건대 광성 국구(光城國舅)의 뒤에는 오직 경 한 사람이다. 아! 옛 해에 경의 아버지와 더불어 주원(廚院)에서 같이 임무(任務)를 보살폈고, 도총부(都摠府)에 같이 입직(入直)하였으며, 도사(圖寫)에 같이 참여하였는데, 50년 전의 일을 추억하니 황연(?然)히 어제와 같다. 오늘날에 경을 배상(拜相)할 것이라 생각하였겠는가? 진실로 이는 만만 뜻밖이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경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오늘날이겠는가? 승선(承宣)에게 명하여 소자(小子)가 옛 해를 추억하고 선경(先卿)을 생각하는 뜻을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아! 지금 경을 배상한 것이 어찌 나의 뜻이겠는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니, 한결같은 마음을 공정하게 가져 우리 나라를 보좌하라.”하였다.【원전】 44 집 232 면
[주1]광성 국구(光城國舅) : 김만기(金萬基).
[주2]주원(廚院) : 사옹원(司饔院).

6월 3일(도제조 김양택에게 응제의 성적을 매기게 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에게 응제(應製)의 성적 순위를 매기도록 명하고,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원전】 44 집 254 면

6월 15일(김양택의 청으로 수라를 평상시처럼 들일 것을 명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수라를 평상시처럼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우러러 청했기 때문이었다.【원전】 44 집 255 면

윤 7월 26일(내국 제조 한익모를 사직케 하고 김양택을 대임시키다)
내국 도제조 한익모의 사직을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원전】 44 집 261 면

영조 44년(1768)6월 9일(도제조 김상철을 김양택으로 대임하게 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상철(金尙喆)의 청을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으로 대임시켰다.
【원전】 44 집 288 면

8월 2일(예조가 사릉의 사초에 관한 일을 아뢰니 김양택에게 봉심하게 하다)
예조(禮曹)에서 사릉(思陵)의 능 위에 사초(莎草)가 말랐음을 아뢰니, 내국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에게 명하여 봉심(奉審)한 뒤에 개수(改修)하게 하였다.【원전】 44 집 296 면
[주]사릉(思陵) :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능.

11월 8일(김양택과 김상철을 정승에 임명하다)
하교하기를,“비록 밤이 깊었을지라도 정승을 갖춘 연후에 차대(次對)를 하는 것이 마땅하니, 판부사(判府事) 김양택(金陽澤)과 김상철(金尙喆)을 좌의정·우의정으로 임명하라.”하니, 김양택과 김상철이 곧 숙명(肅命)하였다.【원전】 44 집 307 면

11월 21일(도제조 김양택이 경연을 《사기》로 할 것을 아뢰다)
~도제조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경서(經書)》는 성상께서 누워서 들으시기를 어려워 하시기 때문에 《사기(史記)》로 하기를 청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명자(名字)를 얻으려고 하는데, 팔십을 바라보는 그 임금이 어찌 능히 견디겠는가? 나를 거둥이 잦다고 하니, 내가 어찌 활 쏘고 사냥하며 말을 달리겠는가? 어제 기침 소리는 누가 한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하였다. 이어서 《소학(小學)》의 고윤장(高允章)을 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에 이와 같은 신하가 있겠는가?”하였다.【원전】 44 집 308 면

11월 23일(좌의정 김양택이 전라 감사의 장계에 따라 진휼에 관한 일로 아뢰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전라 감사 김상익(金相翊)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사비진여첩가(私備賑餘帖價) 등 곡식 3만 석을 나누어 그것으로 진휼(賑恤)하는 자본에 분배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원전】 44 집 309 면

영조 45년(1769)8월 13일(좌상 김양택 등이 상소한 유생들에 대한 처분이 지나쳤음을 아뢰니 꾸짖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상소한 유생의 일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오늘 감선(減膳)하고자 하였는데, 하지 못하였다.”하였다. 좌상 김양택(金陽澤)과 우상 김상철(金相喆)이 상소한 유생들에 대한 처분이 지나침을 말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며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원전】 44 집 330 면

영조 48년(1772)10월 28일(김양택·남유용 등이 현종·명성 왕비 등의 옥책을 지어 올리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옥책(玉冊)은 영중추부사 김양택(金陽澤)이 지어 올리고~
임금이 말하기를,“글을 모두 잘 지었다.”하였다.【원전】 44 집 439 면

영조 49년(1773)윤 3월 21일(김양택을 영돈녕으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을 서용(敍用)하여 다시 영돈녕(領敦寧)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원전】 44 집 451 면

영조 50년(1774)10월 26일(영돈녕부사 김양택을 입시하도록 명하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양택(金陽澤)을 입시하도록 명하니, 익릉(翼陵)의 외척이기 때문이었다.
【원전】 44 집 482 면

영조 51년(1775)6월 21일(영돈녕 김양택에게 유시를 전하여 내국에게 삼료를 더 보내도록 명하다)
임금이 영돈녕(領敦寧) 김양택(金陽澤)에게 유시(諭示)를 전하여 내국(內局)에게 삼료(參料)를 더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때 김양택이 병이 있어서 오랫동안 입시(入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전】 44 집 493 면

정조 즉위년(1776)3월 19일(복상하고 김양택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김상철을 좌상으로 삼다)
복상(卜相)하여 앞서의 복상 때에 홍봉한(洪鳳漢)·김상복(金相福)·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한익모(韓翼暮)·홍인한(洪麟漢)이었다. 판중추부사 김양택(金陽澤)을 제배(除拜)하여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고, 김상철(金尙喆)을 좌상(左相)으로 강등하여 삼았다.【원전】 44 집 563 면

3월 21일(김양택·채제공·김종정·이휘지·김한기를 각 도감 제조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을 총호사 겸 추숭 상시 봉릉 봉원 도감 도제조(摠護使兼追崇上諡封陵封園都監都提調)로 삼았다【원전】 44 집 563 면

5월 11일(김양택과 서명선을 불러 보고, 사폐하는 수령들을 인견하여 칙유하다)
영의정 김양택(金陽澤)과 이조 판서 서명선(徐明善)을 불러 보고, 이어 사폐(辭陛)하는 수령들을 인견하여 칙유하였다.【원전】 44 집 578 면



8월 7일(삼사의 합계를 따라 영의정 김양택을 삭직하다)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을 삭직하였으니,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를 따른 것이었다【원전】44 집 613 면

8월 8일(전 영의정 김양택에게 직첩을 주어 사용하라고 하교하다)
하교하기를,“나는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안다. 어제 대계(臺啓)는 역시 관사(官師)가 서로 규간(規諫)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전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에게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하라.”하였다.
【원전】 44 집 613 면

8월 8일(김양택을 영돈녕부사로, 홍국영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민종섭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다)
김양택(金陽澤)을 영돈녕부사로~【원전】 44 집 613 면

정조 3년(1779)12월 12일(임술) 은언군·연최적·이정소 등에게 증시하다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을 문간(文簡)으로~【원전】 45 집 142 면



정조 8년(1784)7월 29일(김양택의 관작 추탈을 건의하는 옥당의 차자와 비답)
여러 옥당(玉堂)들이 차자를 올려, 죄인을 징토(懲討)하려는 뜻을 아뢰고 김양택(金陽澤)의 관작(官爵)을 추탈하도록 청하니, 비답하기를,
“아! 이번의 흉적(凶賊)을 아직도 차마 말하는가? 나는 어려운 시기를 만나 춘저(春邸)에 있을때 부터 많은 무함을 당하였고, 임금 자리에 등극한 뒤에도 여러번 욕설을 들었는데, 박필몽(朴弼夢)·심유현(沈維賢)·신치운(申致雲)의 흉언이 오늘날 다시 나올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하고 생각만 해도 뼈가 저린다. 다만 나의 성효(誠孝)가 보잘것없음을 한탄할 뿐이니, 차마 선왕을 여의는 비통한 일을 당하고도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이런 말을 듣고서 이런 일을 보게 되었도다. 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천지(天地)에 백성이 생겨난 이래 처음 보는 변고이다.

더구나 광산(光山)의 김씨(金氏) 집안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명문[甲族]이라고 일컫는데, 사계(沙溪)는 큰 유학자이며,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은 원훈(元勳)이고 국구(國舅)이다. 어찌 이런 집안에서 이런 극악한 역적이 생기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만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의 상정(常情)인데, 만약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만고에 있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한 그지없는 부도(不道)한 흉언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승지에게 전해 줄 리가 있겠는가? 이번에 그는 스스로 죽음의 길에 뛰어들었으니, 또한 정말로 너무나도 상리(常理) 밖에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청대(請對)한 뒤에도 발포(發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반나절이나 지체하였으며, 이미 발포(發捕)를 허락한 뒤에도 또 즉시 국청(鞫廳)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고 저녁 때까지 끈 것은 그가 이미 제정신을 잃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법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하여 흉언이 두번 다시 입밖에 나와서 다시 내 귀속에 들어오는 것을 면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옥에 갇힌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전혀 동정(動靜)이 없었으므로 국청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정국(庭鞫)에서 공초한 내용은 더욱더 흉악하였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갑진년 운운한 것은, 가리키는 뜻이 음흉하여 은연중에 신치운(申致雲) 무리들과 어투가 같았으니, 이것은 비단 나에 대한 극악한 역적이 될 뿐만 아니라, 선대왕에게도 극악한 역적이 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처지로서 역적 김일경의 마음을 본받으려고 하였으니, 어찌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자가 할 짓이겠는가?

아! 내가 오늘 조정에서 거듭거듭 힘써 경계하는 것은, ‘백성을 진정시키고 사람의 목숨을 오로지 보호하라[鎭安全保].’는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어찌 속을 썩이고 피를 말리면서 징토(懲討)하는 형전(刑典)을 크게 행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한 명의 김하재가 있더라도 이미 천지 사이에 극심한 변고인데, 어찌 다시 두명의 김하재가 있겠는가? 그가 스스로 자복한 뒤에 곧 결안(結案)을 받았고, 나머지 심보를 같이하여 공모한 사람들에 대해서 애당초 따져 힐문(詰問)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번의 일은 세상 도리의 참변일 뿐만 아니라, 명문 집안이 이러할진대, 또한 어찌 조정의 큰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조정에서 광성 부원군에 대해서는 10대에 걸쳐 용서할 뜻이 있다. 모든 광성 부원군의 자손에 대해서는 응당 연좌(緣坐)시키는 형벌에 두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까운 집안[同堂]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마땅히 벼슬길을 막을 필요가 없다. 심지어 그의 아비에 대해서 말한다면, 바로 나의 사부(師傅)였고, 빈객(賓客)이었으며, 내가 등극한 뒤에는 수상(首相)이었다. 이번에 그 집안이 멸망하는데 대하여 측은한 생각이 든다. 자식이 역적으로 된 것이 이미 죽은 그의 아비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대신(臺臣)이 벼슬을 추탈하자고 논한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그대들은 또 어째서 다시 번거롭게 구는가? 이밖의 여러 조항들도 또한 대각(臺閣)의 비답에서 자세히 말하였다. 이번의 이 십행(十行)의 비답에서는 내가 어제 처결한 본의(本意)를 죄다 유시하였으니,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려고 한다.”
하였다.【원전】 45 집 458 면
[주] 이번의 일 : 아들 하재의 영희전(永禧殿)의 고유제(告由祭)의 헌관(獻官)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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