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 史 돋 보 기

제목: 조선왕조실록(諱 憙)
이름: 孤巖/準一


등록일: 2015-12-05 14:27
조회수: 792 / 추천수: 52


조선왕조실록(諱 憙)

  영중추부사 김희의 졸기 정조 24년 경신(1800, 가경 5)  1월 6일(기미)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죽었다. 김희의 자는 선지(善之)인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다. 영종(英宗) 계사년에 급제하였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뒤에 경술(經術)로 진용되었는데, 매양 물음을 받을 때마다 경전(經傳)의 장구(章句)와 제가(諸家)의 주설(註說)들을 마치 자기의 말을 외듯 하였다. 내각과 이조의 관직을 역임하고 계축년에 재상에 올랐다. 상이 이인(李?)을 소견할 적에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였으나 듣지 않자, 김희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끝내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소식(疏食)을 하였다. 벼슬이 경상(卿相)에 이르러서도 담박하고 검소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나, 처세에 능하여 강직한 풍도가 적었으므로 선비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이 옥당과 내각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알아줌을 받아 발탁이 된 것은 그의 경학(經學) 때문이었다. 나는 그 유상(儒相)을 대신으로 대우하였으나, 그 대신이 자처하는 것은 역시 한사와 같았을 뿐이었다. 중간에 한 번 고향을 내려간 이후 오랫동안 격조했었는데, 부음이 갑자기 이를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그를 위해 마음이 아파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학을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지금의 습속으로 이러한 대신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은졸(隱卒)의 특전은 의당 해당 도에서 거행할 것이요, 대신의 녹봉은 3년 동안 실어보내도록 하라.”
하였다.【원전】 47 집 229 면



김희(金憙) 인물정보

* 1729(영조 5)∼1800(정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선지(善之), 호는 근와(芹窩).
  충청도 연산출신. 장생(長生)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상경(相庚)이다.
* 1762년(영조 38)에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봉사가 되었으나, 1773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77년(정조 1)에 초계어사(抄啓御史)에 선발되었다.
* 그뒤 1779년 지평·규장각직각·이조좌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교리로 재직시에는, 경성(京城)사대부
  들 중에 공물과 경저인(京邸人)이 내놓은 물건을 몰래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엄금하게 하되 만약 재상가라 하더라도 용납하지 말고 장오리(贓汚吏)의 율(律)을 적용시킬 것을
  상소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 1780년에는 대사간·대사성 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대사헌·동지경연사·평시제조·이조
  참판·홍문관부제학·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 1790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 이어서 예조판서·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역임하였다.
* 이듬해에는 임경업(林慶業)의 실기(實記)를 찬집한 바 있고, 이어 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를 거쳐,
* 1793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 그러나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다툼에 인물을 천거한 것이 말썽이 되어 물러났다.
* 뒤에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친 뒤 영중추부사가 되고,
* 1795년과 1797년에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 경학에 능하여 경전장구(經傳章句)에 정조의 고문구실을 하였다. 인품이 청백하여 사관들은
  한사(寒士)와 같이 담소하다고 평하였다.
* 가족사항
  부(父) 김상경(金相庚) 조부(祖父) 김수택(金壽澤) 증조부(曾祖父) 김진망(金鎭望)
  외조부(外祖父) 이광택(李廣澤) 처부(妻父) 송능상(宋能相)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정조 2년(1778)10월 25일(지평 김희가 동향 대제때 영년전의 향 누락사건으로 담당자 처벌을 건의)
지평 김희(金熹)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향사(享祀)를 당할 때마다 반드시 예절(禮節)을 준행하여 성경(誠敬)을 극진히 하셨는데, 이는 진실로 뭇 신하들이 흠앙(欽仰)하는 바입니다. 지난번 종묘의 동향 대제 때 영녕전(永寧殿) 제11실에서는 유독 올릴 향(香)이 없어서 나천(裸薦)할 즈음에 급히 다른 데에서 옮겨 왔으므로 매우 구간(苟艱)하였으니, 이보다 더 심한 큰 실례가 없습니다. 그때의 전사(殿司)는 사리에 어두워 소홀히 한 죄가 진실로 컸는데, 헌관(獻官)이 된 대신은 오히려 이를 심상히 여긴 채 미봉책만 일삼고 진달하여 그의 죄를 논할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아! 전하께서 대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따라서 대신이 전하에게 보답해야 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일도 이렇게 하는데 다른 일이야 무슨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에 이르러서는 비록 초헌관과 조금 차이가 있지만, 또한 어떻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아헌관·종헌관에게 속히 견삭(譴削)시키는 형전을 시행하고 전사(殿司)는 아울러 나처(拿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하니, 비답하기를,
“동향 대제 때 영녕전 제11실에서 향이 누락되었던 일을 듣고는 매우 두려웠다.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던가? 그때 잔을 올린 대신은 매사에 반드시 충분히 살펴서 행하려 했을 것인데, 어찌하여 버려두고 아뢰지 않았단 말인가? 제사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지낸 것 같지 않다는 뜻을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 자못 의아스럽다. 아헌관·종헌관을 견삭시키는 일은 마땅히 뒤따라 처분을 내리겠다. 해당 전사는 그 이름을 물어서 나처(拿處)하게 하라.”
하였다.【원전】 45 집 68 면

정조 3년(1779)1월 9일(교리 김희, 수찬 남학문이 죄인 체포의 신중을 건의)
교리 김희(金憙), 수찬 남학문(南鶴聞)이 아뢰기를,
“어떤 조관(朝官)이 반촌(泮村)에 거접(居接)하고 있다가 야밤에 남에게 장살(?殺)을 당하였는데 수포(搜捕)하기를 지금까지 수개월 동안 하였으나 죄인을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포도청에 엄중히 신칙하여 기필코 체포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45 집 86 면

6월 29일(김희를 규장각 직각으로 삼다)
김희(金憙)를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삼았다.【원전】 45 집 110 면



정조 4년(1780)8월 17일(김이소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희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다)
~김희(金憙)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원전】 45 집 181 면

11월 10일(김희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다)
김희(金憙)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원전】 45 집 194 면

정조 5년(1781)2월 24일(김희를 강원도 관찰사로삼다)
김희(金憙)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원전】 45 집 214 면

정조 7년(1783)3월 13일(김희를 이조 참의로, 김우진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다)
김희(金憙)를 이조 참의로~【원전】 45 집 358 면



정조 8년(1784)6월 22일(정호인·홍낙명·오재순·정창순·송재경·김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희(金憙)를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원전】 45 집 450 면


정조 10년(1786)12월 15일(윤시동·김희·이성규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김희(金憙)를 사헌부 대사헌으로【원전】 45 집 616 면

12월 25일(서명선·이명식·이숭호·김희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이명식(李命植)·이숭호(李崇祜)·김희(金憙)를 제조로【원전】 45 집 621 면

12월 26일(김사목·홍검·김희·채홍리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원전】 45 집 621 면

12월 28일(김이주·이겸빈·정창성·정호인·김희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김희(金憙)를 동지경연사로【원전】 45 집 623 면

정조 11년(1787)4월 19일(대사성 김희가 유벌을 내리고 풀어주는 것이 규정을 무시한다고 상소하다)
대사성 김희(金熹)가 상소하기를,
“유벌(儒罰)을 내리고 풀어주는 것은 오직 선비들의 공론에 달려 있는데 어제 효유(曉諭)할 때에 모두 해벌(解罰)하게 하였으나 그 당부(當否)와 경중(輕重)에 대해서 묻지 않은 것은 비록 조정(調停)하여 두루 다스리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옛 규정이 무너진 것이 애석합니다.”
하니, 엄중히 하교하여 무겁게 추고(推考)하고 그 상소문은 돌려 주게 하였다.【원전】 45 집 648 면

정조 12년(1788)12월 28일(김희·엄사만·박우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희(金憙)를 홍문관 부제학으로~【원전】 46 집 23 면

정조 14년(1790)3월 25일(이조 참판 김희를 특보하여 광주 목사로 삼다)
이조 참판 김희(金憙)를 특보(特補)하여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았다【원전】 46 집 111 면

7월 7일(홍양호·김희·오재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희(金熹)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원전】 46 집 154 면

7월 11일(김희·오재순·조정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희(金憙)를 예조 판서로【원전】 46 집 156 면

9월 7일(이철모·오재순·김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희(金憙)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원전】 46 집 169 면

10월 6일(경기 관찰사 김희를 불러 접견하다)
경기 관찰사 김희(金憙)를 불러 만나보았다.【원전】 46 집 176 면

정조 16년(1792)6월 3일(함경 감사에 이문원을 대신하여 김희를 등용하다)
함경 감사 이문원(李文源)이 병으로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고 김희(金憙)로 대신하였다.【원전】 46 집 318 면

정조 17년(1793)6월 22일(홍낙성을 영의정에, 김희를 우의정으로 삼다)
정승을 가리었다【예전에 추천된 사람은 홍낙성·유언호·채제공·김종수·박종악이었고 새로 추천된 사람은 김희(金熹)였다.】홍낙성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김희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원전】46 집 399 면
6월 22일(우의정 김희에게 하유하다)
우의정 김희에게 하유하였다.
“재상은 아무쪼록 글 읽은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데 글은 경전(經傳)을 이르는 말이다. 그것의 쓰임새는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일이며, 그 맛은 다반(茶飯)과 양육(梁肉) 등 일상의 음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실상의 지경에 마음을 기울이면 군자가 되고 사화(詞華)에 맛을 들이면 문사(文士)가 된다. 그런데 근세의 사대부들은 어려서부터 그것을 익히지 않아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방종을 즐기고 명검(名檢)을 천하게 여겨 스스로 자신을 낮게 처신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받음으로써 크게 세도의 누가 되고 있다.
경은 경대부 가문 사람으로 일찍이 경전에 대해서 논하는 얘기들을 들었었고, 궁중을 드나들 때도 책을 끼고 다니어 많은 보탬을 얻었었다. 더욱이나 산간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친히 불을 지피어 그 구들이 검어지도록 공부를 했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바이니, 여기에서 나의 정승이 결정 된 것이다. 현재 영의정은 원로라서 자주 예절을 차리기가 어렵고, 좌의정도 직무를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지금이야말로 경을 기다리는 생각이 목마름에 비길 뿐이 아니니 인수 인계를 기다려서 바로 길을 나서도록 하라.”【원전】 46 집 399 면

8월 4일(우의정 김희를 소견하다)
우의정 김희(金憙)를 소견하였다. 전에 김희가 네 차례나 상소하여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여러 차례 돈유(敦諭)하였었다. 그렇다가 상이 태묘를 전알하려면 반열을 지휘할 사람이 없다 하여 숙사(肅謝)하도록 타일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희를 소견한 것이다. 김희가 아뢰기를,
“저번에 채제공(蔡濟恭)이 올린 상소 내용에 대해 신이 당시 번임(藩任)으로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으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지 않고 계신 것은 사실 답답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상소에서 함부로 지껄인 자구(字句)를 가지고 죄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원소(原疏) 전체를 싸잡아서 배척한다면 장차 의리를 어느 곳에다 둘 것인가. 현재 북면(北面)하고 나를 섬기는 사람들이 참으로 내 마음을 자신들 마음처럼 이해한다면 어찌 그 일을 가지고 거듭 나의 마음을 언짢게 하겠는가.”
하니, 김희가 아뢰기를,
“신이 외지에 있어서 자세히 듣지 못한 까닭으로 조금 전에 그런 말을 올렸던 것인데, 지금 성교(聖敎)를 받들고서야 비로소 환히 알게 되었습니다.”하였다.【원전】 46 집 403 면

정조 18년(1794)7월 23일(구언에 응답해 판중추부사 김희가 상소하다)
판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상차하기를,
“신은 외람되게 대신들의 뒤를 따라 미천한 나무꾼의 소견과 같은 글을 다섯 가지 조항으로 연명하여 올렸으나 그중에는 한 가지도 긴요한 말이 없었으므로 황공하고 부끄러워 큰 꾸지람을 기다렸습니다. 삼가 비답을 받드니 너그럽게 용납하고 용서하여 각각 다하지 못한 말을 다하게 하시니, 신이 다섯 가지 조항 중에서 다시 한 가지의 견해를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명분과 의리를 부추겨 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끝내 부추겨 세운 성과는 보지 못하였고, 전하께서 기강을 진작시키고 다듬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끝내 진작시키고 다듬은 성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염의를 장려하고 탐욕을 징계시키는 일은 곧 전하가 백성을 위해 고심한 것인데 역시 염의가 있어도 장려하지 못하며 탐욕스러워도 징계하지 못한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옥사를 잘 다스리고 형벌을 공정하게 하는 것은 곧 전하가 죄인을 신중히 다루고 가엾게 여기는 지극한 덕이었으나 어떻게 옥사는 모두 잘 다스려지고 형벌은 모두 공정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벼슬자리와 같은 것은 전하께서 어찌 일찍이 신중을 기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지나치게 벼슬을 준다는 탄식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전하의 성(誠)에 대한 공부가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장 눈앞의 불을 끄듯 급한 일을 수습하는 방도를 생각해보건대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금지령을 철회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역》의 태괘(泰卦)에는 ‘하늘과 땅이 교합하여 만물이 통한다.’고 하였고, 비괘(否卦)에는 ‘하늘과 땅이 교합하지 못하여 만물이 서로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금지령이 발표된 이래로 하늘과 땅이 교합이 됩니까, 교합되지 않습니까.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삼사의 신료들은 의견이 있어도 진달하지 못하여 위와 아래가 서로 막히고 바른 말을 올리는 길이 막혔습니다. 혹 전지에 응하여 글을 올리더라도 모두 말을 머뭇거리면서 얼버무리니 하늘과 땅이 비색하여 교합되지 않음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천지가 교합되지 않으면 만물이 통하지 않고 만물이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재변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의 총명이 만리를 밝힌다하더라도 임금을 편안히 하는 계책이 대궐에 전해지지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죽게 될 형편이라도 모두 살필 수가 없을 것이니, 다섯 가지 조항의 말은 평일에 쓰는 좋은 반찬이나 고기와 같고 금지령을 철회하는 일은 위급한 질병을 구제하는 약이나 침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가 이 다섯 가지의 조항뿐만 아니라 더욱 성실한 마음으로 수양하는 공부를 다하여 재변을 막는 실질적인 정사로 삼고 꼭 금지령을 철회하여 하늘과 땅이 교합하여 만물이 통하게 한 뒤에라야 천심을 감동시키고 백성들의 고통을 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말대로 했는데도 끝내 비가 오지 않는다면 신은 망령된 말을 한 죄로 견책을 받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다섯 가지 조목으로 역설한 것은 경의 정성스러운 마음속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 말이 모두 경전을 인용한 것이므로 내가 유념하고자 한다.”
하였다.【원전】 46 집 489 면

정조 19년(1795)7월 2일(김희를 동지 겸 사은 정사, 이형원을 부사, 조덕윤을 서장관으로 삼다)
김희(金憙)를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원전】 46 집 585 면

7월 7일(영중추부사 김희가 죽을 죄를 들어 상소하다)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달 19일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죄를 짓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사죄(死罪)에 해당되는 것만도 8, 9가지나 됩니다.


엄한 명에 쫓긴 나머지 나아가고 물러감을 뒤죽박죽으로 하였고 한밤중에 길거리를 서성이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옛날에 대신이 도에 입각하여 몸을 바치고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면서 일찍이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것이 사죄(死罪)의 하나입니다.



다음날 엄한 분부를 또 내리시어 마침내 성문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하시고 잇따라 대가(大駕)를 움직이시어 하룻밤을 묵는 거조를 취하셨으므로 신은 놀랍고 황급해지면서 그냥 죽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금(門禁)을 감히 범할 수 없었던 까닭에 한두 차례 차소(箚疏)만 올렸으니 이는 바로 책임이나 메꿔보려는 행태와 같습니다.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문금이 비로소 풀리면서 도성 안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셨으나 감히 나아가지 못한 채 물러가 강교(江郊)에 엎드려 있으면서 깊은 밤에 부주(附奏)하였고, 또 동이 튼 뒤에 미처 비지(批旨)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레 앞질러 시골로 향하면서 미천한 신념이나마 온전히 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소에 대한 비답과 전교 모두가 인신(人臣)으로서는 감히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정신이 혼미하여 변통시킬 줄을 알지 못한 나머지 흡사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거적을 깐 채 지방 옥사(獄舍)에서 명을 기다리다가 겨우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금방 태도를 바꿔 올라오는 등 거취가 사리에 어긋나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의혹케 하였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가볍게 처분을 내리셨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그 처분도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만, 신은 불충(不忠)하고 형편없는 인간이라서 티끌만큼도 보답하는 일이 없었을 뿐더러 정성이 천박해서 바로잡지도 못한 채 필경 계책을 세웠다는 것이 그저 자기 몸 하나 처신하는 의리에 불과하였고, 또 여전히 관직을 차지하고 있음으로써 거꾸로 영화(榮華)를 탐하고 염치를 잃어버리는 죄목에 빠져드는 결과를 빚고 말았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처음에 강변 교외에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신도 여러 대신들과 행동을 함께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 조정에 나아간 상황에서 신만 유독 지체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신이 이렇듯 허다한 사죄를 지고 있는만큼 오직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으나 몸 속의 혈성(血誠)이 달아올라 어떻게 걷잡을 수가 없으니 감히 한 마디 말씀을 올리고 죽을까 합니다.
신이 평소에 늘 말할 때면 으레 우리 임금은 성인이라고 하곤 하였는데, 성인께서도 이런 허물을 지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주공(周公)의 허물은 지나친 것 같으면서도 지나친 것이 아닌 반면 전하의 허물은 지나쳐서 중도(中道)를 잃는 것입니다. 일식(日食)과 월식(月食) 현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다가도 원래의 상태로 바뀌어지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법입니다. 진정 전하께서 해와 달이 변화되는 것을 제대로 본받으시어 성인의 허물을 속히 고치신다면 신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방금 여러 대신들에게 내리신 별유(別諭)를 삼가 보건대, 전일에 내리신 비답과 분부를 환수하시라는 청을 특별히 윤허하시어 따르셨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일단 이런 분부를 내리신 상태에서 또 어찌하여 다시 어느 때고 권도(權道) 아닌 것이 없었다고 분부하신단 말입니까. 대저 어느 때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사물이고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야말로 경(經)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반면에 권(權)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도 곤란한 법인데 더구나 두 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천고(千古) 이래로 성인들께서 반드시 대경(大經)을 지키시면서 권도를 행하기에 급급하지 않으셨던 이유인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오늘날 행하신 권도가 앞으로 다시 뒷날의 권도로 될 우려가 있을 듯한데, 잠시 정상으로 돌아오셨다가 곧바로 예전대로 하시고 일단 예전대로 하시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시는 등 정말로 어느 때이고 간에 권도 아닌 경우가 없는 식이 되고 만다면, 오늘 이후로 대관(大官)이 진퇴(進退)하고 거취(去就)하는 것도 바로 전하께서 수시로 권도를 쓰시는 방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성인의 경법(經法)을 굳게 지키시고 한 때 편리하다고 해서 권도를 쓰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홉 가지 조목이나 자신의 잘못을 늘어놓다니 자기를 깎아내리는 것이 너무도 지나치다. 경이 이렇게 된 것은 실로 내 탓이다. 내가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풍파가 이미 지나간만큼 비답과 분부도 결말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지금 와서 추후로 제기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리고 환수할 것을 윤허한 전교 가운데에서 ‘어느 때이고 권도 아닌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범범하게 말한 것일 뿐이니 꼭 사리로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럴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으로서 괜히 정력을 낭비하는 일이 될 듯하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겠으니 경은 양해하라. 신중히 생각하던 것을 옳은 쪽으로 바꾸어 다시 돌아오려 한다는 말을 들으니 지금 느끼는 기쁨과 기대가 목마른 사람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특별히 승지를 보내 이 비지(批旨)를 전하게 하는 동시에 여행 중의 기거를 묻도록 하였다. 나머지는 연석(筵席)에서 만나 모두 이야기할 것이다.”하였다.【원전】 46 집 587 면

정조 20년(1796)7월 23일(영부사 김희에게 어의를 보내 간병하게 하다)
영부사 김희(金憙)가 병들었는데, 어의를 보내어 간병하게 하였다.【원전】 46 집 664 면

정조 22년(1798)7월 19일(판중추부사 김희가 사신의 임무를 체차시켜 달라고 소를 올리다)
판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소장을 올려 사적인 의리를 진달하면서 사신의 임무를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마지 못해 따랐다.【원전】 47 집 95 면

정조 23년(1799)6월 21일(영중추부사 김희가 약원의 직임을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자 허락하다)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지방관을 통하여 상소를 올려, 겸대하고 있는 약원(藥院)의 직임을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비답하기를,
“삼복 더위가 이토록 심하지만 근래에는 더욱 건강하다. 겸대하고 있는 직임을 사직하는 일은 조정의 체모가 달려 있는 것이므로 매양 윤허하지 않을 수만은 없다. 비록 억지로라도 올라오게 하고 싶지만 이런 무더위에 어찌 강요할 수 있겠는가. 청한 대로 허락한다.”하였다.【원전】 47 집 193 면

정조 24년(1800) 3월 7일(김희에게 시호를 내리고 치제토록 전교하다)
전교하기를,
“김 영부사(金領府事) 장례일이 가까워오는데 이 대신이 비록 과목(科目)으로 길을 튼 사람이었지만 경전에도 많은 연구를 하여 깊이 있는 학문을 쌓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집에서는 효도했고 관직에 있으면서는 결백했다. 그러한 내용으로 시호를 내리도록 태상시(太常寺)에 물어야 할 것이나 장례 시기가 임박해서 오래 기다릴 수가 없으니, 시장(諡狀)이 홍문관(弘文館)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시호를 마련하여 장례날까지 대도록 하라. 그리고 시호 내리는 날 뒤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 영부사는 바로 정승 김희(金憙)이다.【원전】 47 집 250 면

3월 7일(김희·서명선에게 시호를 내리다)
영부사 김희는 시호를 효간(孝簡)으로 내리고~【원전】 47 집 25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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