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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왕조실록(諱 謙光)
이름: 孤巖/準一


등록일: 2015-12-06 08:14
조회수: 762 / 추천수: 50


조선왕조실록(諱 謙光)

  광성군 김겸광의 졸기 성종 21년 경술(1490, 홍치 3) 7월 20일(경오)

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전례(前例)와 같이하였다. 김겸광의 자(字)는 휘경(?卿)이요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경태(景泰) 계유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뽑혀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병조 좌랑(兵曹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쳤고, 천순(天順) 경진년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야인 정벌(野人征伐)에 종군하여 공이 있어서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뛰어 올랐고, 지병조사(知兵曹事)로 옮겼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우승지(右承旨)에 이르고 가선 대부(嘉善大夫)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올랐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다가 병술년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옮겼는데, 이때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의 자리가 비자 세조(世祖)가 특별히 불러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올려서 제수하였고, 곧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정해년에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가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어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옮기었고, 무자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기축년에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광성군(光城君)으로 봉(封)하여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에 옮겼다. 계묘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고 〈이듬해〉 갑진년에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하여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되고 정미년에 다시 광성군에 봉해졌는데,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2세였다. 김겸광은 천성(天性)이 순후(純厚)하고 일을 처리함이 주밀(周密)하였다. 시호(諡號)는 공안(恭安)인데, 일을 공경히 하고 위를 받드는 것이 공(恭)이고, 좋아하고 화(和)하여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 안(安)이다.
.【원전】 11 집 621 면



김겸광(金謙光) 인물정보
* 1419(세종 1)∼1490(성종 2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위경(?卿). 아버지는 증영의정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대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고, 그뒤 감찰·정언·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460년(세조 6) 장령에 승진되었다.
* 같은해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군기시정
  에 올랐으며, 이듬해 지병조사(知兵曹事)에 이어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 1465년 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궐원이 된 평안도절도사의 적임자로 천거를
  받아 승진, 임명되었다.
* 1467년 예조판서에 승직되었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469년(예종 1)에 예조판서에
  재임되었다.
* 1471년에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광성군(光成君)에 봉해지고, 1475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
  에 다녀왔다.
* 1482년 황해도지방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하여 황해도진휼사가 되었고,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세조비
  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례를 주관하였으며, 창경궁과 세자궁 중수의 책임을 맡아 처리하였다.
* 1484년 좌참찬을 거쳐 1486년 세자좌빈객이 되었다. 세조의 신임을 받아 건주위야인 토벌을 비롯하
  여 평안도관찰사와 절도사를 지내면서 세조의 국방정책에 기여한 바 컸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세조6년(1460)10월14일(신숙주·홍윤성·강효문·김겸광에게 옷 1령씩을 내리다)
대가(大駕)가 중화(中和) 생양관(生陽館)에 이르니 신숙주·홍윤성 및 종친(宗親)·재추(宰樞)·승지(承旨)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어 매우 즐기고, 신숙주·홍윤성·강효문·김겸광에게 옷 각각 1령(領)씩을 내려 주고, 사냥하여 잡은 금수(禽獸)를 호종하는 여러 신하에게 내려 주었다.【원전】 7 집 426 면

세조7년(1461)3월24일(신숙주...·김겸광·박건순·안관후 등을 불러 《북정록》을 교정하게 하다)
좌의정(左議政) 신숙주(申叔舟)·......군기감 정(軍器監正) 김겸광(金謙光).....좌부승지(左副承旨) 김국광(金國光)을 불러, 빈청(賓廳)에 모여 《북정록(北征錄)》을 교정(校正)하게 하고...【원전】 7 집 456 면

10월1일(우부승지 김겸광에게 명하여 이만주에게 말을 전하게 하다. 그 사목 )
......임금이 말하기를,“김겸광(金謙光)은 일찍이 북방에 왕래하였으니 야인의 정상(情狀)을 잘 알 것이다.”하고, 드디어 우부승지(右副承旨) 김겸광에게 명하여 이만주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김겸광에게 옷 1령(領)과 털로 된 말 장식[馬裝]과 안롱(鞍籠)·유롱(油籠) 등의 물건을 내려 주니, 김겸광이 곧 길을 떠났다.【원전】 7 집 490 면

10월17일(우부승지 김겸광이 이만주의 죄에 대해 치계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듣건대, 이만주(李滿住) 등이 간교(姦狡)한 생각이 남아 있어서 비록 도둑질에는 참여했으나.........【원전】 7 집 493 면

10월 27일(우부승지 김겸광이 북방의 야인이 침범한 것을 아뢰다)
우부승지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듣건대, 이두리(李豆里)가 관하(管下)의 3인을 거느리고 만포(滿浦)에 이르러 하룻동안 머무르다가 돌아갔다고 하는데.......【원전】 7 집 494 면

11월 6일(김겸광과 김계손이 올량합의 야인에 대해 치계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김겸광(金謙光)·평안도 절제사(平安道節制使) 김계손(金繼孫)이 치계(馳啓)하기를,
“올량합(兀良哈)의 기산로(其山老)·사거(沙車) 등이 만포(滿浦)에 이르렀기에 신(臣) 등이 위임받고 온 일을 물으니.........【원전】 7 집 495 면

11월 25일(우부승지 김겸광을 인견하여 평안도의 일을 하문하다)
임금이 우부승지(右副承旨) 김겸광(金謙光)을 인견(引見)하여 평안도(平安道)의 일을 묻고.......
【원전】 7 집 499 면

세조8년(1462)9월 9일(우승지 김겸광이 함길도에서 와 복명하자 인견하고 영의정 등과 일을 의논하다)
우승지(右承旨) 김겸광(金謙光)이 함길도에서 와서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서현정(序賢亭)에서 인견하고,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우찬성 구치관(具致寬)·병조 판서 윤자운(尹子雲)·참판 김국광(金國光)을 불러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원전】 7 집 549 면

세조9년(1463)2월 6일(.....사냥 구경을 하고 노루를 쏜 우승지 김겸광에게 활과 화살을 주다)
양주(楊州) 토지산(兎只山)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우승지(右承旨) 김겸광(金謙光)이 노루[獐]를 쏘아서 바치니, 활[弓] 1장(張), 대전(大箭) 1부(部)를 내려 주었다.【원전】 7 집 566 면

세조9년(1463)6월 2일(도승지 홍응을 이조 참판으로, 우승지 김겸광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다)
....... 도승지 홍응(洪應)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고, 우승지 김겸광(金謙光)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으니, 김겸광에게 이르기를,“경(卿)은 평안도(平安道)를 출입하여 오래 정상(情狀)을 아는 까닭으로 제수한다.”하였다.【원전】 7 집 576 면

세조10년(1464)9월 14일(김겸광이 적은 군사로 적을 정탐한 일에 대하여 힐책하다)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寬察使) 김겸광(金謙光)이 창성진 절제사(昌城鎭節制使) 이원량(李元良)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어서(御書)로 답(答)하기를,
“체탐(體探)은 마땅히 대병(大兵)으로 해야 하는데 몇 사람을 보내어 깊이 들어가는 것이 위험한 일이 아니겠느냐? ........【원전】 7 집 652 면



12월 23일(김겸광이 만주 관하의 김납로가 와서 공벌을 당할까 두렵다 했음을 아뢰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로써 본다면 적인(賊人) 조삼파(趙三波)·보하토(甫下土) 등과 더불어 같이 공벌(攻伐)을 당하여 계축년과 같이 될까 두렵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김겸광(金謙光)과 도절제사(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회유(回諭)하기를,
“만약 이만주의 사람으로서 다시 오는 자가 있거든 그에게 말하기를....지금 이미 너희에게 개심(改心)하기를 허락하였고 지나간 일은 다시 논(論)할 필요가 없으니, 너희는 경동(驚動)하지 말고 생업(生業)에 안착(安着)하여 즐겁게 살라.’고 하라.”하였다.【원전】 7 집 665 면



세조11년(1465)2월 15일(평안도 관찰사 김겸광에게 의주 3도와 신호수의 경간 사목을 보내다)
평안도 도관찰사 김겸광(金謙光)에게 유시하기를,“이제 의주(義州)의 3도(三島)와 신호수(申胡水)의 경간 사목(耕墾事目)을 보내니, 자세히 보고 시행(施行)하라.........【원전】 7 집 673 면



3월 8일(평안도 관찰사 김겸광이 우공의 승직과 황효공의 파출을 건의하다)
평안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이 아뢰기를,“의주 목사(義州牧使) 우공(禹貢)은 무략(武略)이 웅위(雄偉)하고, 일에 임하여는 근검(勸儉)하며, 백성을 다스리고 변방을 방비하는 재질이 모두 남음이 있으니, 승급할 만하고, 방산 만호(方山萬戶) 황효공(黃孝恭)은 재품(才品)이 혼미하고 미혹(迷惑)하여 변방을 수비하는 데 마땅하지 않으니, 파출하소서.”하니, 명하여 이조(吏曹)에 내리게 하였다【원전】 7 집 676 면

3월 26일(양정·김겸광 등이 야인 칭박우의 처우에 관해 아뢰다)
.......회유(回諭)하기를,“칭박우(稱朴右)는 영변(寧邊)에 옮기고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서울로 불려가서 본토(本土)로 풀어 보낼 것이로되, 다만 계달(啓達)한 뒤에 성상의 명(命)이 없으니, 아직 머물러 기다리라.’ 하고, 이어서 후하게 먹이고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였다가 명을 기다려 올려 보내도록 하고, 만약 이고납합(李古納哈)이 다시 오거든 말하기를, ‘칭박우는 서울에 보낸 뒤에는 가부(可否)가 없어 조정(朝廷)의 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하라.”【원전】 7 집 678 면

9월 2일(의정부·육조에서 호조 참판 김겸광을 보내어 문안하다)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 김겸광(金謙光)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원전】 7 집 701 면

세조12년(1466)5월 20일(강녕전에서 신숙주 등과 주연을 베풀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이 하직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김겸광(金謙光)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술잔을 올리도록 명하고 특별히 칼과 궁시(弓矢)를 하사(下賜)하였다.【원전】 8 집 23 면

8월 24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에게 어서로 유시하다)
어서(御書)로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강을 건너 황지(荒地)를 불사르고,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여서 사냥을 하고, 강 연안에서 배를 제조하는 등의 일은 자주 유시(諭示)를 내렸는데도 일찍이 거행(擧行)하지 않았는데, 지금 거행(擧行)하는 것이 좋겠다. 몸소 정탐(偵探)하는 것은 위태한 것이니 비록 시행할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사세(事勢)를 짐작(斟酌)하여 처리하라. 지금 유이(流移)한 사람이 많으니, 강 연안의 방수(防戍)가 응당 예전과 같지는 못할 것이다. 마땅히 일찍이 성내(城內)의 여사(慮舍)를 수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사는 곳에서 편안히 지내도록 하고 이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하였다.【원전】 8 집 37 면

9월 2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의 보고에 대한 회유)
..... 회유(回諭)하기를,“지금 경(卿)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이두리 등이 만약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를 청한다면 정산휘(鄭山彙)로 하여금 경(卿)의 말로써 대답하기를, ‘중국(中國)에서 건주(建州) 사람과 교통(交通)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그들을 타일러 지금부터는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게 하므로, 너희들의 정성은 비록 간절하지마는 감히 계달(啓達)하지 못했을 뿐이다.’고 하라. 만약 그들이, ‘함길도(咸吉道)를 거쳐서 서울로 올라오려고 한다.’고 하면, 대답하기를, ‘저 곳이 어찌 이 곳과 다르겠는가마는, 그러나 각기 변장(邊將)이 있으니 나의 알 바가 아니다.’ 하고, 이와 같이 대답해서 보내라.”
하였다.【원전】 8 집 38 면

10월 15일(변방 방비에 관해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에게 치서하다)
승정원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지금 성절사(聖節使)의 문견 사목(聞見事目)을 보건대, 야인(野人) 등이 개원(開原)의 달자(達子)를 포위하고 또 광녕(廣寧)을 핍박(逼迫)하여 사세(事勢)가 편안하지 못하니, 우리를 위한 계책으로서는 변경(邊境)을 굳게 지키고 군사와 말을 휴양(休養)하면서 사기(事機)를 기다리는 데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연습하지 못한 사졸(士卒)이 지리(地理)를 살피지 못하므로 위엄을 펼 수도 없고 급변(急變)에 대응(對應)할 수도 없다. 지금 듣건대, 몇 갈래의 길로 강(江)을 건너가서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인다 하니 매우 사의(事宜)에 적합한 일이다. 서로 잇달아 출입(出入)하면서 우리가 저들을 위협하는 것을 익숙하게 보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다만 스스로 피로하게 되어서는 안될 것이니, 경(卿)은 모름지기 형상과 정세(情勢)를 짐작하여 지금 정조사(正朝使)가 바야흐로 강(江)을 건너가니, 이로 인하여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이고 군사를 보내어 호송(護送)하여서 통원보(通遠堡)에 이르게 하라.”하였다. 또 말하기를,
“현재는 얼음이 얼어붙지 않고 일도 한가하니, 경(卿)이 와서 나를 보고서 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원전】 8 집 44 면



10월 15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이 야인의 동정에 관해 아뢰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만포진 절제사(滿浦鎭節制使) 정산휘(鄭山彙)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야인(野人) 이고납합(李古納哈) 등이 와서 알리기를, ‘절제사(節制使)가 전하(殿下)의 가련하게 여기는 뜻을 몸받아서 도망간 노비(奴婢)를 돌려 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조현(朝見)하여 은혜를 사례(謝禮)하려고 했으나 중국 조정에서 꺼리어 저지하는 바이므로 함길도(咸吉道)를 경유(經由)하여 가려고 합니다.’ 하니, 정산휘가 대답하기를, ‘피차(彼此)가 무엇이 다르겠는가마는, 그러나 각기 변장(邊將)이 있으니 나의 알 바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고납합(李古納哈)이 또 말하기를, ‘이권치(李權赤)가 내 집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나하(羅下)의 군사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붙는 것을 기다려 다시 의주(義州)의 삼도(三島)를 침구(侵寇)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정산휘가 대답하기를, ‘전일에 두 번이나 우리의 변경(邊境)을 침범하므로 변장(邊將)이 기일을 정하여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마침 중국에서 이를 중지시켰던 것이다. 또 성상(聖上)께서 너희들을 가련하게 여겨 군사를 내어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변장(邊將)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겨 이를 갈고 있으니, 저들이 만약 다시 온다면 이는 스스로 재화(災禍)를 초래하는 것이다.’ 하니, 이고납합(李古納哈)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저들의 나쁜 짓을 금지시킬 수는 없지마는, 만약 저들이 몰래 일어나는 것을 안다면 빨리 대국(大國)에 보고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였다.【원전】 8 집 44 면

11월 1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이 하직하고 돌아가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하직하고 돌아갔다.【원전】 8 집 45 면

11월 22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이 변방의 상황을 치계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정조사(正朝使) 조근(趙瑾)을 호송(護送)하는 우후(虞候) 박성손(朴星孫)이 와서 알리기를, ‘강(江)을 건너간 지 3일 만에 부을후리(夫乙厚里)에 유숙하니, 중국 사람 종신(終信)이 말하기를, 「10월 25일에 야인(野人)이 통원보(通遠堡)에 들어와서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지휘(指揮) 유영(劉英)이 나가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적(賊)이 부을후리(夫乙厚里)·심포(沈浦)·쌍령(雙嶺)에 나누어 둔치고는 왕래하면서 표략(剽掠)하므로, 등어사(鄧御史)가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호박동(琥珀洞)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호참장(胡參將)과 왕지휘(王指揮)도 또한 개주(開州)에 도착하여 뒤쫓아 싸웠으며, 또 송참장(宋參將)과 주참장(朱參將)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만주(李滿住)가 거주하는 곳에 곧바로 도착하여 이만주를 잡아서 그 아들들이 있는 곳을 묻고는 이내 관할(管轄)하는 3둔(屯)을 공격하여 죽이고, 이만주와 그 가속(家屬)을 호참장(胡參將)과 왕지휘(王指揮)가 있는 곳으로 묶어 왔습니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이만주가 보낸 사람이 만포진(滿浦鎭)에 도착하였으나 그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종신(終信)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하였다.【원전】 8 집 51 면

11월 26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이 야인의 동정을 치계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도독(都督) 이고납합(李古納哈) 등이 그 아우 아구(阿具) 등으로 하여금 와서 알리게 하기를, ‘함길도(咸吉道)에 거주하는 올량합(兀良哈)이 1백여 명의 군사가 요동(遼東)에 입구(入寇)했다가 돌아와서 자랑하기를, 「요동(遼東)의 사람과 가축(家畜)을 다 사로잡아 갔다.」고 하였는데, 내가 마침 황제(皇帝)께서 칙사(勅賜)가 있다는 말을 들은 까닭으로 친히 알리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하였다.
【원전】 8 집 51 면

11월 28일(평안도 절제사 김겸광에게 구황 등의 백성 위무책을 펴도록 치서하다)
승정원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평안도 절제사(平安道節制使) 김겸광(金謙光)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본도(本道)의 인심(人心)이 근일에는 그 거소에 안정하지 않고서 유이(流移)하고 천사(遷徙)하는 사람이 그치지 않으며, 또 성식(聲息)이 있고 연사(年事)도 또한 실농(失農)했는데, 듣건대 경(卿)이 내지(內地)의 수령(守令)들을 불러와서 부방(赴防)하게 하였다고 하니, 어찌 사람들에게 편안하지 못함을 보여 위험한 말로 남의 마음을 두렵게 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사람들에게 들리게 하여서는 안된다. 부득이하다면 그만이지마는, 부득이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수령(守令)들을 돌려보내어 구황(救荒)하는 일을 속히 다스려 신구(新舊)의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라. 적(敵)을 제어하는 술책은 이를 잘 사용한다면 수백 명의 정병(精兵)도 이를 쳐부수기에 족하니, 경(卿)은 사세(事勢)를 살펴서 시행하라.”
하였다.【원전】 8 집 52 면

12월 11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에게 둔병책을 유시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에게 유시(諭示)하기를,“동봉(同封)한 사목(事目)과 윤자운(尹子雲)의 말하는 바를 상세히 듣고 시행하라.”하였다. 그 사목(事目)에 이르기를,
“평안도(平安道)의 군사는 대개 3만 명이나 되는데, 3번(番)으로 나눈다면 1번(番)이 1만 명이 되니, 강변(江邊)에 나누어 둔(屯)치되 혹은 합하여 둔쳐서 1개로 하기도 하고 혹은 흩어져 둔쳐서 10개로 하기도 하고, 혹은 이 곳에 둔치기도하고 혹은 저 곳에 둔치기도 하며, 혹은 강 밖에서 사냥을 하기도 하고, 혹은 산림(山林)을 불에 태우기도 하면서 적(賊)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도록 하고, 또 모름지기 잡색(雜色) 군사와 무기(武器)를 고찰(考察)하여 일정한 때가 없이 모이고 흩어질 적에 그들로 하여금 각기 그 기(旗)를 알도록 해야 한다.”하였다.【원전】 8 집 53 면

12월 17일(평안도 절제사 김겸광이 변방 수비에 관해 치계하니 그에 대해 유시하다)
평안도 절제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창성 절제사(昌城節制使) 박양신(朴良信)이 경군사(京軍士)와 본진(本鎭)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달 3일에 강(江)을 건너 하천(何遷)의 동원(洞源)에 이르러 오랑캐를 쫓아내고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이고는 돌아왔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와 한명회(韓明澮)에게 의논하고는 김겸광(金謙光)에게 회답하여 유시하기를,“지금 경(卿)의 장계(狀啓)를 보고 강(江)을 건너가서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인 것을 알았는데 일은 매우 적당하지마는, 그러나 우선 정지하고 명령을 기다려라. 또 경군사(京軍士) 중에 장수가 될 만한 사람 3인을 골라서 각기 정기(精騎) 50명을 주어 진응사(進鷹使) 성윤문(成允文)을 호송(護送)하도록 하니, 구로(舊路)는 통원보(通遠堡)까지 이르고, 신로(新路)는 사천(沙川)에서 그친다.”하였다.【원전】 8 집 54 면

세조13년(1467)2월 16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에게 군사의 둔수에 관한 사목을 유시하다)
.....임금이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에게 유시하기를,
“군사의 둔수(屯戍)하는 것은 사목(事目)에 의하여 시행하라........【원전】 8 집 61 면



3월 21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이 둔수에 관해 치계하다)
이 앞서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지난번에 신에게 유시(諭示)하시기를.....지난 겨울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강변(江邊)을 수위(戍衛)하였으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청컨대 갑사(甲士)의 예(例)에 의하여 번상(番上)하게 하지 말고, 강변(江邊)을 수위하게 하소서.”【원전】 8 집 66 면

3월 28일(평안도 관찰사 김겸광이 통원보 등지에 척후를 보낼 것을 치계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청컨대 건장하고 날랜 사람 10여 명을 택하여 통원보(通遠堡) 등지에 보내서, 도적들이 갔는지 머물러 있는지를 염탐하고 성윤문(成允文)의 영래군(迎來軍)을 보내게 하소서.”....【원전】 8 집 67 면

4월 8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에게 야인 회유책을 유시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야인(野人) 이두리(李豆里)가 그 아들 이호치(李胡赤)와 더불어 중국 사람 왕중무(汪仲武)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왕중무가 이두리 등이 곤히 자는 것을 엿보다 도끼로 아울러 쳐서 〈그들을〉 죽이고, 마침내 삼저와 함께 다시 위원군(渭原郡)에 이르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사목(事目)을 만들어 회유(回諭)하기를,“1. 이두리가 해를 입은 일은 우리에게 관계되는 바가 아니니, 〈죄를〉 얽어서 다시 물어 왕중무 등으로 하여금 의혹(疑惑)을 사게 할 필요가 없다.......【원전】 8 집 69 면
4월 15일(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에게 야인 회유책을 유시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에게 유시하기를,
“건주위(建州衛) 사람이 만약 와서 ‘조정(朝廷)에서 왕중무(汪仲武)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고 묻거든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왕중무 부처(夫妻)가 비록 이두리(李豆里) 부자(父子)를 죽였다고 하더라도, 그 근원이 당인(唐人)에 관계되므로 반드시 장차 압령(押領)하여 보낼 것이다.’ 하고, 만약 왕중무 등을 돌려달라고 청하거든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진실로 이두리가 가장 우리에게 충성을 다한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 어찌 왕중무를 아끼겠는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조정에서 이미 처치(處置)함이 있으니, 우리들이 어찌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권도(權道)의 말로써 위로하여 대답하고, 또 사사의 뜻으로 면포(綿布)와 소금[鹽]·쌀[米] 및 종이를 주어라.”하였다.【원전】 8 집 70 면

4월 23일(둔치는 계책에 대해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에게 치서하다)
“......대저 적(敵)으로써 적을 공격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능사(能事)인데, 경은 어찌하여 생각하지 못함이 심한가? 의주(義州)의 농민을 보호하는 군사 같은 것은 으레 있는 일이니, 폐할 수가 없다. 경은 그 사리를 참작하여 조치하라.”하였다.【원전】 8 집 70 면

5월 7일(평안도 절도사가 김겸광이 침구한 야인의 토벌 상황을 치계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의주 목사(義州牧使) 우공(禹貢)과 판관(判官) 김순보(金舜輔)가 도적을 추격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저들의 군사가 두 곳으로 분둔(分屯)하여 그 형세가 매우 강성해서, 고군(孤軍)으로는 깊이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그 창살(槍殺)을 입은 사람과 가축의 수효는 사람이 48명, 말이 80필, 소가 3두(頭)라.’고 합니다.”하였다.【원전】 8 집 73 면

6월 4일(명령을 어긴 전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을 국문하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전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김겸광(金謙光)은 여러 번 척후(斥候)를 보내지 말라는 유시를 받고도 봉행(奉行)하지 않았으며, 또 대장(大將)으로서 호령(號令)이 엄격하지 못하여 변장(邊將) 등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그 진영을 이탈하여 깊이 저들의 땅에 들어가 사냥을 하게 하였으니, 그를 국문(鞫問)하여 아뢰어라.”하였다.【원전】 8 집 83 면

6월 7일(김겸광과 이수철을 파직하다)
김겸광(金謙光)·이수철(李守哲)을 파직하였다.【원전】 8 집 84 면

7월 28일(김개·김겸광·이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겸 의금부 지사(兼義禁府知事)로......【원전】 8 집 103 면

9월 29일(신숙주·김겸광 등을 불러 명 사신에게 내릴 물품을 의논하여 정하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예조 판서(禮曹判書) 김겸광(金謙光)·도승지(都承旨) 권맹희(權孟禧) 등을 불러서 명(明)나라 사신에게 내려 줄 물건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신숙주가 아뢰기를,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여러 가지 일은 예조(禮曹)에서 마땅히 이를 맡아 보는데, 지금 판서 김겸광이 사복장(司僕將)을 겸하여서 오로지 맡아볼 수가 없으니, 청컨대 고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그 일을 전담하게 하소서.”하였다.



9월 29일(홍응·김겸광·권맹희를 벽제의 선위사로 삼다)
중추부 동지사(中樞芬知事) 홍응(洪應)·예조 판서(禮曹判書) 김겸광(金謙光)·도승지(都承旨) 권맹희(權孟禧)를 벽제(碧蹄)의 선위사(宣慰使)로 삼았다.【원전】 8 집 126 면
12월 19일(김겸광·권맹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원전】 8 집 152 면

예종즉위년(1468) 10월 21일(김겸광의 분경은 추핵하지 말고 관찰사 등은 경저인을 못 거느리게 하다)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의 분경(奔競)한 일은 추핵하지 말도록 명하고, 인하여 사헌부에 전지하기를,“이제부터 제도(諸道)의 관찰사·절도사·도사(都事)·평사(評事)는 경저인(京邸人)을 거느리지 못하게 하라.”하였다.【원전】 8 집 283 면

예종1년(1469)4월 5일(병조에서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의 기황에 대한 의견을 아뢰다)
병조(兵曹)에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겸광(金謙光)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본도(本道)에는 기황(饑荒)이 심하니, 청컨대 무자년 추등(秋等)·동등(冬等)과 금년 춘등(春等)의 염초(焰硝)는 정지하고 보리가 익은 뒤를 기다려 자취(煮取)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8 집 357 면

8월 7일(한계미·유수·노사신·임원준·김겸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원전】 8 집 409 면


12월 27일(김겸광·임수겸·심인·한환·김종순·조지주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으로........【원전】 8 집 620 면

성종3년(1472)4월 4일(광성군 김겸광을 보내어 원각사에서 비를 빌게 하다)


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을 보내어 원각사(圓覺寺)에서 비[雨]를 빌었다.【원전】 8 집 649 면



4월 6일(원각사 기우 행향사 김겸광과 우부승지 유지에게 상을 내리다)

명하여 원각사(圓覺寺)의 기우 행향사(祈雨行香使) 김겸광(金謙光)에게 말 1필을 내려 주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유지(柳?)에게 아마(兒馬) 1필을 내려 주었는데, 이는 〈기우하여〉 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원전】 8 집 649 면

성종6년(1475)10월 12일(새해 하례를 위해 공조 판서 김겸광을 북경에 보내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겸광(金謙光)을 보내어, 표문(表文)를 받들고 북경[京師]에 가서 하정(賀正)하게 하니, 백관(百官)이 표문(表文)을 배송(拜送)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원전】 9 집 278 면
11월 15일(공문 속에 잘못 들어간 광성군 김겸광의 편지를 우부승지 임사홍이 감추다)
내관(內官) 안중경(安重敬)이 대내(大內)로부터 조그마한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교를 선시(宣示)하기를, ‘이것이 무슨 편지인가?’ 하였는데, 이는 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이 충훈부 낭청(忠勳府郞廳)에게 그 아들을 체아직(遞兒職)에 임명할 것을 청한 편지였었다. 그런데 도사(都事) 이의(李儀)가 임금에게 아뢸 공문 속에 잘못 두었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임사홍(任士洪)이 웃으며 감추어 버렸다.【원전】 9 집 286 면

성종7년(1476)  3월 11일(정조사 김겸광이 북경에 돌아오다)
정조사(正朝使) 김겸광(金謙光)이 북경[京師]에서 돌아왔다.【원전】 9 집 326 면

성종8년(1477)9월 14일(김겸광·노공필·이공·이집·구자평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광성군(光城君)으로,.......【원전】 9 집 508 면

성종13년(1482)2월 7일(....심회를 경기 진휼사로 삼고 김겸광으로 대신하다)
황해도 진휼사(黃海道賑恤使) 강희맹(姜希孟)이 처(妻)의 병 때문에 사직을 하니, 심회(沈澮)를 대신하여 경기 진휼사(京畿賑恤使)로 삼게 하고, 김겸광(金謙光)으로 강희맹을 대신하게 하였다.
【원전】 10 집 295 면

6월 27일(의금부 지사 김겸광 등이 제안 대군의 부인을 모함한 금음물 등의 형량을 아뢰다)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 김겸광(金謙光)·윤계겸(尹繼謙), 동지사(同知事) 이극돈(李克墩)이 와서 아뢰기를,“금음물(今音勿)의 죄는 실정으로써 논한다면 비록 사형으로 조치하더라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비자(婢子)가 아니고 또 대군(大君)에게는 유모(乳母)가 되어 복(服)이 있으니.......죄는 다만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가 됩니다.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습니까?”하니, 전교(傳敎)하기를,
“대벽(大?)에 해당하는 죄를 율외(律外)로써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을 영돈녕(領敦寧) 이상 및 정부(政府)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하였다.【원전】 10 집 347 면

7월 21일(충청도 진휼사 김겸광이 질병과 상피의 일로 사임을 청하니 유지로써 대신케 하다)
충청도 진휼사(忠淸道賑恤使) 김겸광(金謙光)이 와서 아뢰기를,“신은 병이 있고, 본도(本道) 도사(都事)는 신의 동생이니, 사임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유지(柳?)로써 대신하게 하였다.【원전】 10 집 362 면

성종14년(1483)  5월 15일(이극증·김겸광·김학기·이승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우참찬(右參贊)으로........【원전】 10 집 462 면



성종15년(1484) 10월 5일(이극배·한계순·김겸광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원전】 10 집 629 면



성종16년(1485)2월 5일(광천군 이극증과 우참찬 김겸광을 세자궁의 조성 제조로 삼다)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과 우참찬(右參贊) 김겸광(金謙光)을 세자궁(世子宮)의 조성 제조(造成提調)로 삼았다.【원전】 10 집 683 면

3월 30일(일을 끝낸 선결 도감 제조 이극배·한계순·김겸광에게 술을 대접토록 명하다)
선결 도감 제조(繕缺都監提調) 이극배(李克培)·한계순(韓繼純)·김겸광(金謙光)이 와서 일이 끝났음을 아뢰니, 술을 대접하도록 명하였다.【원전】 10 집 702 면

6월 21일(노사신·김겸광·정난종·성준·안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겸광(金謙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 좌참찬(左參贊)으로........【원전】 11 집 29 면

성종17년 (1486)3월 2일(이철견·김겸광·이극균·이숭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겸광(金謙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원전】 11 집 104 면

5월 25일(김겸광이 혜산진의 야인을 남도에 나누어 살게 하도록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김겸광(金謙光)이 아뢰기를,
“야인(野人) 김단다무(金丹多茂) 등이 혜산진(惠山鎭)에 거(居)하기를 청하였는데, 본진(本鎭)은 병력(兵力)이 적고 약한데다 김단다무 등의 족류(族類)는 매우 많으니, 만약 그 청하는 것을 들어준다면 후환(後患)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두 도에 나누어 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내지(內地)에 살게 할 수는 없다. 장차 조관(朝官)을 보내어 살펴보고서 나중에 처리하겠다.”하였다.【원전】 11 집 126 면

성종18년(1487)8월 12일(특진관 김겸광이 선공감 장인들에게 보정을 줄 것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김겸광(金謙光)이 아뢰기를,
“선공감(繕工監)의 장인(匠人)들은 지금 보정(保丁)이 없어졌기 때문에 호강(豪强)한 자들은 모면하고 남아 있는 자는 잔약하고 용렬합니다. 지금 바야흐로 군적(軍籍)을 고치는 때이니, 청컨대 이전처럼 보정을 주어 생업(生業)이 넉넉해지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렇게 하라.”하였다. 이때 김겸광이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뢴 것이다.【원전】 11 집 240 면

성종19년(1488) 1월 12일(정미)   광성군 김겸광이 나이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다
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글을 올려서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원전】 11 집 282 면

성종 20년 기유(1489)12월 28일(김겸광을 정헌 대부 광성군으로 삼다)
김겸광(金謙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 광성군(光城君)으로 삼았다.【원전】 11 집 557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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