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 史 돋 보 기

제목: 조선왕조실록(諱 國光)
이름: 孤巖/準一


등록일: 2015-12-06 17:37
조회수: 1199 / 추천수: 61


조선왕조실록(諱 國光)

  광산 부원군 김국광의 졸기 성종 11년 경자(1480, 성화 16) 11월 11일(정해)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轍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다. 정통(正統) 신유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천전(遷轉)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다. 을축년에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에 승직(陞職)되고,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성균 주부(成均主簿)·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歷任)하였다. 경태(景泰) 을해년에 조모(祖母)의 상(喪)으로 복(服)을 입었는데, 세조(世祖)가 ‘김국광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니, 좌우에서 상을 당했다고 대답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가, 이어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승직되었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성균 사예(成均司藝)·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으로 천전(遷轉)되었었다. 경진년에 특별히 중훈 대부(中訓大夫) 사섬시 윤(司贍寺尹)을 더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천전되었으며, 신사년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계되었다. 세조가 항상 그의 암련(?鍊)을 칭찬하여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내려 주었다. 그때 승지(承旨)들이 일로 인하여 견책(譴責)을 받으니, 김국광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의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였다. 갑신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초배(超拜)되고 성화(成化) 을유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승계되었으며, 병술년에는 숭정 대부(崇政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승계되었다. 정해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천전되었다가, 이어서 우찬성(右贊成)에 승직되었는데, 그때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의 주벌(誅伐)로 정충 출기 적개 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숭록 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승계시켰으며,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하였다. 한때 김국광을 비방(誹謗)하는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간관(諫官)이 이것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니, 세조가 크게 노(怒)하여 간관을 저촉시켜 대죄(待罪)하게 하였으며, 김국광이 일찍이 의정(議政)을 역임한 적이 있다 하여 원상(院相)을 삼으니, 김국광이 찬성(贊成)으로서 또한 참여하였다. 기축년에는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계되었는데, 주상(主上)이 즉위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진배(進拜)하였다. 신묘년에는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계사년에 어미의 상을 당했는데, 을미년에 삼년상을 마치니, 광산 부원군을 제수하고, 정유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이다.
.【원전】 10 집 173 면
[김국광(金國光) 인물정보]

* 1415(태종 15)∼1480(성종 11). 조선시대의 문신·공신. 본관은 광산.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
  石). 사헌부감찰 철산(鐵山)의 아들이다.
*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박사에 이르고,
* 1445년에는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이어 황해도도사·성균관주부·사헌부감찰·봉상시판관(奉常寺判
  官)을 역임하였다.
* 1448년 4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이사임(李思任)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 1452년(세조 1) 12월에는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
  으며, 당시 할머니의 상을 입고 있었으나 이듬해 복을 벗고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었다.
* 1458년 4월 최옥산(崔玉山)의 살부사건(殺父事件)이 일어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서 경차
  관(敬差官)이 되어 이것이 무고임을 밝혀내는 데 공을 세워, 세조의 신임을 얻게 되어 사헌부장령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사예(成均司藝)·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역임하였다.
* 1460년 사섬시윤(司贍寺尹)에 임명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전
  (刑典)편찬을 주도했으며, 그해 10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세조는 그의 박식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직접 ‘사지제일(事知第一)’의 4자를 써서 하사하고, 당시
  승지들이 모두 탄핵을 받자 가도승지(假都承旨)로 임명하여 왕명출납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 1464년 10월 호조판서를 거쳐 이듬해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
  었다.
*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책훈되고 광산
  군(光山君)에 훈봉되는 동시에 좌찬성 겸 세자시강원 이사(貳師)·병조판서·오위도총부도총관·춘추관지
  사(春秋館知事)에 올랐으며, 이어 행해진 건주위(建州衛)정벌에도 공을 세워 군공(軍功)3등에 책훈되었
  다.
* 1469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
  으나, 그해 10월에는 겸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좌찬성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 이듬해 5월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문폐사(問弊使)로 내려가 여러가지 폐정 시정에 노력했으며, 8월
  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 1470년(성종 1) 4월 좌의정으로 옮기고 5월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 이듬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1등에 책훈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8월 그의 아우
  정광(廷光)과 사위 이한(李?)의 부정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다만 원상과 영경연사(領
  經筵事)만을 겸했다.
* 그뒤 사헌부·사간원 등 대간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면서도 1476년 5월 원상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원상으로서 국방·외교·법전편찬 등의 국정자문에 응하고 경연관으로서 국왕보도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 1477년 10월 영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6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심한 반발로 사직하
  였다.
  일찍이 세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경국대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新增東國輿地勝覽)



세조1년(1455)  12월 27일(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좌참찬(左參贊) 정갑손(鄭甲孫)........교리(校理) 김국광(金國光)·등은 3등에 녹(錄)한다【원전】7집102 면

세조3년(1457) 3월 18일(연경을 곡산군·남경우를 의령군·김국광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다)
연경(延慶)을 곡산군(谷山君)으로 남경우(南景祐)를 의령군(宜寧君)으로, 김국광(金國光)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삼았다.【원전】 7 집 187 면

세조4년(1458)5월2일(경차관 김국광이 최옥산의 일이 의심스럽다고 하자 연관된 자들을 잡아오게하다)
경차관(敬差官) 김국광(金國光)이 승정원에서 교서(敎書)를 받고 아뢰기를,
“금음산(今音山)은 병이 위독하여 당시에 국문하지 못하였고, 단지 최옥산(崔玉山)만을 국문하였더니, 말하기를,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아비를 죽이는 이치가 만무(萬無)한데, 군사(郡事)와 품관(品官)이 엄형(嚴刑)하기에 참지 못하고 거짓으로 자복(自服)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또 사정(事情)도 자못 의심나는 곳이 있습니다.”하니, 명하여 내의(內醫)를 보내어 금음산의 병을 치료하게 하고, 또 명하여 금음산(今音山)·옥산(玉山)은 항쇄를 풀고, 군사(郡事) 임계중(林繼中)을 항쇄(項鎖)하며 사련인(辭連人)은 모조리 잡아오게 하였다.【원전】 7 집 268 면

6월 6일(이변·김연지·강희안·이승소·김국광·권이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변(李邊)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김국광(金國光)을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원전】 7 집 272 면



세조5년(1459)9월 24일(함길도 도절제사 양정과 경차관 김국광이 낭발아한을 목벤 일 등을 보고하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양정(楊汀)과 경차관(敬差官) 김국광(金國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미 낭발아한(浪?兒罕)을 목베었고, 또 구난(仇難)의 아들 어린 아이 2명도 잡아서 목베었습니다. 기사가(其沙哥)·토로고(吐勞古)·하아하지(河兒河知)는 두칭가(豆稱哥)에게 주고, 대한(?漢)은 본주(本主)인 청암(靑巖)의 동풍기(童風其)에게 주고, 아내 복라손(卜剌遜)·화라속(火剌速)은 회령부(會寧府)에 유치(留置)하였습니다.”.........【원전】 7 집 349 면



세조6년(1460)4월 1일(함길도 경차관 김국광이 거병의 시기를 늦출 것을 건의하다)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 김국광(金國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이제 경원(慶源)에 도착하여 양정(楊汀)·홍윤성(洪允成)을 만나 보고 유서(諭書)를 주면서 성상의 뜻을 모두 전하였더니, 양정 등이 말하기를, ‘적(賊)들 가운데 근래에 투항(投降)하는 자가 서로 잇따르는데 혹시 우리 나라 계통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려보냄이 있을까 합니다. 지금 거병(擧兵)하여 토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천천히 정세를 보고 또 김계손(金繼孫) 등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거병(擧兵)하소서.’ 하였습니다.”하였다.【원전】 7 집 383 면



5월 29일(이호성·이극감·이교연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호성(李好誠)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김국광(金國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원전】 7 집 400 면



세조7년(1461) 2월 21일( 충순당에 나아가 이극감·김국광을 불러 《북정록》을 교정하도록 하다)
충순당(忠巡堂)에 나아가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극감(李克堪)·우부승지(右副承旨) 김국광(金國光)을 불러 다시 《북정록(北征錄)》을 교정(校正)하도록 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원형(朴元亨)을 불러 형옥(刑獄)을 의논하였다.【원전】 7 집 449 면

5월 9일(정창손·박원형·이순지·김국광·김양경 등이 형전을 수교하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원형(朴元亨)·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순지(李純之)가 빈청(賓廳)에 나아가, 좌부승지(左副承旨) 김국광(金國光)과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 김양경(金良敬)과 더불어 형전(刑典)을 수교(?校)하였다.【원전】 7 집 462 면

5월 21일(좌부승지 김국광을 인견하다)
좌부승지(左副承旨) 김국광(金國光)을 인견(引見)하고, 대전(大典)의 형전(刑典)을 수교(?校)하였다.
【원전】 7 집 464 면

5월 25일(김국광·한계미·정식·노숙동·이석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국광(金國光)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정식(鄭軾)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김겸광(金謙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원전】 7 집 465 면

8월 8일(황수신·이극감·김국광 등이 삼전도와 녹양, 아차산 등이 목장에는 부적함을 아뢰다)
좌찬성(左贊成) 황수신(黃守身)·호조 참판(戶曹參判) 이극감(李克堪)·병조 참판(兵曹參判) 김국광(金國光) 등이 아뢰기를,“신 등이 목장을 설치할 만한 땅을 가서 살펴보니, 삼전도(三田渡)와 녹양(綠楊)은 장원(場垣)의 유지(遺趾)가 있고, 아차산(峨嵯山)은 산이 험하고 땅이 좁으며 물과 풀이 부족한데, 목장을 쌓는 공역(功役)이 또 어렵겠습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다른 곳에 구하는 것이 옳다.”하였다.
【원전】 7 집 479 면

세조8년(1462)12월 2일(풍저창에 쌀도둑이 들어 김국광에게 부장·장용대에게 수색토록 하다)
도둑이 풍저창(豊儲倉)에 들어가서 쌀을 훔쳤다. 김국광(金國光)에게 명하여 부장(部將)·장용대(壯勇隊) 등을 거느리고 수색해 잡게 하였다.【원전】 7 집 558 면

12월 3일(형조판서 이극감·병조참판 김국광 등에게 풍저창의 쌀도둑을 국문케 하다)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병조참판 김국광(金國光) 등에게 명하여 승정원에 모여서 풍저창(豊儲倉)의 쌀을 도둑질한 자를 국문하게 하였다.【원전】 7 집 558 면

세조9년(1463) 1월 23일(병조 참판 김국광이 진숙의 마감을 보고하고 일자를 줄이도록 건의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병조 참판 김국광(金國光)이 아뢰기를,
“진숙(陣宿)하는 모든 일은 이제 이미 마감(磨勘)하였으나, 다만 일수(日數)는 정하지 않았는데, 신(臣)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만약 일수가 많으면 지응(支應)하는 모든 일도 또한 많을 것이니, 청컨대 모름지기 날짜를 간략히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옛날에는 천리(千里)를 행사(行師)한 자도 있었으니, 일수의 많은 것은 족히 염려되지 않는다. 반드시 10일은 되어야 가(可)하다.”하였다. 김국광이 또 말하기를,
“상체(上體)가 평선(平善)하시나 미기(未幾)에 봄추위로 풍기(風氣)가 고르지 못할 것이니, 교외(郊外)에 출차(出次)하심은 옳지 못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백관(百官)이 본래 창졸(倉卒)한 일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예비(預備)하게 할 뿐이니, 경(卿)은 염려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7 집 564 면

2월 18일(구치관과 김국광에게 친히 만든 도진(圖陣)의 운용에 대해 이야기하다)
임금이 구치관(具致寬)·김국광(金國光)에게 이르기를,“내가 도진(圖陣)한 것은 진(陣) 사이에 진(陣)을 용납하고, 대(隊) 사이에 대(隊)를 용납하는 법이니, 그 출입을 쉽게 하여 그 분란(紛亂)을 방지하는 소이(所以)이다. 진(陣)을 연합(連合)하여 움직이지 않고 고수(固守)하는 형세[勢]와는 다르며, 또 전후 좌우를 정한 것은 쓰는 데에 미혹하지 않고 그 변화(變化)를 익히는 것이다. 병조(兵曹)에서 써서 제군(諸軍)에 유시하려 하면 상법(常法)에 어려우니, 제군(諸軍)이 각각 살피면 변통(變通)하기에 쉽다. 경(卿)은 방(?)을 내어 구효(求曉)함이 옳겠다.”
하였다.【원전】 7 집 567 면



세조10년(1464) 8월 3일(호조 판서 김국광을 불러 횡간을 상세히 정하게 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국광(金國光)을 불러 여러 관사(官司)의 횡간(橫看)을 상세히 정하게 하였다. 김국광이 법령(法令) 조문(條文)에 익숙하니, 임금이 이에 정통하다고 하여 허락하였는데, 김국광도 또한 스스로 일을 맡아서 태만 하지 않아 추이(推移)와 증손(增損)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러나 인색한 버릇이 있으니 당시 공론(公論)이 작다고 하였다.
【원전】 7 집 643 면


  [주]횡간(橫看) : 조선 시대의 재정 세출표(財政歲出表). 조선의 국고 차출은 관청·관리에 대하여 토지
      를 지급하는 외에 국가에서 징수한 현물(現物)로 충당하는데, 이를 명확하게 실시하기 위해 연간
      의 지출 명세서를 미리 작성하였음.
  [주]추이(推移) : 돈을 여기저기 옮겨 매우는 것.



세조11년 을유(1465)  2월 12일(영순군 이부와 호조 판서 김국광을 파직시켰으나 곧 복직시키다)
임금이 승지(承旨) 등을 불러서,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국광(金國光)에게 이르기를,“너희들은 횡간(橫看)을 만드는 데 어찌 마음을 쓰지 아니하느냐?”하였는데, 말이 심히 엄절(嚴切)하였다. 곧 이부와 김국광을 파직(罷職)하였다가 얼마 있다가 복직시켰다.【원전】 7 집 672 면

11월 21일(김국광 등에게 음식을 하사하다)
지중추원사 김국광(金國光)·호조 참판 김겸광(金謙光)·행 상호군 민발(閔發) 등이 병든 어미를 보기 위하여 충청도(忠淸道)로 돌아가니, 관찰사(觀察使)에게 일러 음식물(飮食物)을 내려 주게 하였다. 임금이 김국광을 총애하여 대우하니 권세가 날로 성하여 여러 신하가 비교할 이가 없었다.【원전】 7 집 714 면

세조12년(1466) 윤 3월 29일(최항·김국광·한계희 등에게 《동국통감》을 편찬케 하다)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양성지(梁誠之)·임원준(任元濬)·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였다.【원전】 8 집 16 면

세조13년(1467) 2월 27일(최항·김국광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향화인·사복들에게 사후하게 하다)
화위당(華?堂)에 나아가 좌찬성 최항·병조 판서·김국광·이조 판서 한계희·공조 판서 임원준과 승지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고, 이어서 향화인(向化人)과 사복(司僕)들을 불러서 좌우(左右)로 나누어 사후(射侯)하게 하여 .........【원전】 8 집 63 면


5월 27일(구치관·한계희·김국광 등을 불러 친정에 대한 일을 의논하다)
구치관(具致寬)과 한계희(韓繼禧)·김국광(金國光)·윤필상(尹弼商) 등을 불러, 사정전(思政殿)의 월랑(月廊)에 모여서 친정(親征)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였다.【원전】 8 집 79 면

6월 26일(최항·김국광·노사신 등을 불러 정사를 의논하다)
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형조 판서(刑曹判書) 서거정(徐居正)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 정사를 의논하고, 시식(侍食)하게 하였다.
【원전】 8 집 90 면


7월 23일(김국광 승지 등이 일을 의논하고 세자·승지 등에게 관장 공사를 아뢰게 하다)
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과 승지(承旨) 등이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에 모여서 일을 의논하였다. 한참 있다가 세자(世子)와 승지(承旨) 등에게 명(命)하여 각각 관장(管掌)하는 공사(公事)를 들어와서 아뢰게 하였다......【원전】 8 집 101 면



8월 12일(우참찬 김국광 등에게 모화관의 진도(陣圖)를 제시하여 의논하게 하다)
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과 승지(承旨) 등이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에 모여서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할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였다. 임금이 진도(陣圖)를 지어서 김국광 등과 여러 장수에게 내보이고, 이어서 여러 장수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자, 각각 치중(輜重)을 보호할 방략(方略)을 아뢰었다.
【원전】 8 집 108 면

8월 20일(김국광·윤필상 등을 불러 정벌에 참가한 장사의 논공을 의논하다)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서 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 등을 불러서 의논하여, 정벌에 나갔던 장사에게 논상(論賞)할 조건을 의논하였다.......적(賊)을 토벌하는 계책을 의논하는 데 참여하여 공이 있다고 하여, 김국광(金國光)은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초자(超資)하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으로 삼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그대로 겸하게 하였으며....【원전】 8 집 112 면

8월 26일(김국광·윤필상·남이 등이 군공의 등급을 의논하여 정하다)
우찬성(右贊成) 김국광(金國光)·우참찬(右參贊) 윤필상(尹弼商)·행 호군(行護軍) 남이(南怡) 등이 도총부(都摠府)에 모여서 군공(軍功)의 등급을 의논하여 1등을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으로 하고, 2등을 정충포의적개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으로 하고, 3등을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하였다.【원전】 8 집 114 면

8월 27일(김국광·윤필상에게 이시애 난의 교훈에 관해 말하다)
임금이 김국광(金國光)·윤필상(尹弼商)에게 이르기를,“중궁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시애(李施愛)의 반역(反逆)은 나라의 화(禍)가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군졸(軍卒)을 다시 훈련하는 것도 또한 나라를 튼튼히 하는 방도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마음에 감동(感動)하였으니, 경(卿) 등도 그리 알라.”
하였다.【원전】 8 집 115 면

8월 29일(김국광에게 명하여 장진충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향리로 돌아가게 하다)
우찬성(右贊成) 김국광(金國光)에게 명하여 훈련원(訓鍊院)에 가서 장진충(張進忠)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먹이게 하고, 노정(路程)의 멀고 가까운 것을 계산하여 양식을 주어서 각각 향리(鄕里)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 중에서 남아서 시위(侍衛)하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 주었다.【원전】 8 집 115 면

9월 8일(최항·김국광·노사신 등을 불러 대전을 의논하여 정하다)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 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우찬성(右贊成) 김국광(金國光)·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서 대전(大典)을 의논하여 정(定)하였다.【원전】 8 집 119 면

10월 26일(권맹희·김국광 등에게 군공의 등급을 의논하게 하다)
도승지(都承旨) 권맹희(權孟禧)·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 등에게 명하여, 군공(軍功)의 등급을 의논하였다.【원전】 8 집 136 면

세조14년(1468)  2월 2일(지응사 김국광에게 충청도로 하여금 술을 올리지 말게 하다)
지응사(支應使) 김국광(金國光)에게 전지(傳旨)하기를,“본도(本道)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지 말라.”
하였다.【원전】 8 집 159 면

3월 4일(건주를 정복한 군사를 소환하는 것에 대해 김국광에게 묻다)
주서(注書) 조익정(趙益貞)을 보내어,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에게 묻기를,
“지난 가을에 건주(建州)를 정벌한 군사(軍士) 3천여 인은 그대로 평안도(平安道)에 머물러 방수(防戍)하게 하였는데, 해빙(解氷)하기를 기(期)하여 이제 이만주(李滿住)의 아들이 군병(軍兵)을 청하여 침구(侵寇)하여 온다는 성식(聲息)이 있는 것 같으니, 방수하는 군사를 소환(召還)함은 불가하지 않겠느냐?”
하니, 김국광이 대답하기를,“이미 건주(建州)를 정벌하였는데, 또 겨울이 지나도록 머물게 함은 옳지 못합니다. 만일 부득이하면, 사람을 보내어 대신하는 것이 옳겠습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마땅히 여러 재신(宰臣)과 더불어 상의(商議)하겠다.”하였다.【원전】 8 집 168 면

8월 13일(김국광·노사신 등을 불러 《주역》을 강론하게 하다)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 등을 불러 안에 들이어 《주역(周易)》을 강론(講論)하게 하였다.【원전】 8 집 206 면



예종 즉위년(1468)10월 19일(정병을 오래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김국광을 체임시켰다고 전교하다_
명하여 좌찬성 김국광(金國光)을 부르고, 인하여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제 김국광을 겸판병조(兼判兵曹)에서 체임시킨 것은 부장들이 분군(分軍)을 잘못한 때문이 아니니, 이것을 말하도록 하라.”하였다. 대간(臺諫)을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내가 김국광을 겸 판병조(兼判兵曹)에서 체임시킨 것은 대신(大臣)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정병(政柄)은 오래 잡을 수 없다. 오래 잡으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은혜가 상하니, 남의 말이 염려스럽다. 호조와 예조에도 비록 겸판서(兼判書)가 있으나 병조에 비할 것이 아니다. 내가 김국광을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에 체임시킨 것이고 다른 뜻은 없다.”
하였다. 김국광의 사람됨이 시사(時事)를 잘 헤아려서 임금의 신임하는 바가 되어 오래 병권(兵權)을 맡아서 옥백(玉帛)을 마음대로 하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이때에 거리에 방(榜)을 붙여서 그 탐하는 것을 풍자(諷刺)한 자가 있었으니, 임금의 전교는 어찌 들은 바가 없었겠는가?【원전】 8 집 282 면

예종1년(1469) 2월 2일(김국광에게 충청도에서 징집한 군사를 모화관에서 열병하게 하다)
김국광에게 명하여 충청도에서 징집해 온 군사를 모화관(慕華館)에서 열병(閱兵)하게 하였다.
【원전】 8 집 324 면



5월 29일(임김국광·이극배를 각기 충청·전라도 문폐사와 경상도 문폐사로 삼다)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을 충청 전라도 문폐사(忠淸全羅道問弊使)로 삼고, 우참찬(右參贊) 이극배(李克培)를 경상도 문폐사(慶尙道問弊使)로 삼았는데, 그 사목(事目)에 이르기를,
“1. 경차관(敬差官)은 도적(盜賊)을 체포하여 가두고 밝게 조사하여 석방할 만한 자는 석방할 것.
1. 연변(沿邊)의 방어(防禦)하는 상황을 적간(摘奸)할 것.
1. 탐오(貪汚)하여 백성을 학대하는 수령(守令)과 만호(萬戶)는 공신(功臣)·의친(議親)·당상관(堂上官)을 논하지 말고 가두어 국문(鞫問)해서 아뢸 것.
1. 자기(自己)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청리(聽理)할 것.
1. 연변(沿邊)의 수령(守令)과 만호(萬戶)는 군무(軍務)의 착오(錯誤)한 일을, 군법(軍法)에 의하여 공신(功臣)과 의친(議親)·당상관(堂上官)을 논하지 말고, 그 경중(輕重)에 따라서 죄를 줄 것.
1. 여러 고을, 여러 진(鎭), 여러 포(浦)의 군기(軍器)를 적간(摘姦)할 것.
1. 연변(沿邊)의 여러 진(鎭), 여러 포(浦)의 당번 군사(當番軍士)를 점고(點考)할 것
1. 전(前)에 있었으나 혁제(革除)한 연변(沿邊)의 여러 진(陣), 여러 포(浦) 가운데 다시 회복(回復)할 만한 것을 계문(啓聞)할 것.
1. 봉수(烽燧)와 성자(城子)를 적간(摘姦)할 것.
1. 여러 고을의 진상(進上) 물건 가운데 감(減)할 만한 물건을 뽑아서 아뢸 것.”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원전】 8 집 370 면

6월 2일(도승지 권감이 김국광과 이극배를 하삼도 여러 고을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다)
도승지 권감(權?)이 아뢰기를,“지금 바야흐로 농사가 한창인데, 김국광과 이극배를 하삼도(下三道) 여러 고을에 보낸다면, 소요(騷擾)한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제포(諸浦)를 순시하면서 군기(軍器)를 점열(點閱)한다면, 신은 왜인(倭人)으로서 삼포(三浦)에 거주하는 자가 혹시 의심을 내어 혼단을 일으킬까 두려우니, 청컨대 아직 정지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대신(大臣)을 보내어 일을 조치하면 심히 가하리라 생각된다.”하였다.【원전】 8 집 384 면

7월 5일(김국광에게 선왕이 이룬 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 옳은지 묻다)
원상(院相) 김국광(金國光)에게 전지하기를,
“근래에 다시 정한 법은 모두 선왕(先王)이 이룬 법을 폐하고서 따르지 않았는데, 옳겠는가?”
하니, 김국광이 대답하기를,“세조께서 일찍이 육전(六典)을 상정(詳定)하여 몇달동안 이루지 못하였고, 오직 호전(戶典)·형전(刑典)만을 겨우 이루었으나, 글자를 주조하여 간행(刊行)하였으니, 대개 옳은지를 시험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은 만세(萬世)에 통행(通行)하는 전례입니다. 지난번에 한명회(韓明澮)가 불편(不便)한 몇 가지 일을 아뢰어서 개정(改定)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물며 육전은 세조께서 이루지 못한 서적인데, 지금 바야흐로 상정(詳定)하였으니, 비록 혹 다시 고치더라도 불가하지 않습니다. 복색(服色)도 또한 마땅히 다시 정하소서.”
하니, 명하여 예전(禮典)을 고쳐서 편찬하게 하였다.【원전】 8 집 399 면

7월 16일(김국광이 계문하여 결절한 것은 《대전》에 기록하지 말 것을 청하다)
원상 김국광(金國光)이 아뢰기를,“지금 새로 정한 《대전(大典)》을 보니, 계문(啓聞)하여 결절(決折)한 것과 두 번 신소(伸訴)한 것은 다시 청리(聽理)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세조(世祖)의 교지를 받았었는데, 이르기를, ‘계문하여 결절한 것은 곧 내가 친히 결단하는 것이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비록 《대전(大典)》에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청리하지 않겠으니, 그것을 기록하지 말라.’ 하셨는데, 신이 이를 기록하였다가 관(冠)을 벗고 벌주(罰酒)를 마신 적이 있습니다. 신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기록하지 마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8 집 402 면

8월 22일(홍윤성·윤자운·김국광·한명회·한계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윤성(洪允成)을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윤자운(尹子雲)을 좌의정(左議政)으로, 김국광(金國光)을 우의정(右議政)으로, 한명회(韓明澮)를 상당군(上黨君)으로, 한계미(韓繼美)를 좌찬성(左贊成)으로, 노사신(盧思愼)을 우찬성(右贊成)으로......【원전】 8 집 412 면



9월 27일(최항·김국광 등이 《경국대전》을 지어 바치다)
상정소 제조(詳定所提調)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지어 바치니, 최항·김국광에게 각각 매[鷹子] 1련(連)씩을 내렸다....

【원전】 8 집 419 면



성종 즉위년(1469)12월 12일(신숙주...김국광과 종친 이침·이부에게 산릉 자리를 살피게 하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의릉(懿陵)의 북쪽에 산릉(山陵)이 될 만한 땅을 다시 살펴보고 와서 복명(復命)하니,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영의정 홍윤성(洪允成)·상락군(上洛君) 김질(金?)·우의정 김국광(金國光)에게 명하여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과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함께 다시 살펴보도록 하였다........【원전】 8 집 446 면



성종1년(1470)1월 9일(산릉 제조 김국광이 산릉의 묘자리를 여는 일에 대해 아뢰다)
산릉 제조(山陵提調) 김국광(金國光)이 아뢰기를,“산릉(山陵)에 금정(今井)을 열 때는 광릉(光陵) 만들 때의 예(例)에 의거하여 종친(宗親)·정승(政丞)·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도승지(都承旨)가 같이 가서 봉심(奉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傳敎)하기를,“밀성군(密城君)·영순군(永順君)·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승지(承旨)와 중 일행(一行)이 같이 가서 이를 봉심하라.”하였다.【원전】 8 집 453 면

1월 21일(김국광의 의견에 따라 도둑 체포에 공이 있는 이양생을 당상관으로 승진시키다)
전교(傳敎)하기를,“이양생(李陽生)이 도적을 잡은 공이 있으므로 지금 이를 상주려고 하니, 그것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하니 원상(院相) 김국광(金國光) 등이 아뢰기를,“이양생(李陽生)은 친공신(親功臣)으로서 자궁(資窮)이 되었으니, 승진시켜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敎)하기를,“좋다.”하였다.【원전】 8 집 459 면


3월 4일(우의정 김국광을 사은사로, 이조 참판 정난종을 부사로 삼다)
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을 사은사(謝恩使)로 삼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난종(鄭蘭宗)을 부사(副使)로 삼았다.【원전】 8 집 477 면

3월 9일(원상 홍윤성·김국광이 선정전으로 나아가 경연에 임할 것을 청하니 따르다)
원상(院相) 홍윤성(洪允成)·김국광(金國光)이 아뢰기를,
“보경당(寶鏡堂)은 어좌(御座)가 북쪽으로 향하였으니, 이것은 정전(正殿)이 아닙니다. 지금 또 기후가 온화하니, 청컨대 선정전(宣政殿)에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소서.”하니, 이날에 비로소 선정전에 나아가고, 인하여 경연관(經筵官)·대간(臺諫)과 여러 승지(承旨)·주서(注書)에게 부선(副膳)을 명하였다.
【원전】 8 집 479 면

3월 11일(상의원에 명하여 사은사 김국광에게 물건을 내려주다)
상의원(尙衣院)에 전지(傳旨)하여 사은사(謝恩使) 김국광(金國光)에게 모관(毛冠) 1, 초립(草笠) 1, 침속향 영자구(沈束香纓子具) 아청 필단 초피 이엄(鴉靑匹段貂皮耳掩) 1, 아청라 원령(鴉靑羅圓領) 1, 초록라 탑호(草綠羅搭胡) 1, 도홍라 요선 철릭(桃紅羅腰線帖裏) 1, 필단 호슬(匹段護膝) 1, 초록 필단 초피 허흉(草綠匹段貂皮虛胸) 1, 흑사피화(黑斜皮靴) 1, 투혜구 마피화(套鞋具馬皮靴) 1, 투혜구 도자(套鞋具刀子) 1을 내려 주고........【원전】 8 집 480 면

4월 6일(홍윤성·윤자운·김국광·이극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윤성(洪允成)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인산군(仁山君)으로.......김국광(金國光)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원전】 8 집 485 면

5월 22일(좌의정 김국광과 중추부 동지사 정난종을 보내 사제와 승습을 사례하게 하다)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김국광(金國光)·중추부 동지사(中樞芬知事) 정난종(鄭蘭宗)을 〈명나라에〉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서울에 가서 사제(賜祭)와 승습(承襲)을 사례하게 하였다. 백관(百官)이 의식과 같이 표문을 배송하였다......【원전】 8 집 501 면


11월 26일(원상 한명회·김국광이 창덕궁 재실에 나아가 재숙할 것을 청하다)
원상(院相) 한명회(韓明澮)·김국광(金國光)이 아뢰기를,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교시(敎示)하시기를, ‘종묘(宗廟)와 문소전(文昭殿)의 재실(齋室)은 화재(火災)가 날까 두려우니, 온돌(溫?)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문소전일 것 같으면 내가 안으로부터 나와서 잠시 재실에 나아가 제사를 행할 것이고, 종묘일 것 같으면 창덕궁(昌德宮)에 재실이 있으니, 마땅히 그 재실에 나아가 자고 종묘의 북쪽 문으로부터 들어와서 잠시 재실에 나아가 제사를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신(臣) 등의 생각으로는 부묘(?廟)할 때는 바야흐로 날씨가 몹시 춥고 차가울 때인데, 성상께서 만일 종묘의 재실에서 재숙(齋宿)하실 것 같으면 한갓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의 노숙(露宿)하는 일 뿐만 아니라, 깊이 상체(上體)가 염려되오니, 청컨대 창덕궁 재실에 나아가 재숙하게 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옳다.”하였다.【원전】 8 집 538 면

성종2년(1471) 2월 15일(경연에서 윤자운·김국광·정자영 등이 논란을 벌이다)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맹자(孟子)》에서 전에 공부한 것을 읽다가, ‘그러므로 이르기를 혹자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혹자는 몸을 수고롭게 하는데…… 이것이 천하의 공통된 의리이다.’라는 부분에 이르러, 영경연사(領經筵事) 윤자운(尹子雲)·김국광(金國光) 등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르기를[故曰]’이라는 데에서부터 ‘공통된 의리이다.[通義也]’라는 데까지의 내용이 모두 고인(古人)이 한 말입니다.”하니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정자영(鄭自英)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르기를[故曰]’이라는 데에서부터 ‘남에게 다스림을 당한다.[治於人]’라는 데까지가 곧 고인이 한 말입니다.”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태도를 바꾸지 아니하다가 고성(高聲)에 이르게 되어 쟁변(爭辯)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윤자운·김국광이 정원(政院)으로 물러가서 아뢰기를,
“진강(進講)할 때 정자영이 자기의 식견(識見)을 고집하다가 곧 고성(高聲)에 이르렀으니, 신 등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전지하기를,
“이와 같이 논난(論難)하지 아니하면 시비를 분변(分辯)할 수가 없느니라.”하였다.【원전】 8 집 555 면

2월 20일(신숙주·한명회·윤자운·김국광·한백륜 등에게 물건을 내려주다)
명하여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영의정(領議政) 윤자운(尹子雲)·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예조 판서(禮曹判書) 김겸광(金謙光)에게 각각 말 1필(匹)씩을 내려 주고....... 봉숭(封崇)할 때 집사관(執事官)이었기 때문이었다.【원전】 8 집 556 면

8월 8일(좌의정 김국광의 사직 청원을 받아 들이고 선온을 하사하다)
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이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내관(內官) 안충언(安忠彦)에게 명하여 선온(宣?)을 그 집에 하사하게 하고, 유시(諭示)하기를,“경(卿)이 전일에 재차 사직하고, 지금 또 굳이 사직하니, 부득이 이를 따르는 것이다.”하였다.【원전】 8 집 592 면

8월 10일(김국광과 이승소에게 관작을 부여하다)
김국광(金國光)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겸 영경연사(領經筵事)로.......【원전】 8 집 592 면

11월 22일(김국광이 사직을 청했으나 듣지 않고 승정원에 산예역 조역 혁파건의 조사를 명하다)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 와서 아뢰기를,
“근일에 대사헌(大司憲) 김지경(金之慶)이 신의 전죄(前罪)를 들추어서 원상(院相)·영경연(領經筵)을 파하기를 청하고, 대간(臺諫)도 교장(交章)하여 논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학술(學術)이 없고 또 경제(經濟)의 재주도 없어 영경연(領經筵)과 원상(院相)은 참으로 모두 분수가 아니오니, 청컨대 모두 파면하여 주시어 몸을 보전(保全)할 수 있게 하옵소서. 다만 김지경이 전에 대사간(大司諫)이었을 때에, 신(臣)이 방(榜)을 붙인 일을 발설하여, 정언(正言) 김지(金漬)로 하여금 아뢰게 하였다가, 세조(世祖)께서 진노하시고 명하여 끌어내다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국문하게 하신 적이 있었는데, 뒤로부터 김지경이 함혐(含嫌)하고 신(臣)으로 더불어 서로 왕래하지 않았으며, 비록 혹 서로 만나더라도 함께 말하고 웃지도 않았었는데, 김지경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어 온양(溫陽)의 옥(獄)에 갇혔을 때 신이 명을 받들고 국문하게 되니, 김지경이 노(怒)하여 저에게 이르기를, ‘영공(令公)은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김지경이 대사헌(大司憲)이 된 지 얼마 아니되어, 신의 평생 동안에 있었던 죄과(罪過)를 들추어서 아뢰는 것은 반드시 이전의 혐의로써 그런 것입니다. 또 듣건대, 김지경이 아뢰기를, ‘세조(世祖)께서 김국광(金國光)의 기망을 당하여 잘못 산예역(?猊驛)의 조역(助役)을 혁파시켰다.’ 하면서 세조께서 우신(愚臣)에게 기망당하였다고 하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은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니, 번거롭게 사피(辭避)하지 말라.”하였다.
김국광이 다시 아뢰기를,“신은 대간(臺諫)의 말을 혐의하여서 사면(辭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신은 용렬하고 우둔하온데 특히 세조(世祖)의 발탁(拔擢)하는 은혜를 입어 지위가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므로 총애하심이 분수에 넘었으니, 신의 이제 사면은 참으로 적심(赤心)에서 나온 것입니다. 빌건대 윤허를 주시어 신의 소원을 이루게 하소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어서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산예역(?猊驛)의 조역군(助役軍)을 설립(設立)한 것과 혁파(革罷)한 것의 연유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원전】 8 집 613 면


성종3년(1472)  10월 24일(광산 부원군 김국광·도승지 권효상 등이 권호의 일에 대해 아뢰다)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도승지(都承旨) 정효상(鄭孝常)이 아뢰기를,
“권호(權瑚) 등이 노비를 분간(分揀)하는 일은, 하나는 모자(母子)를 분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과 주인이 서로 힐난하는 것이어서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끝까지 추국하여 바른 데로 귀결(歸結)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사증(辭證) 가운데 어긋나는 것이 있는 자, 유지성(柳之盛)·유숙련(柳淑漣) 등 5인을 형문(刑問)하여 귀일(歸一)시키도록 하소서.”하니 전지하기를,
“유지성 등 5인을 형문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우선 형벌 한 차례만 하여 두고, 또 양수사(楊守泗)·노분(盧昐)이 귀손(貴孫)을 순비(順非)의 자식으로 한 것은 다시 국문하라.”하였다.
【원전】 8 집 691 면

성종4년(1473)  2월 26일(광산 부원군 김국광의 어미의 상에 부물을 내려 주다)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의 어미의 상(喪)에 부물(賻物)로,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과 종이 1백 권, 석회(石灰) 40석, 관곽(棺槨)·송지(松脂)·유둔(油芚)을 내려 주었다.【원전】 9 집 11 면

7월 26일(충청도 관찰사 신승선에게 광산 부원군 김국광을 잘 봉양하라고 명하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신승선(愼承善)에게 하서(下書)하기를,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 어미의 상(喪)으로써 연산(連山)에 거주하고 있는데, 늙고 또한 병(病)이 있으니, 경(卿)이 속히 친히 육즙(肉汁)을 권하고 식물(食物)도 갖추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원전】 9 집 42 면

성종6년(1475) 5월 11일(김국광·한보·이전수·성귀달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국광(金國光)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원전】 9 집 222 면



5월 17일(외방의 민폐에 대해서 영사 김국광에게 묻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영사(領事) 김국광(金國光)에게 묻기를,
“경(卿)은 상(喪)을 당하여 외방(外方)에 있었으므로 반드시 민폐(民弊)를 듣고 보았을 것이니, 말해 보도록 하라.”하니, 김국광이 대답하기를,“신이 다른 폐해를 듣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조군(漕軍)이 가산(家産)을 탕진하게 되므로 매우 괴로워하니, 청컨대 구례(舊例)대로 사선(私船)도 아울러 쓰게 하소서.”
하였다. 홍윤성(洪允成)이 아뢰기를,“조군의 폐해는 과연 김국광이 아뢴 것과 같으므로, 지난번 신이 조석문(曹錫文)과 함께 의논하여 사선도 아울러 쓰도록 하는 계책을 아뢰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다시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김국광이 또 아뢰기를,“수령(守令)이 어질더라도 한 고을의 일을 혼자 다스릴 수 없으므로 수호장(首戶長)인 자가 일을 맡아서 그 다스리는 일을 도우니, 수호장이 어질면 한 고을에 폐해가 없을 것인데, 수령이 된 자가 현부(賢否)를 논할 것 없이 제 애증(愛憎)에 따라 일정하지 않게 갈아 내니, 매우 적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경재소(京在所)에서 천거하게 하여, 각품(各品)의 반당(伴?)의 예(例)에 따라 구전(口傳)으로 차정(差定)하되, 그 가운데에서 어진 자는 구임(久任)하여 갈지 말고, 어질지 못한 자는 계문(啓聞)하여 갈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홍윤성에게 묻기를,“이 말이 어떠한가?”하니, 대답하기를,
“경외(京外)의 관리를 신중하게 가려도 탐욕하고 잔혹하며 용렬한 자가 있는데, 더구나 하고많은 고을의 호장(戶長)을 구전(口傳)으로 차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모두 어진 자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갓 자질구레하게 될 뿐입니다. 또 구전하면 간사하고 교활한 서리(胥吏)가 더욱 치장(?張)을 부려서 크게 민폐가 될 것입니다.......
김국광이 아뢰기를,“감사가 어질더라도 겨우 폐막(弊?)을 알게 되자마자 곧 갈려서 돌아오므로 매우 적당하지 못하니, 구임(久任)하는 것이 어떠합니까?”하고, 홍윤성이 아뢰기를,
“주년(周年)이 되면 체임하도록 선왕(先王)께서 법을 세우셨는데, 어찌 익히 생각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조종(祖宗)의 법을 가볍게 고쳐서는 안됩니다.”하고.......【원전】 9 집 227 면


7월 6일(광산 부원군 김국광의 아들 김극니를 경직에 서용하게 하다)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 와서 아뢰기를,“제 아들 김극니(金克?)가 지금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제수(除授)되었는데, 신(臣)의 아내가 병에 걸려서 목숨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으며 신(臣)도 늙었사오니, 고쳐 임명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김극니(金克?)를 경직(京職)에 서용(敍用)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9 집 240 면

성종8년(1477) 1월 25일(정창손·김국광이 이종생의 추안을 아뢰다)
정창손(鄭昌孫)·김국광(金國光)이 이종생(李從生)의 추안(推案)을 아뢰기를,
“도치(都致)가 당초에 이종생에게 고하기를, ‘그 서신을 잃었으므로 입으로 그 뜻을 전합니다.’ 하였는데, 이것은 도치의 간사한 계책이었습니다.”하였다.【원전】 9 집 416 면

7월 14일(김영유·심회·김국광·현석규 등과 조식의 무고죄·군적 경차관의 가자에 대해 논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대사헌(大司憲) 김영유(金永濡)가 아뢰기를,
“본부(本府)에서 명(命)을 받아 홍귀달(洪貴達)·손순효(孫舜孝)를 추국(推鞫)하였더니, 마땅히 공구(恐懼)하여 복죄(服罪)해야 할 것이로되 오히려 스스로 옳다 하고는.........
임금이 말하기를,“어찌 청촉(請囑)하는 것을 들어 주었겠는가? 조식(趙軾)이 무고(誣告)한 것은 오로지 김주(金澍)를 내치고, 그 누이의 재산을 합집(合執)하려고 한 것뿐이다. 내가 들으니, 조식 등은 일찍이 그 누이를 때리고 다리를 몇 번 분질렀다 하니, 마땅히 샅샅이 추문(推問)하여 그 죄를 바르게 하려는데 경(卿)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하였다. 영사(領事) 심회(沈澮)·김국광(金國光)이 대답하기를,
“조식(趙軾)의 무리는 형추(刑推)함이 마땅하며, 홍귀달이 아뢴 것은 그릇되었습니다.”하니,
【원전】 9 집 472 면



7월 22일(손비장·김국광·강희맹 등과 서거정의 일·제도 주현에서의 마추의 견감 등에 대해 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대사간(大司諫) 손비장(孫比長)이 서거정(徐居正)의 서용(敍用)이 그릇됨을 논(論)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 기순(祈順)이 왔을 적에 서로 한가지로 주선하고 창화(唱和)하여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광화(光華)를 더 중하게 한 자는 서거정의 공(功)이었다.”
하니, 영사(領事) 김국광(金國光)이 말하기를,“대간(臺諫)의 말한 바가 옳습니다. 그러나 서거정은 서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김국광이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변고(變故)가 무상(無常)하니, 만일 군흥(軍興)이 있으면, 말을 사육(飼育)하기가 심히 어렵다.’ 하시고, 드디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꼴[芻?]을 쌓아 완급(緩急)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하고....【원전】 9 집 482 면



8월 24일(이조 판서 강희맹이 도총부의 임기에 대해 아뢰고, 이를 김국광에게 묻도록 하다)
이조 판서 강희맹(姜希孟)이 와서 아뢰기를,
“《병전(兵典)》에 이르기를, ‘도총부(都摠府)의 부장(部將) 외에는 모두 임기가 차기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도총부는 구임(久任)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속록(續錄)》에는 구임이라고 칭하지 않았으니, 도총부는 구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하니, 정원(政院)에 명하여 《대전(大典)》을 상정(祥定)한 김국광(金國光)에게 묻게 하였다.【원전】 9 집 493 면



10월 23일(김국광·이훈·이덕량·이예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국광(金國光)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원전】 9 집 520 면



12월 21일(윤사흔·김국광·강희맹·이계손 등과 관화의 중지에 대해 논의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약장(藥匠)의 사상자가 많아서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 관화(觀火)를 그만두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영사(領事) 윤사흔(尹士昕)과 김국광(金國光)이 대답하기를,
“기계(機械)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관화는 무방합니다.”.......【원전】 9 집 539 면

성종9년(1478)2월 21일(김국광 등이 정인지의 재산 증식을 이유로 삼로에 적격치 않음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이세광(李世匡)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이 여러번 정인지를 삼로로 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청하였으나, 아직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정인지가 재산을 불린 것은 온 나라가 다 압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대신에게 물으니, 다 말하기를, ‘정인지는 비록 재산을 불렸다는 이름은 있더라도 그 사람을 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니, 이세광이 김국광(金國光) 등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제 이 대신도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거실(巨室)의 일을 말하기 꺼릴 뿐입니다.”
하니, 김국광이 말하기를,“신이 만일 자세히 안다면 어찌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원전】 9 집 560 면



6월 2일(김국광·윤필상·홍응·어유소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국광(金國光)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원전】 9 집 609 면



6월 3일(김국광이 상장하여 사직하기를 청함에 이를 수락하다)
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이 상장(上狀)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신(臣)은 용렬하고 어리석은데, 외람되게 세조(世祖)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날마다 옆에 모시면서 윤명(綸命)을 출납(出納)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가, 드디어 중인(衆人)의 비방(誹謗)을 받았습니다. 지난 경인년에 언관(言官)이, 신의 사위 이한(李?)이 상언(上言)한 일을 가지고 신이 지휘한 것이라 하며 여러번 신에게 죄주기를 청하므로, 신이 세 번 소(疏)를 올려 사직(辭職)코자 하니, 전교(傳敎)하시기를, ‘의정 대신(議政大臣)은 대간(臺諫)의 말로 인하여 바꿀 수는 없으나 경(卿)이 굳이 사양하니, 원상(院相)만은 그대로 맡으라.’ 하셨는데, 성상의 그 말이 분명하고 성은(聖恩)이 흡족하니,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신은 지금 9년 동안 분수를 지키고 시종(侍從)하면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는데, 이번에 또 다시 의정(議政)을 제수(除授)하시니, 성상의 은혜가 너무도 무거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세 번 다시 생각해보니, 신같이 용렬한 자로써 다시 의정직(議政職)을 맡는다는 것은, 헤아려보면 분에 넘치는 것이어서 놀라고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지극한 심정을 가엾게 여기셔서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남은 여생을 보전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이 경의 일을 적극 말하고 있으니, 경이 어찌 안심하겠는가? 특히 경의 소원을 따라 경의 마음을 편하게 하겠다.”하였다.【원전】 9 집 610 면

6월 3일(김국광을 체차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을 체차(遞差)하라. 옛날에 삼공(三公)의 적임자(適任者)가 없으면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대체로 그 책임이 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직임(職任)을 맡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있으면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옳겠는가? 육조 판서(六曹判書) 가운데에는 승진시킬 만한 사람이 없는가? 이조(吏曹)에 물어보라.”하였다.【원전】 9 집 610 면

6월 29일(김국광·김유·윤효손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국광(金國光)을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원전】 9 집 620 면



성종13년(1482) 3월 11일(김극뉵이 아버지 김국광의 시호가 잘못 지어져 고쳐줄 것을 상소하다)
김극뉵(金克?)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은 아비의 시호(諡號)에 대한 원통함을 가지고 면류(冕旒)의 아래에서 여러 차례 모독하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비와 아들 사이는 천성(天性)의 친(親)한 것입니다. 그러니 신 등이 만일 이 원통한 것을 신원(伸?)하지 못하면 하루라도 살아가기 어렵겠으며, 다른 날에 무슨 면목(面目)으로 선인(先人)을 지하(地下)에서 따라가겠습니까? 정리상 매우 급한 일이기에 성상을 모독하는 큰 죄가 됨을 알지 못한 것이니 엎드려서 성상의 인자(仁慈)하신 은덕을 바랍니다.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름과 사실은 서로 맞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조그마한 일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더구나 시호(諡號)는 사람의 도리에 큰 일이고 조정의 중요한 의전(儀典)이니, 어찌 이름이 그 사실에 어긋나게 하겠습니까? 태상(太常)에서 신의 아비의 시호를 의논하여 정(丁)자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김국광(金國光)이 두 번이나 상부(相府)에 들어가고 동생과 사위가 장물죄(贓物罪)를 범하였다 하여 대간에서 반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간의 반박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비방입니다. 동생과 사위가 〈장물죄를〉 범한 것은 아비나 형에게 관련되지 않는 것이니, 신 등은 정(丁)의 시호가 신의 아비에게 맞는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의논에는 순수하게 여기는 이도 있고 잡박(雜駁)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는데, 순수하게 여기는 이들은 ‘고치는 것이 맞겠다.’ 하고, 잡박하게 여기는 이들은 말하기를, ‘유려(幽?)라고 이름이 붙여지면 자손들이 그 시호를 고칠 수 없으며, 공론(公論)에서 나왔기 때문에 〈시호를〉 고치는 단서를 열 수 없다.’는 두어 마디의 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유(幽)와 여(?)의 시호는 그의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기에 자손들이 과연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맞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공론에 구애된다 하여서 고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이름과 사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헤아리지 아니하고 범연(泛然)히 ‘시호는 가볍게 고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론이란 어찌 〈시호는〉 고치지 못한다는 데에만 있고 ‘다시 고쳐야 한다.’는 데에는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는 시호라면 참으로 경솔하게 고쳐서 단서를 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맞지 아니하는 〈시호라면〉 자손들이 마땅히 호소하여 고쳐야 하며, 조정에서도 마땅히 의논하여 고쳐줌으로써 일세(一世)의 공론을 완전하게 하고 만세(萬世)의 공의(公議)를 보여줌이 공도(公道)의 다행함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아비의 시호를 정(丁)이라 한 데 대하여 고쳐햐 한다고 하는 자가 몇 사람이며 고칠 수 없다고 하는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만,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기에는, 그 〈시호를 고치는 것이〉 옳다든지 옳지 못하다든지의 수의 다소(多少)에 따라 시론(時論)에 맞추어 주시면 공도(公道)에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신 등이 하늘에 부르짖고 호읍(呼泣)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에, 드디어 예와 이제의 것을 참고하고 서사(書史)를 열람하여서 〈시호를 고친 이가〉 한(漢)나라에서는 몇 사람이고 진(晉)나라에서는 몇 사람이며 당(唐)나라에서는 몇 사람이고 송(宋)나라에서는 몇 사람이며, 우리 조정에서는 몇 사람이나 되는지를 삼가 조목을 들어 아뢰겠습니다. 한(漢)나라의 오한(吳漢)은 시호가 무(武)였었는데 특별히 충(忠)으로 고쳤고, 진(晉)나라의 하증(何曾)은 시호가 무추(繆醜)였었는데 특별히 효(孝)로 고쳤으며, 또 그의 아들 하소(何邵)가 스스로 표(表)를 올려 원(元)으로 고쳤고, 왕술(王述)의 시호는 목(穆)이었는데 특별히 간(簡)으로 고쳤고, 가충(賈充)의 시호는 황(荒)이었는데 특별히 무(武)로 고쳤고, 곽혁(郭奕)의 시호는 목(穆)이었는데 조명(詔命)을 내리기를, ‘시호는 그의 덕(德)과 행(行)을 정표(旌表)하는 것이다.’ 하여 특별히 간(簡)으로 고쳤고, 등수(?脩)의 시호는 성(聲)이었는데 그의 아들 등병(?幷)이 표(表)를 올렸기에 특별히 충(忠)으로 고쳤으며, 당(唐)나라의 봉윤(封倫)의 시호는 명(明)이었는데 뒤에 무(繆)로 고쳤고, 우문 사급(宇文士及)의 시호는 공(恭)이었는데 뒤에 종(縱)으로 고쳤고, 소우(蕭瑀)의 시호는 숙(肅)이었는데 특별히 정(貞)으로 고쳤으며, 진숙달(陳叔達)의 시호는 무(繆)였는데 뒤에 충(忠)으로 고쳤으며, 송경례(宋慶禮)의 시호는 전(專)이었는데 그의 형의 아들 송사옥(宋辭玉)이 호소하여 경(敬)으로 고쳤고, 두섬(杜暹)의 시호는 정숙(貞肅)이었는데 그의 아들 두열(杜列)이 호소하여 정효(貞孝)로 고쳤고, 이길보(李吉甫)의 시호는 공의(恭懿)였는데 충의(忠懿)로 고쳤으며, 신비(辛秘)의 시호는 숙(肅)이었는데 뒤에 의(懿)로 고쳤고, 왕지원(王知遠)의 시호는 승진(升眞)이었는데 뒤에 승현(升玄)으로 고쳤으며, 원재(元載)의 시호는 황(荒)이었는데 뒤에 성종(成縱)으로 고쳤고, 왕무준(王武俊)의 시호는 위열(威烈)이었는데 특별히 충렬(忠烈)로 고쳤고, 우적(于?)의 시호는 여(?)였는데 그의 아들 우계우(于季友)가 호소하여 특별히 사(思)로 고쳤고, 배광정(裵光庭)의 시호는 극평(克平)이었는데 특별히 충헌(忠憲)으로 고쳤으며, 송(宋)나라의 하주(何鑄)의 시호는 통혜(通惠)였는데 그의 집에서 사퇴(辭退)하였기에 특별히 공민(恭敏)으로 고쳤고, 왕요신(王堯臣)의 시호는 문안(文安)이었는데 그의 아들 왕동로(王同老)가 아비의 공을 말하여서 특별히 문충(文忠)으로 고쳤으며, 장강(張綱)의 시호는 문정(文定)이었는데 그의 손자 장부(張釜)가 두 번 청하여서 특별히 장간(章簡)으로 고쳤고, 노종도(魯宗道)의 시호는 강간(剛簡)이었는데 특별히 숙간(肅簡)으로 고쳤으며, 사숭지(史嵩之)의 시호는 충간(忠簡)이었는데 뒤에 장숙(莊肅)으로 고쳤고, 사호(史浩)의 시호는 문혜(文惠)였는데 뒤에 충정(忠定)으로 고쳤고, 진강백(陳康伯)의 시호는 문공(文恭)이었는데 뒤에 문정(文正)으로 고쳤고, 진항(奏杭)의 시호는 문간(文簡)이었는데 특별히 문숙(文肅)으로 고쳤고, 전유연(錢惟演)의 시호는 문묵(文墨)이었는데 그의 집에서 호소하여 특별히 사(思)로 고쳤다가 또 그의 아들 전애(錢曖)가 호소하여 특별히 문희(文僖)로 고쳤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는 안황(安荒)이었는데 특별히 양경(良敬)으로 고쳤습니다. 이렇게 한(漢)나라·당(唐)나라·진(晉)나라·송(宋)나라의 것을 고찰하여 보아도 이미 저와 같았고, 우리 조정의 것을 고찰하여 보아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는 모두 사람의 행적이 선(善)하였던가 악(惡)하였던가에 인하여 시호를 고쳐 주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사실이 맞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진집중(陳執中)·하송(夏?)의 시호만은 고쳤다가 반박이 있었던 것은 그의 전의 시호는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았지만 뒤의 시호는 이름과 사실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름과 사실이 맞지 않으면 고쳐주고 서로 맞으면 고쳐 주지 아니하는데, 이것이 제왕(帝王)의 시호를 제정하는 통의(通義)입니다. 하물며 《사기(史記)》의 시법(諡法) 해석에, ‘시(諡)라는 것은 행실의 자취이고, 호(號)라는 것은 공(功)의 표창이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옛날에 큰 공이 있으면 선(善)한 호를 주어서 칭한다.’ 하였습니다. 이제 신의 아비는 큰 허물과 이지러진 행실이 없었으며 견마지로(犬馬之勞)가 조금 있었는데도 오히려 평상(平常)의 호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 어찌 옛날 시호를 제정한 뜻이라 하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 신의 아비의 시호가 신의 아비의 행적에 맞지 않음을 알지 못함이 아니지마는, 특별히 그러한 단서를 열게 되는 것을 염려하여 다시 고치기를 신중히 하는 것이니, 이는 전하께서 먼 〈후세까지를〉 염려하는 뜻이 지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기에는 천하의 일은 옳은 것과 그른 것들 뿐입니다. 그러니 이 일이 참으로 옳았던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고쳐서는 아니될 것이고, 일이 참으로 그릇된 것이라면 백 번 고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주요한 것은 옳은 대로 귀착(歸着)시킬 뿐입니다.
신 등이 그윽이 예전과 지금의 시호를 관찰하건대, 선(善)한 이에게는 선한 것으로 악한 이에게는 악한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아비의 시호에만은 ‘의(義)를 펴되 이루지 못하는 것을 정(丁)이라 하고, 자기 몸을 삼가하고 말이 적되 맞게 하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그 사람됨이 이미 의를 펴되 이루지 못하는 행적이 있다면, 어떻게 자기 몸을 삼가하고 말이 적되 맞게 하는 이치가 있다 하겠습니까? 이미 자기 몸을 삼가하고 말이 적되 맞게 하는 행적이 있다면, 반드시 의를 펴되 이루지 못하는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정(丁)과 정(靖)의 뜻은 크게 서로 모순(矛盾)됩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행적에 같이 붙이는 것은 또한 도리에 어그러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물건에 비유한다면 배와 수레를 같이 가게 한다든지 얼음과 숯불을 한 그릇에 두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뒤에 시호를 의논하는 자가 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후세(後世)에 전하여 보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것을 옳다고 이르겠습니까? 정(丁) 자가 아비의 행적에 이미 관련된 것이 없으며, 또 정(靖) 자와 정(丁) 자는 뜻도 서로 반대가 됩니다. 엎드려 성상의 인자하심을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신(人臣)으로서 추(醜)한 시호를 받은 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자손으로서 이를 원통하게 여기어 진정하여 호소한 자가 하소(何邵)·등병(?竝)·송사옥(宋辭玉)·우계우(于季友)·왕동로(王同老)·장부(張釜)·전애(錢曖)에 그친 외에는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행적에 맞는 것이라면 비록 추(醜)와 황(荒) 자처럼 나쁜 글자라도 그의 자손들이 어찌 그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 호소하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의 행적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라도 마땅히 그 자손들의 호소를 들어서 이미 이루어진 명령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만세의 공론입니다. 어찌 신 등에게서 단서가 열리어 후일에 이러한 일들이 봉기(蜂起)한다 하겠습니까? 그러니 신의 아비의 일 같은 것은 천일(天日)이 내려다보고 성명(聖明)하신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그의 선(善)한 것을 빠뜨려서 악한 시호로써 더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들으니, ‘태종 때에 조준(趙浚)은 조정의 비방을 받아 극형(極刑)에 두자는 논박(論駁)까지 있었지마는 그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세종 때에 안숭선(安崇善)은 중한 죄에 연좌되어 관직(官職)이 깎이고 유폄(流貶)까지 되었지만 그의 시호는 문숙(文肅)이라 하였고, 세조 때에 이징옥(李澄玉)이 대역(大逆)의 죄를 범하였지만 그의 형 이징석(李澄石)의 시호는 강무(剛武)라 하였다.’ 합니다. 더구나 신의 아비는 근거 없는 비방을 받은 것이 그 유(類)가 조준의 논박받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안숭선의 유폄(流貶)에 좌죄(坐罪)된 것과도 다릅니다. 그리고 자제(子弟)의 허물이 있는 것도 이징옥의 대역을 범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데도 시호를 얻는 것이 도리어 위의 세 사람의 예와 같지 않기에 신이 그윽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한(漢)나라·진(晉)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 밝은 임금과 어진 재상들이나 또는 우리 태조의 총명하신 성지(聖智)로써 어찌 시호를 고치는 단서를 열어서는 아니됨을 몰랐겠습니까? 그런한데도 반드시 고쳐준 것은 참으로 고쳐주지 아니하여 그의 사실을 인몰(湮沒)시키는 것이 차라리 고쳐 주어서 옳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호가 맞지 않아 고쳐준 것은 당시에도 잘못하였다는 의논이 없었고, 후세에도 그르다는 의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혹은 ‘고쳐 주어서는 아니된다.’ 하니, 이것은 신 등이 알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옛날에는 아비를 위하고 할아비를 위하고 남편을 위하고 숙부(叔父)를 위하여 진정하여 호소한 이로서 한 사람도 고쳐 줌을 받지 못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만은 충성과 효도가 부족하여서인지 아직 회천(回天)의 힘이 없어서 상소를 다섯 번 올렸어도 회보(回報)가 없고, 궁문 밖에서 아홉 번 울부짖어도 신원(伸?)이 되지 못하니, 간담(肝膽)이 찢어지는 듯하여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중한 주형(誅刑)도 피하지 않고 수다스럽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신의 아비가 신이 아니면 지하(地下)에서 원통함을 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 등의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한(漢)나라·진(晉)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의 옛 제도를 상고하시고 우리 나라 조정의 태조께서 이뤄놓은 헌장(憲章)을 준수하시어, 여러 의논들을 널리 모아 사실에 따라 개정하게 하여서 태사(太史)로 하여금 크게 기록하기를, ‘아무가 죽음에 시호를 아무[某]라 하였던 것을 그의 아들 아무 등이 호소하였기에 시호를 아무로 고친다.’ 하게 하여, 그 사실을 매몰(埋沒)되지 않게 하심이 참으로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신의 아비의 시호를 고침으로써 전하의 성명(聖明)에 흠이 생긴다든지 또는 전하의 치적(治績)에 누(累)가 있다면 그만이겠지만, 서사(書史)에 상고하여도 잘못됨이 없고 귀신에 물어보아도 의심됨이 없으며 백세(百世)의 뒤에 성인(聖人)을 기다리더라도 의혹됨이 없는 일인데, 아직 전하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니, 신 등의 어리석고 미혹(迷惑)함으로써 다만 애통함만 더할 뿐이어서, 간(肝)을 갈라 종이를 만들고 피를 쏟아 글씨를 쓰면서 떨어지는 눈물과 박절(迫切)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하였는데,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어찌 일시(一時)적인 사사로운 말[私言]로써 만세의 공의(公議)를 고치겠느냐? 인정으로는 비록 박절한 듯하지만 도리로 봐서는 따르기 어렵다.”하고,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원전】 10 집 308 면

7월 18일(김극뉵이 그 아비 김국광의 시호를 고쳐 주기를 상소하다)
초토(草土)의 신하 김극뉵(金克뉴)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 등이 태상(太常)에서 신의 아비의 시호(諡號)를 의논한 것이 공정치 못하다는 일을 가지고 여러 번 상소하여 여섯 번째에 이르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슬픔을 머금고 원통한 마음을 지닌 채, 아침저녁으로 운 것이 하루나 한 달이 아닙니다. 신의 아비의 행실이 만약 시호에 적합하다면 신 등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성청(聖聽)을 더럽히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시호란 것은 실덕(實德)을 기록하여 〈후세에〉 권하고 경계하는 것을 드리우는 것입니다. 만약 선행(善行)의 실상이 있는데도 더러운 시호를 얻거나, 악행(惡行)의 실상이 있는데도 아름다운 시호를 얻는다면, 이는 옳고 그름을 그릇되게 하여 다음 세대를 속이는 것이니 장차 무엇으로 믿음을 취하여 권하고 경계함을 드리우겠습니까? 지금 대간(臺諫)이 동생과 사위의 범죄가 있음을 논박(論駁)함이 있어 신의 아비가 결점이 있다고 지적하여 ‘정(丁)’으로 시호를 한 것입니다. 이른바 대간의 논박이란 것은 다만 익명서(匿名書)에 의한 것인데, 익명서는 신의 아비가 세조조(世祖朝) 때에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맡아서, 임금의 총애가 날로 융성(隆盛)하여, 이를 꺼리는 자가 음중(陰中)의 술책으로 뜬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세조께서 요·순(堯舜)과 같은 밝으심으로 신의 아비가 그러한 사실이 없는 것을 밝게 아시고 전교하시기를, ‘김국광(金國光)은 결단코 이런 일이 없다.’고 하시며, 도리어 그 때에 간원(諫員)이 탄핵하는 것을 허물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조(當朝)에 이르러서는, 신의 아비가 두 번째로 상부(相府)에 들어가니 간관(諫官)이 이것을 지적하여 논박하므로 전하께서도 전일의 일을 상고하여 사실이 없음을 분변하였으나, 신의 아비가 진정(陳情)하여 굳이 사양한 뒤에 정승만을 면하기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물며 익명서는 본래 허위(虛僞)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율문(律文)에서 금하는 것이니, 진실로 신의 아비에게는 손익(損益)이 없습니다. 더구나, 세조께서 앞서 분변하시고 전하께서 뒤에 분변하시어, 만에 하나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동생과 사위가 범한 것은 모두 동생과 사위 자신의 실수입니다. 동생과 사위의 몸은 신의 아비의 몸이 아니므로, 동생과 사위의 실수는 신의 아비의 실수가 아닙니다. 신 등은 모르긴 하나, 아비의 시호인 ‘정(丁)’ 자가 실덕(實德)에 합하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선악(善惡)은 속에 쌓이면 반드시 밖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의 아비가 진실로 의(義)를 행하는 데 능하지 못한 실상이 있었다면, 자연히 밖에 드러났을 것입니다. 신의 아비는 조금도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 악한 이름이 만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신 등은 마음이 아픕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니, 의(義)를 행하는 데 능하지 못함을 정(丁)이라 한다.’ 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능히 의(義)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였으며,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을 적게 함을 정(靖)이라 한다.’ 하고, 주에 이르기를,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으니, 말이 적은 것이 적중(適中)하다.’고 하였으니, ‘정(丁)’과 ‘정(靖)’ 두 글자의 뜻은 선(善)과 악(惡)이 상반(相反)된 것인데, 신의 아비의 한 몸의 시호를 〈이 두 가지로〉 합하여 지었으니, 이는 선과 악이 서로 섞였으며, 시호를 명하는 예(例)에도 어긋남이 있습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건대, 신의 아비가 평생(平生)에 자신의 허물이 없는데, 시호가 맞지 아니함이 이미 이와 같고, 예(例)를 어김이 또한 이와 같으니, 태상(太常)에서 신의 아비에게만 시법(諡法) 쓰는 것을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 등은 마음이 아픕니다. 신 등이 아비의 묘갈(墓碣)에 시호의 글자를 넣으려고 하였으나 붓을 들고 서로 말하기를, ‘아버지의 시호인 「정(丁)」자는 이미 〈행실과〉 서로 맞지 아니한데, 맞지 아니하는 시호를 만세에 전하여 보일 수 없으니, 어찌 성명(聖明)한 임금 밑에서 억울함을 펴지 못할 이치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돌을 어루만지며 장차 쓰려고 하다가 다시 그만둔 것은, 특별히 전하의 밝으심으로 신 등의 마음을 어여삐 살피실 것을 믿은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의 억울함을 품은 심정을 애처롭게 여기시고, 신의 아비의 온전함을 무너뜨린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특별히 시호를 고치기를 명하시면, 신의 아비의 원통함을 구천(九泉) 밑에서 펼 수 있을 것이며, 신 등의 심정도 백일하(白日下)에 펼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원전】 10 집 359 면

7월 20일(김국광의 시호를 고치는 것을 대신들과 의논해 고칠 수 없다고 하다)
김국광(金國光)의 시호(諡號)를 의논한 것을 정승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지금 만약 시호를 고치면 반드시 예(例)가 될 것이므로, 나는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정창손(鄭昌孫) 등이 아뢰기를,“고치는 것은 과연 적당치 못합니다.”
하고, 홍응(洪應)은 아뢰기를,“신 등이 고치자고 하는 것은, 다른 시로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당초에 시호를 의논한 계본(啓本) 가운데의 글자는 모두 김국광의 평생 동안의 행적(行跡)이므로, 그 가운데의 글자를 따서 고치자고 한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만약에 그 가운데에서 ‘공(恭)’자와 ‘양(襄)’자를 취하여 시호로 하면, 어찌 이 시호보다 낫겠는가? 고칠 수 없다.”하였다.【원전】 10 집 362 면

11월 1일(김국광의 시호를 고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일은 공정하게 아니할 수 없다. 만약 행실이 착하지 못한데도 죽어서 아름다운 시호를 얻으면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며, 행실이 착한데도 죽어서 나쁜 시호를 얻으면 착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이름을 유려(幽?)라고 하면 비록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라도 백세토록 고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김국광(金國光)이 생전에 행한 바를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이미 시호를 정하였는데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하자, 지사(知事) 이파(李坡)가 말하기를,
“시호를 의논하는 것은 큰 일이니 봉상시(奉常寺) 관원을 고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행(操行)이 있는 이를 골라 겸관(兼官)으로 삼아서, 비록 항상 출근하지 않더라도 시호를 의논할 때에는 함께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그렇게 하라.”하였다.
【원전】 10 집 404 면



성종15년(1484)10월14일(행부사직 김극뉵이 상서하여 김국광의 시호를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극뉵(金克?) 등이 상서(上書)한 대략에 이르기를,
“신의 아비가 오랫동안 나라의 정권을 잡아 바름을 지키고 아부하지 아니하니, 소인(小人)이 속으로 꺼리는 것은 형편상 당연한 것입니다. 무릇 군자(君子)를 모함하는 자가 햇볕처럼 밝은 주상 밑에서 간사한 꾀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비방(誹謗)하는 말을 퍼뜨려서 조정의 시청(視聽)을 현혹하게 하므로 율문(律文)에는 단지 ‘성명(姓名)을 숨긴 문서(文書)에 고해 말한 사람만 죄에 저촉되고, 피고자(被告者)는 죄주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신의 아비에게만 이 비어(飛語)를 들어서 사실로 논하여 신의 아비의 시호를 ‘술의불극(述義不克)’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론(公論)입니까? 또 아비가 아들에게와 형이 동생에게는 비록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고 하나 아들의 범한 바가 아비에게 간여됨이 없고, 동생의 범한 바가 형에게 간여됨이 없기 때문에 단주(丹朱)의 악함이 요(堯)의 덕을 더럽힐 수 없고, 관·채(管蔡)의 악함이 주공(周公)의 착함을 더럽힐 수 없는데, 신의 아비만이 제서(弟壻)의 범한 바를 들어서 실덕(實德)으로 논하여 악한 시호를 더하였으니, 또한 어찌 공론이라 하겠습니까? 봉상시(奉常寺)에서 어떤 일이 신의 아비의 잘못임을 적실히 말하지 아니하고, 단지 유언비어의 비방(誹謗)과 제서(弟壻)의 범한 것만 들어서 시호를 의논하는 사실로 삼았으니,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되며, 후세를 경고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의 아비가 죽은 뒤에 잘못된 시호를 얻어 지하(地下)에서 원통함을 품었으나, 다만 유명(幽明)이 막혔으므로, 밝은 햇볕 아래에서 스스로 억울함을 펼 수가 없어 반드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신 등은 아비의 몸을 나누었는데 아비의 억울함을 성명(聖明) 밑에서 펴지 못하니, 그래도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어질고 사랑하심으로써 특별히 정(丁) 자(字) 하나만 고쳐 주시면 신의 부자(父子)가 그 억울함을 펴게 될 뿐만 아니라 공도(公道)도 이를 힘입어서 밝아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보이게 하니,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는 의논하기를,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전교하시기를, ‘재상(宰相)의 행실이 선과 악이 서로 반(半)이 되면 그 선한 것을 취하여 시호(諡號)를 정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김국광(金國光)의 시호 정자(丁字)는 비록 지극히 악한 것은 아니나 아름다운 시호는 아닙니다. 예전이나 우리 조정에서 모두 시호를 고친 예(例)가 있으니, 개정하기를 명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김국광이 성조(聖朝)를 섬김에 있어 공적이 또한 드러났고, 세조조(世祖朝)에 비록 한때의 비방(飛謗)이 있었으나 어찌 다 사실이라 하겠습니까? 대저 국정(國政)을 오래 잡는 자는 헐뜯음과 기리는 것이 겸하게 됩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이미 의논해 아뢰었으니, 전부 고칠 수는 없고, 다만 의논해 올린 글자가 하나만이 아니니, 그 가운데 골라서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제 선성(宣城)의 의논을 보건대, ‘성(晟)의 일은 여태자(戾太子)의 일과 같지 아니하니, 고치는 것이 무방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정대(正大)한 의논이 아니다. 여태자는 무제(武帝)가 생존했을 때에 군사를 막고 반역하였고, 지금 성은 비록 제집의 여종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죽여서 꺼림이 없었으니, 임금을 경멸한 것이다. 또 시호는 공론으로 정하는 것인데, 이제 만약 수의(收議)하여 고치면 뒤에 할아비와 아비의 시호를 고치려고 하는 자가 장차 어지럽게 일어날 것이니, 단서를 열 수 없다. 또 김국광(金國光)의 시호는 승정원(承政院)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김종직(金宗直)·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우승지(右承旨) 성건(成健)은 아뢰기를,
“신 등이 전에 홍문관(弘文館)에 있을 때에 이미 고칠 수 없다는 뜻으로 계달하였습니다.”
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 한찬(韓?)·우부승지(右副承旨) 안침(安琛)·동부승지(同副承旨) 이세우(李世佑)는 아뢰기를,“봉상시(奉常寺)에서 이미 시호를 정하였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만약 고칠 수 있다면 창원군(昌原君)은 나에게 숙부(叔父)가 되니, 마땅히 먼저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호는 공론이 있는 바인데, 한 번 그 단서를 열면 끝에 가서는 금하기 어려우니, 모두 고치지 말라.”하였다.【원전】 10 집 632 면

성종20년(1489) 1월 15일(김국광의 시호 문제를 의정부 등에 논의하게 하다)
전(前) 참의(參議) 김극뉵(金克?)이 상소하여 그 아버지의 시호(諡號)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보이게 하니,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의 재주와 덕이 높은 것은 신이 다 알지 못하나, 다만 세조조(世祖朝)에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때에 병조 판서로서 장막 속에서 토벌의 계략을 획책하여 그 때에 공이 있었고, 또 예전에도 시호를 고친 때가 있었으며 또 국가에 손실이 없으니 시호를 고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김극뉵이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함이 이처럼 지극함에 이르니, 진실로 가긍합니다. 그 아비 김국광이 세조의 지우(知遇)를 입어 힘을 베푼 것이 가장 오래 되었고, 또 드러난 허물이 없는데, 한갓 한때의 비방(誹謗)을 입은 까닭으로써 시호를 정(丁)으로 주었으니, 오히려 의논할 만합니다. 당초 봉상시(奉常寺)에서 의논한 바의 시호 글자 안에서 평평(平平)한 글자로 고쳐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홍흥(洪應)은 의논하기를,“김극뉵의 상소가 지극히 간절하나, 이미 일찍이 전교를 내려 성상의 뜻을 유시(諭示)하였고, 또 고칠 수 없다는 뜻을 보였는데, 이제 다시 거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으며,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김극뉵이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한 번만이 아니며 신 등이 시호를 의논한 것도 한 번만이 아닙니다.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면 다시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봉상시에 명을 내려서 평생 행정(行跡)에 의거하여 다시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의논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으며,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시법(諡法)에 유려(幽?)라 이름지었으면 비록 효도하는 아들과 사랑하는 손자가 있을지라도 능히 고칠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고금의 바꿀 수 없는 논의입니다. 김극뉵이 이 앞서 여러 번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여 별도로 교서(敎書)를 내렸으므로 천은(天恩)이 지극히 중한데, 이제 또 글을 올렸으니, 진실로 번독(煩瀆)됩니다. 들어주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예전에 시법(諡法)을 세운 것은 대체로 조정에 있는 이가 그 불의(不義)를 행하면서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게 되면, 한때의 기세(氣勢)가 두려워서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죽은 뒤에 악한 이름을 더하여 그 자손에 무궁토록 경계하기 위한 것이니, 이는 공도(公道)입니다. 유려(幽麗)라고 이름지었으면 비록 효도하는 아들과 사랑하는 손자가 있을지라도 고칠 수 없습니다. 김극뉵이 아들로서 아비의 시호를 민망히 여겨서 상소를 번거롭게 함이 이에 이르렀으나,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며,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이제 김극뉵의 상소의 말을 보니 가긍스러움이 있는 것 같으나, 아름답지 못한 시호를 더한 자에게 문득 자손의 호소로 인하여 고치면 반드시 장래의 폐단이 있을 것이니, 가볍게 고치기가 어려울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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