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 史 돋 보 기

제목: 조선왕조실록(諱 瞻)
이름: 孤巖/準一


등록일: 2015-12-07 19:59
조회수: 997 / 추천수: 60


조선왕조실록(諱 瞻)

  [전 우군 총제 김첨의 졸기 태종 18년 무술(1418, 영락 16) 5월 4일(계축)]

전 우군 총제(右軍摠制) 김첨(金瞻)이 졸(卒)하였다. 김첨의 자(字)는 자구(子具)이요, 옛 이름은 구이(九二)인데, 광주(光州) 사람으로서 자혜부윤(慈惠府尹) 김회조(金懷祖)의 아들이었다. 10세에 속문(屬文)에 능하였고, 장성하게 되자 경사(經史)·제자(諸子)에 두루 통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육통증(肉通證)’이라 하였다. 병진년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하여 친어군(親禦軍) 호군(護軍)·예문 응교(藝文應敎)에 이르렀다. 임신년 여름에 정몽주(鄭夢周)를 아첨하여 섬겼다고 하여 유배되었다가, 기묘년에 발탁되어 봉상 소경(奉常少卿)이 되어 몇해 동안에 갑자기 화요(華要)의 직임에 옮겨져, 드디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겸 예조 전서(禮曹典書)에 제수되었다. 갑신년 여름에 여직(女直)의 유민(遺民) 동경(?景)·왕가인(王可仁) 등이 우리 나라 함주(咸州) 이북이 옛날 요(遼)나라·금(金)나라의 땅이라고 황제(皇帝)에게 아뢰어, 황제가 칙서(勅書)를 내려 10처인민(十處人民)을 수색하게 하였다. 임금이 김첨을 보내어 계품(啓稟)하여 그대로 본국(本國)에 속하게 허락하여 달라고 빌었다. 김첨이 경사(京師)에 이르니, 동경 등이 오히려 아둔하고 어리석어 예부(禮部)에 호소하므로, 김첨이 예부에 고(告)하기를,“만약 요(遼)나라·금(金)나라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하면, 허실(虛實)은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하였다. 예부관(禮部官)이 옳게 여겨, 이에 두 나라의 지리지를 상고하니 과연 10처 지명(十處地名)이 없었으므로, 갖추 사실대로 아뢰었다. 황제가 김첨에게 이르기를,“조선(朝鮮)의 땅도 또한 짐(朕)의 법도 안에 있는데, 짐이 무엇 때문에 다투겠는가? 이제 청(請)한 것을 허락하겠다.”하니, 김첨이 고두(叩頭)하여 사례(謝禮)하였다. 이날 봉천문(奉天門)에서 시연(侍宴)할 때 김첨이 구호(口號)로 말하였다.

“황제의 의장(儀仗)을 몸소 보니 일표(日表)가 밝은데,
배신(陪臣)을 은혜로 대우하니 영광(榮光)이 갑절일세,
영서(靈犀)는 못가에 있어 신기한 서기(瑞氣)를 보이고,
순상(馴象)이 문전에 당하여 어지러운 행렬을 금하네.
만세의 옥잔으로 수주(壽酒)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구성(九成)의 소악(韶樂)은 즐거운 성음(聲音)을 연주하네,
하정(下情)이 상달(上達)되어 백성은 유감이 없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니 태평(太平) 세월 누리네.”
태감(太監) 황엄(黃儼)이 이를 아뢰고 나와서 김첨에게,
“그대의 시(詩)에 황제가 깊이 찬탄하였다.”하였다.
사신이 돌아오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전지(田地) 50결(結)을 내려 주고,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로 전직하였다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고쳤다. 김첨이 본래 민씨(閔氏)에 당부(黨附)하였는데, 민씨가 죄를 얻게 되자, 김첨도 또한 벼슬에서 쫓겨나서 몸을 마쳤다. 김첨은 전고(典故)를 잘 알고 음률(音律)에 자못 밝아서 의례(儀禮)를 상정(詳定)하는 데 김첨이 반드시 참여하였고, 또 왕지(王旨)를 받들어 아악(雅樂)을 교정(校正)하였다. 그러나, 그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고 잡되어 불씨(佛氏)를 좋아하고 도교(道敎)를 받들어, 일찍이 상서(上書)하여 문묘 석전(文廟釋奠)에 소[牛]를 희생(犧牲)하는 것을 없애자고 청하였다가 유사(有司)에게 탄핵을 당하니, 사림(士林)에서 이를 비웃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65세였고, 아들이 하나이니, 김자경(金資敬)이었다.【원전】 2 집 220 면

[김첨(金瞻) 인물정보 요약]
- 1354(공민왕 3)∼1418(태종 18).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산. 초명은 구이(九二),
   자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 광주(光州)출신. 자혜부윤(慈惠府尹) 회조(懷祖)의 아들이다.
-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뒤, 친종호군(親從護軍)·우사간(右司諫)·예조전서(禮曹典書)·예문관제학
  (藝文館提學)·대사헌·경연관(經筵官) 등의 관직을 거쳤다.
- 1390년(공양왕 2)에 개성의 5부와 각 도의 목(牧)·부(府)에 있는 유학교수관(儒學敎授館)에 원자와
  종실의 자제들이 입학하도록 상소하였고,
- 1392년(태조 1)에는 정몽주와 내란을 음모하였다는 혐의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었다.
- 1404년(태종 4)에 태종이 성수초례(星宿醮禮)를 상정(詳定)하게 하자 도관(道觀)인 태청관(太淸觀)의
  보수와 천황대제(天皇大帝)의 재초(齋醮)도 함께 진언하였다.이에 대해 권근(權近)·하륜(河崙) 등이
  반대하자 고려조의 사례를 들어 도교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또 같은해 계품사(計?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 여진족과의 영토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공로로 태종은 밭 50결을 하사했다.
- 1407년에 옥사(獄事)에 걸려 구금되었다.그러나 도교를 깊이 신봉한 태종은 그를 아주 버리지는 않고
  소격전(昭格殿)의 제조(提調)로 삼아 도교에 관한 자문을 구하였다.
- 1411년에 태종이 다시 도교의 신인 삼성(三聖)과 주작(朱雀)·대국(大國)에 관해서 하문하자, 고려의
  전례를 들어 주작은 시좌궁(時坐宮)남쪽에 단을 설치하도록 건의하고, 삼성과 대국도 폐지함이 불가함
  을 주장하였다.
- 1415년에 《성수경 星宿經》을 태종에게 올렸다. 같은해에 하륜이 그의 박학함을 높이 평가하여
  육조판서에 봉하도록 상소하였으나, 태종은 과거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와 무리지어
  불충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 1417년 태종에게 사전(祠典)제정의 명을 받았으나, 그 이듬해 죽었다. 유교의 기반이 굳혀지는 조선
  초기에 도교의 부흥을 위해서 노력한 인물이었으며, 또 불교에도 관계가 있어 문묘(文廟)의 석전(釋
  奠)에 쇠고기를 못 쓰게 하여 유사(有司)의 탄핵을 받은 일도 있었다.
  *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東史綱目, 燃藜室記述, 朝鮮道敎史(李能和)

태조 6년 (1397)
06/02(임오) 전라도 관찰사가 수군 만호 최원충이 왜선 1척을 잡았음을 보고하다
....임금이 말하였다. “원충이 배를 송두리채 잡았으면 어째서 생금(生擒)한 자가 하나도 없는가?” 친히 따르는 호군(護軍) 김첨(金瞻)을 보내어 가서 그 이유를 추궁하게 하였다. 【원전】 1 집 107 면

06/29(기유) 일본 사자를 죽여 예물을 나눠 가졌던 수군 만호 최원충 등을 처형케하다
  “수군 만호(水軍萬戶) 최원충(崔原忠)이 일본 사자(日本使者)를 해하여 죽이고, 그 예물과 자장(?裝)을 빼앗아 군사에게 나누어 가지게 하고 적을 잡았다고 속여 상신하였으니, 죽고도 남는 죄가 있다. 가서 김첨(金瞻)과 관찰사로 더불어 다시 국문을 가하여 율에 의하여 처결하여 각도에 고루 돌리고 가산을 적몰하고, 꾀에 참여한 자도 모두 따라서 좌죄하라.”【원전】 1 집 107 면

정종 2년 (1400)
01/24(기축) 문하부에서 봉상시 소경 김첨을 탄핵하다
문하부(門下府)에서 봉상 소경(奉常少卿) 김첨(金瞻)을 탄핵하였다. 김첨이 건의하였었다.
  “본조(本朝) 국학(國學)에서 봄·가을 두 정일(丁日)을 당하여 문선왕(文宣王)을 제사하는 데에 참람하게 대뢰(大牢)를 쓰니, 예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빌건대, 《지정조격(至正條格)》 제군현(諸郡縣)의 품식(品式)에 의하여 양(羊) 셋만 쓰소서.” 그러나 본조에서 대뢰(大牢)를 쓴 지가 오래인데, 김첨이 경솔히 고치고자 하였으므로, 탄핵한 것이다.【원전】 1 집 162 면

11/01(신유) 사헌부에서 노비 변정 도감의 일로 지제교 안노생·김첨·정정을 탄핵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지제교(知製敎) 안노생(安魯生)·김첨(金瞻)·정정(鄭井)을 탄핵하였다......
【원전】 1 집 185 면

12/18(무신) 경연에서 기양에 대해 경연관과 논하다
......임금이 말하기를,“지금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모두 생각하기를, ‘신(神)의 음조(陰助)가 아니면 편안히 살 수 없다.’고 여기는데, 만일 금령(禁令)을 내리면, 백성이 기쁘게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할 것이다.”하였다. 응교(應敎) 김첨(金瞻)이 대답하였다.
  “예전 제도에 따라 이사(里社)의 법을 세워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제사하게 하면, 백성이 모두 기쁘게 따르고, 음사(淫祀)가 또한 장차 근절될 것입니다.”【원전】 1 집 188 면

태종 1년 (1401)
02/12(신축) 공신 도감에 명하여 맹서를 전사하여 나누어 주다
......임금이 말하기를,“공신들이 어찌 맹서(盟書)를 두루 외울 수 있겠는가?”하고, 공신 도감(功臣都監)에 명하여 김첨(金瞻) 등을 시켜 전사(傳寫)하게 하여 모두 나누어 주었다.【원전】 1 집 197 면

07/23(경술) 궁실 건축 반대한 좌사간 윤사수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용서하다
  “좌사간(左司諫) 윤사수(尹思修)는 경상도로 귀양보내고, 우사간(右司諫) 김첨(金瞻)은 전라도로 귀양보내고,”........내가 조금 노여워서 사수(思修)·김첨(金瞻)을 영표(嶺表)에 귀양보내어 오래도록 부르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하였다. .........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리어 말하기를,
  “공신(功臣)들이 이처럼 간청하니, 내가 용서하겠다.”【원전】 1 집 209 면

11/20(갑진) 가까운 신하들에게 무인년의 일과 현재의 심경을 말하다
경연에 나아가서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시독관(侍讀官) 김첨(金瞻) 등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여 파하매, 주과(酒果)를 내려 주었다.【원전】 1 집 217 면

11/23(정미) 헌납 한승안이 동료를 탄핵한 사헌부를 탄핵하려다 도리어 함께 파직당하다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을 파직시키었다. ....... 사간(司諫) 윤사수(尹思修)·김첨(金瞻), 지사간(知司諫) 성발도(成發道)...........등을 탄핵하여 상소하기를.......【원전】 1 집 217 면

12/21(을해) 예조 전서 김첨이 적전과 선잠의 법식을 새로 정할 것 등을 건의하다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첨(金瞻) 등이 상소하기를,“신 등은 상고하건대, 적전을 가는 예(禮)은 신명(神明)을 공경하고 농업(農業)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바야흐로 지금 물건을 갖추고 예문(禮文)을 다하는 때에 적전(籍田)과 선잠(先蠶)의 두 제사에만 악장(樂章)이 없으니, 대단히 불가합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짓게 하소서.”하여,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원전】 1 집 221 면

태종 2년 (1402)
01/03(병술)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서로 탄핵하다. 결국 좌사간 진의귀 등이 안치되다
......상소하기를,“대사헌 이지.....등이 사간(司諫) 김첨(金瞻)을 탄핵하여 말하기를, ‘헌납 한승안(韓承顔)이 평주(平州)로 호가(扈駕)하였을 때, 주상께서 안렴사(按廉使) 김분(金汾)의 참소를 들으시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장령 박고를 견책하시는데도, 한승안은 간(諫)하지 못하였고, 김첨은 바로 그들과 동렬(同列)이었다.’고 하였사온데.....【원전】 1 집 221 면

02/29(임오) 김첨 등의 전의로 친히 문신을 시험하여 관각의 양제로 임용케 하다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첨(金瞻) 등이 상소하여 친히 문신(文臣)을 시험하여 관각(館閣)의 양제(兩製)로 충용(充用)하기를 청하였다. 【원전】 1 집 227 면

04/19(신미) 좌정승 김사형이 각사를 이끌고 원자 책봉을 하례하였으나 받지 않다
.......임금이 곧 전서(典書) 김첨(金瞻)을 불러 말하기를,“원자를 봉했다는 말이 어느 경전에 보이는가?”
  하니, 김첨이 대답하기를, “신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이제 이미 봉하셨사오니
신하된 마음으로 하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원전】 1 집 232 면
  
04/23(을해) 예조 전서 김첨에게 법받을 만한 고사를 궁전 벽에 그리게 하다
임금이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첨(金瞻)을 불러 말하기를,“벽(壁) 위에다 옛날의 법받을 만한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고자 한다.”하니, 김첨이 대답하기를,“문왕(文王)은 세자(世子) 때에 침소(寢所)에 문안하였고, 한(漢)나라 고제(高帝)는 태상황(太上皇)에게 헌수(獻壽)하였고, 주(周)나라 선왕(宣王)의 후(后)는 선왕에게 늦게 일어남을 간(諫)하였으며, 당(唐)나라 장손 황후(長孫皇后)는 임금에게 명신(明臣)이 있음을 축하하였사오니, 모두 다 그릴 만한 것이옵니다.”하자, 임금이 즉시 김첨에게 명하였다.
  “경이 화공(?工)을 시켜 벽 가운데에다 그리도록 하라.”【원전】 1 집 233 면

06/08(경신) 호조 전서 김첨에게 《서경》의 재재편을 강하게 하다
호조 전서(戶曹典書)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서경(書經)》의 재재편(梓材篇)을 강(講)하게 하였다. 임금이 악가(樂歌)의 일로 인하여 김첨(金瞻)을 오라고 불렀다. 임금이 마침 《서경》의 재재편을 보고 있다가 김첨에게 강(講)하라고 명하니, 김첨이 구두점(句讀點)을 떼지 못하여 부끄럽게 여기며 사과하였다.
  “오늘날의 유생(儒生)들은 우공(禹貢)·재재편(梓材篇)을 학문에 절실치 못하다고 여겨 모두 읽지 않습니다.”【원전】 1 집 236 면

06/09(신유) 하윤이 지어 올린 악장 2편. 교서를 내려 칭찬하다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이 악장(樂章) 두 편(篇)을 올리니, 교서(敎書)를 내려 주어 칭찬하였다....... 위의 시(詩)는 수명명(受明命) 6장(章)이다.임금이 이것을 보고, 김첨(金瞻)을 불러 이를 주면서 말하기를,“관현(管絃)에 올려서 연향악(宴享樂)으로 하라.”【원전】 1 집 237 면

06/28(경진) 좌사간 최긍에게 간관끼리 탄핵한 이유를 묻고 사헌부를 무마시키다
.....신 등이 묻기를, ‘간관을 꺾어 버렸다고 하니 누구냐?’ 하였더니 이양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평주(平州)에 행차하셨을 때에 장령(掌令) 박고(朴?)를 내치셨고, 그 뒤에는 사간(司諫) 윤사수(尹思修)·김첨(金瞻) 등을 순위부(巡?府)에 잡아 가두고.........이것이 간관을 꺾어 버린 것이 아니란 말이오?’ 하였습니다.....

06/29(신사) 더위나 비가 오나 날마다 청심정에 나아가 글을 읽다
임금이 날마다 청심정(淸心亭)에 납시어 글을 읽는데, 무더운 여름철 장마가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시강(侍講) 김첨(金瞻)에게 말하기를,“수 양제(隋煬帝)가 우세기(虞世基) 때문에 천하를 잃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하니, 김첨이 대답하기를,“우세기는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세기를 쓴 사람은 수 양제입니다. 더욱이 성색(聲色)으로 망했습니다.”하매, 임금이 말하였다.
  “옳다! 성색(聲色)은 실로 천하를 망치는 근본이다.”【원전】 1 집 240 면

07/11(임진) 사평부 영사 하윤 등에게 신도로 돌아가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다
.........삼부(三府)의 의논을 보고 마음속으로 불편하게 여겨 가까운 신하에게 묻기를,“성왕(成王)은 호경(鎬京)에 있고, 종묘는 풍(豊)에 있었느냐, 낙(洛)에 있었느냐?”하니, 모두 대답하지 못하였다.
또 김첨(金瞻)을 불러 물으니, 또한 대답하지 못하였다.【원전】 1 집 242 면

09/14(갑오) 예조 전서 김첨이 종묘 제사 절차에 관해 건의하는 상소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첨(金瞻) 등이 제의(祭儀) 두어 조목을 올리었다. 소(疏)에 이르기를,
  “삼가 제례(祭禮)를 상고하건대, 인군(人君)이 친히 제사하면, 태자(太子)와 공(公)·후(侯)·백(伯)이 아헌(亞獻)하고 태위(太尉)가 종헌(終獻)하며, 이를 섭행(攝行)하면, 태위(太尉)가 초헌(初獻)하고 태상경(太常卿)이 아헌하며 광록경(光祿卿)이 종헌하였습니다. 일찍이 종친으로 섭행한 일이 없었던 것은, 방친(旁親)은 감히 종사(宗祀)를 전장(專掌)하지 못하고, 또 정통(正統)을 피하기 때문입니다. 예(禮)에 말하기를, ‘서자(庶子)가 제사하지 않는 것은 그 종통(宗統)을 밝힘이라.’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이 예를 제정함에 있어 혐의를 분별하고 은미한 것을 밝힌 것이 이처럼 엄한데, 지금 종친으로써 종묘의 제사를 섭행하는 것은 예(禮)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 종친은 친히 제사하는 때의 아헌(亞獻)과 진전(眞殿)·산릉(山陵)의 제사를 제외하고는 종묘에서 섭위(攝位)하여 제사하는 것을 허락치 마소서.
  한(漢)·당(唐) 이래로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으로 삼공(三公)을 삼았는데, 삼공의 직책은 원수(元首)에 대해 고굉(股肱)노릇을 하여 음양을 조화하고 백관을 총괄하여 통솔치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인군이 연고가 있으면 대신 섭행하는 것이 예(禮)입니다. 지금 재신(宰臣)의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태위(太尉)를 삼고, 전서(典書)로 사도(司徒)·사공(司空)을 삼으니, 그일이 예전 것을 법받은 것도 아니고, 이름이 참람하고 실지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제례를 중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 태위는 정승(政丞) 이상으로, 사도·사공은 문무(文武)의 자헌(資憲) 이상과 이성(異姓)의 제군(諸君)으로 충당하면, 거의 고례(古禮)에 합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군관(軍官)은 제사를 행하여서는 아니된다.’합니다. 그러므로 교묘(郊廟)의 일에 승추(承樞)가 참예하지 않는데, 이것은 태위(太尉)가 군관(軍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태상(太常)은 예악(禮樂)을 맡고, 광록(光祿)은 주선(酒膳)을 맡았는데, 지금의 봉상(奉常)·전농(典農)이 곧 그 소임입니다. 그들을 그대로 향관(享官)으로 삼는 것은, 대개 각기 그 직책을 닦아서 신명(神明)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게 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은 일에 임(臨)하여 다른 관원으로 차정(差定)하니, 체상(?嘗)의 뜻이 무엇인지 전연 모릅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 태상(太常)과 광록(光祿)은 마땅히 본관(本官)의 경(卿)을 보내어 일을 판비(判備)하게 하여 명실(名實)을 상부(相符)하게 하면, 거의 일에 임하여 구차하고 간략[苟簡]한 잘못이 없을 것이요, 전하의 신명(神明)을 공경하는 뜻에 맞게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1 집 245 면

10/15(을축) 사신 유사길과 왕태가 조선의 관직제도와 관리임용 등을 묻다
유사길(兪士吉)·왕태(汪泰)가 이조와 호조의 관원을 보고자 하므로, 의정부에서 김첨(金瞻)과 진의귀(陳義貴)를 사신관(使臣官)에 보내며 이르기를,
  “사신이 반드시 묻는 바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말을 갖추어 대답하라.”
  하였다. 사길이 첨(瞻)에게 묻기를,
  “관자(官資)는 몇 등급이 있습니까?”하니,“9등급이 있습니다.”하고,
  “전선(銓選)과 봉증(封贈)을 본조(本曹)에서 주장합니까?”하니,“그렇습니다.”하였다.
  “전선(銓選)은 어떻게 합니까?”하니,“여섯 과(科)가 있습니다.
  문과(文科)·무과(武科)·음양과(陰陽科)·의과(醫科)·율과(律科)·역과(譯科)인데, 문과는 예조(禮曹)로 하여
  금 33인을 뽑게 하고, 무과는 병조(兵曹)로 하여금 28인을 뽑게 합니다.”하매,
  “봉증(封贈)은 어떻게 합니까?”하니,
  “사람이 공이 있으면 봉(封)하고, 그 부모를 추증(追贈)합니다.”하매,
  “이 법은 중국과 다름이 없습니다.”하였다. 또 묻기를,
  “외관(外官)은 몇 등급입니까?”하니,
  “부(府)·주(州)·군(郡)·현(縣)이 있습니다. 부(府)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
  府使)·부사(府使)가 있습니다.”하였다.
  “관(官)은 얼마입니까?”하니,
  “3백 72관(官)인데, 그 소속이 많지마는 큰 것만을 든 것입니다.”하였다.
  “그 관원을 어떻게 차견(差遣)합니까?”하니,
  “본조(本曹)에서 현량(賢良)하고 공정(公正)한 사람을 택하여 계문(啓聞)해서 차견합니다.”하였다.
  “백성을 해(害)하여 함부로 거두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하매,
  “사람을 선택하여 차견하였으니, 어찌 백성을 해하는 일이 있겠습니까?”하고, 또
  “도관찰사를 보내어 수령의 현부(賢否)와 민생의 휴척(休戚)을 순찰(巡察)하게 하는데, 그 법은 중국
  조정의 염방(廉訪)을 모방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니, 그 법이 좋다고 하였다. 의귀(義貴)에게 묻기를,
  “공역(工役)과 재부(財賦)를 본조(本曹)에서 맡습니까?”하니,
  “공역(工役)은 공조(工曹)에서 맡고, 재부(財賦)는 본조에서 맡습니다.”하고,
  “1경(頃)의 부(賦)는 얼마나 됩니까?”하니,
  “우리 나라의 밭은 중국과 같지 않기 때문에, 경법(頃法)은 행하지 아니하고 결(結)로써 전법(田法)을
  삼습니다.”하였다.
  “1결(結)에 부과하는 것이 얼마입니까?”하니,
  “1결에 쌀 30두(斗)를 냅니다.”하였다.
  “군(軍)과 민(民)이 다름이 있습니까?”하니,
  “우리 나라는 군민(軍民)의 분별이 없고, 일이 있으면 군사가 농민에서 나오고, 일이 없으면 모두
  농민으로 돌아갑니다.”하매, 그 법이 좋다고 하였다.
  말이 끝나매, 김첨 등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었다.【원전】 1 집 248 면

태종 3년 (1403)
01/13(신묘) 사헌부에서 칙서를 조서같이 개독한 김첨과 설미수를 탄핵하다
사헌부에서 이조 전서(吏曹典書) 김첨(金瞻)·호조 전서(戶曹典書) 설미수(?眉壽)를 탄핵하였으니, 칙서(勅書)를 열어 살피지 않고 읽기를 조서(詔書)같이 하였기 때문이었다.【원전】 1 집 255 면

04/16(임술) 사간원에서 겸 예조 지사 김첨 등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하였는데, 소(疏)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이미 이루어진 법은 가볍게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사전(祀典)은 나라의 큰 일이니, 더욱 살펴서 증손(增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건문(建文) 원년 정월 30일에 성균관(成均館)에서 송조(宋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글을 올려 신청(申請)하여, 증자(曾子)와 자사(子思)를 안자(顔子)와 맹자(孟子)의 열(列)에 배향(配享)하였으니, 참으로 성시(盛時)의 아름다운 법입니다. 겸 지예조사(兼知禮曹事) 김첨(金瞻)·예조 의랑(禮曹議郞) 장자숭(張子崇) 등이 원자(元子)의 입학(入學)하는 예(禮)를 상정(詳定)함에 있어, 작헌의(爵獻儀)에 증자와 자사를 빠뜨리고 거행치 않았으니, 뜻을 두어 정밀하게 살피지 못한 죄가 큽니다. 비옵건대, 파직(罷職)시켜 삼가지 않은 죄를 징계하시고, 거듭 예관(禮官)을 명하여, 그 예(禮)를 다시 정하여 증자와 자사로 하여금 예전과 같이 배향(配享)하게 하시면, 사도(斯道)가 심히 다행이겠습니다.”하였으나, 내리지 아니하였다.【원전】 1 집 262 면
  
06/27(계유) 복야의 신분으로 의정부에 출입한 이조 전서 김첨을 사헌부에서 탄핵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이조 전서(吏曹典書) 김첨(金瞻)을 탄핵하였다. 첨(瞻)이 예조 상정(禮曹詳定)을 겸하여 법령(法令)을 변경해 고쳤는데, 조사(朝士)가 이를 비난하였다. 첨(瞻)이 상정(詳定)한 문서를 가지고 의정부에 나가 좌정승 하윤(河崙)에게 고하였으므로, 사헌부에서 복야(僕射)의 관원으로 정부에 진퇴(進退)하였다 하여 탄핵한 것이었다.【원전】 1 집 270 면

10/01(을사) 사냥하여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의례를 상정케 하다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사냥하여 종묘(宗廟)에 천신하는 의례를 상정(詳定)하였다. 임금이 장령(掌令) 이관(李灌)을 불러 말하기를, “전일에 너희들이 사냥하는 것을 불가하다 하였으니, 그러면 인군(人君)은 사냥을 못하는 것이냐?”“신 등이 불가하다고 한 것은 장차 고묘(告廟)하려고 하면서 사냥을 하였기 때문이지, 인군(人君)이 사냥을 못한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하였다.....  김첨(金瞻)과 김과(金科) 등에게 명하기를,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제왕(帝王)이 사냥하는 예(禮)를 잘 상고하여 아뢰라.”하니....
【원전】 1 집 279 면

태종 4년 (1404)
02/20(신묘) 성수 초례를 상정토록 명하다. 이에 대한 논란과 도교 숭봉에 대한 김첨의 상서문
겸 지예조사(知禮曹事)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성수(星宿)의 초례(醮禮)를 상정(詳定)하였다. 첨(瞻)이 대청관(大淸觀)을 수리하고 천황 대제(天皇大帝)를 초제(醮祭)하려고 하니, 판사(判事) 권근(權近)과 여러 낭관(郞官)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여 말하기를,
  “본조(本朝)에서 이미 소격전(昭格殿)을 세워 성수(星宿)를 초제(醮祭)하는데, 또 어찌 대청관(大淸觀)을 수리할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하윤(河崙)이 듣고 말하기를,
  “첨(瞻)이 도(道)를 보기를 분명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이하고 괴상한 것을 좋아 한다.”
  하였다. 첨(瞻)이 또 글을 올려 임금께 도교(道敎)를 숭봉(崇奉)할 것을 권(勸)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태일(太一)은 하늘의 귀신(貴神)이기 때문에, 한(漢)나라 이래로 역대에서 받들어 섬기어 여러 번 아름다운 상서(祥瑞)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조(前朝)에서 복원궁(福源宮)·소격전(昭格殿)·정사색(淨事色)을 두고 따로 대청관(大淸觀)을 세웠으며, 또 간방(艮方)【화령(和寧).】·손방(巽方)【충주(忠州).】·곤방(坤方)【부평(富平).】·건방(乾方)【귀주(龜州).】의 머무르는 궁(宮) 마다에 궁관(宮觀)을 세워 초례(醮禮)를 행하고, 매양 액운(厄運)과 재변(災變)을 당하면 기도(祈禱)하는 별초(別醮)를 대청관에서 행하고, 만일 군사를 행(行)하려면, 장수가 대청관에 나가서 재숙(齋宿)하고 초례를 베푼 연후에 행하였으니, 대개 태일(太一)은 어진 별[仁星]이 있는 곳이어서 병역(兵疫)이 일어나지 않고, 방국(邦國)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국초(國初)에 상정(詳定)하여 복원궁(福源宮)·신격전(神格殿)·정사색(淨事色)을 폐(廢)하고, 경성(京城)에 다만 대청관과 소격전 두 곳만 남기고, 또 다섯 위차[五次]의 궁(宮)인 간방(艮方) 영흥군(永興郡)에 관(觀)을 세워 초제(醮祭)를 행하였으니, 숭봉(崇奉)하는 예(禮)가 갖추어졌다 하겠습니다. 지금 대청관의 초제를 행하는 법규를 보면, 연종(年終)과 세수(歲首)에 두 번만 행하고, 수한(水旱)과 재변(災變)에는 기도(祈禱)하는 바가 없으며, 제사하는 관원[祠官]은 내감(內監) 한 사람만 쓰니,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송(宋)나라 제도에 의하여 매년 사입일(四立日)에 제사를 행하되, 대언(代言)이나 혹은 시신(侍臣)에게 명하여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고, 제문(祭文)이 있게 하며, 중사(中祀)의 예(例)에 의하여 5일 동안 재계(齋戒)하게 하소서. 그리고, 장수를 보내면, 유제(類祭)의 예에 의하여 장수가 관(觀)에 나가서 하룻동안 재계(齋戒)하여 자고 제사를 행하게 하되, 제문(祭文)이 있고, 만일 도액(度厄)하거나 기도(祈禱)할 때라면, 문관 대신(文官大臣)을 보내어 5일 동안 재계하고 도류과(道流科)의 의법(儀法)을 써서 초례(醮禮)를 행하되, 청사(靑詞)가 있게 하소서. 그리고 내감(內監) 네 사람과 도류(道流) 네 사람, 본관(本觀)의 녹사(錄事)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날을 번갈아 직숙(直宿)하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향등(香燈)을 켜고, 관우(觀宇)를 수리하고, 제기(祭器)를 진열하는 것을 때에 맞추어 미리 준비하여 숭봉(崇奉)하는 뜻을 이루소서.”【원전】 1 집 290 면

03/16(정사) 제릉의 비를 세우는 데 공헌한 성석린·권근 등에게 잔치를 베풀고 상을 주다
우정승(右政丞) 성석린(成石璘)과 참찬(參贊) 권근(權近)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니, 제릉(齊陵)의 비(碑)를 세웠기 때문이다. 석린에게 노비 다섯 구(口)와 안마(鞍馬)를 내려 주고, 권근에게 안마를, 김첨(金瞻)·이응(李膺)에게 각각 말 한 필을.....주었으니, 근(近)은 글을 짓고, 석린(石璘)은 글씨를 쓰고, 첨(瞻)은 액전(額篆)을 쓰고.....【원전】 1 집 292 면
05/19(기미)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성조(聖朝) 홍무(洪武) 21년 2월에 호부(戶部)의 자문(咨文)을 받았사온데, 호부 시랑(戶部侍郞) 양정(楊靖) 등 관원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鐵嶺) 이북(以北)·이동(印)·이서(以西)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에 속하였으니, 군민(軍民)을 그대로 요동(遼東) 관할에 소속시키라.’ 하였습니다. 본국에서 즉시 상항(上項)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陪臣)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조정(朝廷)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당년 6월 12일에 박의중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아 보니, 본부 상서(本部尙書) 이원명(李原明) 등 관원이 당년 4월 18일에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의 일로 인하여 왕국(王國)에서 말이 있다.’ 하시고, 전과 같이 관리를 정하여 관할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흠차(欽差)하신 동녕위(東寧?) 천호(千戶) 왕수(王脩)가 싸 가지고 온 칙유(勅諭)를 받들어 보니, ‘삼산(參散)·독로올(禿魯兀) 등처의 여진(女眞) 지역의 관민인(官民人) 등을 초유(招諭)한다.’ 하셨습니다.
  상고하건대, 삼산 천호(參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10처 인원(十處人員)이 비록 여진 인민(女眞人民)에 속해 있기는 하나, 본국 지면(本國地面)에 와서 산 지가 연대가 오래고,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 등의 군사와 왜구(倭寇)의 침략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조잔(凋殘)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그 유종(遺種)의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으며, 또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賦役)에 이바지 하고 있습니다. 또 신(臣)의 조상(祖上)이 일찍이 동북 지면(東北地面)에 살았으므로, 현조(玄祖) 이안사(李安社)의 분묘가 현재 공주(孔州)에 있고, 고조(高祖) 행리(行里)와 조(祖) 이자춘(李子春)의 분묘(墳墓)가 모두 함주(咸州)에 있습니다. 생각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만난 이래로 여러 번 고황제의 조지(詔旨)를 받았사온데, 화외(化外)를 구분하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였으며, 또 성조(聖朝)의 호율(戶律) 내(內)의 한 조목에 준하면, ‘홍무(洪武) 7년 10월 이전에 다른 고을로 유이(流移)하여 일찍이 그곳의 호적(戶籍)에 등재(登載)되어 부역(賦役)에 종사하고 있는 자는 논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소방(小邦)은 이미 동인(同仁)의 가운데에 있사옵고, 공험진 이남이 또 고황제의 ‘왕국유사(王國有辭)’라는 명령을 입었사오니,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 유종(女眞遺種)의 인민(人民)들을 본국(本國)에서 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시면 한 나라가 다행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배신(陪臣)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주본(奏本)과 지형 도본(地形圖本)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게 하여 주달(奏達)합니다.”【원전】 1 집 297 면

10/01(기사) 여진인을 조선에서 관할코자 한다는 요청을 수락한 명의 칙서가 도착하다
계품사(計稟使) 김첨(金瞻)이 준청(准請)한 칙서(勅書)를 가지고 명나라 서울[京師]에서 돌아왔다. 칙서는 이러하였다.“조선 국왕 이(李)【휘(諱).】에게 칙유한다. 상주(上奏)하여 말한 삼산(參散) 천호(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10처 인원(十處人員)을 성찰(省察)하고 준청(淮請)한다. 그러므로, 칙유하는 것이다.”임금이 김첨(金瞻)에게 전지(田地) 15결(結)을 하사하였다.【원전】 1 집 309 면

10/06(갑술) 돈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결정하고, 이궁을 짓도록 명하다
다시 한양(漢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드디어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제학(提學) 김첨(金瞻)에게 묻기를,“무슨 물건으로 점(占)칠까?”하니, 대답하기를,
  “종묘 안에서 척전(擲錢)할 수 없으니, 시초(蓍草)로 점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초(蓍草)가 없고, 또 요사이 세상에는 하지 않는 것이므로 알기가 쉽지 않으니, 길흉(吉凶)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하니, 김과(金科)가 나와서 말하기를,
  “정괘(占卦)의 글은 의심나는 것이 많으므로, 가히 정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함께 알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낫다. 또 척전(擲錢)도 또한 속된 일이 아니고, 중국에서도 또한 있었다. 고려 태조(太祖)가 도읍을 정할 때 무슨 물건으로 하였는가?”
  하니, 조준이 말하기를,“역시 척전(擲錢)을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그와 같다면, 지금도 또한 척전(擲錢)이 좋겠다.”하고....【원전】 1 집 309 면

태종 5년 (1405)
05/16(경술) 이행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을 예전과 같이 조선에서 관할하도록 청하다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행(李行)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상주(上奏)하게 하였다......홍무 21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지(聖旨)를 받자와, ‘공험진(公탪鎭) 이북은 요동(遼東)으로 환속(還屬)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本國)에 붙여 달라.’고 청하기 위하여, 배신(陪臣) 김첨(金瞻)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가서 주달하게 하였사온데, 그해 10월 11일에 <김첨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공경히 칙서(勅書)를 받자오니, ‘삼산 천호(三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열 곳의 인원(人員)을 허락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臣)이 일국(一國)의 신민(臣民)들과 더불어 감격하여 마지 아니하였습니다.........【원전】 1 집 326 면

07/03(병신) 성석린을 영의정에 임명, 정부 주요 부서에 인사이동이 있다
.......김첨(金瞻)으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삼았다.【원전】 1 집 331 면

08/19(임오) 박상문의 양천 변정을 오결한 김첨·한이·한임을 귀양보내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첨(金瞻)을 여흥(驪興)에, 전 계림부윤(鷄林府尹) 한이(韓理)를 안성(安城)에, 전 철원부사(鐵原府使) 한임(韓任)을 춘주(春州)에 귀양보내었다. 사헌부(司憲府)와 형조(刑曹)에서 박상문(朴尙文) 등의 양천(良賤)을 변석(辨析)하여 보니 과연 종천(從賤)시키는 것이 부당하였다. 이에 첨(瞻)과 이(理)·임(任)을 탄핵하고 수직(守直)하였다. 임금이 첨(瞻) 등을 순금사(巡禁司)에 내리어 국문(鞫問)하고, 율(律)을 상고하니, 장(杖) 1백대에, 도(徒) 3년에 해당하였다. 이에 명하여 귀양보내었다. 첨(瞻)은 예조 의랑(禮曹議郞)으로 있을 때에 상문(尙文) 등을 종천(從賤)할 것으로 결절(決折)하였고, 이(理)와 임(任)은 민제(閔霽)·권홍(權弘)과 동종(同宗)이기 때문에 상문(尙文)의 일족(一族)을 천(賤)에 붙여서 역사(役使)시킨 자이었다.【원전】 1 집 333 면

09/13(을사) 김첨·한이·한임을 경외 종편하다
김첨(金瞻)·한이(韓理)·한임(韓任)을 경외(京外)에 종편(從便)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1 집 337 면

12/19(신사) 진전(眞殿)에 올리는 제물에 대하여 논의하다
원묘(原廟)의 전물(奠物)을 의논하였다......김첨(金瞻)이 아뢰기를,
  “진영(眞影)을 베푸는 것은 불씨(佛氏)와 노자(老子)에게서 비롯하였는데, 한(漢)나라 초년(初年)에 비로소 시작되었고, 송(宋)나라 인종(仁宗)에 이르러 그 제도가 크게 성(盛)하여, 집 수천 간(間)을 세워 종묘(宗廟)를 경(輕)하게 여기고 진전(眞殿)을 중(重)하게 여기며 모두 소찬(素?)을 베풀었으니, 불씨(佛氏)의 도(道)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전(眞殿)을 세우는 것은 예전 제도가 아닙니다. 3년 후에는 종묘(宗廟)에 부(쯊)하여야 하니, 진전(眞殿)은 혁파(革罷)하여야 하고, 반드시 부득이하여 한다면 마땅히 그 법(法)에 의하여 소찬(素?)으로 하는 것이 가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부녀(婦女)가 부묘(쯊廟)하기 전에 어찌 치제(致祭)하는 예(禮)가 없겠는가? 만일 불가(佛家)에 진전(眞殿)을 둔다면 마땅히 소찬(素?)을 써야 하지마는, 따로 집을 세웠다면 고기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평일(平日)에 즐기시던 어육(魚肉)·포해(脯탛) 등물(等物)로써 드리라.”【원전】 1 집 345 면

태종 6년 (1406)
05/27(병진) 인소전의 터를 창덕궁 북쪽에 잡는 것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장차 인소전(仁昭殿)을 창덕궁(昌德宮) 북쪽에 다시 지으려고, 북문(北門)을 나가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터를 잡게 하니......“내가 처음에는 진전(眞殿)만 세워두고자 하였는데, 김첨(金瞻)이 말하기를, ‘불당(佛堂)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니, 아울러 짓게 하는 것이 가하다.”하니.........

08/19(을사) 이원·심귀령·이응·노한·성발도 등에게 관직 제수
성석린(成石璘)·하윤(河崙)·유창(劉敞)·이내(李來)·유관(柳觀)·조용(趙庸)을 모두 세자 빈객(世子賓客)의 직(職)에서 해임하여,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우군 총제(右軍摠制) 성석인(成石因)·김첨(金瞻)과 함께 갖추 경연관(經筵官)에 제수하였다.........  【원전】 1 집 371 면

태종 9년 (1409)
09/19(무자) 민무질·민무구 등의 옥사와 연관된 호조 판서 이빈 등을 신문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빈(李彬)과 평강군(平江君) 조희민(趙希閔)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전라도(全羅道)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강사덕(姜思德)과 전 총제(摠制) 김첨(金瞻)을 잡아오게 하였다....... 윤목(尹穆)의 초사(招辭)에 또 단산 부원군(丹山府院君) 이무(李茂)와 강사덕(姜思德)·김첨(金瞻)을 끌어들였다.....임금이 말하기를, “김첨(金瞻)은 무슨 죄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윤목(尹穆)이 말하기를, ‘첨(瞻)이 내 집에 와서 일찍이 말하기를, 「상군(商君)이 진(秦)나라 효공(孝公)을 도와 변법(變法)의 영(令)을 정하였는데, 혜문왕(惠文王)이 그때에 태자(太子)로 있으면서 법을 범하였다. 이에 상군이 말하기를,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범하기 때문이다. 태자(太子)는 임금의 저사(儲嗣)이니 형벌할 수 없다 하고, 그 스승[傳] 공자건(公子虔)을 형벌하였는데, 효공이 죽은 뒤에 공자건의 무리가 상군이 반(反)하려고 한다고 고하여, 아전[吏]을 발동시켜 상군을 잡아서 마침내 거열(車裂)하였다. 지금 만일 민무구(閔無咎) 등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면 마땅히 상앙(商?)과 같은 자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윤목의 말로 김첨에게 힐문하고자 합니다.”
  하였다.【원전】 1 집 508 면

09/28(정유) 정안지·김첨을 석방하고 정안지의 도년을 면제하다
정안지(鄭安之)와 김첨(金瞻)을 석방하고, 정안지의 도년(徒年)을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김첨이 윤목(尹穆)과 대변(對辨)하기를,“본래 너와는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일찍이 공자건(公子虔)의 일로 너에게 말하였겠는가?”하니, 윤목이 오히려 김첨의 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김첨이 스스로 변명할 수가 없었다. 옥관(獄官)이 옥사(獄辭)를 써서 김첨에게 보이니, 김첨이 말하기를,“이 말은 실로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장초(狀招)에 항복한 것은 다만 천감(天鑑)과 상총(上聰)을 믿은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듣고 불쌍히 여겨 다시 핵실(?實)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1 집 510 면

태종 10년 (1410)
08/10(갑진) 임금이 친히 죄수의 계본을 보고 사유시키다
죄수를 사유(赦宥)하였다........ 이미 일찍이 종편(從便)한 김첨(金瞻) 등 18인은 직첩을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원전】 1 집 561 면

12/18(경술) 외척의 봉군을 없앴다가 다시 민무휼 등을 군에 봉하다
다시 민무휼(閔無恤)로 여원군(驪原君)을 삼고, 민무회(閔無悔)로 여산군(驪山君)을 삼았다........
  “외척은 일을 맡길 수 없으니, 다시 봉군(封君)하는 것이 옳다.”하고, 또 말하였다.
  “김첨(金瞻)은 민무구(閔無咎)에게 붙어서 왕래하며 비밀히 말하였으니, 죄가 용서할 수 없다”
【원전】 1 집 571 면

태종 11년 (1411)
01/20(신사) 야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여 하번 갑사와 시위군으로 경성 군사를 돕도록 명하다
명하여 하번 갑사(下番甲士) 3백 명과 시위군(侍?軍) 3백 명으로 경성(鏡城) 군사를 돕게 하였다.....
중국에서 일찍이 동북면(東北面) 십처(十處)의 인민(人民)을 바치라고 하기에, 김첨(金瞻)을 보내어 이를 변정(辨定)하였다. 그 때에 땅을 찾아가지 않았는데, 맹가(猛哥)의 호소를 듣고 우리 땅을 바치라 하겠는가?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이 한경(漢京)에서 온다고 하니, 그도 역시 모의(謀議)를 잘하는 사람이다. 어찌 그에게 자문(咨問)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이윽고 이직이 이르러 아뢰기를,
  “길이 멀고 땅이 험하니,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더군다나, 북방(北方)은 흉년이 들고 말[馬]도 지쳤으니, 오면 치고 가면 쫓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하였다.【원전】 1 집 575 면

07/15(갑술) 삼성·주작·대국의 신에 제사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다
주서(注書) 양질(楊秩)을 해풍(海?)에 보내어, 전 총제(摠制) 김첨(金瞻)에게 삼성(三聖)·주작(朱雀)·대국(大國)의 신(神)의 제사를 물으니, 김첨이 대답하였다.
  “주작(朱雀)은 전조 때에 송도(松都) 본궐(本闕) 남훈문(南薰門) 밖에 설립하고, 주작 칠수(七宿)를 제사하였는데, 이제 한경(漢京)에서도 또한 옛곳에 제사함은 실로 미편하니, 다시 시좌궁(時坐宮) 남쪽에 단(壇)을 베푸는 것이 가합니다. 삼성(三聖)은 전조 충렬왕(忠烈王)이 세조 황제(世祖皇帝)의 딸에게 장가들고 중국 남방에 있는 신(神)을 청하여 제사하였는데, 대개 수도(水道)와 화복(禍福)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국(大國)은 중국 북방의 신인데, 충렬왕이 또한 청하여 제사한 것입니다. 옛적에 주공(周公)이 신읍(新邑)을 짓고, 사전(祀典)에 없는 신(神)도  모두 제사하였으니, 위의 2신(神)이 비록 바른 신은 아니나, 사전에 실려 있으니 폐할 수 없습니다.”【원전】 1 집 596 면

태종 12년 (1412)
03/20(갑진) 전 대사헌 김첨이 산수화 족자와 용을 그린 수목화 족자를 바치다
전 대사헌 김첨(金瞻)이 산수 족자(山水簇子) 및 수묵룡 족자(水墨龍簇子)를 각각 한 쌍씩 바치었다.
【원전】 1 집 628 면

10/11(계해) 김첨·이종선·위충 등에게 과전을 환급하다
명하여 전 총제(前摠制) 김첨(金瞻), 전 참의(前參議) 이종선(李種善), 전 판사(前判事) 위충(魏?) 등의 과전(科田)을 돌려주게 하였다.【원전】 1 집 652 면
11/24(을사) 전 총제 김첨에게 미두 20석을 하사하다
전 총제 김첨(金瞻)에게 미두(米豆) 20석을 내려 주었으니, 김첨이 가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원전】 1 집 655 면

태종 15년 (1415)
01/27(병인) 소격전 제조 김첨이 《성수경》을 올리다
소격전 제조(昭格殿提調) 김첨(金瞻)이 《성수경(星宿經)》을 올렸다. 김첨은 학문이 넓지만 잡설을 좋아하고, 시세(時勢)에 따르며 아부하였다.【원전】 2 집 52 면

07/12(정미) 진산 부원군 하윤이 친한 사람을 천거하는 상언을 하니, 이의륜을 충주 목사로 삼다
이의륜(李義倫)으로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삼았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실봉(實封)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윤회(尹淮)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여 대언(代言)이 될 만하고, 김첨(金瞻)은 고금(古今)을 널리 통하여 육조 판서(六曹判書)가 될 만하고.......”모두 하윤과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었다.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유사눌(柳思訥)에게 보이며 말하기를,“김첨은 내가 이미 써서 수년(數年)이 못 되어 발탁하여 재상에 두었었는데,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 당부(黨附)하다가 불충한 죄로써 헌부(憲府)에서 형벌을 받은 것은 사람이 함께 아는 일인데, 하윤이 몽롱하게 천거하였으니, 남의 신하가 된 자가 과연 이러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 훈구(勳舊)를 생각하여 책망하지는 않는다. 이 말을 누설하지 말라.”하고, 이의륜으로 목사를 삼았다.【원전】 2 집 75 면

[양촌선생문집 제9권]

전서(典書) 김첨(金瞻)이 다녀갔다

옛날 궁동에서 날마다 같이 다닐 때/昔年宮洞日相隨
어려서부터 친한 정 누가 또 있느냐/童稚情親更有誰
벼슬길의 궁통을 운명에 맡겼더니/宦路窮通曾信命
성조의 발탁이 바로 때를 만났다/聖朝遷擢政逢時
예악에 정통해서 연혁을 알고/精硏禮樂知沿革
경서도 널리 보아 의심을 밝혔다/博涉經書辨信疑
표주박으로 바닷물 헤아리기 어려우나/自愧持?難測海
찾아 주시니 너무나 감사하네/賁然門巷喜來思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양촌 권근(權近:1352∼1409)의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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