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세 허주공(虛舟公) 휘(諱) 반(盤)(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허주공)


(1580∼1640). 61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舟), 아버지는 문원공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창녕조씨로 첨추 대건(大乾)의 딸이다.
1605년(선조 39)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9인으로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 2) 인조반정후 이조의 추천으로 빙고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이괄의 난에 상감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하여 공주에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성균관 전적을 제수받고 형조좌랑을 거쳐 예조로 옮겨 사관으로 기사관을 겸했다. 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부교리에 승진되었다. 1625년(인조 3) 헌납, 직장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그때 대사헌이 혼조의 척신사객이므로 탄핵하다가 면직되었다. 다시 헌납네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그 뒤 교리, 이조좌랑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 지제교, 응교, 사간원 집의, 종부시정, 상의원정, 의정부 사인,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했고 홍문관 전한이 되었고 1633년(인조 11) 장악원정과 도감(都監)을 겸했다. 그 후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대사간,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병조, 형조참판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부임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화친을 반대했다. 그 후 가선대부로 승진되고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대사성, 예조참판, 부제학, 병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한성우윤,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이때 아우가 남의 무고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는데 궐문밖에 대죄하니 임금이 무고함을 알고 석방해 주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궁중에서 오락이 심하므로 「인군이 정무를 마친후에는 반드시 경사에 유념하여 흥망의 자취를 근본으로 치정하여야한다」고 말하였다. 평소에는 화기가 가득하나 일의 시비에 있어서는 의연히 분발하여 외세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말로 간사한 것을 물리쳤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모셨고 둘째아들 김익희와 함께 독전어사로 전투에 나가 병사들을 감독하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때 부인 서씨와 셋째아들 김익겸도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정려문을 세웠는데 이 정려문은 묘 아래쪽 동네입구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있다. 정사(靖社), 영사(寧社)의 원종훈에 책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이조참판 증 영의정 반 신도비명 (吏曹參判贈領議政槃神道碑銘 )

▶ 김반, 김익겸의 묘 및 비(金盤의 墓 및 碑)


▶ 시지정문화재자료 제 7 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산18-1
▶ 시   대 : 조선 인조

전민동 엑스포사거리에서 삼성푸른아파트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통나무집이 나오고 그 위쪽의 산에는 수십기의 분묘가 있다. 이곳은 광산 김씨 일가의 선산으로 나라에서 사패지로 하사받은 땅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인근에 전민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산 김씨 문중의 묘 중 대전시문화재자료 지정된 것이 김반의 묘와 신도비이다.

김반의 묘 주위에는 상석.문인석.묘비.신도비등이 있다.  봉분의 직경은 8m,높이는 2.2m이고 앞에는 12m의 장대석을 놓고 묘역을 조성해 놓았다. 묘의 왼쪽 앞에 있는 신도비의 글은 청음 김상헌 선생이 짓고, 글씨는 동춘 송준길 선생이 쓴 것으로 현종 2년 (1661)에 세워진 것이다. 또 중앙에는 상석을 놓았고, 좌우에는 문인석을 배치 장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묘의 바로 아래쪽에는 광산 김씨 문중의 제실이 있어 1년에 한 번씩 후손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제를 지낸다.

소재지: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세일사일:음 10월 12일

 

<참고:묘비(墓碑)와 비명(碑銘)>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의 총칭이며, 비명이란 비에 생긴 글로서 명문·비문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고인의 성명·본관·원적·성행·경력등의 사적을 서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