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김백겸(金伯謙)

(1428 ∼ 1506) 79歲 전리판서공 광리(光利)의 현손(玄孫)이며 諡 양호공(襄胡公)이다.
조선 전기의 무신이며 훈신,  字는 자양(子讓),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혁(革)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청주곽씨(淸州郭氏)로 현감(縣監) 휴(休)의 딸이다.
아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힘이 뛰어나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더니 1460년(세조 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 때 북쪽 오랑캐가 변방을 소란케 하므로 임금이 상락군(上洛君) 김질(金 )에게 명하여 진압하라 하니 선전관으로 김질을 도와 전공을 세웠다. 또 상당군 한명회를 따라 서변(西邊)의 적(賊)을 진압하는데 공로가 많았으므로 여러번 승질(陞秩)되었다. 1467년(세조 14)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귀성군(龜城君) 준(俊)의 막하(幕下)로서 평정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으며 절충장군 겸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뒤에 임금이 문무를 겸전한 인재를 등용할 때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이 때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가 의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므로 조정에서는 치안을 염려하여 수령과 목사를 여러번 교체하다가 公으로 의주목사를 삼으니 이만주 일당은 도망가고 노략질은 없어졌다. 병으로 퇴임을 청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는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땅이니 덕망있는 당상관을 임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니 임금이 도리어 평안병사(平安兵使)등을 거쳐 광원군(光原君)에 봉(封)해 졌고, 1478년(성종 10) 황주목사(黃州牧使)가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대궐에 몰려가서 한 번만 더 연임토록 글을 올려 간청하니 조정에서 이를 허락했다. 1484년(성종 16)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1485년(성종 17) 평안도 절도사로서 변경 경비를 소홀히 하여 충군(充軍)되었다가 뒤에 도총부총관이 되고,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였다. 늙어서 향리로 돌아와 쉬려하니 임금이 훈구신으로 우대 하려 했으나 사양했다. 뒤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묘(墓)는 경기도 성남시 태장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典故大方, 國史大事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