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 충장공(忠壯公) 휘 덕령(德齡)


김덕령은 광주시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1567년 광산김씨 습독공 붕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고 18세 때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 명령을 받고 의병을 일으켜 제봉 고경명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에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사호를 받앗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여 형 덕홍과 고경명 장군의 권유로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하여 고향에 내려온 사이 금산전투에서 형이 제봉과 함께 전사했다는 비보를 받고 통분을 참지 못했다. 이듬해 8월 모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른 뒤 담양과 인근 고을에 격문을 띄워 장정 5천의 의병을 모았다. 그해 12월 조정으로부터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고 담양에 출전하여 순창, 남원, 운봉, 함양을 거쳐 진해, 고성지방을 방어했고 왜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았으며 의병장 곽재우(1552 - 1617)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물리쳤다.

1595년에는 고성을 침략하려는 왜군을 기습 격퇴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도체찰사 윤근수(1537 - 1616)의 종을 죽인 일로 한때 의금부에 수감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장군은 이 난이 이미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했다. 그런데 충청도 순찰사의 종사관인 신경행의 무고로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갖은 악형 끝에 억울하게 옥사하니 이때 공의 나이 29세였다.

이듬해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왜적이 전라도까지 휩쓸게 되었는데 부인 흥양홍씨도 담양 추월산에서 피난중 왜적이 쳐들어오자 이를 꾸짖고 순절했다.

1661년(현종 2년)에야 공의 억울함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복직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 1678년(숙종 4년) 벽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1년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이어 영조 때 의열사에 제향, 1788년(정조12년) 다시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31세 충장공(忠壯公) 휘 덕령(德齡)장군 의복


▶중요민속자료 제111호
▶조선시대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1980년 4월 1일 지정
▶충장사

김덕령장군 의복은 1974년 금곡동 배제에 있던 김덕령장군의 묘소를 이장하던중 출토되었다. 이것은 16세기말의 복식으로 복식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이 의복은 저고리 1점, 천익 2점, 직령포 4점, 바지 1점으로 1975년 4월 24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1호로 지정되었다가 1980년 4월 1일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었다.

1974년 11월 19일 충장사에서 500m 지점의 배재마을 뒤에 있었던 충장공 묘를 사우 경내로 이장하기 위하여 묘를 팠는데 묘를 봉안한지 378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육탈되지 않은 시신과 매장당시 입었던 수의가 그대로 출토 되었다.
발굴된 목관은 길이 188Cm, 폭 69Cm, 높이 45Cm, 두께 7.5Cm로 옻칠을 한 이중목관이었으며 안치된 장군은 전하던대로 5척 단구임이 확인되었다.
옷은 대부분 흰색 또는 다갈색 계통이었고 두툼한 솜이 든 것이었는데 특히 수의는 썩지 않고 원형대로 있었으며 누비옷은 바느질 솜씨가 아주 정교하게 누벼져 마치 재봉틀로 옷을 만들지 않았나 의심할 정도였다. 또 가죽으로 된 전포(장수가 입었던 긴 웃옷)를 겉옷으로 입고 있어서 당시의 복장과 군복 연구 및 장례제도 연구에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누비옷은 장군이 출정할 때 가족의 부녀자들이 정성들여 만들어 준 호신복으로서 민속의 일단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의복이 썩지 않은 것은 회로 세 겹을 싼 회격묘였기 때문에 외기가 차단되고 지하의 습기와 지열 등의 작용으로 부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회를

둘러싸는 장례법이 성하여 이 묘도 전형적인 묘제에 의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참고:[김덕령장군 사후 379년이 되니 400여년전의 것이다.]이 의복은 저고리 1점, - 2점, 직령포 4점, 바지 1점으로 당초 1975년 4월 24일에 전남도 지방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1980년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었다.

현재 충장사에 보존관리하고 있으며 의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고리 : 겉은 굵은 대-이고 속은 굵은 --이면 안에는 솜을 두었다.
옷길이 69.5cm, 화장 76cm
백저천릭 : 백저의 단천릭이며, 치마는 맞주름으로 처리되고 소매는 양쪽을 뗄 수 있게 되었다.
옷길이 위 50.3cm, 아래 71.5cm, 화장 110cm
동천릭 : 천릭이라 볼 수 없을 만큼 해체되어 있으나 부분을 조립하였더니 천릭임이 분명하였다. 겉은 명주였던 흔적이 있으나 삭아서 없어졌고 두터운 솜과 무명으로 된 안감만 남아 있다.

옷길이 위 60cm, 아래 109cm, 소매 85cm
흰무명 직령포 : 흰 무명에 솜을 두고 0.8cm 간격으로 곱게 꼬아서 누빈 춘추용 직령포다.
옷길이 107cm, 화장 85cm
흰무명 납의직령포 : 겉과 안이 모두 백무명으로 누빈 것으로 다른 포처럼 이중섶이다.
옷길이 108cm, ,화장 85cm
흰무명 납의직령포 : 겉은 고운 무명, 안은 거친 무명을 쓰고 솜을 두텁게 두어 누빈 것으로 승복과 흡사하다.
옷길이 117cm, 화장 85cm
명주직령포 : 겉이 명주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모두 삭아 없어지고 솜만 남았다.
옷길이 121cm, 화장 129cm
겹유고 : 현재는 솜만 남았으나 바지의 형태나 누비의 흔적이 뚜렷하다.
길이 90cm
위 옷들은 1986년 보존처리를 하였다.

▶해동명장 김덕령 장군의 약사


  충장공 諱 金德齡은 우리 광산김씨의 명조(名祖)이자 해동명장(海東名將)이다. 장군은 조선 宣祖 元年(서기 1568년) 12월 29일에 광주 무등산(無等山) 아래 석저촌(石底村 : 現 충효리)에서 탄생하였다. 그 때 무등산의 정기(精氣)가 온통 장군에게로 쏟아졌기에 무등산의 草木이 3년동안 꽃을 피지 못하였다고 전해온다. 장군은 태어나면서 신용(神勇)을 타고나 바라보면 단아(端雅)한 선비였으나 내면에는 상상을 초월한 용력(勇力)이 있었다. 눈방울이 가을물처럼 맑으면서 광채가 나 아무리 어두운 밤일지라도 수리(數里) 안의 물체를 환희 구별하였으며, 둔갑술(遁甲術)을 능통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하였다.

  宣祖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이듬해 계사년(癸巳年)에 장군은 수령(守令)·방백(方佰)의 명 천거와 권유로 모상(母喪)중에 묵최(墨 )로 의병을 담양에서 일으키니 그 소식을 듣고 하루 아침에 의병 5천여명이 운집하였다. 이에 광해군(光海君)은 전주에 분조(分朝)하여 있다가 장군을 불러 보고서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칭호를 내려주었으며, 선조대왕은 특사를 보내 충용군(忠勇軍)이란 칭호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장군의 전략(戰略)은 담양을 출발하여 순창, 남원, 운봉, 함양, 산음, 단성, 삼가, 의령, 함안, 창원, 김해, 동래, 부산과 동해의 대마도를 거쳐 일본 대판(大阪)으로 쳐 들어가려고 하였다. 장군은 의병 5천여명을 거느리고 영남의 진주로 진군하여 월아산(月牙山)에 목책(木柵)을 설치해 놓고, 대여촌(代如村) 마평(馬坪)에서 호두가면(虎頭假面)을 쓰고 24斥짜리 철추(鐵椎)에 50斤짜리 철일(鐵 )을 휘두르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곤 하였다. 장군은 이 정예(精銳兵)들을 거느리고서 의령 정암진에서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연합기습작전으로, 거제도에서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륙연합작전으로 왜적을 크게 무찌르기도 하였다. 장군은 명성이 너무나 높아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터무니 없는 모함을 받아 의금부(義禁府)에 나치(拿致) 되었다가 다행히 무죄방면되면서 어구마(御廐馬)를 하사받아 진주로 환진(還陳)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조 29년 7월에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장군이 또 터무니없이 연루되어 추국청(推鞫廳)으로 체포 압송되었다.

  이 때에 추관(推官)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좌의정 김응남(金應南)·지중추부사 정탁(鄭琢) 등이었다. 김응남과 정탁은 장군을 힘껏 구원하였는데, 정탁은 장군을 구원하는 옥사계(獄事啓)까지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독 영의정 柳成龍만이 장군을 배제(排 )함으로 인하여,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는 웅략(雄略)을 조금도 펴보지 못한 채, 만고(萬古)의 억울함을 품고서 "春山火燃曲" 한 수를 남기고서 옥중에서 원통하게 돌아갔다. 때는 선조 29년 8월 21일로 장군의 보령(寶齡) 겨우 29歲이였다. 이 때에 진주 백성들은 장군의 비보를 듣고 모두들 골목에 모여 서로 울었었다. 장군이 돌아간 지 65년 만인 현종(顯宗) 2년에야 비로소 신원 복직되고, 현종 7년에는 병조판서를 가증한 동시에 장군이 합향(合享)된 벽진서원(碧津書院)과 의열사(義烈祠)에 사액(賜額)도 하였다.  그리고 정조(正祖) 12년에는 충장(忠壯)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장군의 옛 마을 석저촌을 충효리(忠孝里)로 명명(命名)하여 표리비(表里碑)를 세워 주었으며, 13년에는 좌찬성을 가증하고 부조판하(不 判下)도 내려 주었다. 뿐만 아니라 1976년에는 정부(政府)에서 장군의 묘역을 성역화(聖域化)하고 충장사(忠壯祠)를 창건(創建)해 주기도 하였다. 앞서 말한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올린 장군의 옥사계(獄事啓) 초본(草本)을 종현(宗賢) 김선원(金善源)씨가 인사동(仁寺洞)에서 발견하여 내게 연락을 주기에, 단걸음에 달려가 고가(高價)에 구입 표구하여, 봉심재배(奉心再拜)하고서 오동나무 갑에 넣어 화씨벽(和氏璧)보다 더 보배로 간직하다가, 이번에 번역을 곁들여 월간 光山뉴스에 게재한다.

후손 충호(忠浩) 삼가 씀.

※ 이글은 후손 김충호 (성균관 한림원 원장 겸 성균관대 교수, 단국대 동양학 전문위원) 일가가 월간 光山뉴스에 기고한 글을 우리 광산김씨 후손들은 알아야 하겠기에 원문 그대로 올린 것입니다.

▶김덕령 옥사계(金德齡獄事啓)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신(臣) 정탁(鄭琢)은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김덕령(金德齡)의 옥사(獄事)는 신은 끝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덕령에게 별로 근거할 만한 정적(情迹)이 없는데도, 다만 그 역적(逆賊)의 입에 오른 까닭으로 이로써 그가 반역을 꾀 하였다고 의심하여 꼭 죽이고야 만다면 어떻게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

덕령의 이름은 다만 나라 사람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일본 오랑캐와 중국에서도 역시 알고 있습니다. 역적 괴수가 당초에 무리들을 유혹하고 위협할 적에, 필시 먼저 스스로 성세(聲勢)를 과장하고 속임수를 끼고서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거사(擧事)함에 있어 반드시 성공 못할 리가 없다. 아무 진(陳)에 아무 장군(將軍)이 마땅히 올 것이며, 아무 지방에 아무 장군도 역시 따라 올 것이다."고 하여 한 사람의 외침에 백 사람들이 뇌동부화한 것일 터이니, 이것이 그 흉모(凶謀)중의 가장 앙큼한 것입니다. 적중(賊中)의 일이 반드시 이런 음모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홍모(洪某) 등도 당시에 지키던 성(城)에 있었는데, 조금 이름자가 있는 까닭에 역시 연루를 모면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덕령에게는 못치지 못합니다. 덕령은 이름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역적의 입에 이용 당함이 더욱 많을 것이니, 이 때문에 꼭 역모(逆謀)에 참여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지적하여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 역적의 공초(供招) 내에, "호남(湖南)에 왕래하면서 서로 내통하였다."는 것도 조사해 봄에 대부분 서실이 아니었습니다. 매한가지로 이 적중(賊中)의 말이 과장된 말 아닌 것이 없으니, 절대로 이를 근거하여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옛적에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이 죽은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진승(陳勝)의 무리들이 오히려 그들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지금 덕령이 역적 괴수에게 이용당한 것이 또한 무슨 이상하잘 것이 있겠습니까 ? 그 사건을 고찰해 보면 무릇 역적의 과장한 말이 대체적으로 이에 벗어나지 않음이 알기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덕령이 남쪽으로 내려간 이후에 이미 시기를 놓쳐버려, 비록 힘을 펴서 조그마한 공도 기록할 만한 것은 없지만, 별로 군사를 죽게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없습니다. 그 호서(湖西)의 역적이 반란을 선동한 초기에 이르러 그 도원수(都元帥)의 전령(傳令)을 듣고 그날로 군사들을 정돈하여 그 이튿날 출동하였고, 또한 별로 망설이면서 관망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역적의 입에 이름이 올랐다는 까닭만으로 그 정적(情迹)을 구명해 보지도 않고, 갑자기 엄한 국문(鞫問) 아래에서 곧바로 죽도록 한다면, 죄명(罪名)이 밝혀지지 않아 나라 사람들의 의심이 끝내 풀리지 않고, 남쪽 변방에서 병권(兵權)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위험스럽게 여기고 두려워 하여, 모두들 자면서 뒤척거리며 스스로 편치않은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국가의 복이 아닐성 싶습니다. 신(臣)의 지나친 염려는 종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국사(國事)가 어지러움이 많음을 당하여 아직도 평정되지 못하였고, 해구(海寇)의 정적(情跡)도 또한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까닭없이 한 명장(名將)을 죽인다면 다만 적국(敵國)의 비웃음과 업신여김만을 초치할 뿐, 난리를 평정하는 정사에는 아무 도움이 없을까 몹시 두렵습니다.
덕령이 참으로 역모(逆謀)가 있었다면 그 정적(情跡)이 반드시 드러나 절대로 끝내 은폐될 리가 없습니다.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그대로 시일을 끌어 반드시 그 정적이 드러남을 기다린 뒤에야 그 죄를 성토하여 죽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면 법을 사용함이 구차스럽지 않아 죄인이 아무 말없이 죽음에 나아갈 것이고, 나라 사람들의 의심도 또한 크게 풀리어 남쪽 변방의 장사(壯士)로서 힘을 펴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스스로 안심하여 마침내 자면서 뒤척거리는 마음이 없을 터이니, 어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臣)도 또한 황공스럽게 ......... 추국청(推鞫廳)에서 대죄(待罪)하면서 가만히 망령된 소견이 있어서, 감히 품달하지 않을 수 없기에 황공하옵게도 감히 아뢰옵니다.
만력(萬曆) 24년 (서기 1596) 8월

▶충효동 정려비각


忠壯公 金德齡(1567~1596)장군과 그의 부인 興梁李氏, 그 兄 德弘과 弟 德晋 一家族의 忠.孝.,烈을 기리기 위해 충효리 마을앞에 세운 閭 비각이다. 이것이 여느 門과 다른 것은 이 碑閣 앞의 縣板에 새겨 있는 내용에서 {...1788년 正祖가 倫音으로서 表里碑를 세우라}이르고, [忠孝之里]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 下賜한 점이다.

閭碑는 1789년 (正祖13년)에 세운 것으로 全面에는 碑名 [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德齡 贈貞敬夫人 興梁李氏 忠孝之里[가 三行으로 새겨져 있다. 이면에는 정헌대부호조판서 徐有隣이 選하고 全羅道觀察使 徐龍輔가 쓴 陰記가 새겨져 있다. 碑의 크기는 총 높이 220Cm 基壇 높이 110Cm 碑身 높이 171Cm 碑身너비 68Cm이며 비갓이 얹혀있다. 碑閣은 正面 3칸, 側面 1칸의 맞배지붕이며 三門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碑閣의 建立年代는 1792년이며 그 뒤 수차례의 重修가 거쳤다. 碑閣前面에는 全州府尹 韓用龜가 쓴 [正祖御製倫音]이란 현판이 있고, 碑閣內容左側에 忠孝里碑閣上樑文](1792년 宋欽選. 書).[忠孝里碑閣重修記](1838년 全羅道觀察使 李憲球識)의 記文현판이 있다. 碑文에 나타난 金德齡一家의 事蹟은 다음과 같다.

金德齡; 자는 京樹 本貫은 光山이며 午鷄 成渾에게서 글을 배웠다.
壬辰倭亂때 형 德弘이 錦山戰鬪에서 戰死하자 喪中임에도 義擧하여 潭陽府使 李景麟, 長成縣監 李貴의 천거로 從軍의 命을 받고 義兵을 收合하여 南原에서 訓練을 마친 뒤 宣傳官에 被任되어 權慄 휘하에서 倭의 湖南進出을 막는데 힘썼다.

1594년 鎭海, 固城에 나가 義兵將 郭再祐와 협력하여 倭兵을 물리치고 1595년에는 固城에 上陸하는 적을 격퇴하였다. 1596년 都體察使 尹根壽의 奴僕이 上典의 권세를 믿고 軍律을 어기므로 杖殺하여 한때 체포되었으나 王命으로 석방되자 大臣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때마침 李夢學이 反亂을 일으키자 그와 內通했다는 모함을 받아 鞠問 도중 獄死했다.

1661년 伸 되어 官爵이 복구되고 1668년 兵曹參議, 1681년 兵曹判書, 1788년 議政府左成에 加贈되고 忠壯의 諡號를 받았다. 興陽李氏: ( ?` 1597): 김덕령 장군의 부인으로 丁酉再亂때 倭兵의 추격을 받고 殉節했다. 金德弘(1558-15920): 김덕령장군의 형이며 호는 省庵이다. 牛鷄 成渾의 門人이며 壬辰亂이 일어나자 義兵將 高敬命 휘하에 참집하여 義州行在所로 가던중 錦山에서 倭兵과 싸우다 전사했다.

金德晋(1571-1627): 김덕령의 아우이며 字는 子龍, 號는 風岩이다. 孝誠이 지극했다.
두 兄을 잃은 뒤 다시 丁酉亂이 일어나자 智異山 白雲洞에서 亂을 피하여 겨우 家系를 보존했다.
亂後네 風岩亭을 짓고 讀書로 一生을 보냈는데 仁祖때 잠시 昌陵參奉으로 나가 있다가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隱居 하였다. 正祖 乙巳年(1785)에 執義에 追贈했다

▶풍 암 정


▶[충효동 718 '90.11.15 광산김씨김종두 ]

▶시대:조선시대

풍암정은 원효(元曉)계곡 계류(溪流)의 하류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선,인조대에 활동하였던 풍암 김덕보(楓巖金德普 1571-?)가 선조대에 지은 정자로 풍암정사라고도 불린다.

풍암은 임진왜란 때에 큰형 덕홍(德弘)이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하고, 중형 덕령(德齡)이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이를 슬퍼하여 칩거하였다.

그 후 세상을 잊고자 하는 뜻으로 이곳 무등산의 수려한 원호계곡을 찾아 터를 잡고 도학과 경륜을 쌓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후에 의열사(義烈祠)에 추배(追配)되었다.

정자는 풍암정사(楓巖亭舍) 현판과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 그리고 임억령(林億齡), 고경명(高敬命), 안방준(安邦俊), 정홍명, 풍암 등의시를 새긴 판각이 걸려 있다. 임억령, 고경명 등의 제영(題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름있는 시인들이 이에 출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정,측면 다같이 2칸으로 좌우에는 1칸의 올돌방을 두었다. 팔작기와지붕으로 홑처마이며, 우물 마루를 구성하였다. 큰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보이는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중앙에만 팔각기둥을 세웠다. 문은 띠살문으로 네 방향 모두 사분합(四分閤)이면서 위로 들어 올려 열 수 있도록 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중앙은 우물천장으로 처리하였다. 우측에 거실 1칸을 두고 앞면과 좌측은 판자마루로 돌렸다. 선자서까래를 사용하였으며, 연곡벽과 온돌방 3벽면을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정자 뒷편은 기와를 얹은 담을 두르고 좌우에는 큰 바위들이 자연스럽게 담을 이루도록 하였다.

▶취가정(醉歌亭)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이 두 정자는 서로 바라다 보일 만큼 비슷한 높이와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광산 김씨)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정자로 6·25동란때 소실된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정자의 이름 '취가정'은 석주 권필(1569∼1612)의 꿈에서 연유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함받아 죽은 김덕령이 어느 날 권필의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 "취시가(김덕령이 취했을 때 부른 노래라는 뜻)"를 부르자 이에 권필이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 한다.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天命을 어찌하리…. "

 

* 취시가 * --김덕령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此曲無人聞
 我不要醉花月
 我不要樹功勳
 樹功勳也樹浮雲
 醉花月也是浮雲
 醉時歌
 此曲無人知
 我心只願長劍奉明君
 <<충장공유사>>

* 취시가에 화답 * --권필

 지난 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리
 돌아가신 그 넋의 그지없는 눈물
 분명한 한 곡조 취시가로 읊으셨네.

 將軍昔日把金戈
 壯志中최奈命何
 地下英靈無限恨
 分明一曲醉時歌
 
<취가정 현판>

[김덕령은 무등산 아래 석저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에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았다. 지금도 무등산 곳곳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이 많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고경명, 곽재우 등과 함께 크게 활약했는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옥사했다.
큰 나무들이 서 있는 동그란 언덕에, 자미탄을 뒤로하고 외따로 떨어져 자리잡았다. 주변의 정자들이 주로 자미탄을 주경관으로 내려다보는데 비해, 취가정은 남쪽으로 널리 펼쳐진 논밭과 무등산을 바라다본다. 가장 나중에 세워진 정자건물이다.]

▶김덕령 장군의 시조[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임진왜란 때 의병이었던 작가가 왜군과 내통하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산에 붙은 불은 끌 수 있지만, 마음에 붙은 불은 끌 수가 없다고 하는 <대조>의 표현기법이 이 작품의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

▶김덕령 장군에 얽힌 전설[고동바위와 용마(龍馬)] - 창선면


[김덕령 장군이 용마 타고 내려온 발자국...]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지금의 창선면이 진주목에 속해 있을 때 이야기. 창선도는 섬 전체가 나라에서 군마로 쓸 말을 기르는 목장이었다. 이 목장은 오랫동안 전쟁을 치렀던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기르는 말의 수가 천 필을 넘었다. 옛날부터 '닭이 천이면 봉이 나고 말이 천이면 용마가 난다'는 속담이 있었으니, 창선에도 과연 용마가 나왔을까?

과연 창선 목장 안에도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성질이 사나운 용마가 있었고, 아무나 타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이 소문은 진주목에 주둔해 있던 충용 김덕령 장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김덕령 장군은 창선으로 건너와 영웅답게 용마를 훌쩍 올라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용마는 하늘을 향해 포효를 한 번 하고는 힘차게 내닫는 것이 아닌가. 용마는 상신마을과 옥천 뒷산 꼭대기에 있는 고동바위를 지나 달려갔다.

김덕령 장군이 용마를 잡아타고 지나간 고동바위 위에는 말 발자국이 띄엄띄움 찍혀 있다. 이 발자국은 옛날 상신천 돌다리에도 있었으나, 아쉽게도 1917년 큰 홍수 때 돌다리가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없어졌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이 얻은 이 용마는 그 뒤 장군이 무고로 옥에 갇힐 때,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아 장군의 불행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용마는 김덕령 장군이 풀려났다 다시 옥에 갇힐 때에도 역시 며칠 전부터 먹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수감된 뒤에는 끝내 장군이 풀려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자 이 용마도 마침내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자료 : 자료의 일부는 광주광역시 공개자료]

▶'충장공 역모(逆謀) 근거 없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