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 황강공(黃岡公) 휘(諱) 계휘(繼輝)


26세 김계휘(金繼輝)(양간공파/판군감사공파/의정공파) (1526∼1582). 5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아버지는 증좌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정랑 광원(光元)의 딸이다.
세 살, 네 살 때 문자를 알고 일곱 여덟살 때 문의(文義: 글의 뜻)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다 읽었고 한 번 보면 거의 다 기억하였다. 1548년(명종 4)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왕명이 있어 이듬해 정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곧 호당(湖當)에 뽑혔다. 이듬해 부정자를 거쳐 조금 있다가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저작박사가 되었다. 1554년(명종 10) 부수찬, 지제교, 사간원 정언, 이듬해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곧 성균관 전적으로 이조좌랑에 피천되니 이 때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김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함을 주장하니 권간배의 꺼리는 바가 되어 한을 머금고 화를 전가 시키니 일시의 명류들이 혹은 귀양가고 혹은 파직당하였다. 서울을 떠나 연산에 은거하였고 1563년(명종 22) 조정의 조치가 달라져서 벼슬을 돌려주고 다시 등용한다는 명이 내렸으나 마침 아버지의 상중이라 이듬해 복제를 마치고 곧 승문원 교리, 예조정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시(寺)의 첨정을 한 번, 정(正)을 세 번 지냈고 양사의 사간과 집의며 의정부로는 검상과 사인이요 관직(官職)으로는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냈다. 1566년(명종 22) 중시 문과 을과 제1인으로 뽑히니 통정에 승진하여 동부승지를 배수하였다. 중시에 올린 시표가 시정에서 걸출일 뿐만 아니라 당송명문집에도 당당히 우두머리가 될 만하니 곧 학사가 당상관이 되는 예요 상감의 은총도 받았다. 그 후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간이 되었으며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1573년(선조 7) 가선에 승진되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로 대사간을 네 번, 대사헌을 세 번 지냈고 평안, 전라관찰사, 공, 형조참판, 상호군,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 때에는 동지성균관사,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경상감사를 재직시 백성의 제소(提訴)를 공정히 처결하여 흐르는 물같고 일의 작은 수나 이름이라도 한 번 듣고 본 것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잊지아니하니 이민(吏民)이 그 신명함을 탄복하였다. 또 급미(給米) 3백석을 연산으로 보내 고운산사에 있는 정회당을 대둔산으로 옮겨 서재를 짓고 학문을 권장했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왕조계통이 명나라 서책에 잘못 기록된 점을 바로 잡는 것) 교섭차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하는데 학식이 고명한 인재로 황제를 감동시켜야할 당시의 인물은 김계휘와 이이뿐이었다. 임금이 계휘로 주청사를 삼으니 고경명과 최립은 보좌관으로 수행하였다. 1600년(선조 34) 광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으로 추증되었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고 신도비가 논산시 연산면 거정리에 있으니 지방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황강 김계휘의 사당 (모선재) 황강 김계휘의 서원(월정서원)

▶문화재 :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10호
▶지   정 : 1984년 7월 26일 지정
▶장   소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13-1
선생의 묘소는 거정터에 있고, 신도비는 1604년 건립하였는데 당초 마을 안에 있던 것을 마을입구에로 옮겼다.


▣가선대부 대사헌 증 이조판서 계휘 신도비명(嘉善大夫大司憲贈吏曹判書繼輝神道碑銘)
   공이 3, 4세에 문자를 알고 7, 8세에 문의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거의 다 읽었고 점차로 장성하여서는 제가서를 두루 열람하여 일견에 열 줄을 함께 내려보고 한번 보면 다 기억하였다. 무신년 한해동안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어지가 내렸다. 기유년 봄에 정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참방하였다. 윤원형이 자기의 신분을 위하여 서얼도 청반에 참여시키자는 의논을 수창하니 이를 반박한 차자가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더욱 강직하여 심정의 직첩을 돌려줄 수 없다고 힘써 논쟁하니 옛 직신의 풍도가 있었다.

공이 김공 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함을 주장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서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내고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황해도 관찰사, 이조참의로 좌우승지를 거쳐서 대사간이 되었으며 가선에 승진하여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뒤로 대사간을 네 번, 대사헌을 세 번이나 지냈다. 평생 치가에 뜻을 두지않고 조선의 유업외에는 한 식구의 먹을 것이나 한 이랑 밭이라도 증산한바 없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재주있는 이를 사랑함을 지성으로 하고 내몸을 낮추어 아랫사람을 대하되 나이와 지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의 착한 일을 반드시 들어내며 착하지 못한 일은 듣지 않은체 하며 더욱 종척과 향당사이에 두텁게 하니 유식한 사람은 그 의리에 복종하고 무식한 사람은 그 어질고 온후함을 그리워 하였다. 이에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서 애사를 쓰니 이에 이르되, 몸은 능히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 하나 뜻은 물욕으로 인하여 변하지 아니하며 도량은 사람이 엿볼 수 없고 말씀은 겨우 입에서 나오는 듯 하나 들끓던 공론이 끝나고 조정에 가득찬 의논이 결정되도다 바야흐로 공의 앞날을 기대했는데 벌써 공을 문자중에서 그리게 되니 무궁한 슬픔을 어찌하랴.
知中樞府事 崔  撰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