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世 효간공(孝簡公) 근와(芹窩) 김희(金喜)[의정공후 下 허주공파]

문원공(文元公) 사계선생의 후손으로 문정공(文貞公) 창주(滄洲) 휘 익희(益熙)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결백하였으며,

죽은 후에도 3년동안 정승의 녹봉(祿俸)을 받았다.

 

김희는 조선조 중기(1729-1800)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상경(相庚)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다.
자는 선지(善之) 호는 근와(芹窩) 사호는 술우평이다.
정조(正祖)가 술우평이라 사호하고 글을 써주되 우옹조술주자(=우암 송시열은 주자의 학문을 이어 밝혔고) 김공조술우옹(=김공은 우암의 학문과 도를 받아서 서술하여 밝혔다)하였다.

공은 천품이 단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일직 이루었다.

1763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우암 송시열선생을 효종(孝宗)묘정(廟廷)에 배향할 것을 발의 하였다. 경능참봉에 배수되고 북부봉사에 승진되었다.

1773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 주서, 정자, 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 별검 사과를 거쳐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1777년 학문으로 중망되어 전라도 경시관이 되어 과거의 공정성을 기하였다. 이어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지평에 올랐고 우암 송시열의 유헌비문을 썼으며, 교리겸 경연시독관이 되었다.

1780년 통정대부 공조참의, 수원부사, 사간성, 우승지, 좌승지, 가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1782년 대사성, 형조참의가 되어 왕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의하였다. 왕명을 받아 주자전서를 점비해 올렸으며 이조참의로 문신의 시관이 되었고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태학(太學)의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였다.

1784년 가선으로 승진, 병조참판, 승문원 제조, 호조참판, 사현부 대사현, 동지의금부사,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규장각 직제학, 부제조, 한성부 우윤, 도승지 겸 승정원 재조를 지냈으며, 알성문과 시관이 되어 인재를 뽑았다.

1789년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장군의 유사를 지었고 1790년 우리 광산김씨의 후손으로 임진왜란에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과 영남에서 왜병을 크게 무찔러 곽재우와 더불어 찬여히 빛을 남긴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장군의 유사를 지었다.

또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왕명으로 송시열선생의 송자대전(宋子大典)을 교정해 올려 정조왕이 술우평이라 사호하였다. 자현대부로 승진 형조판서, 예조판서겸 도총부 도총관, 경기도 관찰사와 서흥부사, 규장각 직제학,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1793년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이 되어 기사에 들어갔으며,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내의원 도제조가 되었다.

 

1800년에 졸하니 임금이 부음을 듣고 충청도에 명하여 두 사람의 관리를 보내 호상케하고 대신(大臣)으로 예우하여 장사를 지낼 것이며, 관에 있을 때 청렴 결백하였으므로 향후 3년 동안 정승에 재직 시와 같이 녹봉을 줄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특명하여 시장(諡狀)을 내리되 자혜애친왈효(慈惠愛親曰孝)요. 평이불자왈간(平易不 曰簡)이라 하여 효간이라 시호를 내렸다.
외손자 판서 심의면이 묘지명에 이르기를 "공은 어려서부터 효우가 근천하였고 자라서 경학과 학문으로 당세에 이름이 있었다" 하였고 "5_6세 되던해에 글을 읽는데 하루는 아버지 증 영의정공(허 상경)이 극히 사랑하고 아꼈는데 인근을 다녀오며 글을 읽으라 하자 그말씀에 순종하여 글을 읽었다. 이때 어머니 이씨부인이 음식을 주자 독서하는 것은 아버지의 명이니 어찌 어기리요 하며 단정히 앉아 글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어머니께서 크게 기특히 여겼다" 하였다.

 

영정과 유고가 있으니, 유고는 14권 7책이요 가장 1권 행장, 묘표, 음기, 묘지명 합1책과 연보 1책등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조선조 마지막 정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