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 호(鎬)

자(字)는 숙경(叔京), 조선조 연산군 을축(1505)년에 태어나 명종 신유(1561)년 겨울에 임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57세다. 아버지는 진산군수를 지낸 종윤(宗胤)이며, 어머니는 영산신씨로 풍저창수 우정(禹鼎)의 따님이다.

어려서 문학에 힘썼고 만년에 벼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지례현감(현 경북 구미시)을 지냈다. 공(公)은 식견이 넓고 기우(氣宇)가 온후하며 안으로는 온화하고 밖으로는 엄전하여 바라보면 위대해 보였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고 음률(音律)도 잘 알며 음양(陰陽)·산수(算數)와 금기(琴碁)·잡기(雜技)에 이르러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추만(秋巒) 정지운과 한마을에 살면서 오고가며 역리(易理)를 강론하는데 추만(秋巒)이 탄복했다.

아들 대사헌공이 사림들 사이에 명망이 높으매 공은 항상 겸퇴(謙退)하라고 경계하였으나 윤형원 일파에 당화(黨禍)를 입었다.

그리고 손자 장생(長生)이 어려서 어머니 평산신씨를 여의고 아버지는 외방(外方)의 임지로 부임하거나 당화(黨禍)로 연산에 장기간 은거한 고로 항상 애잔히 여겨 아끼고 사랑함이 남달랐으며 밖에 스승에 보내지 않고 직접 교육을 시켰다.

부인은 전의이씨로 정랑 광원(光元)의 따님이다. 평소 자화(慈和)하여 규법(規法)이 있으니 자녀들 성취(成就)에 가르침이 많았고 공보다 9년 뒤 선조 기사(1569년)년에 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공의 돌아간 이듬해 임술 2월에 연산 우수리 선영 옆에 안장했고 부인은 기사 3월에 합장(合葬)했다.

후에 조정(朝廷)으로부터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받았다.

사계선생이 할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나타낸 시(詩)가 전하다. 이 시(詩)는 10년 만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찾았던 가야산 고사(古寺)에 들러 깊은 감회에 젖은 던 모습을 그린 시(詩)다.

   再伽倻山            다시 가야산에서

   재가야산

 

古寺會遊己十秋    옛 절에 노닌 지 이미 십년

고사회유기십추

寒齋獨坐思悠悠    찬방에 홀로 앉아 생각은 한이 없네

한재독좌사유유

故山春色渾如舊    옛 산 봄빛은 온전히 지금과 같은데

고산춘색혼여구

回首龜城雙涕流    머리를 구성으로 돌리니 두 줄기 눈물이 흐르네.

회수구성쌍체류

 

통훈대부 행지례현감 상주진관 병마절제도위 증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휘 호 묘갈명 병서

通訓大夫 行知禮縣監 尙州鎭管 兵馬節制都尉 贈崇政大夫議政府 左贊成兼 判義禁府使 諱 鎬 墓碣銘 幷序

공(公)의 휘(諱)는 호(鎬)요 자(字)는 숙경(叔京)이니 광주인이다. 신라말에 왕자가 피난하여 광주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삼았고 고려조에 대대로 대관(大官)이 이어 팔대(八代) 평장사(平章事)가 되니 공은 그 후손이다.

증조의 휘(諱)는 국광(國光)이니 좌의정(左議政)으로 적개좌리(敵愾佐理) 이훈(二勳)에 책록되어 광산부원군을 봉하였고 조(祖)의 휘(諱)는 극뉴(克뉴)이니 대사헌(大司憲)으로 참판(參判)과 광원군(光原君)을 추정(追贈)받았고 고(考)의 휘(諱)는 종윤(宗胤)이니 진산군수로 참의(參議)를 추정(追贈)받았으며 비(비)는 영산신씨로 풍저창수 우정(禹鼎)의 따님이다.

연산 을측(1505)년에 공(公)을 낳으니 공은 어려서 문학에 힘썼고 자라서 운수가 기구했으나 만년에 처음 벼슬하여 와서(瓦署) 별제(別提)로 참례(參禮) 찰방(察訪)에 옮기어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에 승진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지례현감으로 나가 있다가 명종 신유(1561)년 겨울에 임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57세인데 자(子) 계휘(繼輝)의 귀(貴)로써 이조 참판의 추증(追贈)을 받았다. 배(配) 전의이씨로 정부인(貞夫人)을 추봉받았으니 정랑(正郞) 광원(光元)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곧 계휘(繼輝)이니 대사헌(大司憲)이요 차남은 은휘(殷輝)이니 현령(縣令)이요 차남은 입휘(立輝)이니 별제(別提)요 차남은 공휘(公輝)이니 찰방(察訪)이요 여(女)는 이흠·채유근에 각각 출가했다.

대사헌의 자(子)는 장생(長生)이니 참봉(參奉)이요 여서(女壻)는 정기명이요 현령(縣令)의 여(女)는 강찬·송이창에게 각각 출가했고, 별제(別提)의 자(子)는 길생(吉生 )·선생(先生)이요 채유근의 자(子)는 홍(泓)이며 여(女지)는 윤세정에게 출가했다. 장생(長生)의 자(子)는 은(은)·집(集)·반(槃)이요 그 밖에 손자는 다 어리다.

공(公)은 식견이 넓고 기우(氣宇)가 온후하며 안으로는 온화하고 밖으로는 엄전하여 바라보면 위대해 보였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고 음률(音律)도 잘 알며 음양(陰陽)·산수(算數)와 금기(琴碁)·잡기(雜技)에 이르러도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재주의 능하고 넓음이 이와 같았다. 추만(秋巒) 정지운과 한마을에 살면서 오고가며 역리(易理)를 강론하는데 추만(秋巒)이 탄복했다.

아들 대사헌공이 젊었을 때는 착한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므로 명망이 사림들 사이에 높으매 공은 항상 겸퇴하라고 경계하더니 당화(黨禍)를 입었다가 다시 기용되었다.

부인은 평소 자화(慈和)하여 규법(규法)이 있으니 자녀들 성취(成就)에 가르침이 많았고 공보다 9년 뒤 선조 기사(1569년)년에 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공의 돌아간 이듬해 임술 2월에 연산 우수리 선영 옆에 안장했고 부인은 기사 3월에 부장(부葬)했다.

명(銘)하노니, 학문은 반드시 록(綠)에 있고 주림은 농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 공(公)은 포부를 가지고 몸을 비색했으나 마음은 편안하였네. 백수(白首)에 청삼(靑衫)으로 고을을 다스렸고 아들이 집을 이으니 준수한 선비일세. 드높은 가성(佳城)은 공의 무덤이다. 아름다운 말로 숨을 빛을 발표하네.

숭정대부 행병조판서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이이 찬

崇政大夫 行兵曹判書兼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 成均館使 李耳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