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世 김익희(金益熙)

창주공 김익희의 친필(1610∼1656).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신독재 김집, 기암 정홍명, 계곡 장유의 문인이며 1627년(인조 5)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50인으로 합격하였고 1633년(인조 11)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 2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고, 곧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전적에 승진, 세자시강원 사서로 옮겼고 옥당에 선발, 수찬에 임명되어 정사의 대본과 천리, 인욕, 공사, 의(義)와 리(利)등을 나누어 상소하였으며 부교리 겸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임금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산성을 고수하며 척화를 주장했다. 1639년(인조 17) 어머니 상(喪)을 마치고 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영광군수로 나갔다. 이듬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렸고 1644년(인조 22)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에 들어가 보덕을 겸했는데 이때 대소관원이 무사안일하고 법도가 해이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1646년(인조 24) 동부승지, 승문원 부제조를 거쳐 1648년(인조 26) 태안군수로 옮겨 선정을 베푸니 백성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인조가 승하하자 효종의 부름을 받아 우부승지가 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다. 1651년(효종 3) 강원감사가 되어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653년(효종 5)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형조참의, 대사성을 거쳐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곧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사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옮겼다. 1655년(효종 7)  대사헌, 이듬해에 양관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곧 사양하니 형조판서로 임명하자 또 사직소를 올렸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4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과 도의로 사귀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문집이 있다.
配는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유성구 가정동에 있다. (대전시 도지정문화재 제5호)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