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 김익겸(金益兼)

충정공 김익겸의 묘소(1615∼1637). 23歲,  조선 중기의 충신, 字는 여남(汝南), 아버지는 증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澍)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생원시에 장원하고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1636년(인조 14) 건주의 오랑캐가 참람하게 황제라 일컬으니 우리 사신 이곽(李廓) 등이 겁내어 그 궁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들과 같이 축하하였다. 이때 상소하기를 "오랑캐가 오만무도하니 천지의 대변이요 이곽 등이 사신의 임무를 버리고 위조(僞朝)를 축하하여 군명을 욕되게 했으니 그 부도한 사람을 죽여 나라안에 조리돌리고 또 오랑캐의 사신이 거만하여 우리로 하여금 부모의 나라를 배반하고 흉한 무리와 화친하라 하니 이 말이 어찌 마땅하다 하리오, 청컨대 몽고 사신도 함께 죽여 함에 담아 명나라에 알리고 대의를 들어 삼군을 격려하면 벙어리와 앉은뱅이라도 백배나 기운이 날것이니충정공 김익겸과 김반의 배위 서시의 효열각 어찌 힘이 적은 것을 근심하랴." 하였다. 그러나 이 해 겨울에 오랑캐가 쳐들어와 어머니 서부인을 모시고 강화도로 갔다. 이듬해 정월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침범하자 동지들과 함께 군관을 도와 사수할 것을 약속하고 활을 잡고 성에 올라 말하되 한 사람씩이야 어찌 대적하지 못하겠느냐 하였다.
22일에 청병(淸兵)에게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강화(江華)로 가서 성을 사수(死等) 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선원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성루문에 올라가 분신(焚身) 자결하였다. 뒤에 보조공신 영의정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며,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 및 논산의 충곡사(忠谷祠)에 배향되었고 부조(不조)의 은전을 받았으며 충신의 정려(旌閭)를 받았다.
配는 贈정경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묘(墓)는 대전시 서구 정민동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년보(年譜)]

중종 19년/02/12(정미) / 세자빈의 간택을 의논하다

전교하기를,

“세자빈(世子嬪)의 일을 의논하고자 하니, 삼공(三公)과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부르라.”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자빈을 자전(慈殿)께서 이미 간택하셨는데, 박호(朴壕)의 딸만큼 합당한 사람이 없다. 다만 가문이 어떠한지 모르겠다.”하매,  영상(領相) 남곤(南袞) 등이 아뢰기를,

“박호의 아비는 박강(朴薑)이고 강의 아비는 박은(朴豈)인데 다 훈신(勳臣)으로 지위가 1품에 이르렀습니다. 박은의 먼 조상인 박상충(朴尙衷)은 전조(前朝)에서 정당 문학(政堂文學)이었고, 박호의 처의 아비는 김익겸(金益謙)이고 그 아비는 김양중(金養中)이라 하는데 곧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의 사위입니다. 문벌로 보아도 쓸 만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박호의 딸은 내의(內議)가 이미 정해졌고 대신도 이와 같이 아뢰니, 정혼할 만하다. 빈의 집이 본디 여염에 있으므로 창호(窓戶)와 포진(鋪陳)이 구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니, 도감(都監)에 물어서 마땅하게 장만하여 주라.”하였다.

인조 13년/09/27(갑술) / 증광 별시를 시행, 생원과 진사 백 명씩을 선발하다

증광 별시에서 생원과 진사를 각각 1백 인씩 선발하였다. 생원시의 장원은 김익겸(金益謙)으로 김반(金槃)의 아들이며, 진사시의 장원은 홍중보(洪重普)로 홍명구(洪命耉)의 아들이다.

인조 15년/01/22(임술) / 강도 함락 시,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과 전 우승지 홍명형 등의 졸기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인하여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

감상용의 자는 경택(景擇)이고 호는 선원(仙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묘(宣廟)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해야 할 일을 만나면 임금이 싫어해도 극언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박두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이 반정(反正)함에 이르러 더욱 중하게 은총을 받아 지위가 정축(鼎軸)에 이르렀지만,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국가가 위망에 처하자 먼저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강도의 인사들이 그의 충렬(忠烈)에 감복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은 젊었을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번 종반(從班)을 역임하였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던 날, 미처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뒤따라 강도에 들어갔다가 김상용을 따라 남문루(南門樓)의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뒤에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생원 김익겸(金益兼)은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재명(才名)이 있었다. 어미를 모시고 강도에 피난 중 적이 이르자 남문루에서 김상용을 따랐다. 그의 어미가 장차 자결하려고 불러다 서로 이별하자 익겸이 울면서 ‘내가 어찌 차마 어미가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고, 마침내 떠나지 않고 함께 타죽었다.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은 참판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다. 김익겸과 함께 남문루에 갔는데, 김상용이 장차 스스로 불에 타죽으려 하면서 그들에게 피해 떠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함께 죽었다. 뒤에 모두 관직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은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로 본래 조행(操行)이 있었으며 충효를 스스로 힘썼다. 강도가 함락되자 먼저 스스로 염습(斂襲)할 기구를 마련해 놓은 뒤 신기(神氣)를 편안히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후손으로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했으며 공평하고 정직하였다. 적이 성에 들어오자 송시영(宋時榮)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인(古人)의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시영이 먼저 죽자 스스로 가서 초빈한 뒤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그 중 하나를 비워두고 말하기를,

“나를 묻어라.”

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그의 아들 이경(李憬)에게 부치기를,

“장강(長江)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 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 아, 내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구구하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네가 나의 뜻을 잘 잇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심현(沈좩)은 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뜻을 맹세하였다. 적의 공격을 받던 날, 그의 가족이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피하도록 청하니, 듣지 않고 직접 유소(遺疏)를 쓰기를,

“뜻하지 않게 흉적이 오늘 갑진(甲津)을 건넜으니, 종사(宗社)가 이미 망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부인(夫人) 송성(宋姓)과 함께 진강(鎭江)에서 죽어 맹세코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하고, 드디어 관대(冠帶)를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처도 손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함께 죽었다. 상이 유소를 보고 이르기를,

“국가가 심현에게 별로 은택을 내려 준 일이 없는데, 난리에 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기를 중신(重臣)들보다 먼저 했으니 대현(大賢)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그의 처 송씨가 함께 죽은 절개 또한 매우 가상하다. 해조로 하여금 함께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여 그 충렬(忠烈)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전 사헌부 장령 정백형(鄭百亨)은 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인데, 그의 고조(高祖) 이하 4세(世)가 모두 절의(節義)와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정효성이 연로한데다 병까지 위독하여 강도에 피난하였는데, 적이 성에 침입하자 정백형이 그의 아비를 돌보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게 노략질하자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조복(朝服)을 갖추고 남한 산성을 바라보며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두 첩도 함께 죽었다.

전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시골 집에 있었는데, 적병이 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성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상길은 선조(先朝)의 기구(耆舊)로서 양사의 장관을 역임하였고, 뒤에 나이 80이 넘었다 하여 초자(超資)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예조가 정표(旌表)하도록 계청하였다.

충의(忠義) 민성(閔?)은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의 아들이다. 강도가 함락되던 날, 먼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벤 뒤 자살하였다. 기타 유사(儒士)와 부녀(婦女)로서 변란을 듣고 자결한 자와 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현종 2년/04/17(병신) / 고 필선 윤전과 유생 권순장·김익겸을 강도 충렬사에 종향하다

고(故) 필선 윤전(尹?)과 유생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兼)을 강도(江都) 충렬사(忠烈祠)에【충렬사는 곧 순절(殉節)한 신하 김상용(金尙容)·심현(沈좩)·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英) 등 제인(諸人)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종향(從享)하였다. 윤전은 고 참의 윤황(尹煌)의 아우로서 다른 재능은 없었으나 사람이 순박하고 근실하였다. 정축년에 궁관(宮官)으로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청(淸)나라 군대가 철수해 돌아갈 때 성 밖으로 끌려나가 그대로 살해되었다. 순장은 고 감사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고, 익겸은 고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서 태학(太學)에서 학업을 닦으며 모두 이름이 있었다. 김상용이 남루(南樓)에 있을 때 두 사람도 같이 누 위에 있다가 불길이 치솟아도 피하지 않고 죽었는데, 뒤에 헌직(憲職)에 추증되었다. 그런데 강도(江都)의 사자(士子)들이 윤전의 죽음은 분명치 못한 점이 있고 순장 등은 어미가 있는데도 먼저 죽은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충렬사에 들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 유계의 진언에 따라 이렇게 명한 것이다.

현종 13년/08/03(을사) / 김만기가 대제학을 사양하니 답하다

김만기(金萬基)가 세 번이나 소를 올려 대제학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김만기가 인대하였을 때 다시 불안하다는 형편을 아뢰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는 출사하기 전에는 의논할 일이 아니므로 연이어 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효종 때에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 역시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으므로 청나라에 관한 문서는 별도의 지제교(知製敎)를 차출하여 주관하게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학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김만기의 아비 김익겸(金益兼)이 정축 호란 때 강화에 들어갔다가 청나라 군병에게 죽었다. 익희는 익겸의 형이다.

현개 00/07/18(정축) / 상이 대신 및 여러 신하를 인견하다

상이 대신 및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심지원(沈之源)이 말하기를,

“수원(水原)에 이미 다듬어 놓은 돌을 산릉(山陵)으로 운반하려면 백성들의 전답이 많이 상하고 배로 운반하는 것도 불편하여 염려했는데, 영상의 아룀을 인해 운반하지 말도록 하셨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수원의 산에는 이미 돌 다듬는 일을 시작했으므로 이를 옮겨 써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대신이 멈추라고 청한 것이다. 이 때 대마도(對馬島)에서 쌀을 무역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는데, 상이 그 일의 시말을 물으니, 정태화(鄭太和)가 대답하기를,

“대마도(對馬島)는 일찍이 강호(江戶)에서 지급하는 쌀이 있었는데 지금 주지 않기 때문에 섬 안 사람들이 의뢰할 바가 없게 되자, 공무목(公貿木) 1천2백 동(同) 안에서【우리 나라에서는 면포(綿布)를 목(木)이라 일컫고 50필(疋)을 1동이라 하는데, 왜인(倭人)들이 구리를 바치고 우리 면포를 바꾸는 것을 공무목이라 일컫는다.】 3백 동을 들어 내고 쌀을 대신 주되 무명 1필의 값을 쌀 1석(石)으로【우리 나라는 15두(斗)를 1석으로 한다.】 하고 1동을 40석으로 정식(定式)을 삼아 10년을 한정으로 해 바꾸어 주기로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 때 변신(邊臣)이 5년을 기한으로 정했는데 이제 이미 기한이 넘었기 때문에 이런 청이 있게 된 것이니, 2백 동을 허락하고, 또 1필에 10두로 값을 정하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복 정(司僕正)이 올라온 후 상견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어버이의 병 때문에 돌아가고자 하니, 마음이 매우 서운하다.”

하니, 이유태(李惟泰)가 아뢰기를,

 

“상께서 버려 두지 않고 거두어 부르시므로 감히 한결같이 물러나 있지 못했습니다만, 집에 병이 든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차마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기를 허락하시니,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왕래하는 기간이 반드시 여러 달이 걸릴 것이니, 직명을 체직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긴요한 직임이 아니고, 또 인산(因山)의 기일이 멀지 않았다. 오래 머물 계획은 하지 말라.” 하고, 또 이르기를,

“장악 정(掌樂正)을 상견하기를 간절히 바란 지 오래였다.【이유태와 윤선거 등은 모두 예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이다.】 병환이 있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죽을 죄를 진 신하로 자처해서입니다. 선조(先朝) 때에도 역시 궐문 밖에서 내려가면서 등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죽을 죄라고 하는가?” 하니, 송준길이 대략 그 까닭을 진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뜻이 지나치다.”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병자 호란 때 윤선거가 일반 선비로 어미를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 그의 벗 권순장(權順長), 김익겸(金益兼)과 일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었다. 적이 강을 건널 때 선거가 부서를 나누어 성문을 지키자고 청하여 자신은 동쪽 문에 소속되게 되었다. 성이 함락되려 할 때 그의 형이 어미를 모시고 먼저 강가로 도망하였는데 선거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고는 탄식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어 부모의 생사를 모두 알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남한 산성으로 가서 대인(大人)이 있는 곳에서 함께 죽는 것이 낫겠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선거의 아비 대사간 윤황(尹煌)이 바야흐로 산성에서 호가(扈駕)하고 있었고, 중부(仲父) 윤전(尹?)역시 힘쓰고 있어서였다.【윤전(尹?) 역시 순절하였다.】 이 때 효종(孝宗)이 대군(大君)으로 오랑캐의 진영에 있으면서 종실(宗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으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에 편지를 받들고 가게 했는데, 선거가 그 수행인으로 변장하여 따라갔다. 마침 상이 성에서 나올 때여서 아비와 서로 만났는데, 인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선거의 아내가 선거를 따라 강도에 있었는데, 일이 급하게 되자 여러 사람과 함께 모여 있던 곳으로 선거를 청해 오게 하였다. 선거가 이르자 말하기를

“적에게 죽느니보다는 일찍 자결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다만 한번 결별하고 죽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거가 차마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다시 먼저 모여 있던 곳으로 달려가니, 그의 아내는 마침내 자신의 목을 두 여종으로 하여금 매게 하여 죽었다. 선거의 두 벗인 순장과 익겸이 남문(南門)에 있다가 정승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죽었는데, 선거는 다른 곳에 있었으므로 함께 죽지 못했다. 선거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일생 동안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으므로 여러 차례 징소(徵召)하는 명을 받았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 때에 상소를 올려 진동(陳東)과 윤곡(尹穀)의 일의 일로써 자신을 비유하고 또 말하기를

“이른바 사(士)에게는 나라와 함께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것은 평상시 정해진 생각이었습니다만, 이미 포위된 성 안에서 함께 모욕을 당했고 보면 난을 만나 구차스레 모면한 것이니,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가령 진동(陳東)이 윤곡(尹穀)의 처지를 당했다면 반드시 죽었지 차마 살아 남으려고 애쓰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아픔이 실로 이에 있어 끝내 이미 지난 일이라 하여 스스로 위안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신의 본심을 논하는 자들이, ‘벗과 함께 일하기로 하고서 벗은 죽었는데 죽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아내와 죽기로 약속하고서 아내는 죽었는데도 죽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자책하여 벼슬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모두 신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벗 때문도 아니요, 또 아내 때문도 아니며 단지 신의 몸이 구차스럽게 살아 남은 것을 한하는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거의 마음은 대략 이상과 같은데 알지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말하기를

“윤선거가 강도의 난에서 그 아내를 먼저 죽이고 자기만 죽지 않은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겨 벼슬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의 아내가 절개에 죽은 것은 선거가 핍박하여 죽인 것이 아니고, 그가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오로지 아내가 죽었는데 함께 죽지 못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거가 상소 가운데서 진술한 것이 대개 그 실상인 것이다.

그가 벼슬하지 않는 뜻을 외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나, 그의 아들 윤증(尹拯)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종신토록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은 대개 헤아린 뒤 들어간다는 의리였고, 죽을 죄를 지은 자로 자처한 것은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긴 것을 사죄(死罪)로 삼은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믿을 만하다.

현개 02/04/20(기해) / 고 필선 윤전·금부 도사 전순장 등을 강도의 충렬사에 종사하다

고(故) 필선 윤전(尹?), 금부 도사 권순장(權順長), 생원 김익겸(金益兼)을 강도(江都)의 충렬사(忠烈祠)에 종사하였다.【충렬사는 곧 순절한 신하인 김상용(金尙容)·심현(沈좩)·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榮) 등을 제사하는 곳이다.】 윤전은 고 참의 윤황(尹煌)의 아우이다. 병자년에 궁관(宮官)으로 빈궁(嬪宮)을 강도에 배종하였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곧 식음을 전폐하였고 적병이 철수해 돌아갈 때에 꼼짝않고 누워 있다가 해를 입었다. 순장은 고 감사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고 익겸은 고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인데, 태학(太學)에서 유학할 때 모두 이름을 떨쳤다. 김상용이 남루(南樓)에서 장차 분신 자살하려고 할 때 이 두 사람이 곁에 있었다. 상용이 물러가 피하도록 지휘하였으나 짐짓 가지 않고 있다가 드디어 함께 죽었다. 뒤에 아울러 지평에 추증되었다. 이때에 와서 부제학 유계(兪棨)가 이 세 사람이 순절한 정상을 갖추 진달하자 이런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현개 13/09/03(을해) / 우의정 김수항이 월경했다가 사로잡혀 온 사람에 대하여 아뢰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항이 의주(義州)의 월경(越境)했다가 사로잡혀 온 사람을 처치할 일로 앙품(仰稟)을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정말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고 하던가?”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의주 부윤이 엄히 형신하여 캐묻기도 하고 술을 대접하여 그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꾀어보기도 하였으나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인 듯한데 바깥 의논들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건 실성을 한 사람이건 난자도(蘭子島) 근처에서 붙잡혔으니만큼 그가 월경을 한 정상이 뚜렷하니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입시한 신하들에게 다시 한 번 묻도록 명하였는데, 다들 신문을 할 필요없이 곧장 효시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말을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호조 참판 김만기가 문형(文衡)에 제수되고부터 누차 상소하여 고사(苦辭)를 하다가 나중에는 나아가 사은(謝恩)을 하였는데, 이때 와서 또다시 정리상 편안하기가 어려운 형세임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정리를 내가 모르지 않으나, 경이 출사를 아니했기 때문에 미처 의논하여 정하지 못하였다.”

하고는, 수항에게 물었다. 수항이 아뢰기를,

“선조(先祖) 때에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문형에 재임하던 당시, 저들에 관한 모든 문서들에 대해서는 별지제교(別知製敎)를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주관토록 하는 게 좋겠다.”

하였다.

대체로, 만기는 김익희의 조카인데, 정축년의 난리에 익희의 어미 서씨(徐氏)가 강화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만기의 아비 김익겸(金益兼)도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죽었기 때문이었다.

현개 14/12/27(임술) / 김익겸을 예조 참판으로 삼다

김익경(金益炅)을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심재(沈梓)를 호조 참판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판으로, 신정(申晸)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년보제공 : 김진수)200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