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문경공(文敬公) 신독재 선생 김집 金集 1574(선조 7)∼1656(효종 7)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대건(大乾)의 딸이다. 여덟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 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장학을 좋아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 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 그 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 되었으나, 나가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한편,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 등과 상례를 논하고, 또 아버지가 찬한 ≪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등, 활발한 학술활동을 폈다. 그 뒤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태학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안팎으로 그 덕망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 때는 대임(大任)을 맡게 달라는 김상헌의 특청을 임금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늘 초야에 묻혀 도(道)를 줄기고,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위로 이이(李珥)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 이황(李滉)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옥천의 창주서원(滄洲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 疑禮問解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愼獨齋文集<金容傑>[ 출전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독재선생의 친필 교서(효종묘정에 배양하는 교서)

※ 문경공파 종중 행사 및 기타자료

▶김집선생 사당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294호(1987. 12. 30지정)
▶위     치 : 논산시 연산면 임리 267번지
▶소     유 : 광산김씨 중종
▶수     량 : 건물 1동(정면3칸, 측면2칸)
▶재     료 : 목재, 석재
▶시     대 : 조선시대

연산면 임리에 있는 이 사당은 종가 후면에 건립되어 신독재 김집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조선조 가묘의 전통적인 양식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에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고, 전면의 각칸마다 4짝씩 문을 설치하였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후벽면에는 위패를 놓을 수 있도록 단을 높게 설치하였다.
건축년대는 상량문에 정확하게 표기되었는데 조선 인조7년(1629)으로 되어 있다.

▶김집선생 교지


▶충청남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295호(1987. 12. 30지정)
▶위     치 : 논산시 연산면 임리 267번지
▶소     유 : 김선오
▶수     량 : 문서 1매(가로5.45m, 세로83cm)
▶재     료 : 한지
▶시     대 : 조선시대

이교지는 조선 현종 2년(1661) 6월 21일에 현종이 내린 교지로써 깅집선생을 효종 묘정에 배향토록 하는 교지이다.

가로 5.45m, 세로 83cm의 한지에 종서로 47줄, 총 464자가 쓰여졌다.

이 교지에 수록된 내용은 깁집선생의 훌륭한 가문과 인품을 찬양하고, 학문의 경지와 지혜등은 일찍이 볼 수 없었으므로 효종 묘정에 배향함이 합당하다는 내용이다.

▶김집선생 묘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296호 (1987. 12. 30지정)
▶위     치 :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35-3
▶소     유 : 광산김씨 중종
▶수     량 : 분묘 1기(묘역 60평)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35의 3번지 구 고운사 절터 부근에 김집선생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묘소 전면에는 선생의 후처인 덕수이씨의 묘소가 있고 선생의 묘소 전면좌우에는 문인석 (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을 설치하였으며 묘소의 전방에는 김집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28세 문경공(文敬公) 신독재 선생 김집 金集 1574(선조 7)∼1656(효종 7)  신도비

▶신독재선생 년보(愼獨齋先生 年譜)

▶참고

 

한삼천 느티나무


장소 : 충남 논산군 벌곡면 양산리
신독재선생을 사사(師事)하던 문하생들이 선생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빌며 심은 것으로 수령(樹令) 4백여년이 된다.
이 느티나무의 잎이 무성하면 물이 흔하고 번성하지 못하면 물이 귀하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한삼천(汗三川) 느티나무에 얽힌 구전(口傳)』
신독재선생의 종손(善五)에 의하면 그 느티나무는 본래 신독재선생의 祖父(조부)이신 황강공(諱 繼輝)께서 설립하신 정회당이란 공부방 인근에 있던 나무였다. 하루는 신독재선생께서 정회당에서 밤늦도록 학문에 전념하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 조부(祖父) 황강공께서 홀연히 나타나 빨리 근처 느티나무를 잡으라는 계시(啓示)를 하셨다 한다. 신독재선생께서 다소 괴이하게 여겼으나 조부(祖父)의 현몽(現夢)이라 자리에 일어나 그 나무를 잡으매 이윽고 갑자기 큰 홍수가 일어 한삼천 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다행이 느티나무를 부여잡은 신독재께서는 무사하였다는 문경공파 집안의 구전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