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의정공(議政公) 휘(諱) 국광(國光)


의정공은(1415∼1480) 66歲.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훈신, 字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부사 명리(明理)의 딸이다.

1438년(세종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생으로 뽑혔을 때 황희 정승이 항상 말씀 하시기를 김생은 "작게 될 사람이 아니다" 하며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뒤에라야 공을 버았다. 1441년(세종 24)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처음 벼슬에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1445년(세종 28) 황해도 도사에 승진하고 1447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및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49년 전라도 도사 1452년 승문원 교리(承文院敎理)가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사헌부 지평이 되어 이듬해 함안사람 최옥산의 옥사를 잘 다스리니 임금이 "김국광이 아니었으면 무죄한 백성을 죽일뻔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어 성균관 사예를 제수받았고 왕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 후 부승지, 참의를 거쳐 1461년 병조참판에 승진되었는데 「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내리어 포상하고 문무전재라고 칭찬하였다. 1464년(세조 10)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되고 1466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고 병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게 하였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고 특명으로 도승지를 겸직하였다. 이 때 길주 적 이시애가 백성을 선동하여 감사, 절도사, 수령을 다 죽이고 반역하였는데 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 2등 공신에 오르고 좌찬성에 승진되었다. 1469년(예종 2) 우의정(右議政)에 승진되고 편집중인 경국대전을 집대성하였다. 1470년(성종 2)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 1등공신에 녹선되었으며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의정공 휘 국광의 친필

의정공(議政公) 국광(國光)은 광산김씨로는 처음으로 좌의정을 하셨다.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신도비명에 찬(撰)하기를 『광산에 모인정기 대대로 호걸과 영웅이 나는도다 공이 이에 큰 영걸이다 그 소리 크게 떨쳤도다 공은 경제 포부를 가졌고 공이 국책을 시설코자 하였도다 광묘를 만났으니 천년만에 한 번 있을 기회로다 은대에 뽑혔고 사마에 어른이로다 시정을 조치함이 모두 다 적당하니 어디를 간들 옳지 않으리오 계책을 임금께 아뢰니 오히려 군진의 벗이ㅇ 유악에서 운주하니 장자방 같은 사람이라 깊숙한 상부와 드높은 기린각에 단청이 빛나고 신흘이 엄연하다 충성과 근면이요 공훈과 인덕이로다 백성은 귀서같이 생각하고 나라에서는 주석같이 믿었도다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거연히 불행하였도다 한나라 개국공신 같은 공은 남았으나 위징같은 명감은 들을 수 없네 당저 슬퍼하여 부의와 제문을 내리었네 웅진강이 희고 계룡산은 푸르도다 연산의 한 언덕이 공의 현당이다 풍성한 비 서 있으니 영원토록 빛나리라 나의 아첨함이 아니라 후세에게 계고 함이로다』
配는 정경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니 영의정(領議政) 황희(黃喜)의 손녀이다.
묘(墓)는 논산시 두마면 왕대리에 있으며 충청남도지정문화재자료 제308호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與地勝覽)

▶의정공 김국광(國光)의 묘소


1. 22세 의정공 휘 국광의 묘

2. 22세 의정공 배 정경부인 장수황씨의 묘

3. 26세 사의공 휘 입휘의 묘

4. 27세 추의공 휘 길생의 묘

5. 21세 서윤공 휘 진일의 묘

6. 32세 통덕랑공 휘 광택의 묘

7. 의정공의 신도비

소제지:충남 논산시 두마면 왕대리(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305호)

기사:음 11월 10일

▶의정공 김국광(國光)의 사당


▶논산시지정 향토유적 제7호(1992. 10. 28지정)
▶위     치 :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148
▶소     유 : 김 경
▶수     량 : 건물1동(정면3칸, 측면3칸)
▶재     료 : 목재, 석재
▶시     대 : 1483년

연산면 고정리에 있는 의정공 사당은 성종13년(1483)에 건립된 불천지위 사당으로 종중에서 관리하여 왔으며 수차에 걸쳐 보수하여 왔다.

전통적인 민족고유의 가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전면에는 퇴간을 둔 사당으로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후벽면에 감실을 두어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9일과 12월 10일에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영    사    암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29호(1989. 4. 20지정)
▶위     치 :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11-1
▶소     유 : 광산김씨중종      
▶수     량 : 건물 1동(정면 1칸, 측면 2칸)
▶재     료 : 목재, 석재                 
▶시     대 : 조선시대  

영사암은 김국광과 김겸광 형제가 선영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시묘살이 하던곳에 세워진 건물이다.
成化 乙未年에 건립될 당시는 26칸의 건물이었으나 없어지고  그 후에 수차 개축 보수되다가 지금은 4칸만이 보존되어 남아 있다. 시묘살이 하던 가옥이 오래 보존될 수 없었고, 하인들을 기거 시키면서 묘소를 수호하기도 불편하므로 암자를 겸한  수호사로 영사암을  건립 승려를 두고, 독경과 제사를 모시게 하였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조선 고종  12년에 개축된 조선후기 건물로 원주를 사용하고 팔작 지붕형태의 민도리집으로 된 전통 한옥 건물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시대의 기본법전. 조선왕조는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6년(태조 5)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續六典)》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임원준(任元濬),홍응(洪應),성임(成任),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60년(세조 6) 먼저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대에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81년에는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85년부터 시행하였다. 그 뒤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92년의 《대전집록(大典輯錄)》,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 1698년(숙종 24)의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1706년(숙종 32)의 《전록통고(典錄通考)》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또한 반포 때에 이미 <예전(禮典)>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호전>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또 형벌법으로서 《대명률(大明律)》과 같은 중국법이 <형전>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되었다.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체(六典體制)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14~61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전(吏典)>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兵典)>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工典)>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짧게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고려 말부터 약 100년 간의 법률제정사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법전의 반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규범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또한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다. 한편,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실제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이 수립되어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법률의 개폐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것을 반영한 법전이 출현하였지만, 이 법전의 기본체제와 이념은 큰 변화없이 이어졌다. 《대전회통》에는 비록 폐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경국대전》의 조항이 그 사실과 함께 모두 수록되었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 또한 매우 큰 폭으로 달라져 갔다. 그것은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備邊司)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물론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매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법제처가 1962년에 번역본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85년에 번역본과 주석서를 함께 간행하였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광산부원군 국광 신도비명(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光山府院君國光神道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