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세 김극핍(金克핍)

평정공 휘 극핍의 묘소(1472∼1531) 6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성(子誠), 아버지는 공안공(恭安公) 겸광(謙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로 사직 계손(繼孫)의 딸이다.
1489년(성종2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 5) 식년시 문과에 3등 23인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고,검열, 봉교, 전적, 예조좌랑, 수찬, 지평, 예조정랑이 되었다. 이 때 연산군의 정란(政亂)으로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자 고산현(高山縣)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이 즉위하자 귀양에서 풀려나와 교리가 되고 장령, 부정으로 옮겼고 승문원 교감(校勘)으로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했고 그 후 사간, 집의 제용, 선공감정에 올랐고 직제학, 동부승지, 우승지,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좌승지, 도승지,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한성부우윤, 이조참판, 좌참찬, 병조판서, 세자좌빈객, 우찬성, 좌찬성 겸 세자이사에 이르렀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에게 직언으로 간하여 출척(黜斥)할 것을 아뢰고 흉당들의 원한을 받았다.
평정공 이하의 묘소 1530년(중종 25) 김안로, 허항, 등에게 몰려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발병하여 서거(逝去)하였고 1537년(중종 32) 김안로 등이 사사(賜死)된 후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용모가 단아하고 식견이 풍부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교만하지 않았다.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광악군(純忠輔祚功臣崇祿大夫光嶽君)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다
묘(墓)는 양주군 주내면 마전동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