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광성부원군 사우(충청공(忠貞公) 휘 克成(극성))


▶지 정 별: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제143호
▶지정년월일: 1984.5.17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27-2
▶수 량: 사당1동(5.1평),외문1동(1.41평)
▶소 유 자: 광산김씨종중
▶관 리 자: 광산김씨종중
▶구조: 건조

본 사당은 중종반정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으로 광성부원군에 봉해진 좌의정을 지낸 조선초기 문무를 겸비한 정치가 김극성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청라면 장산리 청천저수지 수몰지구에 있었던 것을 1960년2월16일 현위치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청라공 김극성의 묘소

김극성(金克成)(1474∼1540) 67歲. 조선의 문신. 字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羅), 우정(憂亭) , 아버지는 封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맹권(孟權)이다. 1469년(연산군2) 사마시(司馬試)와 149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장원,전적(典籍)이 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수찬(修撰) 헌납(獻納) 병조 정랑(兵曹正郎) 사인(舍入)을 거쳐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請國功臣) 4등으로 광성부원군(光城席院君)에 봉해졌다. 의주 목사(義州牧使) 경상도 병마절도사 경상도 관찰사, 공조참판 (工曹參判) 등을 지내고, 1521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23년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어 우참찬(右參贊) 이조판서(吏曹判書)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찬성(贊成)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으로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흥덕(輿德)에 유배 되었다. 1537년(중종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기용되어 찬성 우의정(贊成 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광성부원군 비문내용]


청라공 김극성의 신도비중종임금 즉위 32년 가정 정유년에 상께서 권행을 처단하고 원로명철을 예로써 크게 불러들이셨다.
이때  전 좌찬성 김극성송도 유배지에서 기용되어 다시 천성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의정부 우의정에 오르게 되니
상께서 바야흐로 공을 향하여 중히 여기심이요 조야가 그 위엄과 풍채를 상망하였다. 그 후 3년 경자년에 공께서 돌아가셨다.
상께서 크게 슬퍼하시며 사흘간 조회를 철폐하고 조의와 부의며 제례에 임금으로서의 넉넉한 예를 내려 주셨다.
그 해 8월에 보령현의 오서산 기슭에 장사 지내니 대체로 공이 돌아가신지 지금으로부터 74년이 되었다.
공의 여러 자손이 상의하여 돌을 다듬어 공의 행장을 영원히 전하려 불초한 이 사람을 찾아와 말하였다.
우리 선조께서 다행히 장상의 위를 갖추어 관작이나 계급이 모두 제일이요, 훈작이 맹부에 있으니 법도에 맞추어 비를 세움이 마땅하겠습니다.
가령 입조하신 이래 이룩한 사업이 세상에 전해져 뒷날에까지 행하여 지기 넉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묘소를 돌아보건대 아직 비를 새겨 세우지를 못하였습니다. 저의 자손들은 세월이 오래 지나다 보면 그 자취가 아주 임멸될까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정론을 감히 청하옵니다.
그 말에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옛 기록을 살펴보았다.
분의 정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 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광성부원군 김고의 휘는 극성이요 자는 성지이며 광주인이시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던 김주정이 바로 그 비조이고, 감찰어사를 지낸 김류를 거쳐 판도상서를 지낸 김윤장이 전라도 도만호를 지낸 김성우를 낳으니 이 분이 바로 김극성 공의 고조이시다
일찍이 왜구를 치라는 명을 받들어 보령을 지나

다 그 땅을 좋아하게 되어 자리를 잡고 마침내 보령인이 되었다.
증조 김남호에게는 이조판서가, 감찰이었던 할아버지 김중로에게는 좌찬성이, 진사였던 아버지 김맹권에게는 영의정이 각각추중되었는데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한 것이었다.
의정공은 일찍부터 명망이 중하여 문종대왕이 말년에 불러 가상히 여기시며 반궁에 넣었으나 곧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나주전씨에게 장가들어 성화 겁오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바 있어 병진년의 사마시에 장원하고, 무오년의 대과에서도 장원급제하였으니 나이 겨우 스물다섯에 전적에 임명되고 종학의 사회를 겸하였다.
경신년에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조부상을 당하였다. 그후 상복을 벗자 북평사의 직이 주어지니 조정은 공이문무를 겸한 것을 시험해 보고자 함이었다.
임기가 차자 홍문관의 수찬에 올랐으며 얼마 뒤에 헌납에 발탁되었다.
당시 임금 연산군은 심순문이 죄가 없음에도 죽이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물어오니 다들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공께서 대사간 성세순에게 벼슬이 간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죄 없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하는 것은 비록 몸을 아껴 그런다지만 직분을 저 버리게 됨을 어찌 하시려요?" 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잠자코 있다가 누군가 "반드시 심순분과 함께 죽는다고 해도 득될 것이 없을 것이요." 라고 하였다.
공께서 성세순과 담소하며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죽고 사는 것은 큰문제이니 제각기 자기 뜻에 맡기는 것이 옳겠소.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니지 어찌 다른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하리요!"라 하고 마침내 심순분의 원통한 형편을 아뢰니 임금 연산군은 비록 들어 주지는 아니하였으나 공등에게 벌을 내리지는 아니하였다.

병조 정랑과 의정부 사인 등의 벼슬을 지내다 중종 임금이 즉위하시자 공께서는 정국공신에는 품계가 정3품인 통정대부에 올랐다.
어버이 봉양에 편의할까 하여 외직을 희망 서천군수가 되었다. 봉양한 지 얼마 안 되어 갖가지 방법도 효험없이 의정공께서 돌아가시니 그 슬퍼하는 정이 지극하여 고을에서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판결사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라 의주목사가 되었다. 당시 의주는 해를 이은 오랑캐의 대침에 시달린 터라 조정의 대신 모두가 공을 적임자로 천거하여 일을 맡긴 것인데 부임하자 의롭게 어루만져 정성을 다하니 백성들이 복종하여 한 해 만에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무인년에 조정에 들어 에조참판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 다시 경상병사로 나가고
경진년에 관찰사로 옮기어 송사를 오래도록 묵혀둔 탐관오리를 제거하니 백성들은 한결같이 숙연한 마음으로 송의 높은 덕망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고, 정조사로 명나라 연건에 다녀온 뒤 대사헌 겸 세자 빈객이 되었다.
계미년에 일약 예조판서에 오르고 다시 우참찬 이조판서를 지내다 서북지방에 경계할 일이 있어 마침내 공은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기한이 차자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갑신년에 계모상을 당하여 상기를 마치자 다시 예조판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기축견에 찬성에 오르고 다시 대사마와 경연의 지사,세자 시강원의 이사등을 역임하고 신묘년에는 다시 이공이 되었다.
김안로가 영상 정광필을 음해할 때 공도 함께 폄적되어 흥덕에서 귀양사는 7년동안 문을 걸어 닫고, 비록 친구가 찾아오거나 또 무엇을 보내와도 일체 사절하였다.
정유년에 김안로가 복죄되자 공은 정부로 돌아와 곧 우의정에 올랐다. 공이 다시 부름을 받자 도성의 부로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다시 선량한 어른을 보게 되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였다.

공은 용모와 풍채가 수려하고 도량이 넓어 남과 화친은 하지 아니하고, 침착 신중하며 대범하고 엄숙한 성격으로 평상시 거처함에 항상 행동거지가 일정하고, 기쁜 일이나 성나는 경우를 당하여도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 깊은 마음속을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의 허물을 보면 오로지 가려 덮어 주기를 힘쓰고, 비록 자제에게 잘못이 있어도 완고한 말씨로 타일렀으며 일찍이 노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는 항상 지극한 정서으로 이르기를 "사람의 근심은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 일의 곡직에 이르러서는 더욱 굳이 가리려 들지 말 것이며 스스로 반성하여 바로잡을 것이며 비록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나에게 손될 것이 무엇이겠는가?"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누군가가 집에 칠을 하시라고 권하자 "사치는 뒷날에 상서롭지 못한 것을 남기게 된다."며 물리치고, 가정은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만 가르쳤고 평생 잇속에 대하여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벼슬에 계실 때는 청렴결백하고, 관리의 사무를 판단함에는 반드시 상세히 살피고 신중하였으며 중한 범죄를 처단함에는 밝기가 신과 같았다.
부인 이씨는 부사직 이문충의 따님으로 맑고 아름다운 덕을 지녔으며 아들하나 딸 셋을 낳으니 아들은 양근 군수를 지낸 김인사요, 큰 딸은 별좌 이좌명에게, 둘째 딸은 충의위 윤지양에게, 막내 셋째 딸은 생원 이몽규에게 시집 갔다.
양근이 아들 다섯 딸 셋을 낳으니 아들은 내륜경록, 경지,경사,경조이며 큰딸은 청원도정간에게, 둘째 딸은 이유에게, 막내 셋째 딸은 찰방 조후에게 시집갔다.
이좌명은 아들 하나 딸 넷을 두고, 윤지양은 딸만 둘,이몽규는 아들 딸 하나씩을 두었다.   내륜이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으니 큰 아들이 정준 둘째 아들이 정걸이요,

경록이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으니 아들이 정직이요,
경지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으니 아들이 정엽이요, 경상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정열이요, 경조가 아들 딸 둘씩을 낳으니, 큰아들은 정식 둘째 아들은 정석이다.
청원 도정이 아들 딸 둘씩을 낳으니 큰 아들이 광산수 효윤 작은 아들이 금산군 성윤이요, 이유가 아들 둘을 낳으니 큰 아들은 수란 작은 아들이 수원이요, 조후가 아들 하나를 낳으니 국필이다. 공의 친손자,손녀,외손자,손녀가 고루 여러명이다.
오호라! 공께서 사마시와 대과의 양과에 장원한 명성이 일찍부터 무성하여 조정에 올랐으나 조정은 공을 오르지 문한으로만 쓰지 아니하고 더러는 군막에서 몸을 구부려야 했고 어떤때는 변방에서 몸이 이슬에 젖어야 했으니 하루라도 경연에서 편안할 수가 없었던 것은 대개 공의 경륜과 지략이 재상.대신이 되어 정사를 맡아 볼 만한 재능을 스스로 이미 갖춘 까닭이었다.
조정에서 공에게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았으니 오랑캐의 침입으로 서쪽이 급하게 되면 공은 서로, 왜구의 출몰로 남쪽이 급하면 남으로 내달려야 했다.
전례의 면에서도 공이 아니면 아니되어 세 차례나 종백이 되었고,
인물을 전형하고 국정을 관장함에 공이 아니면 아니되어 오래도록 양전의 임무를 맡아 이미 외직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가야 했으니 나라에서 크고 작은 일에 공을 쓴 것은 거의 30년, 참으로 옳은 일이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공의 기개를 논함에 부족하디.
연산군의 불꽃같은 성미에도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곧 바로 솥에 넣어져 삶아 죽이는 형별을 당하는 지경인데도 공은 일개간관으로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하여 항론하며 직분상 죽음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는 공의 맡은 바 직분에 얼마나 충실하였던가를 알 수 있으며 절

조가 없고 간사한 무리나 붕당을 이루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아 끝내 그들에게 배척당해 7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도 그 지조를 변치 않았으니 이는 공의 기개는 알 수 있게 하니 다 비에 새겨 전 할 일이다.

시중에게 자손 있으니 선비로서 뜻을 지켰도다.
빛을 감추고 세상에 숨어 본분을 좇으며 자족해 하도다.
학문과 덕을 쌓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발양되나니 이에 상공을 낳았도다.
공은 오직 선조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자신의 경사를 펼쳐 나갔도다.
심성은 너그럽고 용모는 준수하며 화기가 봄바람 같았네.
많은 선비 중에 두 차례나 장원급제 그 향기로운 명성 멀리 멀리 퍼져 나가고
동렬 중에 우뚝 솟으니 많은 사람들의 신망이 쏠리도다.
몸이 위태로운 조정에서도 바른 말 하며 의롭게 죽는 것 두려워하지 않았네
우리 중종 임금 등극하시자 도와 공훈이 크게 나타나도다.
이에 장상의 지위에 올라 국사를 도맡았네.
변방과 조정을 들고 나며 많은 일 보살피느라 온갖 고생 무릅썼네.
여러 차례 종백되어 덕화를 널리 펴니 좌우가 모두 마땅하게 되었네.
참소하는 무리들의 해를 당해 일곱 해나 남쪽에 유배당하고
유배가 풀리니 임금께서 공의 충성 생각하여셨네.
공이 적소에서 돌아오니 상공의 수레가 모이고
백성들은 거리에서 손뼉치며 좋아하고 선비들은 조정에서 경사로 여겼네.
이에 금현을 점치어 백간을 거느리며
지덕이 완비하여 통하지 않는 일 없고 사사로운 욕심하나 없으니 벼슬길의 어진 선비들   눈을 씻고 바라보네.
훌륭하신 나라의 원로정승을 하늘은 어찌 그리 빨리도 데려가시나?
공이 우상의 벼슬에서 돌아가시니 슬픔과 영화에 다하였네.
명성이 사방에 전해지고 공적은 기상에 기록되도다!
젊어서부터 근면하여 그 말년을 온전히 누리셨네.
공께서 지니셨던 그 영명한 덕은 높고 멀기도 하여라.
명으로 기술하니 나의 말에 큰 잘못은 없으리라!
명나라 연호로 만력41년 숭록대부 행 에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우빈객 이정귀 짓다.


<참고>

1)김극성:1474~1540(성종 5~중종 35).조선시대의 문신.자 성지, 호 청라, 우정,시호 충정, 1496년(연산군2)년 사마시에 장원, 이어 98(연산군4) 별시문과에 또한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가 되었다. 수찬·의정부사인을 거쳐 1506년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4등으로 광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경상도 관찰사·공조참판등을 역임하고 1521년(중종16)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이 되었다. 23년(중종18)예조판서, 이어 이조판서·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찬성이 되고, 김안로의 모함으로 정광필과 함께 흥덕으로 유배되었다. 37년(중종32) 김안로가 사사되자 다시 기용되어 우의정을 지내다 67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저서에 우정집이 있다. 청소면 재정리 늑절골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2)신도비: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서 비명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 찬술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게 여겼다.

3)명:금석,기물등에 적힌 글.

4)중묘:중종(1488~1544).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44). 성종의 2남.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94년(성종25) 진성대군에 봉해졌는데, 1506년 박원종,성희안등에 의한 중종반정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어진 정치를 펴는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1519)이후 간신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 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5)가정:중국 명나라 세종년간의 연호로 서기 1522년에서 1566년까지이다.

6)정유:1537년(중종32년)

7)주류:혹은 주륙하고,혹은 유형에 처함.

8)권행:권세가 있고 임금의 굄을 독차지하는 신하.

9)징소:임금이 초야에 묻힌 사람을 벼슬자리에 불러서 씀.

10)적소:죄인을 귀양 보내던 곳. 배소.

11)찬성:조선시대의 의정부의 종 1품 벼슬. 좌찬성,우찬성이 있었음.

12)의정부: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 정1품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종 1품의 좌찬성,우찬성, 정2품의 좌참찬,우참찬,정 4품의 사인,정5품의 검상, 정8품의 사록등으로 구분된다.

13)상망:사모하여 우러러봄. 일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여 기대함. 기대.

14)경자:1540년(중종35년)

15)불녕:재주가 없다는 뜻으로,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16)맹부:맹약의 문서를 넣어 두는 창고.

17)입조:벼슬에 오르는 일.

18)요(맞을요,구할요):1991년 간행 보령군지 페이지801의 원문에는 격으로 나와 있으나 요의 오기일 것으로 생각되어 고쳐 보았음. 역자는 혜자를 은혜를 베푸는 사람(어른)정도의 뜻으로 비문의 찬자인 이정귀 선생으로 보아 선생님께서 훌륭한 비문을 하나 지어 주시길 외람되이 청하옵니다'로 풀이하였으나 노승덕 선생은 요를 그대로 두고 혜자를 남의 자손을 높여 일컫는 말로 월사에게 비문을 부탁하는 광성부원군의 자손으로 보아 감요혜자일언을 자손들의 말에 크게 격려되어(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로 해석해야 옳다는 지적을 해 주셨음을 밝힌다.

19)정국공신: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 103명에게 내린 훈호로 그 중4등 52명에게 내려진 훈호가 분의정국공신이다. 이 때의 논공행상은 13년이 지난 1519년(중종14) 조광조등 신진사류에 의해 유례없는 남훈이라고 상소되어 3등 공신 심정등 물 76명이 훈호를 삭제당하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1월에 훈구파에 의해 일어나는 기묘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20)대광보국숭록대부:조선시대 관계의 최고관. 정1품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군,사부,영사,위가 있다. 초기에는 문무관에게만 쓰다가 뒤에 종친,의빈에게도 통용하였다.

21)경연:고려,조선시대에 임금 앞에서 경적과 사서를 강론하던 자리. 경악. 1420년(세종2년)에는 경연청이라 하고 영사,지사,시강관,사경등의 관직을 두었다.

22)춘추관:고려,조선시대에 시정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조선 개국 당시에는 예문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년(태종1)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하였다. 영사(영의정 겸임), 감사(좌,우의정 겸임),지사,동지사 각 2명, 수찬관(정3품),편수관(정3품~종4품),기주관(정,종5품),기사관(정6품~정9품)등을 두었는데 모두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23)부원군:조선시대에 임금의 장인 또는 정 1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로, 받는 사람의 본관인 지명을 앞에 붙였다. 부원군이 여럿 생길 때에는 연고 있는 지명이나 다른 함자를 넣어 불렀다. 일반적으로 딸이 궁중에 들어와 정실 황후가 되면 왕비의 부친은 자동적으로 부원군이 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국구가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중기 이후 정치에 참여하여 많은 폐단이 생겼다.

24)휘:왕이나 제후,고관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원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는 생전의 이름 그 자체를 휘라 일컫게 되었다.

25)자: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 본명이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하여 자는 본인의 기호나, 웃사람이 본인의 덕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며 자가 생기면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그래서 본명을 휘명이라고도 한다.

26)시중:문하시중. 고려시대 문하성(왕명의 출납과 중신의 핵주를 맡았던 중앙 의정기관)의 종 1품관으로 나라의 모든 정치를 총괄하였던 대신이다.

27)감찰어사:고려시대의 관직의 하나. 995년(성종14)어사대를 설치하였을 때와 1298년(충렬왕24)감찰사로 개칭하였을 때에 그 곳에 속하였던 종 6품의 관직인데,그 후 감찰사헌,감찰사,감찰내사,감찰규정,사헌규정등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28)판도상서:고려시대에 호구,공부,전량등을 관장하던 중앙 행정관서인 판도사의 장관으로 정3품이다.

29)도만호:고려시대 말기에 도둑,난동,약탈,품기,우마의 도살 등을 단속하던 치안기관인 순군만호부를 처음에는 개성에만 두었다가 뒤에 합포,전라,탐라,서경에도 증설하였는데 그 장관이 도만호이다.

30)증:증직.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품계,관직을 추증하여 영예를 누리게 하던 일. 삼국시대부터 행하여 졌으나 제도화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988년(성종7)문무상 참관이 상의 부조를 봉작한 이른 바 추은봉증을 실시하면서 부터이다. 1391(공양왕 3)도평의사사의 상언으로 2품 이상은 3대,3품은 2대,4~6품은 부모까지를 증직하는 제도를 확립시켰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추증의 대상과 범위를 확대시켰다. 즉 고려시대의 추은봉증 이외에도 명유,절신,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 효행이 뛰어난 사람 등에게도 상당한 품계와 관직을 추증하였고 이 밖에도 증직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31)이조판서:조선시대 이조의 장관.국초에는 이조전서라 하여 정 3품으로 품계가 낮아 조정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1405년(태종5)판서로 개칭하고 다른 5조와 같이 정 2품으로 승진하였다. 이조판서는 최고의 신하라 하여 총재라는 별칭이 있었으며, 6조의 수석판서로서 문관의 선임,승진,공훈의 사정, 관리 성적의 평정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다. 특히 그 업무 집행이 어려워 대간으로부터 자주 논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32)감찰:조선시대 사헌부에 속하던 정6품의 관직. 1392년(태조1)에 20명을 두었다가, 1401년(태종1) 25명으로 늘렸으나, 세조 이후에는 그 수를 줄여 문관 3명, 무관 5명,음관 5명, 도합 13명으로 하였다. 중요한 임무로는 국고출납,사제,조정예회,과거등 모든 면에 걸쳐 감찰하여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보았다. 일례를 등면, 섣달 그믐에 각 관아가 사무를 끝내고 창고를 봉할 때는 감찰의 검사를 받게 되어 있었다.

33)진사:고려 및 조선시대에 진사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원래 중국 수나라에서 비롯되어 당나라 때에는 수재(정치학),명경보다 특히 진사(문학)가 존중되어 유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고려에서도 958년(광종9)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1차 시험에 합격한 자를 상공진사, 향공(지방)진사, 빈공(외국인)진사라 하였고 2차 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한자를 진사라 하였는데, 이들의 시험 과목은 시,부,송 및 시무책 등이었다. 조선시대는 문과의 예비 시험인 소과에 생원과와 더불어 진사과를 두어 문예오써 시험을 보아 합격한 100명에게 진사의 칭호와 백패(합격증)를 주고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고려때에는 진사가, 조선 전기에는 생원이 우위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시진사가 우위에 있었고, 문과를 단념한 진사들은 지방의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34)의정공: 김극성공의 아버지 김맹권에게 영의정이 추증 되었기에 그렇게 부른 것임.

35)문종대왕:1414~1452. 1412년(세종 3)에 세자로 책봉 되었는데 학문을 좋아했으며 인품이 관후하였다. 20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문무의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도록 했으며 언론을 자유롭게 열어주어 민정 파악에 힘쓰는 등 부왕을 보필한 공이 컸다.
1445년(세종27)세종이 병들자 대신하여 국사를 처리하였으며,50년(세종 32)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 해에 "동국병감"이 출간되었고, 이듬해 "고려사"139권이 간행되었으며, 52년(문종2)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한편 병제를 정비하여 3군에 속한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비분하게 하였다. 유학은 물론 천문,역법,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재위 3년 만에 병사하였다.

36)반궁:중국 주대의 제후의 국학. 여기에서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유학을 전수하던, 나라의 최고학부 성균관을 가리킨다.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공자를 모신 문묘,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등이 있다. 문묘의 정전인 대성 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10철, 송나라 때의 6현등 모두 21위를 봉안하였고, 동,서무에는  그 밖의 중국 유현94위와, 우리나라 고래의 유명한 유현18위 등, 합계112위를 봉안하였다. 태종은 성균관에 학전,노비를 지급하여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또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왕세자를 여기에 입학시켜 이후로 하나의 상례가 되었다.

37)임천:숲과 샘이란 뜻으로, 은사가 사는 곳을 이르는 말.

38)성화:중국 명나라 헌종때의 연호로 서기1465년에서 1487년까지이다.

39)갑오:1474년(성종5년)

40)병진:1496년(연산군 2년)

41)괴:으뜸. 우두머리. 과거에서, 각 경서의 수석 합격자.

42)사마:사마시. 고려와 조선시대의 과거의 하나.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를 이르는 말로, 생진과,감시라고도 한다.

43)무오:1498년(연산군4년)

44)대과:서울,지방에서 생원,진사,성균관 유생 중에서 340명(후에 223명)을 1차로 선발하는 초시, 서울에서 초시 합격자 중에서 33명을 2차로 선발하는 복시, 어전에서 복시 합격자의 등급을(각각 3명,7명,23명)으로 결정하여 홍패을 주는 전시를 아울러 대과라 한다. 갑과의 장원급 제자는 종6품이 상의 참상관으로 임명되고, 병과 합격자는 정9품 이상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45)배:내리다. 벼슬을 내리다.

46)전적:조선시대 성균관에 딸려 있던 정 6품관으로 정원은 13명이었다.

47)종학:조선시대 종실의 교육을 관장하던 관아로,1428년(세종10)에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도선(정4품),전훈(정5품)각 1명,사회(정6품)2명을 두었는데 모두 성균관의 사서(종3품) 이하 전적(정6품)까지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종학은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설치되어 1899년(광무 3)에 종인학교로 개편되었다.

48)사회:종학의 정6품관.

49)경신:1500년(연산군6년)

50)서장관: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던 사행 중 정관의 하나. 인조 이전의 명, 이후의 청에 정기,부정기적으로 파송되던 사행에는 양국협약에 따라 규정된 인원을 보냈는데, 서장관은 정,부사와 함께 삼사라 하여 외교 실무에 큰몫을 하였다. 서장관은 기록관이라고도 하여 행대 어사를 겸하였으며, 일본에 보내던 통신사 밑에도 서정관이었으며, 일본에 보내던 통신사 밑에도 서장관이 따라갔다.

51)정:당하다. 만나다

52)외간:아버지의 상사. 또는, 아버지가 없을 때의 조부의 상사.

53)북평사:조선시대의 외관직 무관 정 6품관으로,영안도와 평안도의 병마 절도사 아래에 있었다. 정원은 각 1명씩이었다.원래 이름은 병마평사이다

54)옥당: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사적의 관리,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홍문관의 다른 이름. 옥서,영각이라고도 하며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라고 한다.

55)수찬:홍문관의 구성원은 영사(정1품),대제학(정2품),제학(종2품),부제학(정3품),직제학(정3품),전한(종2품), 응교(정4품),부응교(종4품)각 1명,교리(정5품)부교리(종5품)수찬(정6품),부수찬(종6품), 각2명,박사(정7품),저작(정8품)각1명,정자(정9품)등인데,3정승을 비롯하여 경연청과 춘추관등의 관원들이 이를 겸직하였다.

56)헌납:조선시대 사간원의 정 5품 벼슬.1401년(태종 1)에 개국 초부터 내려오던 보궐을 고친 이름이다. 처음에는 좌우 두 사람이 있었으나 뒤에 한 사람으로 줄였다.

57)대사간:조선시대 간쟁,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으뜸 벼슬. 정 3품으로 정원 1명을 두었다. 이 벼슬은 1402년 문하부가 의정부로 흡수될 때 사간원이 독립되면서 둔 것으로 처음에는 좌,우 간의대부 각 1명, 좌·우사의 각 1명을 두었다가 후에 대사간 1명,사간(종3품)1명을 두었다. 연산군은 대사간 등 간관의 간언이 듣기 싫어 사간원을 폐지, 이 벼슬을 없애기도 하였으나 중종 반정 후 옛 제도로 복귀하였다.

58)병조정랑:병조는 국방을 총괄하는 중앙 기관으로, 군무,의위,무선,우역,병기,서울의 성문 경비, 궁궐의 열쇠관리등의 일을  맡아보았으며 하관,서전이라는 이칭이 있다.장관인 판서(정2품)밑에 참판(종2품),참의(정3품),참지(정3품)각1명,정랑(정5품)4명 좌랑(정6품)4명의 관원을 두었는데, 당하관은 모두 문관이었다.

59)사인:의정부 소속의 정4품 관직. 12)의정부 참조

60)장악원정:조선시대에 악정을 관장하였던 관아인 장악원의 직제는 제조(종1품,종2품)2명, 정(정3품),첨정(종4품),주부(종6품),직장(종7품)각 1명이다.

61)통정:통정대부. 조선시대 정 3품의 당상관인 문관과 종친 및 의빈 등의 관계였다.

62)애훼:애훼골립의 준말.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위는 일.

63)판결사:장례원의 으뜸 벼슬. 위계는 정3품이다. 장례원은 조선시대 노비의 부적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아로 사헌부,한성부와 더불어 사법서사라 하였다. 장례원은 사무한계 관계로 한성부 및 복심 기관인 형조와 논란이 잦다가 1764년(영조40)형조에 병합되었다.

64)병조참의:병조의 정3품관. 58)병조정랑 참조.

65)가선:가선대부. 조선시대 종2품  하의 관계 초기에는 문무반에만 이 관계를 주었으나, 뒤에는 종친과 의빈에게도 주었다.

66)목사:고려 중엽 이후와 조선시대에 관찰사 밑에서 목을 맡아 다스리던 정 3품의 외직문관. 목은 큰 도나 중요한 곳에 두었는데,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지방은 작더라도 목으로 승격하여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모두 20명의 목사를 두었다.

67)무인:1518년(중종13년)

68)예조참판:예조는 예악,제사,연향,외교,학교,과거등을 맡아보며 남궁,의조,춘관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으로는 판서,참판,참의 각 1명을 두어 이를 삼당상, 또는 예당이라 하였다. 정랑,좌랑등 당하관 각 3명을 두어 이를 낭관이라 하였다.

69)경상병사:병사는 조선시대에 각 지방의 병마를 통솔,지휘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 2품의 무관인 병마절도사의 준말이다. 인원은 모두 16명으로 경기(1),충청(2),경상(3),전라(2),황해(2),강원(1),함경(3),평안(20의 도에 두었는데 그 중 1명은 각도의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70)경진:1520년(중종15년).

71)관찰사:조선시대의 외관직 문관의 종2품 벼슬. 13각도에 1명씩 두었으며,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의 무관직을 거의 겸하고 있었다. 중요한 정사에 대하여는 중앙의 명령을 따라 시행하였지만, 자기 관하의 도에 대하여 민정,군정,재정,형정등을 통할하여 지방 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으며,관아의 수령을 지위감독하였다. 고나찰사의 관아를 감영이라고 하며, 관원으로는 도사,판관,중군등 중앙에서 임명한 보좌관이 있고,일반 먼정은 감영에 속한 이·호·예·병·공·형의 6방에서 행하고, 이를 지방민에서 선출된 향리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72)공조:산림,소택,공장,건축,도요공,야금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던 중앙 관아로 판서,참판,참의 각1명과 정랑,좌랑 각3명이 있었다.

73)대사헌:시정에 대한 탄핵,백관에 대한 규찰,풍속교정,원억의 신설,참람허위의 금지 등의 임무를 맡았던 사헌부의 장으로 품계는 종2품이다. 그 밑에 있는 집의 1인, 장령,지평 각2인, 감찰 24인의 관원을 감독하고 통솔하였다.

74)세자빈객:조선시대에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관아인 세자시 강원 소속의 정 2품 관직. 세자시 강원의 관원으로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사(정1품)1명,부(정1품)1명,이사(종1품)1명, 좌·우빈객 각1명, 이상은 타관직이 겸임하고, 찬선,보덕,진선,필선,문학,사서,설서,자의 등을 더두었다.

75)정조사:조선시대에 신년 축하를 위하여 중국으로 보내던 수석 사신. 해마다 정기적으로 세 번 보내는 사신 중의 하나인 정조사는 하정사라고도 하며, 2품 이상의 관원을 뽑아 보내는데,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가 동지와 정월이 가까운 관계로 정조사를 겸하였다. 정조사는 부사,서장관,종사관,통사,감원,사자관,서원,압마관등 4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정한 공물을 헌납하고 그 대가로 회사품을 받았으며 북경의 회동관에 유숙하였다.

76)계미:1523년(중종18년)

77)우찬찬:참찬은 조선시대의 의정부에 속해있던 정2품의 관직.1426년(세종8)좌참찬.우참찬 각 1명의 정원을 두었으며, 1896년(고종33)의 의정부 개편때는 칙임관의 참찬1명을 두었다.

78)갑신:1524년(중종19년)

79)종백:조선시대 의식,외교.제도.학교.과거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던 정2품 예조판서를 달리 이르던 말.

80)도헌: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을 달리 이르던 말로 대헌이라고도 한다. 73)대사헌참조.

81)기축:1529년(중종24년)

82)대사마:병조판서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

83)신묘:1531년(중종26년)

84)이공:이상.삼정승다음 가는 벼슬이란 뜻으로, 좌우찬성을 일컫는 말.

85)김안로:1481~1537(성종12~중종32). 1506년(중종1)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를 하고 대사간을 거쳐 1519년(중종14)기묘사화에는 조광조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22년(중종17)에 부제학이 되고, 24년(중종19)에는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아들 희가 효혜 공주와 결혼한 후부터 권력남용이 잦아 영의정 남곤,대사헌 이항등에 의해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에 유배되었다. 27년(중종22)남곤이 죽고 그 일파가 실각되자 29년(중종24)에 풀려나와 31년 다시 등용되어 이조판서를 거쳐 34년에는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정적에 대하여는 종친.공경이라 할지라도 이를 축출하여 살해하는 등 무서운 공포정치를 하던 끝에, 문정왕 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조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과 대사헌 양연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으며,이어 사사되었다. 허황,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용천담적기가 있다.

86)정광필:1462~1538(세조8~중종33). 1492년(성종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홍문관에 등용되고,부제학.이조 참 의를 역임하고 1504년(연산군10)갑자사화에 왕을 극간하다가 아산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 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하여 이조참판.예조판서.대사헌을 거쳐10년(중종5)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9년 기묘사화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작되고 27년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37년 총호사로서 장경황후의 희릉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 이듬해 감안로의 사사로 풀려났다. 이 때 영의정 윤은보,좌의정 홍언필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천되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 영 중추 부사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정문 익공 유고가 있다.

87)흥덕:전라도 고창군 흥덕면을 중심으로 있었던 현.

88)정유:1537년(중종32년).
89)부사직:조선시대에 오위에 딸린 종5품의 군직. 오위는 조선 문종 때 군제를 고치어 정한 다섯 위. 곧, 중위로 의흥,좌위로 용양,우위로 호분, 전위로 충좌, 후위로 충무를 두었다.

90)양근군수:양근군은 1908년(융희2)지평군과 통합하여 경기도 양평군을 이루었다.

91)별좌:조선시대, 서울의 각 관아에 딸린 정5품, 또는 종 5품의 벼슬.

92)충의위:오위의 전위인 충좌위에 충찬위.파적위와 더불어 속해있던 부대로, 1418년(세종 즉위)설치하였다. 충의위에 속한 군병은 공신의 자손이나 그 첩의 중승자로 편성하였다.

93)생원:조선시대의 소과인 생원과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 생원 시험에는 명경과를 택하게 하여 오경의 1편과 사서의 1편을 짓게 하였다.

94)청원도정간:도정은 조선시대의 관직.정3품 당상 벼슬로 종친부.돈녕부에서 종실.왕친.외척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도정은 종친부와 돈녕부에 각 1명씩 두었는데, 세자의 중증손,대군의 중손,왕자군의 중자, 승습의 적장증손등 종친에 한하여 이 벼슬을 주었다.그러므로 청원도정간은 청원도정 이간을 가리킨다.

95)찰방:조선시대에 각 도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 마관.우관이라는 별칭이 있다.

96)경연:경연을 달리 이르는 말. 21)경연 참조.

97)양전:이조와 병조.

98)임인붕비:임은 아첨할 임. 보비위할 임.임인은 절조가 없고 간사한 사람. 붕은 무리를 이루다. 비는 친하게 지내다. 붕비는 붕당을 지음.

99)소리:검소한 생활을 함. 본분을 좇아 만족함.

100)금현:어떠한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함.

101)기상:기.상은 일월을 그린 기.

102)만력:중국 명나라 신종때의 연호로 서기1573년에서 1619년 까지이다. 만력 41년은 1613년(광해군 5년)이다.

103)숭록대부;조선시대의 관계. 동반종 1품의 관계를 상.하로 나누어 상에게는 숭록 대부를, 하에게는 숭정 대부를 주었다. 이 관계는 조선 개국 초부터 1894년(고종31)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104)행:조선시대 모든 관직에는 그에 따르는 품계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 어떤 관직에는 그 관직 자체의 품계보다 더 높은 품계의 관원을 임명할 수 있다.  그중에 품계가 높은 사람은 낮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고직비의 경우를 행,반대로 품계가 낮은 사람을 높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비직고의 경우를 수라한다. 이를 행수법이라 하는데 예를 들면 정2품의 자헌대부가 종 2품의 관직인 대사헌에 임용되면 자헌대부행 사헌부 대사헌이라 하고, 반대로 종 2품의 가정대부가 정2품 관직인 호조판서에 임용되면 가정대 부수 호조 판서라 하였다. 그러나 7품 이하의 관원이 2계이상 높은 관직에 임용될 수 없고, 6품이상의 관원이 3계 이상의 높은 관직에 임용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본문에서는 숭록대부는 종1품 상, 예조판서는 정 2품이기 때문에 행이라 한 것이다.

105)대제학:조선시대 홍문관과 예 문관에 둔 정2품 벼슬. 1401년(태종1)대학사를 고친 이름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예 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으나, 1420년(세종2)집현전에 대제학을 두었고, 1456년(세조2)에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쳐 그대로 대제학을 두었다.
대제학은 대개 본인이 사퇴하지 않는 한 종신까지 재임하였다.

106)이정귀:1564~1635(명종19~인조13) 자 성징,호 월사, 보만당, 응암,시호,문충,본관 연안. 1585년(선조18)진사가 되고, 90년 증광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92년(선조25)임진왜란 때 행재소에 가서 설서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경락 송응창의 요청으로 경서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후 병조 참지가 되어 부제학을 겸하였다. 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치려 한다는 자기 나라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국변무주문"을 지여 진주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를 파직시켰다. "조천기행록"을 간행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병조와 예조판서를 역임, 13년(광해군5) 계축옥사 때 모함을 받아 사직, 15년 형조판서가 되고 23년(인조1)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에 왕을 공주에 호종하고 27년 정묘호란때 병조판서로 왕을 호종, 강화에 피난하여 화의에 반대하였다. 28년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한문학의 대가로서 글씨에도 뛰어났고 신흠.장유.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월사집이 있고, 편저에 "서연강의""대학강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