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문원공(文元公)사계(沙溪)선생 휘(諱) 長生(장생)


문원공 사계 선생 장생은 대사현 황강 휘 계휘의 아들로 조선조 중기(1548~1631)의 대유현,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공이다.  1557년 열살의 나이에 구봉 송익필(宋翼弼)로 문하에서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의 직을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고, 1596년에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 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에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에 회양, 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그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고, 집의의 직을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여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고,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을 뿐더러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 등등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그리고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었지만, 禮學분야는 송익필로부터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에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었던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祀連의 일로 還賤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徐 .鄭曄 등과 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을뿐더러 1만 8천여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583년 첫 저술인 ≪喪禮備要≫4권을 비롯, ≪家禮輯覽≫.≪典禮問答≫.≪儀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近思錄釋疑≫.≪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하여 안성의 道基書院 등 10개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仁祖實錄,燃藜室記述,沙溪先生全書,儒敎淵源(張志淵),朝鮮儒學史(玄相允,民衆書館,1949). <李泰鎭> 민문 4권 865-6.

 

사계전서중에서 시호를 내리는 교지

▶사계 김장생 선생의 가계도


사계 김장생의 가계보(클릭하면 확대합니다)소재지: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기사일:음 8월 2일

 

 

▶사계 김장생 선생 친필


 

 

▶임  이  정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67호(1976. 6. 9지정)
위     치 :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
소    유  : 광산김씨 문원공파 종중       
수     량 : 건물1동 (정면 3칸, 측면 2칸, 8작지붕)
재     료 : 목재, 석재                 
시     대 : 조선시대    


논산군 강경읍의 금강가에는 임이정 팔괘정, 죽림서원이 연이어 있다.
임이정은 인조 4년에 사계 김장생이  건립하여 후학들에게 강학 하던곳으로 원래 황산정이
라고도 했다.
임이정이란 임이정기에 의하면 시경의  "두려워 하고 조심하기를 깊은못에 임하는 것 같이
하며, 엷은 어름을 밟는것  같이 하라"의 구절에서 연유하고 있다고 한다.
금강에 면한 낮은 야산 위에 서향으로  세워졌으며 정면 3칸 기둥사이를 동일한 간격으로
나누고 구 중 왼쪽의 2칸을 마루로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이 온돌방 전면에는 반칸을 안으로 들여 상부는 누마루로 하부는 함실 아궁이로 만들어져
있다.
기둥은 둥근 기둥이고 그 위에 기둥 머리를 배치하였고, 초익공식  공포를 올렸다. 창방위에
는 기둥사이마다  5개의 소로 받침을 두고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다.

지붕의 가구방식은  앞뒤 평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구  위에 기둥머리를 갖춘 낮은 동자
주를 세워서 종량을 받쳤고  그 위에는 제형대공이 배치된 겹처마 집이다.

▶김장생 선생 문묘배향교지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28호 (1987. 12. 30지정)
▶위     치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178
▶소     유 : 광산김씨 문원공파중종      
▶수     량 : 문서 1점(가로 6.3m, 세로 88cm)
▶재     료 : 한지                 
▶시     대 : 조선시대  


이 문묘(文廟) 배향교지는 조선 숙종43년(1717)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문묘에 배향토록 내린 교지이다.

한지(韓紙)에 종서(從書)로 내려쓴 이 교지는 가로 6.3m 세로 88m로 총 624자가 종서 48줄로 수록되어있는데, 그 내용은 사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국가사회에 크게 기여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의 대가로서 인간생활의 도덕성 확립에 이바지한 공이 크므로 문묘에 배향 하도록 임금이 명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김장생 선생 묘소 일원


▶충청남도지정 기념물제47호 (1984. 7. 26지정)
▶위     치 :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7-4외 6필지
▶소     유 : 광산 김씨 중종

▶면     적 : 61,513㎡
▶수     량 : 분묘 1기
▶시     대 : 조선시대  

사계 김장생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학문은 아들 신독재 김 집에게 이어져 조선 예학의 태두로 기호학파 학문의 주류를 이루며 문하에 송시열, 송준길 등 조선 유학의 거유들을 배출시켰다. 1688년에 문묘에 배향되고, 연산의 돈암서원, 안성의 도기서원, 강경 죽림서원 등 국내 10여개소 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사계 김장생 묘(산맥도)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묘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4번 국도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연산리를 지나 좌측으로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좌의정을 했던 김국광 선생 묘를 비롯한 광산 김씨 선영과 양천 허씨 정려가 보인다. 사계 선생 묘는 계속 길을 따라 가면 마을을 지나 고정산 자락에 있다.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달성 서씨(達成 徐氏), 연안 이씨(延安 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문이 광산 김씨다.

광산 김씨 고정리 선영(先塋)에는 사계 김장생 묘를 비롯하여 양천 허씨 부인 묘, 김철산과 부인 묘, 김겸광(金謙光), 김공휘(金公輝), 김선생(金善生) 등 여러 정승과 판서의 묘가 즐비하게 있는데 주산은 고정산(高井山)이다. 고정산은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가는 도중 영취산(1076m)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맥하여 진안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까지 와서 남으로는 호남정맥을 뻗고, 북으로는 금남정맥이 되어  운장산(1126m)과 왕사봉(634m)을 거쳐 대둔산(878m)을 기봉하는데 이곳의 태조산이 된다. 대둔산에서 낙맥한 주룡은 월성봉(650m)과 바랑산(555.4m)으로 내려와 곰치재를 넘고 호남고속도로를 건너 깃대봉(393m)을 기봉한다. 여기서 다시 국사봉(333m)을 만들고 매봉(146m)을 향해 가는데 용맥은 들판을 건너 천전과협(穿田過峽)하였다. 매봉에서 다시 방향을 바꾼 주룡은 왕대골과 동성골 들판을 지나 고정(145m)을 기봉한다.

고정산에서 출맥한 주룡은 계백장군 묘의 주산인 충장산으로 넘어가기 전 중간에서 약간 머무른 듯 작은 봉우리를 기봉하고 옆으로 맥을 뻗어 위이 하면서 계속 내려왔다. 주룡의 변화가 기세 장엄하지는 않으나 밝고 순하고 후덕하다. 이를 용의 12격룡으로 나누어 보자면 순룡(順龍)과 복룡(福龍)에 해당된다. 용진처에 다다른 주룡은 입수도두를 만들어 기를 응축시킨 다음 두 개의 맥을 뻗어 왼쪽으로는 사계 김장생 선생 묘의 혈을 만들고, 오른쪽으로는 사계 선생 묘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변화 생동하여 김철산과 그 부인의 묘혈을 계속 연주형으로 결지 하였다. 청룡과 백호는 유정하고 다정하게 혈을 끌어안아 주었고, 청룡 백호가 감싸준 공간인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득수처는 여러 곳이나 파구는 한 곳으로 좁게 관쇄 해주었다. 파구의 방위는 계축(癸丑破)이고 물은 우수도좌(右水倒左)하므로 곤좌간향(坤坐艮向)을 하여 팔십팔향법으로 자생향(自生向)이다. 청룡 백호 밖 조산과 나성들은 모두 이곳을 배반한 곳 하나 없이 귀하고 수려한 산들이 혈을 비추어 주고 있다. 이곳은 기세 장엄하기보다는 순하고 점잖은 분위기다. 아마 사계 선생의 성품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다.<자료 일부는 논산시 문화재관리부터 제공 받음.>

송시열 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송시열의 영정,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으로 옮겨가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기묘록>>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충청도 연산의 김장생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사계선생이 戊寅(1578)년 31歲時 창릉참봉에 추천받아 입시할 때의 호패



사계(沙溪)선생 휘(諱) 長生(장생)* <年譜>

사계선생 서문(文元公 沙溪先生 序文)

사계 김장생의 예설(沙溪 金長生의 禮說)

사계유고집


13권 5책으로 된 목판본인 이 책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사계 김장생(1548-1631)선생의 유고집이다.

『사계선생유고』는 1687년(숙종 13)과 1792년(정조 16)의 두 차례에 걸쳐 간행 되었는데 이 책은 1687년에 송시열 등이 유고를 모아 간행한 초간본이다. 내용은 소(疏)·서(書)·묘지(墓誌)·행장(行狀)·어록(語錄) 등과 성리학 및 예학에 관한 저술이 수록되어 있으며, 김수항이 쓴 서문이 책머리에 있다.

 

사계(沙溪)선생 휘(諱) 長生(장생)* <인조록 편 年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