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문정공파 파조]

(金台鉉 1261∼1330(원종 2∼충숙왕 17))고려 후기 문신. 자는 불기(不器), 1275년(충렬왕 2) 감시(監試)에 수석으로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고, 판도총랑(版圖摠郎)·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301년(충렬왕 28) 밀직부사(密直副使) 때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갔다. 그때 원의 황제가 간쑤〔甘肅〕에 가 있으면서 모든 진공사(進貢使)는 연경(燕京)에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가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행재소(行在所)에 가는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맞서자, 중서성(中書省)이 허락하여 행재소에 가게 되었다. 그의 충성을 높이 산 원제(元帝)로부터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다. 이때 신하들이 분당하여 충렬왕과 아들(충선왕)을 이간시켜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1305년(충렬왕 32) 지도첨의사사(知都僉義司事)로 원나라에 가서 도당들의 흉계를 밝혀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충선왕의 복위 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충숙왕 때 평리(評理),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를 지내다 중찬(中贊)에 이르러 사임하였다. 저서로 《동국문감(東國文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

<<동국문감(東國文鑑)>>고려 말기 문신 김태현(金台鉉)이 편집한 시문선집(詩文選集). 한국 최초의 문선집이다. 고대로부터 고려 말엽까지의 제가(諸家)의 시문을 수록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 서문에, <김태현이 편찬한 《문감》은 소략하여 실패하였고, 최해(崔해)가 편찬한 《동인문(東人文)》은 산일된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동국문감》의 규모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정공 휘 台鉉의 제단비

▶문정공(태현) 묘지(墓誌)


공의 휘(諱)는 태현(台鉉)이요 자는 불기(不器)요 성은 김씨니 본은 광산(光山)의 명문으로서 고려초부터 조정에 출사하여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지 아니하였다. 증조는 신호위중량장(神虎衛中郞將) 휘 광세(光世)로서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는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휘 경량(鏡亮)으로서 문하평장사에 추증되었으며 고(考)는 감찰어사(監察御史) 휘 수(須)로서 문하시중에 누증되었다.

시중은 일찍이 고종43년(1255년) 을묘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기질과 용모가 위장수려하고 담력과 지략이 출중하였으며 내외직에 종사하여 염결의 평이 자자하였다. 기사년에 어사를 거쳐 영광군주사로 나갔을 때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나 강화(江華)의 인마와 재화를 약탈하고 함선으로 남하하였는데 탐라(제주)를 점거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토벌토록 하고 또 전라도 종정관(從征官)에게 공문을 내려 도민들의 신복하는 자를 선출하여 군사를 영솔케하여 고장군과 함께 나가 토벌하라고 하였다.

시중이 그 소임에 뽑힘에 사제에서 숙식을 하지 아니 하면서 군사와 갑병을 정선하고 고여림과 탐라에서 회동하였을 때 반적들이 아직 진도만을 보유하고 탐라에는 당도하지 못하였으므로 주야로 보루(堡壘)를 구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여 적의 내습로를 차단하고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계획을 세웠으나 현지 보안군(保安軍)이 먼저 도망하여 협조하지 아니 하였으므로 적도가 다른 경로를 거쳐 상륙하여도 발각하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에 대의로써 사졸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고 용기백배하여 분발호질하면서 멀리 진격하여 적의 선봉을 거의 섬멸하였으나 현지인들이 적과 내통하여 자조(資助)하였으므로 중과부적 마침내 고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하니 사람들이 원통히 여겼다.

1270년(원종12)에 공의 나이 10세에 부친을 잃었다. 대부인은 고예비경고공 휘 정의 따님으로서 영광으로부터 고자(孤子)들을 인솔하고 송경(松京)에 돌아와서 법도에 맞게 교육하니 독서에 능숙하였다. 공이 겨우 14세때 숙부 문숙공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사부의 걸출한 문장을 문숙공이 보고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은 반드시 너이니 내 형님은 죽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면서 기뻐하였다. 15세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다음해 1276년(충렬3년) 문과에 급제하고 정축년에 강음(강화소재: 감목(監牧) 아록(俄錄) 중(中) 좌우위참군 직문한서(直文翰書)에 제수되었으며 이 때부터 7년 간에 3차 승진하여 관계가 7품(品)에 이르기까지 다 학문과 문필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직책에 등용되었다.(* 1270년을 1276년으로 정정)

1288년(충렬15)에 당후관(堂後官)을 거쳐 권지통예문지후에 서임되고 정언(正言) 지제고(知製誥)에 제수되었으며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은청어대(銀靑魚袋)를 패용하고 감찰어사로 전직하여 금자어대(金紫魚袋)를 하사 받았으며 기거랑(起居郞)에 승진되고 기거주를 거쳐 첨의사인으로 승진하였으며 전법총랑으로 승진 전보 되었으니 조현대부(朝顯大夫)의 품계라 1298년(충렬25) 봄에 충선왕이 선양을 받아 왕위를 계승함에 공으로써 왕에 종사하게 하고 동년 가을에 충선왕이 원의 궁정에 입시하게 되어 충렬왕이 복위함에 공이 판도총랑이 되고 전중윤에 전보되었다가 누진하여 밀직우승선(右承宣) 좌승선 판사재사사 문(文) 독서관 수찬, 지제고, 지군부사, 지감찰 동지 조봉중 이대부(二大夫)에 이르렀다.

1300년(충렬27)에 밀직부사 겸 감찰대부를 배명하고 이듬해에 왕명을 받들어 원제(元帝)의 탄생경하의 임무를 띠고 원경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원제 성종이 북방인 감숙(甘肅)에 진정중으로서 유수(황제 부재중 궁중을 수직하는 중신)가 조칙을 받을어 각국 사신들에게 군사정보에 관한 긴급사항을 제외하여서는 일절 연경(燕京)에 정주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원의 중서성에 나아가 우리나라가 귀국에 사대교린한 이래 천수성질의 조하를 아직 궐례한 일이 없는데 어찌 여기 머물러서 행재소에 진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매우 공구한 일이라고 항의하여 드디어 허락을 받고 감숙으로 북행하여 원제를 알현하고 연경까지 귀환하는데 일년일참(1년이상한참)이 걸렸다. 행재소에 도달하여 조복(朝服)으로 정장하고 마치 궁궐의 연회에서 행하는 의전과 같이 장전 야영장막내의 제왕의 처소에서 헌수배하하고 물러나니 원제가 특별히 어금을 하사하면서 총행하였으며 거가친정(車駕親征)할 당시라. 적(敵) 공이 먼저 칙지를 받들어 돌아옴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경하하였다. 동지밀직사사에 문한승지를 겸대 승진하고 또 원에서 승무랑 정동행중서성좌우사랑중을 제수하였으며 밀직사사에 승진하고 보문관 대제학(寶文관 大提學)을 겸대하였으며 광정대부로 전임하였다.

1305년(충렬32)에 첨의사에 들어가 지첨의사사가 되고 동년에 또 천수절경하사로 원에 갔다가 환국하였는데 이 때 지난 충렬왕25년에 충렬왕이 복위한 이래 본국인 간신배들이 패를 갈라 왕부자의 정분을 상통하지 못하도록 이간하였으나 공이 왕부자의 사이에 끼어 둘의 화친을 주선하는데 오로지 지공무사하였으므로 이간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1307년(충렬34)봄에 이르러 충선왕이 원의 인종을 편(便)들어 제위계승권 쟁탈의 내란을 소탕숙청하여 무종(武宗) 옹립에 그 공훈이 천하에 드러났으므로 원제실과 친밀하게 됨에 본국의 신료로서 왕에게 이심(二心)을 품은 자는 위로는 첨의밀직이부로부터 밑으로는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혹은 주륙하고 찬류하고 혁정하여 모두 숙청하였는데 유독 공 만을 지첨의사사에 유임하고 또 지밀직사사를 겸대케하였으며 여름에 지밀직사사를 혁파하여 자의찬성사로 개칭하였다.

1308년(충선1)에 충선왕이 재차 직위함에 대신들을 각 도에 분견하여 민속을 점검하고 호적을 작성하려고 하였을 때 공으로써 양광수길도 계점사 행수주목사로 삼았다. 각 도에서 첨의사에 보고하면서 시행예규의 지시를 요청하면 첨의사에서는 소정의 조례가 없는지라 회첩에 마땅히 양광수길도에서 하는 준례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으므로 각 도에서 속리를 보내어 그 준례를 모사하여 갔다. 1309년(충선2) 여름에 다시 판삼사사를 배명하여 그 직위에 ㅇ년간 있다가 삼사가 혁파되어 대광상의찬성사로 개칭되었으며 1311년(충선4)에 또 상의관제가 혁파되었으므로 따라서 퇴관하고 이로부터 10년간 집에서 유유자적 심신을 정양하다가 1321년(충숙9)에 첨의평리겸 판삼사사로 기용하였는데 연우 말(延祐 末)직 전년에 충선왕이 토번으로 찬배되고 1321년(지지초)에 왕이 원경에 억류됨에 국내 당쟁이 일어났으며 수상은 왕을 호종하여 연경에 갔으므로 공이 비록 첨의 삼사 양부의 수위에 있었으나 하료들이 추요를 잡고 서로 협심하지 아니하여 사사건건 상호충돌하였다. 그러나 국사를 그르치지 아니한 것은 오직 공이 진정한 까닭이었다. 1324년(충숙12)에 원의 정변으로 인하여 왕이 다시 친정하게 되어 관직을 대폭 개편하게 되었는데 공을 파면하려고 하므로 왕이 말하기를 이 노인은 시종일관하여 타의가 없고 지공무사하므로 정부에서 파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으나 집권자가 찬성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침내 파직되었으며 다음에 왕이 귀국함에 삼중대광첨의정승으로 치사 하였으며 이 해에 대부인의 나이가 100세였으므로 연간 30석의 국록을 하사하였다.

1327년(충숙15)에 충열왕조 때의 관제로 복귀하였으므로 삼중대광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겸 영춘수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 그대로 예와 같이 되었으며 이 해에 대부인의 상(喪)을 만나니 수가 102세였으며 특히 변한국대부인을 봉증하였다. 1330년(충숙18) 봄에 원으로부터 세자 정(충혜왕)에게 선양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원정에서 객성사 견(堅)을 파견하여 옥새를 가져가면서 공에게 권지정동행중서성사를 제수하였으나 공이 거듭 사양하다가 익년에 그 임무에 부임하려던 중 원사가 2월 2일에 돌아가고 동 29일에 그 당시 재상들이 순군에 모여 앉아 충숙왕의 명령이라 하면서 공을 소환하고 공이 도착하니 성부에서 승상인을 탈취하고 공을 축출하였다. 명에 따라 귀가하여 여러 달을 하는일 없이 보내다가 4월에 가권을 인솔 동쪽으로 금강산에 유람하였으니 대저 협세농권배를 혐피하였음이리라. 5월에 충혜왕이 사자를 송도로 보내어 당시 제상을 힐책하고 승상인을 천수하였으며 정동행중서성좌우사의 관원들을 파면하고 금강산으로 사람을 보내어 공에게 역마로 귀환케 하고 다시 권지정동행중성사의 직에 취임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이것은 공이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7월에 신병이 나서 의약의 효험을 얻지 못하고 10월 계축일에 서거하니 향년이 70이었다. 공은 세인들이 염결행동에 예법을 잘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가히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타인을 응접할 때는 음성과 기색이 온후유화하여 그 아니하였다. 대부인을 섬기는데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부인을 대우하는데 예절을 지켰으며 자손을 교양하는데 의방으로써 하였으니 친척간에 돈목하여 말하지 아니하여도 화합하였으며 사람들과 함부로 교유하지 아니하였으나 또한 원망하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첨의부와 삼사가 이부에서 국가최고지위에 있을 때나 퇴관하여 사저에서 한거할 때나 빈객의 내왕에는 증감이 없었다. 평생에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늦어 취침하였으며 낮에 눕는일이 없었고 아무리 더운 때라도 윗 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발을 치고 있을 때라도 옷깃을 여미고 단아하게 무릅을 끓고 정좌하여 엄숙하게 근신하였다.

그 나이 어릴적에 금중에 들어가 왕의 시봉을 하였을 때나 좌창별감을 배명하였을 때나 그 사무의 분란번잡한 것을 현명하게 판별처리하는데 다년 종사하는 연로고참자들도 가히 따를 수 없었으며 참정 대간의 직에 있을 때 진주하는 바가 모두 원대한 계책이었으며 경기 충청 경상 이도 및 안집동계(함경도)의 송사를 상호 화해로 귀결지었으며 이해득실 및 기호욕념을 배제하였으나 언제든지 모가짐에 절검을 기하였다. 충렬,충선,충숙 3왕조에 걸쳐 봉직하였으되 사진 사퇴를 예의로써 하고 호말의 실언이 없으셨다. 역대의 전례와 고사에 정통하여 선명하고 정확함이 작년에 있던 일과 같이 하였으니 국가에 큰 의혹이 있을 때마다 공에게 자의하여 시정하였다. 그의 저술은 훈과 교의 체제가 잘 짜여졌으며 시는 칭신 염려하여 애송할 만한 명시문이오 우리나라의 문장을 수집편찬하여 제호를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부쳤으니 정수의 선집에 상응필적한 명칭이라 자호를 쾌헌이라 하고 만년에 또 설암(雪菴)이라 하였다. 성균시를 관장하여 이천(李천)등 70인을 얻고 지공거가 되어 박리(朴理)등 30여 인을 얻어 당세의 명망지사들을 입선시켰다. 공이 좌우위낭장 감의의 딸을 취처하였으나 조서하였으므로 신호위중낭장 왕정단(王丁旦)의 딸을 취처하니 그이가 개성군대부인으로 봉작된 분으로서 현숙하여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공을 혼탁하지 않게 하였으며 아들 3인을 대과급제시켜서 연간 30석의 국록을 받고 있었다. 아들이 4인이요 딸이 2인인데 선부인이 1남을 낳고 여타는 모두 후부인의 소생이다.

광식(光軾)은 1294년(충렬21)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총부의낭(摠部議郎)에 이르렀으나 선졸무자하고, 광철(光轍)은 1305년(충렬32)문과에 급제하여 현금 군부총낭 진현전직제학(進賢殿直提學)이요,
광재(光載)는 1313년(충숙1)문과에 급제하여 현금도관 정랑(正郞)이요,
광로(光輅)는 1317년(충숙5)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요절무사하고 관직은 가안부록사였으며 장녀는 전교령 예문관직제학 안목(安牧)에게 출가하여 해양군부인의 봉작을 받았고, 차녀는 예문공봉 박윤문(朴允文)에게 출가하였으며 손남3인은 모두 연유하다.

충선왕이 유시부터 공의 명망을 익히 들은지라 정동행중서성사를 권임한 것은 대개 다시 재상을 제수하여 상국(相國)으로 삼을 의향이 있던 터이므로 공이 병으로 서거하니 부음을 듣고 슬퍼하여 제향하고 문정(文正)이라 증시 하였으며 다시 유사에게 상수의 조달을 명하였다. 1330년(충혜1) 11월 18일에 덕수현(德水縣) 해운산(海雲山)에 안장하면서 유명이라 하여 문인 계림군 최해(崔瀣)에게 묘지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나 해가 공을 사사하기를 근 30년간 상(常), 무(無), 유진지부지, 덕광(德廣)이 불휴함을 칭송하는 표지는 마땅히 문장이 능숙한 사람에게 겸양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유명이신지라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재배호곡하면서 명(銘)하노니

[아 ~아 문정공이여! 당신은 국가의 원로 귀감이신데. 이제 홀연히 가시니 누구에게 질의 하리이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다 하오리까 현철하신 스승님 저를 버려 가시니
아 - 그 슬픔 그 감통(感慟)이 공자(孔子) 잃은 자공(子貢)의 심정이외다.]

묘는 개풍군 중면 대룡리 대야치 덕운산에 있다.

[참고]국토 분단으로 향화를 받들 수 없음을 후손들이 한하여 광산군 비아면에 설단하여 매년 3월 3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