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김의원(金義元)

(1066∼1148) 83歲 양감(良鑑)의 셋째 아들로 고려 인종때 문신 17歲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아버지 문안공의 음덕으로 관직에 올라 장사랑과 군기시주부동정(同正)이 되었다, 1088년(선종 6년) 23세에 수어도감판관(戍御都監判官)을 지냈고 여러번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이 되어 감찰어사(叢察御史)로 연천(漣川)을 지킬 때 여진족을 쳐서 큰 공을 세웠다. 호부상서(戶部尙書)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역임했다.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국자제주(國子祭酒) 석(碩).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 자인(資仁), 祖 문하시중 정헌공(門下侍中貞憲公), 曾祖 문하시중 장화공(門下侍中章和公) 자연(子淵) (依李氏譜)

[충정공 묘지명]

공의 휘는 의원이요 나주 광양현인이다. 기선(其先)은 신라에서 나와서 말기에 난을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였다.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니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요 어머니는 최씨인데 상서 우복야 중추원사 연하의 따님이니 증서해군부인이요 조(祖) 정준(廷俊)은 수사도 문하시랑평장사요 증조(曾祖)는 책(策)이니 좌복야한림학사요 고조(高祖)는 준(峻)이니 삼중대광이요 준의 부(父)는 길(佶)이니 삼중대광이다. 길 이상은 구속에 족보가 없었으므로 이름이 실전 하였다.

 

공의 성품이 엄격하고 용모가 준수하고 기력이 뛰어나 남의 급(急)함을 들으면 반드시 구원하여 주고 젊었을 때 글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좨주 김근이 시관으로 있을 때 성균시에 급제하니 공의 나이 17세라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 근기 주부동정이 되고 23세에 수어도감판관을 지내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어사로 연주자사가 되었을 때 예종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동으로 여진을 정벌할 때 공으로 병마판관을 삼으니 공이 화살과 투석을 무릅쓰고 사졸에 앞서 여진을 쳐서 군공을 자주 세우던 바 그 후 적병이 날로 성하여 길주를 침범함에 원수(元帥)가 공을 불러 이르되 길주가 위태하여 구원할 이 없으니 전술이 능한 자가 아니면 적에게 성을 빼앗길 것이니 공이 가서 지키라, 함에 병마사 이관진과 병마판관 허재등과 함께 길주성을 지키더니 적이 원근에 사나운 무리를 모아 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수개월을 물러나지 않는지라 고이 사졸들과 같이 감고를 같이 하며 밤낮으로 수비를 굳게 하더니 때마침 원수의 구원병이 오다가 적에게 패하니 적은 하루사이 승세를 이용하여 사다리를 걸고 성을 공격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성이 무너져 거의 함락될 때 공이 칼을 빼어들고 적 을 격살하고 호통하니 적의 무리가 후퇴하자 때마침 날이 저무는지라 공이 사졸을 독려하여 중성 26칸을 쌓았더니 그 익일 아침에 적이 바라보고 모두 탄복하고 사기가 떨어져서 화친을 청함에 공이 허락치 아니하더니 조정에서 화친을 허락하였다. 적이 성을 에워싸고공격할 때 군사들이 모두 실색하되 공이 홀로 안색이 자약하여 군사를 독려하니 사졸이 모두 그 의기와 용맹에 감복하고 고군약졸로 위태로운 성을 지키되 적병 백만으로도 성을 빼앗을 뜻을 저 버리고 화친을 청함은 모두가 공의 힘이더라 이어 회군할 때에 길주도 병마원에 조서하여 예를 갖추어 복명케하고 임금이 간곡히 위로하였다. 마침 논공행상하는 자리에 장병들이 공을 다투되 오직 공은 참관하지 않았다. 형부원외랑과 호부랑중을 역임하였다. 계사(1113년)에 글안에 사신으로 들어갔는데 큰 사신을 능히 맞아줄 만한 사람이 있어 공을 후한 예로 대접하고 모든 범절이 품족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외국의 귀인이라 하고 관에 나가 비밀리에 바라보더니 환국할 때에 국경까지 전송하는 일행관원들이 공의 덕에 감동하여 울면서 작별하니 사신을 대접하는 절차 성함이 근고 이래고 없었던 일이더라 여러 번 옮겨 공부사랑이 되었는데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병부시랑 지다방사를 제수하고 예부경 지어사대사 호부상서 지추밀원사에 발탁되었다. 이 때에 외척이 전정하더니 병오년(1126년)에 궁궐에 화재가 있었다. 공이 규탄할 수 있는 직위에 있어 시어사 송근과 전중시어사 이중등으로 방화 용의자를 찾아 고발하려 하니 용의자가 듣고 해코자 하거늘 공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더니 외척이 패함에 공도 외척이라 하여 양주자사로 내보내니 그 꺼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놓게 함이더라 공이 덕으로써 정사를 함에 백성이 그 덕을 칭송하더라. 무신(1128년)에 임금이 외척으로 허물 없음을 알고 안변도호부로 옮기고 임자(1132년)년에 공부상서 대도호부사를 제수함은 다 치척이 있음이더라. 늙어서 집에 돌아가기를 고하니 호부상서 겸 삼사사를 겸하고 금자광록대부에 특진되고 무진년(1148년) 11월에 병을 얻어 12월 4일에 성동(城東) 임천사(臨川寺)에서 돌아갔다. 왕이 듣고 슬퍼하며 부의를 보내어 장사를 도우니 19일에 진봉산 서강에서 다비하고 계유(1153년) 12월 7일에 유해를 임강현 북산서록에 장사지내니 향년이 83세라 공의 초취부인은 국자 좨주 이석의 따님이니 1녀를 생하여 예빈소경에게 출가하였고 공 보다 먼저 죽고 후취부인은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이작인(李작仁)의 따님인데 삼남사녀를 낳았다.

    장자에 광중(光中)이요

    차자 대균(大鈞)은 문림광 전중내급사동정이며 다음은 대용(大庸)이니 문림랑 위위주부동정이라 장녀는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최윤의(崔允儀)에게 출가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후 4년에 졸하고 공의 남은 따님도 모두 명문거족에 출가하였다. 명(銘)하노니

[오직 공(公)의 선조는 신라로부터 낳으셨고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왕가에 복로하였도다. 공이 출사(出仕)는 우등으로 사과(士科)에 급제하였고 융망(戎幕)에 종사함에군사를 통솔함이 인화를 이루었네 흉적이 놀래서 창을 거꾸로 잡고 도망하였도다. 웅주(雄州) 길주(吉州)양성을 지킴에 공열이 많았네 본조(本祖)에 우뚝 서서 한결같이 다른 뜻 없었도다. 관에 임하여 정사를 행하심에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 제하였도다. 태산이 무너짐은 천명이라 어찌하리오 돌에새겨 전하노니 산하와 같이 무궁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