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김약항(金若恒)

고려말,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절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성군의 둘째 아들로서 字는 구경(久卿), 호는 척약재(?若齋), 1368년(공민왕 1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371년(공민왕 21) 문과(文料)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직언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하여 외직으로 지곡주군사(知谷州郡事)에 좌천, 얼마 후 강원도 염문계묵사(江原道廉間計默使)로 승진되고 곧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는데 그 때는 고려 왕실이 이미 기울어져 친척과 친구들이 많이 조선조 태조에게 벼슬함으로 함께 추대하고자 요청하되 공은 홀로 물리쳐서 옳지 않다고 하더니 뒤에 천명이 태조에게 돌아갔음을 알고 벼슬길에 나아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서적을 맡아 관리하던 관청의 우두머리 벼슬)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하정표(賀正表)를 동료들과 같이 지었는데 명나라는 자기 힘의 강대함을 믿고 또는 우리나라 문물의 번성함을 꺼리어 글 내용이 불공한 말이 있다고 성죄(聲罪)하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와서 글 지은 사람을 징계한다 하니 공은 회피하지 않고 개연히 명나라에 가려고 길에 올랐으나 대개 태조의 명령을 중하게 여기는 것만도 아니요 도는 만일 난리가 일어난다면 그 백성들의 상할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이 때에 태조는 중추원 학사로 벼슬을 올려주어 보냈다. 공이 명나라에 도착하니 고문이 심하였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리를 분석하여 조리있게 대답하니 명나라 황제가 고문에서 풀어주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멈추었으나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고 운남성(雲南省)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태조가 멀리서 광산군(光山君)으로 봉(封)하고 그 가족에게 후하게 보조하였다. 흉보가 들려오자 정종이 부의(賻儀)를 내리고 유의장(遺衣葬: 죽은 사람의 옷으로 장사지냄)을 명하였고 태종조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소청으로 포은 정몽주와 같은 날에 보국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로 추증하는 동시에 청백리(淸白吏)에 선정하고 자손을 등용하라 명하였으며 시호는 문온공(文溫公)이다.

묘(墓)는 용인군 금령역에 있다. (見高麗史, 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태조 012 06/11/30(무인) / 정총·김약항·노인도가 명나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정윤보가 전하다.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의 처가 정윤보(鄭允輔)의 말을 듣고 발상(發喪)하니, 임금이 듣고 말하기를,  “황제가 만일 총(摠) 등을 죽였으면 예부(禮部)에서 반드시 자문(咨文)이 있을 것이다. 윤보(允輔)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하고, 금하게 하였다.

  총(摠)의 자(字)는 만석(曼碩)이요, 청주(淸州) 사람인데 문간공(文簡公) 정공권(鄭公權)의 아들이다. 위조(僞朝)의 병진년에 홍중선(洪仲瑄)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법을 고치어 시(詩)와 부(賦)로 과거를 보였는데, 총(摠)이 제일인(第一人)에 올랐다. 나이 19세에 춘추 검열(春秋檢閱)을 제수 받고, 대간(臺諫)·응교(應敎)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고, 기사년에 공양군(恭讓君)이 서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승진하였는데, 한때의 표문(表文)·전문(箋文)은 많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임금의 잠저(潛邸) 때부터 마음을 돌린 지 오래였는데, 임금이 즉위하매 녹공(錄功)하여 1등을 삼아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서원군(西原君)을 제수하였다. 갑술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옮기어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로 고치고,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함께 편수하였다. 을해년에 고명(誥命)을 청하는 일로 명나라 서울에 갔었는데, 황제가 우리 나라 조정에서 표문(表文) 낸 것이 회피하는 자양(字樣)이 있음에 바야흐로 노하여, 총(摠)더러 표문(表文)을  지었다 하여 구류하고 사람을 보내어 처자를 데려갔는데, 황제가 진실이 아니라고 노하여 모두 돌려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어 정도전(鄭道傳)을 잡아가려 하였다. 도전(道傳)이 병이 들매, 권근(權近)이 청하기를,

표문을 지은 일에는 실상 신도 참예하였사온데, 신은 지금 잡혀 가는 것이 아니므로 용서받을 수 있고, 잡혀 가지 않는 자들도 또한 의심을 면할 수 있겠지만, 신이 만일 후일에 잡혀 가게 되면 신의 죄는 도리어 중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보내었다. 황제가 권근을 보고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근(近)과 총(摠)에게 날마다 문연각(文淵閣)에 나가 여러 선비의 강론을 듣기를 명하고, 장차 돌려보내려 하여 함께 옷을 주고 사흘 동안 돌아다니며 구경하게 하고, 제목(題目)을 주어 시(詩)를 짓게 하였다. 뜰 아래에서 하직
할 때를 당하여 근(近)은 내려 준 옷을 입었는데, 총(摠)은 현비(顯妃)의 상사로 흰옷을 입었었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였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내려 준 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었는가?”  근(近)만 돌려보내고 금의위(錦衣衛)에 명하여 총(摠) 등을 국문하게 하였다. 총은 두려워하여 도망하다가 잡히게 되니 형(刑)을 당했고, 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는 총(摠) 때문에 아울러 형을 당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심히 슬퍼하여 시호를 문민(文愍)이라 하였다. 아들은 둘인데 정효문(鄭孝文)·정효충(鄭孝忠)이다. " 김약항(金若恒)의 자(字)는 구경(久卿)이요, 광주(廣州) 사람인데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의 아들이다. 전조(前朝) 신해년에 과거에 올라 계축년에 전교 주부(典校注簿)가 되고, 여러 번 옮겨 예의 총랑(禮儀摠郞)에 이르렀다. 임신년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승진하였는데, 임금이 즉위하매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를 제수하고, 을해년에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가하였다." 병자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우리의 표문(表文)·전문(箋文)의 글자 모양이 틀렸다 하여 글을 지은 자를 보내라고 칙유(勅諭)하였다. 이에 약항(若恒)으로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를 제수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게 했는데, 정총(鄭摠) 때문에 화를 당하였다. 경진년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상언(上言)하기를,

  “약항(若恒)의 마음가짐은 강직한데다 국사를 위해 죽었으니, 마땅히 추증(追贈)을 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광산군(光山君)에 보국 숭록(輔國崇祿)의 위계(位階)를 증직하였다. 아들이 둘 있으니 김처(金處)와 김허(金虛)이다.

      【원전】 1 집 111 면
      【분류】*외교-명(明)/*인물(人物)

※참고 : 창녕조씨 청간 조서 선생 행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