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직제학공(直提學公) 휘(諱) 약시(若時)

[사진 : 광산김씨유적보감 하권 86쪽 上참조 (墓所]
[사진 : 광산김씨유적보감 하권 86쪽 下참조 (神道碑]
[사진 : 광산김씨유적보감 하권 87쪽 上참조 (景慕齋, 직제학공의 齋室)]
[사진 : 광산김씨유적보감 하권 87쪽 下참조 (慕忠祠 직제학공의 祠宇)]

고려말, 조선 전기의 절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성군의 셋째 아들로서, 1382년(우왕 9) 사마시(司馬試0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1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태조(太祖)가 등극하자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 산골짜기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막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혹은 술과 음식을 가져다가 대접해도 받지 않으니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부전어(不傳語)라고 이름하였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하게 상심하며 흐느끼나 사람들은 그의 듯을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조가 물색하여 그를 찾아내어 원래의 관직을 주고 벼슬하게 하니 공은 병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직제학공 휘 若時의 묘비(신_ 구비)

그리하여 특별히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집 한 채를 손수 "송헌(松軒: 이성계의 호)이라고 어호(御號)를 써서 주었다. 일찍이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종묘사직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또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하는 것은 선인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곧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고 망국의 천부(賤 : 천한 죄인)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卒하자 자손이 그 말대로 하였다. 고상한 풍도와 절조는 길야은(吉冶隱) 제공(諸公)들과 대등한데 공은 다만 그 사적이 민몰(泯沒)되었기 때문이요 후인들이 또 감히 포장천양( 奬闡揚)하지 못하는 것은 공의 평소의 뜻을 상하게 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공의 지조와 절개를 아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이며, 조선조 순조 때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묘(墓)는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에 있고 모충사(慕忠祠)와 장성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見高麗名臣傅, 華東忠義錄, 崧陽耆舊傅, 朝鮮王朝實錄)

직제학공 휘 若時의 신도비 직제학공 휘 若時의 시호교지 직제학공 휘 若時의 교지

소재지: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 산 50-1번지
세일사 : 음 10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