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김예몽(金禮蒙)

(1406∼1469) 64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경보(敬甫), 호는 만사(晩沙),  아버지는 증좌참찬(贈左參贊) 소(遡)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옥과조씨(玉果趙氏)로 소감 신우(臣祐)의 딸이다.
1429년(세종 12)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432년 친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랑에 뽑혀 보임되었고, 이내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 1440년 부사직(副司直)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시관이 되어 진사 신숙주 등을 뽑았는데 이로부터 항상 시관을 맡아보아 뽑은 선비들이 많이 달관과 제상이 되어 그 때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세종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자 하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는데 조정공론이 公만한 적임자가 없다하여 드디어 거용하여 보내니 公이 해외의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미의 빛이 얼굴에 나타남이 없으므로 보는자가 모두 칭찬하고 임금이 역시 중히 여기어 은례가 더욱 두터우며 그 재기를 알아줌이 매우 깊었다. 1447년(세종 30) 집현전 교리(集賢殿敎理)가 되어 그 해 중시 문과에 을과 3등 9인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고 대사성으로 옮겼다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초배(超拜)됨에 임금이 날로 고문을 주어 존례가 매우 높았으며 중국에 보낼 표찬이 있으면 반드시 公에게 명하여 지어 바치게 하니 왕이 그 지은 바를 보고 특히 참다운 문장이라고 허락하여 주었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전임하였고 1458년(세조 4) 가선대부에 승자되어 홍주목사로 나아갔다가 1460년(세조 6)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청백하고 너그러운 선정을 베풀어 일도가 다 칭송하였다. 1464년(세조 10) 명나라 헌종황제가 등극함에 부사로 진하하였다. 1468년(세조 14) 정헌대부에 가자되어 공조판서(工曹判書)겸 지성균관춘추관사 판의금부사에 배수되고 팔준도명(八駿圖銘)을 지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配는 정부인(貞夫人) 창평조씨(昌平曺氏), 繼配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묘(墓)는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 막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