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의 약사(略史)


고려전기의 광산김씨 (태조∼의종)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인심을 얻어 918년 6월 궁예(弓裔) 휘하의 장군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통일왕조를 건설하였다. 왕건은 고구려(高句麗)의 계승자(繼承者)임을 자처하고 북진정책을 써서 청천강(淸川江)까지 국경을 넓혔고 개성(開城)을 서울로 정하여 정권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뜻을 충분히 이루지 못하고 후대제왕(後代諸王)이 지켜야 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놓았다. 2대 혜종(惠宗)때의 외척 왕규(王規)의 난을 정종(定宗)초에야 진정시키고 4대 광종(光宗)의 개혁정치를 통하여 문벌귀족사회가 지속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유교적 정치이념하에 왕권이 안정되고 문치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송나라와의 문물교환이 활발해지고 글안(契丹)침략의 격퇴와 여진(女眞)정벌 등으로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불교가 융성하여 민심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태평의 그늘에서 점차로 귀족계급의 전제가 심해짐에 따라 나라 안이 어지러워진데다가 태평환락(泰平歡樂)이 극성에 달했던 18대 의종(毅宗: 1146∼1170). 24년에 드디어 무신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들 무인들 사이에 정권쟁탈이 계속되기 시작했다.
우리 광산김씨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통합할 때
3세 길(佶)이 왕건을 도와 민족통일의 왕업을 성공케한 공으로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은 삼중대광 사공을 지냈다.

그리고 최근 학자들의 논문에 의하면 3세 김길께서 중국사서인 책부원구(冊府元龜:중국의 사료집)의 외신부 조공조에 보면 "청태원년(934년) 8월에 고려조의 조공사 김길의 선박이 청주(靑州:지금의 山東省)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발견된 바 이는 김길이 후백제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태조를 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4세 준(峻) 삼중대광 좌복야(정2품), 5세 책(策) 좌복야(정2품)와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오늘날의 장관급), 6세 정준(廷俊) 문하시랑 평장사(정2품), 7세 양감(良鑑), 8세 약온(若溫)과 의원(義元) 등이 대대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워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에 올랐다.
그 중에서도
문안공(文安公) 양감(良鑑)께서는 문종조에 급제하여 문종 24년(1070)에 간의대부 어사대사(정4품)를 거쳐 태복경일 때 송(宋)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웠고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을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가지고 돌아와 성현의 근원을 닦고 공자의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를 지내니 우리나라에 문묘(文廟)를 시작한 연원(淵源)이 되었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로 추앙받게 되었다.

문종 32년(1078)에는 송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호부상서(정3품)로서 접반사가 되었고, 문종 35년(1081)에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와 서경유수를 겸하였으며 선종 3년(1086)에 문하시랑 평장사를 거쳐 수태위(정1품)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현재 전북 고창에 있는 화동서원에 철향(주벽으로 모심)되어 있다.
동방이학의 종사라 불리운 문안공 김양감의 아들이 두 분 있었는데 맏아들인
김약온(金若溫:8世)은 예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상의국어 봉어(정6품)부터 시작하여 지추밀원사와 참지정사를 거쳐 인종 원년(1122)에 수태부 문하시중 판호부사(종1품)에 까지 이르렀으나 성품이 공손하고 청렴하였으며 뒤에 이자겸이 정권을 휘두르는 그때였지만 인척간이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남에게 교태를 보이지 않았다. 시호는 사정(思靖)이다.
문벌 귀족사회가 전개되면서 그 대표적인 문벌은 인주이씨로 문종때부터 인종때까지 80년간 세력을 잡았다. 문벌 귀족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이자겸은 우리 광산김씨의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던 김정준의 외손자이다.
이 무렵 우리 광산김씨의
김의원(金義元:8世)은 문안공 양감(良鑑)의 아들로 문종조에 성균시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과 군기주부동정(정8품) 벼슬부터 시작하여 예종 4년(1109)에 병마판관이 되었고, 인종 4년(1126)에 동지추밀원사(종2품)로 발탁되었으나 이자겸의 실각으로 인척이라 하여 양주로 좌천되었고, 인종 10년(1132)에 공부상서 수대호부사를 받으시고 늙어서 집에 돌아오니 호부상서겸 삼사사를 제수하고 금자광록대부(정2품)에 특진으로 가자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으시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마침내 무신들은 의종 24년(1170)에 정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김광중(金光中:9世)은 의종 17년(1163)에 급사중(종4품)으로 있다가 서북면 병마부사(정4품)로 승진되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실지를 회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집을 불사르고 그들을 몰아낸 뒤 그곳을 계속 지키려고 둔전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가 금나라의 항의를 받은 고려 정부의 명령으로 철수 하였다.
의종 24년(1170)에 간의대부비서감(정4품)과 상서우승(종3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중부의 난 때 몸종 박광승이 밀고하여 살해되게 하였다.
광중의 아들
김 체(金 체:10世)는 순안현령(종5품)이 되었는데 마침 배순석이 군사를 모집하므로 체가 군사를 훈련하여 접응하러 가다가 박광승이 제고사로 온다는 말을 듣고 먼저 사람을 보내어울주로 가서 광승의 아비를 체포하고 또 광승을 잡아서 순안에 이르러 광승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체의 다음으로
김 위(金 位:11世)와 김주영(金珠永:11世) 형제가 있었는데 위는 황국인 송나라에서 상서령으로 추봉되었고 주영은 벼슬이 금오위중랑장 동정행대정(정5품)이었고,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상장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위의 아들
김광세(金光世:12世)는 벼슬이 신호위의 중랑장(정5품)인데 황국에서 상서우복야를 추봉받고 신호위의 대장군(종3품)에 추증되었다.
주영의 아들
김광존(金光存:12世)은 벼슬이 홍위위의 별장동정(정7품)이었고 이부상서겸 판예부사 상호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광세의 아들
김경량(金鏡亮:13世)은 금오위의 대장군(종3품)이었고, 문하평장사(정2품)에 추증되었고, 광존의 아들 김대린(金大鱗:13世)은 금자광록대부(종2품) 예빈경과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