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의 약사(略史)


고려후기의 광산김씨 (명종∼공민왕)


  무인정권이 시작되자 제19대 명종(明宗)이 즉위했다. 그러나 정권은 여전히 무인들의 손에 의하여 전횡(專橫)되었다. 무신들은 약 20여년 정권쟁탈을 계속하다가 최충헌이 집권했는데 그동안 19대 명종, 21대 희종의 2왕이 폐위되고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23대 고종 등 4왕을 옹립(擁立)하는 등 무인들의 독재정치가 강행되었다. 최씨정권은 글안의 침략이 6차나 계속되는 고금 미증유(未曾有)의 국난을 당하였다. 이 때 우리 민족의 저력(底力)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고 30여년간을 줄기차게 항몽(抗蒙)을 계속한 것은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불력(佛力)에 의존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조 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고종 45년(1288)에 최씨정권이 타도(打倒)되고 24대 원종(元宗)이 즉위함으로서 친몽정책(親蒙政策)으로 전환되어 원나라에 복속(服屬)되어 신하로서의 충성을 하게 되고 민족의 자존심을 꺽이고 정치는 문란해졌다. 따라서 31대 공민왕의 개혁정치도 좌절되어 원에 추종하는 사대부(士大夫)세력과 친명(親明)을 주장하는 신진세력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신진세력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을 계기로 친원파(親元派)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32대 우왕, 33대 창왕을 폐하고 34대 공양왕을 세웠으나 공양왕 4년(1392)에 양위(讓位)를 받아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단행하니 고려는 475년만에 멸망하고 이씨왕조(李氏王朝)가 개국(開國)되었다. 이와같이 어지러웠던 고려 후기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지조를 지텼고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도 무게있는 활약을 함으로써 명문으로서의품격을 유지해 왔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광산김씨들도 후손들의 수가 늘어나고 모두가 벼슬길에 올라 벼슬자리가 끊이지 않으니 평자사를 비롯한 여러 고관대작을 배출하게되니 일약 명문으로 자리를 잡게되고 이시기를 기점으로 분파가 되어 5대파의 파조가 생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에 많은 공을 세운 현조(顯祖)는 삼별초(三別抄)의 난에 순절(殉節)한 14세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 설암 김태현(金台鉉:15世)은 김 수(金 須:14世)의 아들로 문정공파의 파조이시다. 태어나면서 용모가 수려하고 담력과 지략이 출중하였다. 충렬왕1년(1275) 15세에 사마시에 장원하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사부(운자를 달아 지은 한문 시)의 걸출한 문장에 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충렬왕 32년(1306)에 지도첨의사사로 다시 원나라에 갔을 때 왕과 아들인 충선왕을 이간시키는 도당들의 흉계를 밝히고 돌아와서 충선왕이 복위한 후에는 판삼사사와 중찬등을 거치고 마지막에는 최고 벼슬인 삼중대광 대제학겸 전리사사(정1품)로 치사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정공 김태현의 부인은 고려왕족인 개성군 대부인 왕씨이다. 부인은 인자하면서 근엄하고 총명하여 가사처리에도 법도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시어머니인 고씨부인을 향년 102세까지 극진히 모셨으며 부군인 문정공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까지 오르게 하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들 넷 모두가 문과에 급제, 국법으로 종신토록 국록을 받게 된 복 받은 부인이었다.

김주정(金周鼎:14世)은 문숙공파 파조이시다. 원종 5년(126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해양부녹사, 이부시랑을 거쳐 충렬왕 2년(1276)에 대부경 좌사의 대부가 되었다. 충렬왕 4년(1278)에는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대가 공물을 받는 것을 없애고, 김방경의 유배를 상소하여 풀어준 공으로 좌부승지(정3품)가 되었다. 충렬왕 7년(1281)에 원나라 세조가 2차 일본 정벌을 계획하자 여원연합군부원수를 지냈고 계속하여 여원연합군으로 일본을 침공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였으며 나중에 광정대부 지도첨의사사(정2품)를 지냈으니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 연(金 璉:14世)은 양간공파의 파조이시다. 고종 42년(1255)에 시어사를 시작으로 내시문하록사, 병부시랑, 추밀원부사를 거쳐 형부상서(정3품)에 이르렀다. 충렬왕 1년(1275)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일본을 정벌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였다. 이때 어느날 저녁에 허리에 차고 있던 금어대(관직을 표시하는 황금주머니 모양)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해몽하기를 "몸에 있던 신장이 이미 갔으니 이제 이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정2품)로 벼슬길에 물러났다. 충렬왕 17년(1291)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끝내었으니 화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현재 화상찬만 남아 있으며 원종 2년(1261)에 발행한 호적이 예안파의 유물관인 숭원각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정조 5년(1781)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전동에 있는 노산사(蘆山祠)에 철향 되었다.

김 규(金 珪:14世)는 낭장공파 파조이시고 낭장동정(정6품) 벼슬을 지냈다.

김 이(金 珥:14世)는 제안 황대전고를 지냈는데 충렬왕 33년(1307)에 광산김씨의 가장 오래된 문서인 광산현제영시서를 지었는데 그 글이 전해지고 있어 더 없이 다행스럽다.
만약 김이가 이때 광산현 제영시서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시조공의 세거지와 우리 광산김씨의 선계 세계를 잃어버릴 뻔도 했으니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

김 영(金 英:17世)은 사온직장공파 파조이시고 고려말에 사온서의 직장(종7품)을 지냈으며 조선조에 공조참의(정3품)로 추증되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에 설단하였다.
    
김 심(金 深:15世)은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충렬왕 때에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와서 낭장(정6품) 벼슬부터 시작하여 밀직부사만호(종2품)를 역임하였다. 그 뒤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충선왕을 모시고 나온 공으로 찬성사(종1품)가 되었으며 그의 딸이 원나라의 왕후가 되니 원나라에서 고려의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충숙왕 14년(1327)에 왕이 원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충혜왕이 즉위하면서 벼슬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화평부원군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 유(金 流:15世)는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문림랑 감찰어사 문하시중수문전 태학사(종1품)를 지냈다.

김사원(金士元:15世)은 양간공 연의 아들로 충렬왕 19년(1293)에 총랑(정4품)으로 김언을 국문할 때 공평한 판결을 내렸으며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첨의찬성사(정2품)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부인은 순흥안씨로 문성공 안유(安裕 또는 安珦)의 딸이다.

김사형(金士亨:15世)은 양간공 연의 아들로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종2품) 벼슬을 지냈다.

김 진(金 ? :16世)은 정경공 사원의 아들로 충렬왕 33년(13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좨주(祭酒:정3품)로 통례문 부사를 겸하였고 충숙왕조에서는 정당문학(정2품),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거쳐 충혜 왕조에서는 지공거(과거의 총책)로 인재를 가장 많이 봅았고 충숙왕 2년(1333)에 작성한 호적이 있으며 시호는 장영(章榮)이다.

문정공 태현의 아들 4형제는 첫째가 김광식(金光軾:16世)인데 충렬왕 20년(129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총부의랑(정6품)을 지냈으니 그 후손을 의랑공파라 하고, 다음은 김광철(金光轍:16世)인데 충렬왕 31년(1305)에 문과 급제하여 관직이 삼중대광밀직사사(종2품)에 올라 화평군에 봉작되고 시호가 문민(文敏)이므로 그 후손을 문민공파라 이른다. 다음은 김광재(金光載:16世)인데 충선왕 5년(1313)에 문과 장원 급제하고 전리판서(정2품) 및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시호가 문간(文簡)이었으니 그의 후손을 문간공파라 하며, 다음은 김광로(金光輅;16世)인데 충숙왕 4년(1317)에 문과 급제하여 가안부녹사(정8품)를 지냈으니 그 후손을 녹사공파라 한다.

문숙공 주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이가 충숙공 심이고 둘째가 시중공인 유이다. 다시 심에게는 아들을 5형제나 두었는데 김석견(金石堅:16世)은 삼사좌사 상호군과 우정승(종1품)이며 화평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은 화평부원군파라 하며, 김승사(金承嗣:16世)는 충목왕 때 벼슬이 삼사좌사(종1품) 병마도원수를 지냈으니 그 후손은 삼사좌사공파이고, 김승진(金承晉:16世)은 벼슬이 상호군(정3품)을 지냈으므로 상호군파라 하며, 김승로(金承魯:16世)는 벼슬이 예조판서(정2품)을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예조판서공파라 부르며, 김승한(金承漢:16世)은 후사가 없었다.

문숙공 주정의 차자가 시중공인 유인데 유의 아들이 김백간(金伯幹:16世)으로 무후하였고, 다음이 김중간(金仲幹:16世)으로 벼슬이 상호군이며 동지밀직사사(정3품)이므로 그 후손은 밀직사사공파이고 다음인 김윤장(金允臧:16世)은 벼슬이 봉익대부 판도판서 밀직부사(종2품)을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판도판서공파라 부른다.

양간공 김 연(金 璉:14世)의 아들은 정경공 사원, 참지정사 사형이다. 사원에게는 장영공인 진 한사람 뿐이나 진은 아들 5형제가 있다. 아들 김광리(金光利:17世)는 공민왕 1년(1352)에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봉익대부 전리판서(종2품)를 역임했으므로 그 후손은 전리판서공파라 하고, 다음 김영리(金英利:17世)는 신현의 문인으로 삼은과 같이 성리학을 배웠고 공민왕 3년(1354)에 통의대부 판군기감사(정3품)를 지냈으므로 그 후손을 판군기감사공파라 부르고, 김성리(金成利:17世)는 벼슬이 판전의사사와 통정원의 사온승(정6품)을 역임하였으므로 그 후손을 사온승공파라 하고, 김안리(金安利:17世)는 벼슬이 대사성을 거쳐 판도판서(종2품)를 역임하였으므로 그 후손을 판도판서공파라 하며, 김천리(金天利:17世)는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을 지냈고 조선조의 개국공신으로 원종공신록에 수록되었는바 그 후손을 밀직부사공파라 부른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이 쇠퇴하자 중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홍건적은 그러한 반란군의 한 무리였다. 이 홍건적의 난에 활동한 사람으로는 문정공 태현의 손자이며 문간공 김광재의 아들인 김흥조(金興祖:17世)는 수원과 해주의 목사를 지냈으며 중헌대부 군기감에 이르렀을 때 홍건적이 침입하였으니 이 때 임금을 호종하고 남행한 공으로 공신록에 책록되었고, 공민왕 18년(1368)에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으로 있던 김 정(金 精:17世)과 더불어 요승 신돈을 주살하려고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두 사람 모두 유배도중 몰래 죽엄을 당하였다.
같은 무렵에 문민공 김광철의 아들인
김회조(金懷祖:17世)가 통헌대부 판도판서 해양군에 봉해졌고 그의 동생 김도탁(金都卓:17世)도 광정대부(종2품)로 추증되었다. 김흥조의 아우 김윤조(金胤祖:17世)는 여말에 형과 같이 요승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형은 살해당하고 제주도로 은거하여 제주도의 입도조가 되었다.
녹사공 김광로의 아들이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순조(金順祖:17世)이고, 손자가 삼척부사를 지낸 김 조(金 眺:18世)이고, 증손자가 또한 전라 병마절도사를 김정무(金丁茂:19世)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내었다.

문숙공후로 화평부원군 김석견의 아들이 해양군으로 봉해진 김 수(金 粹:17世)가 있고, 그 아들이 또한 판도판서를 지낸 김조간(金祖?:18世)이고, 상호군 김승진의 아들은 3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적선(金積善:17世)이고 둘째가 문하시중을 지낸 김덕선(金德善:17世)이며 셋째가 경상감사를 지낸 김종선(金從善:17世)이며, 밀직사사 김중간의 맏아들 김덕룡(金德龍:17世)은 사복시사를 지냈고 그의 동생 김덕봉(金德鳳:17世)은 사의벼슬을 거치었으니 모두들 고려말에 우리 가문을 빛낸 이들이다.

김인우(金仁雨:18世)는 전리판서 광리의 아들로 공민왕 10년(1361)의 홍건적의 침입 때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이르렀으나 아우인 갑우(甲雨)의 화로 연좌되어 현 고창인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
김갑우(金甲雨:18世)는 공민왕 18년(1369)에 천우위대장군(종3품)으로 명나라 황태자의 천추절(생일)에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공민왕 21년(1372)에 대호군(정3품)으로 탐라(제주도)의 공마 50필을 몰고 명나라로 가는 도중 두 필을 잃어 대신 다른 말로 채워 바쳤으나 명나라 황제가 대노하여 받아 들이지 않고 공민왕을 책망하자 돌아와 통역관이던 오극충과 함께 주살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형제가 각처로 흩어져 전북과 경남 지방에 세거하게 되었다.
인우의 아우로 갑우 이외에 또
김삼우(金三雨:18世)와 김시우(金時雨:18世) 그리고 익제 이제현의 사위인 창주 김남우(金南雨:18世) 형제가 더 있었는데 삼우는 상서벼슬을 지냈고, 시우는 판사 벼슬을 지냈으며 남우는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갑우의 화로 연좌되어 모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왜구'를 무찌르는데 공로가 큰 광산김씨로는 김성우(金成雨:17世)를 들 수 있다. 그는 약관 18세에 절충장군(정3품)으로 제수되었고 충정왕 3년(1351)에 도만호겸 전라 충청 양호초토사에 발탁되어 왜구토벌의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전주, 나주, 부령 등 전라지역의 왜구를 무지르고 우왕 6년(1380)에는 진포구의 왜선 5백여척을 함몰시켰으며 임주, 한주, 서주지구에 침입한 왜구도 휩쓸었다. 또 다시 내포지역에 왜구가 침입한다는 급보를 접하고 출전하여 소탕하니 서해안의 도처에서 크게 전과를 올렸다. 40여년에 걸쳐 왜구의 소굴이 된 이 지역을 소탕함에 있어 군둔전을 두고 군마를 자축하고 생포한 왜구는 노예로 삼아 노역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장기간 대비하면서 개선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성계의 등극으로 고려의 운명이 다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불사이군의 절의로 그가 타고 오던 말의 목을 자르고 장군 역시 그 자리에서 자결하니 지금도 충남 보령군의 군드리 모랭이에 조잠이란 마을이 있고 옥마봉, 남서고개에 〈사혁〉이란 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혁이란 김성우장군의 호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이 무렵에 김 정(金 鼎:18世) 또한 충청, 전라도의 찰방을 지냈는데 그 때 공로로 추성 보리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중대광 광성군에 봉해졌다. 아들은 약채, 약항, 약시 삼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 때 묘가 실전 되었으나 후손인 김화택(金和澤:32世)이 춘천부사로 있을 때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김종연(金宗衍:18世)은 고려 말기에 벼슬이 상장군(정3품)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정이 권신인 신돈을 죽이기 위해 일을 꾀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화를 당하였으므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신돈이 죽고 난 뒤에 다시 나와 원수가 되어 왜구를 격퇴한 공로가 있다. 공양왕 때에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커가며 국운이 기울어감을 개탄하고 이성계를 살해하려고 도모하다가 또 누설되어 각처로 숨어 다녔는데 부인과 장인을 순군(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니 부인이 울면서 하는 말이 "설사 내 남편이 있는 곳을 안다 하더라도 어찌 말 할 수 있으며 지금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데 무엇을 말하겠느냐?"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종연은 곡주 숲 속에 숨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굶어서 장차 죽게 되었으니 나를 좀 구해 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죽이라도 끓여 오겠다고 말하고는 내려가서 관가에 고하여 잡혀 죽었다.

사은 김승길(金承吉:19世)은 고려말에 함종현령으로 있으면서 정몽주와 의리를 같이 하다가 정몽주가 죽고 고려가 망하자 :나라가 위태로워도 구하지 못하니 이는 불충이고 친구가 죽어도 조문하지 못한 것은 신의가 없음이라, 이러고서야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설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불사이군하는 절신이 되었으며
아들인 매은
김오행(金五行:20世)에게 "너희도 나의 뜻을 받아들여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유훈을 받들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절의 부자가 되었다.

척약재 김약항(金若恒:19世)은 광성군 정의 둘째 아들로 고려말에 사헌부 집의로 있었는데 이성계와 친교관계에 있었으므로 거사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해 왔는데 신하로서의 절의를 고집하고 응하지는 않았으나 친구와의 정의를 지키면서 그 음모를 고발하지는 않아 성공케 한 소극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하자 처음에는 벼슬길을 사양하였으나 뒤에는 수락하였는데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라는 서적을 맡아보는 관청의 으뜸 벼슬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하정표를 동료들과 함께 지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그 글의 내용이 불공스럽다고 성토하고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서는 글 지은 사람을 징계한다 하니 공은 피하지 않고 명나라에 찾아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공은 굴하지 않고 의리를 분석하여 조리 있게 대답하니 명나라 황제가 고문에서 풀어주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멈추었으나 마침내 우리나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운남성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이태조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광산군으로 봉하고 청백리에도 선정되어 자손에게도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광성군 정의 셋째 아들인 음촌 김약시(金若時:19世)는 고려말에 직제학의 벼슬에 있었으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등극을 하니 처음에는 두문동에 들어 갔다가 다시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의 금광리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을 삼고 살았으며 말을 하지 않고 의관도 괴이하게 갖추고 살았다. 이성계가 등극한 뒤에 거처를 탐문하고 원래 벼승을 주었으나 병을 앓아 앞을 못 본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죽어도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유언하고 세상을 뜨니 공은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 익제 이제현의 외손인 김 유(金 維:19世)는 고려 공민왕조의 중랑장(정5품)으로 이성계와 함께 남정 북벌에 큰 공을 세웠으나 신돈이 정사를 문란하게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령군 도진으로 피해 살다가 이성계의 등극으로 괴로움을 또 받자 합천군 영창으로 이거하여 세거하였는데 그 때 사람들이 3은과 같은 절의있는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수산 김자진(金子進:20世)은 고려 말기에 금위시정이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정몽주와 더불어 의리를 같이 했으며 나라가 망하자 나주의 우정산 아래에 살면서 조선의 하늘을 보기도 싫다고 하면서 외출도 않고 여생을 끝낸 두문신도 있었으니 그 절의는 이상으로도 충분히 알 만하다.

아들 김 허(金 虛:20世)는 강호 김숙자의 문인으로 벼슬이 사제감부정이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만리 타국에서 별세하니 한스러워서 효경 상례장을 벽장에 써 붙이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고, 대호군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