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의 약사(略史)


조선중기의 광산김씨 (중종∼경종)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안정을 되찾은 1506년 9월부터 22대 정조 곧 1799년까지의 약 293년 간이다. 이 시대의 정치적 특징은 실추(失墜)된 왕권을 재정립하고 나아가서는 국력을 신장(伸張)시키고자 노력한 시대였으나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점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는 훈구세력(勳舊勢力)에 의하여 좌절(挫折)되고 정치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한 형태를 면치 못하였고 당쟁(黨爭)이 시작되어 정치의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 국방을 소홀히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고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이 어김없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간 중 무오, 갑자의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사화란 사림, 즉 선비들이 입은 화를 말한다. 세조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등을 포함하는 인척세력을 훈구파라 하고,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을 사림파라 하는데 이들간의 대립으로 다투다가 사림파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농수 김효로(金孝盧:21世)는 무오사화의 참화를 보고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예안현에 자리잡고 세거하였으니 이 분이 오늘날 예안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그는 과거를 일삼지 낭ㅎ고 독서로 임천에서 자적하였으며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아 불천위가 되어 별묘가 있다. 팔순을 넘기고 유택을 정하니 그곳이 마침 고려조에 시중을 지낸 김방경의 지석이 나오는지라 안동김씨인 그의 후손들에게 연락하여 밑자리로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유택을 정하니 양가의 후손들이 서로 고맙다고 두 곳 모두 시제를 지내고 있으니 기이한 현상이려니와 공이 시중공의 7대 외손이 된다. 이조참판(종2품)으로 추증되었고 별묘가 있다.

시기적으로 거의 비슷하나 예안보다 조금 앞서서 안동 구담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은 퇴촌 김열의 증손자이며 세조조에서 벼슬을 하였던 판서인 여석의 동생 담암 김용석(金用石:23世)은 형과 같이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주자의 고사를 모방하여 향약을 설정하고 성균관에 모여 소학을 강의하면서 미풍양속을 진흥시켰다. 이 때의 정치정세로 보아 집권한 간소배들이 미구에 사화를 일으킬 조짐이 보이므로 가솔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자손들에게도 "성균 진사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말라"라는 교훈을 남겼으니 후손들이 유언대로 학문을 닦으면서도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선생과도 동문 수학한 사이이니 학문의 수준을 알만하며 사후에는 용계서원에 철향되었다.

중종반정의 공신을 정국공신이라 부르는데 청라 김극성(金克成:21世)은 연산조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고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뒤 북평사가 되었다. 홍문관의 헌납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심순문이라는 사람에게 죄를 씌워 죽일 때 군신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부당하다고 말을 못하였다. 공이 혼자 원통하다고 죄상을 아뢰었으나 연산은 듣지 않고 심순문을 처형하였으나 극성의 직언하는 죄는 주지 않았으며 그 용기는 높이 평가되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국공신으로 책록되고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광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공조참판을 지내고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의주목사가 되었을 때 고을이 계속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인의로 무마하며 성심으로 백성을 대하니 1년만에 안정되었다. 그리고 예조판서에 오르고 우참찬, 이조판서에 전보되었을 때 서북도에 소란이 일어나니 공을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하여 평정하게 하였으니 출장입상하는 표본이 되었다. 계모의 상기를 마치고 다시 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의정부찬성(종1품)이 되었을 때 희락당 김안로의 모함으로 정광필로 함께 흥덕으로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사사된 후 다시 복관되어 우의정(정1품)이 되었으며 부조의 은전까지도 입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앞에 설명되었던 청백리인 겸광의 아들 중 맏이인 김극회(金克恢:23世)는 성종조에 무관으로 출발하여 중종조에는 통정대부까지 증진되면서 여주목사와 장예원 판결사를 지냈고, 둘째인 김극치(金克 :23世)는 학행이 높아서 참릉참봉을 지냈고, 셋째인 김극핍(金克 :23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예조정랑 벼슬에 있었는데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를 충성된 신하들이 간한다 하여 고산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승문원 교감으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했고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종1품)겸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께 직언으로 간하여 출척할 것을 아뢰어 흉당들의 원한을 사던 중 김안로, 허항 등에 몰려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발병하여 서거하였으나 김안로의 사사 후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평정(平靜)이다.
넷째인 김극개(金克愷:23世)도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병조정랑, 훈련원첨정, 지평, 사간, 사도시부정을 거쳐 승정원우부승지와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다섯째인 김극제(金克悌:23世)는 성천부사를 지냈고, 여섯째는 김극신(金克愼:23世)이고 막내 김극심(金克心:23世)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중종조에 간신이던 김안로와 우리 광산김씨와는 악연에 있던 사람이 많았는데 운암 김 연(金 緣:22世)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조광조의 왕도정치에 협력하였으며 김안로를 탄핵하여 귀양을 보냈는데 채무택, 심언광 등이 모의하여 김안로를 다시 등용하려 하니 회재 이언적 선생과 함께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경성판관으로 좌천되었다가 두 달 뒤에 김안로가 다시 쫓겨나니 우부승지로 돌아왔다. 이 때에 중종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간신에게 미움을 당한 줄 모르고 외방으로 멀리 나가서 수고한 일은 내 마음에 불안함이 있다"고 하였다. 다시 좌부승지를 거쳐 강원관찰사(종2품)를 역임하였다.
탁청정 김 유(金 綏:22世)는 연의 동생으로 중종조 생원시에 합격하고 무예에 정통하였기에 무과에 수차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자 문무 양시를 그만 두고 부모 모시기로 하였다. 벼슬길에 나간 형 대신 부모 공양에 최선을 다하였고, 정자를 세우고 빈객을 맞아 즐기었으나 옳지 못한 사람은 즉석에서 꾸짖어 용서가 없었고,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김유가 세운 정자가 탁청정이라 하며 그 현판 글씨가 한석봉의 친필이다. 그 정자가 우람하고 훌륭한 고 건축으로서 잘 보존되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김말문(金末文:23世)은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을 편찬한 김성원의 아들로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중종조에는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토평할 때 종사관이 되어 좋은 계책을 세워 승전하고 돌아오자 황해도 관찰사를 배명받았다. 승정원 동부승지와 형조와 이조참의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에까지 올랐다. 말문에게는 백문(伯文), 성심재 중문(仲文), 숙문(叔文), 계문(季文), 윤문(胤文), 철문(綴文) 등 6분의 형과 아우인 내문(乃文)등 모두 8형제가 있었는데, 연산조에 형님인 윤문, 철문과 아우인 내문과 더불어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는 가문의 영광을 가져왔다. 윤문은 이조정랑이 되고, 철문은 예문관 직제학에 올랐으며, 내문은 사간원의 사간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4형제도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여 8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이들 8형제를 〈8문의 집〉이라 부르고 부러워 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중종 14년(1519)을 보면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이 장계하기를 "담양부에 사는 사노 박유엄이 그의 아들 박근에게 말하기를 '처주(妻主) 김말문이 조상을 담양 동면 명당 자리에 장사지내고 4형제가 급제하였으니 장차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였고, 그 이웃사람 보린과도 그런 말을 하였다는데, 말이 패란(곧 반역을 뜻함)과 관계되어 놓아 두기 어렵기에 감히 위에 계문하오며,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두었습니다. 라고 하는 관찰사의 장계를 보아도 당시의 8문집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때 서청자 김숭조(金崇祖:22世)는 연산조 별시 문과에 올라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니 청맹고질 이라는 눈병을 빙자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던 중 중종반정이 일어나니 처음에는 옛 임금을 위하는 신하의 절의로 좋지 않게 보다가 곧 폭군을 물러나게 한 반정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중종조에 중시 문과에 다시 급제하고 사간원 헌납을 거쳐 나주목사(정3품)를 지냈다.

김세우(金世愚:23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뛰어난 재질과 방정한 행실로 시대에 아첨하지 아니하여 당시 요로에 있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적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이민(관리와 백성)을 애모하고 뛰어난 공적을 남겼으나 신병을 얻어 벼슬길에서 물러나고 자택에서 죽으니 3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성고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산역을 도았으니 인심 얻은 목민관의 표본이며 여지승람의 적성편의 명환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충윤(金忠胤:24世)도 이 무렵에 부호군 벼슬에 있었으나 34세로 요사하니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져서 살기가 어려워졌다. 그의 부인인 한산이씨는 할 수 없이 거느리던 10여명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하여 네보내고 어린 두 아들과 겨우 끼니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하루는 친정 조카인 토정 이지함이 찾아왔다. 마음으로는 반가우나 대접할 음식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빈 도마와 식칼을 내놓으며 하는 말이 "때가 되었는데 점심을 대접할 양식이 없으니 미안하구나!" "그런데 이 도마와 칼은 왜 갖다 놓은 거예요" " 이 집 양반이 대단하니 다른 것은 줄 것 없고 양반이나마 썰어 먹으려무나"고 하였다. 조카인 토정이 하도 기가 막혀 "고모님 생활이 그렇게도 어려우십니까? 내가 고모님을 돕는 길은 고모부의 묘 자리나 제대로 잡아드리는 길 밖에 없으니 금시발복지와 만세번영지 중 어느 곳을 원하십니까? 하니 토정의 고모이자 김충윤의 부인인 한산이씨는 "지금 우리 집 형편으로 금시발복지라야 살지 않겠느냐?"하니 토정이 정해준 자리로 부호군의 묘소를 이장하였더니 그 이듬해에 집에서 내어 보냈던 노비들이 그 동안에 잘 살게 되었는지라 다시 찾아와서 땅을 사주고 재물을 가져와서 가난을 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일화와 함께 지금도 부호군의 묘가 있는 논산 양촌의 석서리 고개를 〈토정의 고개〉라 부르고 있다. 이 묘지의 여음인지 자손에 많은 재력가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결국 16세기에 들어와 헝클어지기 시작한 조선조의 봉건질서는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분열과 대립을 격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과 민중의 대립까지 심화시켰다. 비록 사림은 그때마다 큰 타격을 받았지만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사림은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하여 계속 성장하고 있었으며 16세기 후반에 다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기묘사화 때 피해를 본 김숭로(金崇老:22世)는 당시 은진현감으로 있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주은 김 식(金 軾:22世)은 조광조의 죄가 없으므로 구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금강 11현 중의 한사람이며 돈목재 김기서(金麒瑞:22世)는 연산군의 혼정이 시작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양팽손과 도의로 사귀며 경학을 강론하였고 뒤에 조광조와 도의로 사귄 연고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향인 고창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육성하였는데 그 때 건립한 돈목재라는 강학당이 현존하고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자암 김 구(金 絿:24世)는 김굉필의 문인으로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고 성균관 사성으로 사가독서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중종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엎드리니 임금께서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까지 왔노라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오"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3암(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자암 김구)과 같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는데 13년이나 그곳에 있는 동안 화전별곡이라는 문학작품을 남겼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가 모두 별세하였는지라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며 기절도 하였고 묘역을 떠나지 않고 애통하다가 병들어 타계하였다. 그는 효우가 돈독하였고 학문도 높았으며 조선전기의 4대 명필중 한 사람으로 서체가 독특하였는데 그가 살던 서울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구의 종제인 의암 김 강(金 綱:24世)은 기묘사화로 종형이 남해로 귀양가자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10년만에 나라가 평온해지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을 거쳐 외직으로 정선군수로 나가 선정했고 다시 예조정랑을 거쳐 성균관 사성, 홍문관 직제학에 승진하면서 춘추관의 편수관(정3품)에 이르렀다.

김신동(金神童:23世)은 중종조의 현량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한림이 되어 3암과 더불어 정론을 주장하면서 선정의 기대사 크더니 사화가 일어나 홍패를 반납하고 오래도록 금고의 형을 입고 두문불출하다가 명종조에 다시 현량과가 복과되자 종부시주부를 거쳤으며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의 재주가 특출하였음을 말함이다.

평정공 극핍의 아들 김명윤(金明胤:24世)은 중종조 현량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경기 관찰사와 의정부좌찬성(종1품)에 이르렀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김홍윤(金弘胤:24世)은 황해도 관찰사(종2품)를 지냈으며 아우인 시은 김의윤(金懿胤:24世)은 명종조의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곳의 정랑과 사헌부의 지평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광릉에 은거하면서 화담 서경덕과 오묘한 이치를 토론하였다. 을사사화를 당하자 병을 청탁하여 출사하지 않았고 그가 살던 곳을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했다 하여 '염퇴고개'라 불리운다.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재 김극통(金克通:24世)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정통하여 조광조를 찾아가서 같이 강론하였는데 정암이 "남주(지금의 전남 장흥군 남면의 지명)의 높은 선비는 참으로 그대이다"라고 칭찬하였으니 알만하고 형제가 문장과 도의가 높아 '3통' 또는 '3수사'라 불이었다고 한다. 벼슬은 동몽교관 이었다.

그 외에도 중종조에 벼슬길에 들어선 노계 김경희(金景熹:23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였으나 김안로 간당의 농락으로 과제가 위격이라 말썽이 생겨 탈락시키고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에도 연루되니 벼슬길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취석정'이라는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고로 문하생 중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시에도 능했고 중종조의 동국필원에도 참여한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성리설'과 '노계집'이 있고 고창의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옥곡 김 기(金 紀:23世)도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을 역임하고 의정부 사인(정4품)에 이르러 임금을 보필할 대관의 물망에 올랐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졸하니 임금이 친히 지사점시관(호조의 관아)에 명하여 장례를 돌보게 하고 제수를 하사하였다.

김 개(金 鎧:25世)는 중종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들어 섰는데 명종조 정시에 장원 급제하니 가자되어 동부승지(정3품)로 배수되었다가 명종조에 형조와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돈영부사가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도 참석하였는데 당시 고봉 기대승 계열의 학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시흥에 있는 금천농막으로 물러나 분사하였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퇴계 이황, 동고 이준경과 함께 명종임금이 직접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으며 호는 독송정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송월헌 김인경(金仁慶:25世)은 일곱 살 때 중종의 부마로 선발되어 순의대부 광천위가 되었다. 중종 22년(1527)에 옹주의 모후인 경빈 박씨가 궁중 음모인 '작서의 변(쥐를 불에 구워 복숭아나무에 매달아 세자 인종을 저주하는 사건)'에 화를 입어 상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돌아오니 김안로가 다시 옥사를 일으켜서 이번에는 서천으로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처형되자 즉시 석방되어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종실 부마들만 모아 보이는 제술시에서 장원하여 통훈대부로 승진이 되었다. 공의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아우와 우애가 깊었다.

김질충(金質忠:24世)은 명종조에 급제하여 황간 김계휘와 같이 호당에 뽑혔으며 벼슬은 형조좌랑과 지제교를 지냈다.
탄수 김 규(金 규:24世)도 명종조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이조정랑을 거쳐 전한으로 있으면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였고 성균관 사성을 거쳐 장악원정에 승진되었다. 선위사로서 동래에 머물러 있을 때 이 무렵 공의 빠른 승진을 시기하는 윤원형 일파의 무고로 투옥되어 경원에 유배되었으나 나중에 풀려 전리로 돌아왔다.

중종조에 김 호(金 浩:22世)는 의주목사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치면서 선정하였고 그의 아들 김우서(金禹瑞:23世)도 문과 급제하여 북병사로 국경수비에 업적이 있고 이 시대에 김 신(金 紳:24世)은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나중에는 관찰사의 소임을 다하여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金允悌:24世)는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전중어사 벼슬을 역임하고 고창, 부안등 10여 고을의 수령을 거쳐 나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다가 을사사화 후 사직하고 향리인 광주에서 환벽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현사들과 도의로 교류하였다.

우리나라 성리학은 조선조에 들어와 16세기에 이르러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회재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면서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이며 다른 하나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면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다. 이 두 학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성리학을 대성한 사람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양 선생이다.
이황의 학통은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등의 제자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의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우리 광산김시로서는 조선의 5부라 일컬음을 받는 문순공 후조당 김부필(金富弼:23世), 읍청정 김부의(金富儀:23世), 산남 김부인(金富仁:23世)과 양정당 김부신(金富信:23世), 설월당 김부륜(金富倫:23世)등 5종반과 내종형제인 봉화금씨의 일휴당 금응협과 면진재 금응훈까지 모두 7인이 퇴계 선생의 고제자로 학덕이 뛰어나 그 당시의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오천 한 마을은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연유되어 오늘까지도 군자리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김부필(金富弼:23世)은 호가 후조당인데 강원관찰사를 지낸 연의 아들이다. 퇴계의 제자로 학덕이 뛰어나 여러번 벼슬을 제수하여도 모두 사양하니 퇴계 선생이 "후조당 주인은 절조가 굳세어, 임명장을 내려도 반기지 않네, 앉아서 빙설 같은 매화 향기를 대하여, 도의 존재를 눈여겨보며 읊조리기만 하네'라는 7언 절구에서 보듯이 벼슬을 탐내지 않고 오직 도학에만 뜻이 있음을 말해 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공의 시호를 제수하였다. 퇴계의 시호가 문순공 인지라 스승과 제자의 시호가 같을 수 있느냐는 시비가 한 말에 있었으나 나라에서는 〈문순공의 문하에 다시 문순공이 나니 어찌 두 가문 모두가 광영이 아니겠는가〉라는 화답으로 시비가 온당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도 있다.

안동 와룡 가야에 살던 유일재 김언기(金彦璣:25세)도 이 무렵 퇴계의 제자이다. 명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조부인 담암의 유언대로 벼슬에는 마음이 없었다. 10년 동안이나 도산서원에 가까이 있는 청량산에서 학문을 닦고 하산을 하니 산천초목이 모두 글자로 보였을 정도로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가야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니 그 덕풍을 듣고 모여든 사람이 수백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비지 남치리, 지헌 정사성, 옥봉 권위, 청신재 박의장, 오봉 신지제, 정곡 권태일 등 그 외에도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 학문 융성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여강동주가 되어 이황이 죽은 후 여강서원을 세우고 퇴계의 주리론을 높이며 유학의 전수에 노력하였다.

김부인(金富仁:23世)은 호가 산남으로 관찰사 연의 아우인 유의 맏아들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향시에 장원하고 명종조에 무과에 장원하니 문무를 겸비하였고 경상좌도병사와 북병사로 경원에 쳐들어온 오랑캐를 물리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사위인데 결혼하게된 경위가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오고 있다. 산남공이 어렸을 때 하루는 낙동강에서 잉어를 보고 쫓아가다가 애일당에 이르렀다고 한다. 애일당은 농암 이현보 선생의 정자인데 농암 선생이 산남의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한 것을 보고 맏 따님의 작이라고 점찍어 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경험적 현실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자와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론적인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통은 중봉 조헌과 우리 광산김씨의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등 많은 유현으로 계승되어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 도관찰출척사를 지내면서 충청도 논산의 연산 땅에 세거지를 잡은 약채의 아들이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21세의 나이로 요사한 문이며, 그 때 17세의 부인 양천허씨가 열녀로 정려를 받아 조선시대의 부도의 표본이 되었다. 예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상신 서석 김국광은 문의 손자이다.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국광으로 하여금 가도승지라는 직제에도 없는 임시 벼슬까지 겸직케하여 가까이에서 자문케 한 것으로 세조가 어느 만큼 그를 소중히 여겼던가를 짐작케 해 준다. 국광의 아들이 대사간을 지낸 극뉵이고, 극뉵의 증손자가 선조조에 대사헌과 호당에 든 황강 김계휘(金繼輝:26세)이다. 그는 조선조 500년간의 가장 유수한 박학자로 나라 일 마다 그의 생각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을 정도였다. 성리나 예의 뿐만 아니고 산천지리의 자연과 인물 그리고 씨족의 원류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선조 14년(1581)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계변무 교섭 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버낼 때도 황강을 추정사로 보내어서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광국 원종공신에 녹선되었고 경연에 나아가 시강도 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나주의 월정서원에 철향되었다.

사계 김장생(金長生:27世)은 황강 김계휘의 아들로 어릴 때는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장성하여서는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덕과 예학을 수학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니 마침내 그를 유학의 종장이요, 예학의 태두라 일컫게 되었다. 김장생은 선조 12년(157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처음 벼슬로 들어와서 여러 관직을 두루 겪어 형조참판을 지냈으나 학문 쪽에 뜻을 더 두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국가 위기에도 독전과 군량미 조달 등 임무를 완수하였고 그 와중에도 근사록석의, 상례비요, 경서변의, 의례문해 및 가례집람을 저술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면서 "사계 김장생과 여헌 장현광은 덕이 큰 사람들인데 내 옆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하던 학자였다. 심지어 그를 불러 들이기 위해 직제에도 없던 성균관 사업이라는 새 직제까지 만들어 그를 불러 들인 일도 있었다.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의 영수인 그는 법치보다 예치를 우위에 놓고 법치가 못 다스리는 심성을 예치로 순화하여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간사회의 규범을 집대성한데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당대의 조정이나 학자 또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에 관한 질문은 모두 사계에게로 집중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학문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경서와 가례등 저서가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고 현대에 와서 사계전집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선생 문하에 아들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문묘에 배향된 선정3현을 비롯해 상촌 신흠, 지천 최명길, 계곡 장유, 월당 강석기, 우재 이후원, 백헌 이경석, 기암 정홍명, 유포 구인후, 충익공 신경진 등 많은 문형과 유현, 재사를 배출하여 사림의 종사가 되었다.        '
사계선생의 5세손 휘 영택의 영정'    ->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정1품)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문묘에 종향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돈암서원에 주향을 비롯하여 전국 10여 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원공 김장생의 첫 번째 부인은 창년조씨로 은(?)과 신독재 집(集)과 허주 반(槃)을 낳았고, 두 번째 부인은 순천김씨인데 절재 김종서의 7세 손녀이다. 계유정란으로 가정이 몰락하였는데 손자가 종의 기지로 생명을 부지하였으며 그 후손이 어려운 환경에서 신분이 보존되어 왔는데 17세 되던 해 아버지인 증참의 수언이 말하기를 "절재(김종서의 호)의 충성과 절의를 밝히려면 지금 조정의 덕망이 사계 선생보다 높은 분이 없는데 네가 그 집에 들어가면 우리 집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선대의 가승을 가지고 시집와서 아들을 낳은 뒤에 남편인 사계 선생에게 그 가승을 보이니 크게 경탄하였다 하며 후에 효와 열행이 임금에게 상달되어 효열의 정려를 받았고 칙령으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장생의 아들 역시 거유인 신독재 김 집(金 集:28世)이다. 판중추부사(종1품)를 지냈고 아버지와 같이 문묘에 종향되었다. 신독재는 18세에 진사가 되고 광해 2년(1610)에 참봉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한 때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요현감, 임피현령, 지평, 집의, 공조참의를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세웠다. 이때 실각한 영의정이던 낙서 김자점이 청나라에 가서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문책을 받게 되어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사임했다. 그 후 대사헌을 지냈고 판중추부사(종1품)로 재임중 서거하였다. 부친인 사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그 학문이 송시열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문묘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한 가문에서 역적이 나면 비록 그것이 무고였을 지라도 그 가문은 바로 파멸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의 서동생인 김 고(金 고:28世)가 무고를 받자 집은 아우 반과 더불어 즉일로 대죄를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고에게 망언한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아버지와 형들이 모두 어진 사람이므로 특히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풀어 주어 역사적인 특례를 만든 것이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보아도 사계와 신독재 부자는 그의 학문과 덕망 때문에 법 위에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도학의 종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정에 의롭게 봉사하면서도 벼슬을 사양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했던 성덕군자라는 호칭을 받았고 부여의 부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있는 여러 서원에 철향되었으며 저서로 신독재 전서가 20권이 있다.

두계 김 규(金?:28世)는 현종조에 경학으로 동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다시 자여찰방으로는 부임하였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숙종조에 특명으로 관로에 나오도록 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사은 숙배하고 바로 물러나와 처음에는 황산(지금의 연산) 강상에서 살다가 중년에 논산 두계로 복거하여 청복을 누리며 정훈을 이어받아 효우가 출천하니 중형인 신독재가 칭찬함이 대단하였다.

장생의 3째 아들이 이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종2품)를 지낸 허주 김 반(金 槃:28世)은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공주로 갔다가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참판에까지 이르렀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또 왕을 호종하였으며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었다. 정사(인조반정 공신)와 영사(유효립 모반진압 공신) 공신책봉 때에 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 무렵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왕실위주의 국가질서론과 주자가례에 대한 연구로 인하여 예학이 발달하였다. 예학은 도덕윤리를 기준으로 하는 형식논리를 중시하였고 명분중심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사람들이 신분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형식을 중요시 함으로서 관혼상제에 예학이 발달하였는데 예학의 태두라는 사계 김장생의 공로가 크며 그래서 세상에서는 광산김씨를 일러 예문의 종가라 일컫게 되었다.

족보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족보가 등장하였다 하나 한 종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15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는데 최초의 족보는 세종 5년(1423)에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라 하나 현존하는 것은 없고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족보는 성종 7년(1476)에 발간된 안동권씨의 세보로 알려져 있다.

우리 광산김씨도 족보도 비교적 빨리 편찬된 편인데 16세기에 병조참판을 지낸 용계 김지남(金止男:25世)이 당시 영남에 살고 있는 종인들과 같이 족보를 만드니 공의 호를 따서 세칭 용계보라 하나 전해지지 않고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숙종 임금의 국구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서석 김만기(金萬基:30世)가 숙종 3년(1677)에 만든 서석보이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숙종 13년(1687)에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가 이를 보수하여 죽천보를 만들었으나 이것마저 보존치 못하더니 드디어 영조 23년(1747) 지추 김진동(金鎭東:31世)이 다시 족보를 편찬하니 이를 정묘대보라 하고 이 족보가 현존하는 광산김씨 족보 중 제일 오래된 것이다. 그로부터 93년 후인 고종 11년(1874)에 미서 김재현(金在顯:35世)과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이 정묘보를 기준으로 수정하여 고종 13년(1876)에 족보를 다시 발간하니 이것이 병자대보이고 각파의 족보를 만드는데 지금까지도 근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후에도 일제하인 1939년에 '장성보'를 그리고 해방후인 1957년에는 '한성보'라는 대동보를 발간하였다.
위에 말한 병자대보가 광산김씨의 족보로는 비교적 잘된 족보이고 오래 되어서 가치 있다고 판단되어 새 천년(2000)을 맞는 기념으로 영인본으로 만들어 다시 배포한 바 있다.
당시에 족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김문서(金文瑞:22世)는 통훈대부로 낙안현령을 지냈으나 그의 묘소가 대천에 있는데 상석 밑에 족보함이라는 석함을 갖출 정도였으니 사후라도 소중하게 보관한다는 뜻이리라 해석된다.

16세기말 조선은 양산사회가 동서 붕당으로 분열되어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고 국력도 약화되어 갔다. 이때 이웃나라인 일본은 도요토미(豊臣秀吉)에 의하여 100여년 동안 계속되어 온 혼란이 수습되고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부하인 장군들의 관심을 해외로 쏠리게 함으로서 국내의 불평세력을 무마하고 아울러 그의 대륙 침략 야욕을 펴고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선조 25년(1592) 4월13일, '명나라를 치러가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고 핑계하고 20만의 대군을 이글고 부산 앞 바다로 몰려왔으니 이것이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김해로부터 성주, 추풍령을 넘어서 청주로 진격한 왜군을 막기 위해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여 죽으니 이때 광김의 김 일(金 鎰:27世)도 탄금대에서 신립과 같이 전사하였다. 이 때 김민선(金敏善:25世)도 사헌부집의(종3품)로 있었는데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부평에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소설옹 김영남(金穎男:25世)도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우도 도사로 있다가 진양군수로 벼슬자리를 옮겼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먼저 동강으로 쳐들어온 왜적을 방어하는 한편 사천에 머물러 있던 적을 소탕하고 수천석의 군량미를 서울로 운반했다. 이듬해 경상우도 감사 학봉 김성일과 우도병사 송암 김면이 모두 왜적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중위장으로서 군중을 통솔한 공로로 당상관으로 품계가 올라 수원도호부사가 되었다.

한편 김 감(金  :28世)은 서천군수로 재직시 서해로 침공하는 왜적을 방어하는데 공로를 세워 말년에는 공조참의로 많은 사람 중에 뽑힌 이가 되었는가 하면 그 밖에도 양형재 김택남(金澤南:26世)은 군자감 참봉으로 있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룩하는데 전공을 세웠고 김몽성(金夢成:27世)은 판관으로 있다가 노량대첩에 참여하여 전공은 세웠으나 순절하였고 김덕유(金德宥:31世)는 한산도 대첩때 전공을 세웠으나 전사하자 부인인 장수황씨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이와 같이 이순신 장군의 3대첩에 우리 광김의 선조가 빠짐없이 참전한 모습이 보이니 문장 쪽 뿐만 아니라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는 얼을 증명하는 바라 하겠다.

광김의 김 결(金 潔:27世)은 조헌 문하에서 수학중이었는데 선생의 창의를 도와 청주대첩에 공을 세웠고 청악 김충국(金忠國:28世)도 중봉 조헌을 도와 창의했으며 김희도(金希道:26世)는 조카인 묵은 김응생(金膺生:27世)과 더불어 참전하였으나 일족인 김치원(金致 :28世), 김 헌(金 憲:28世)과 함께 금산에서 7백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한편 조헌이 의병을 모집할 때 오강 김성휘(金成輝:26世)는 많은 재산을 희사하여 의병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일조하였고 집안에 거느리는 노복들을 시켜 많은 군량미를 진지로 보내 독전하여 그 군공으로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직방재 김보원(金輔元:24世)은 조헌의 병막에 참가하였다가 청주전투에서 공로를 세웠고 다시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과 같이 남강에 투신 자살하였고 김기면(金基命:28世)은 희천군수로 재임중 평양성 탈환에 전공을 세웠고 남하하는 적을 쫓아 행주대첩에도 전공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진주성 수성에도 참전하였으나 세 부족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삼계 최경회와 같이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 밖에도 묵암 김대민(金大民:23世), 김신민(金信民:23世), 김광운(金光運:25世)도 진주성 함락 때 묵숨을 다한 이들이다.

경상도 의령에서는 망우당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항상 적은 군사로 적을 무찔렀으며 붉은 옷을 입고 적진을 진격하여 그 용맹스러움이 나는 새와 같이 가벼우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다 하여 천강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다. 이때 절재 김 질(金 質:26世)은 내금위 봉사의 벼슬자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봉 김성일, 망우당 곽재우와 같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이 되어 진주로 가는 도중 왜병 수십 명을 베고 임곡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왜적에게 포위되어 대적할 수 없음을 미리 알고 편지를 써서 웃옷과 같이 말안장에 얹어 집으로 보내고 곧 바로 칼을 빼어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많은 왜적을 죽이고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말이 집에 도착하니 부인 박씨는 옷과 신을 무덤에 묻고 초혼장을 지내고 소,대상을 마친 후 아들들을 불러놓고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참아온 것은 너의 아버지가 떠날 때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할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고 이르고 곡기를 끊은 지 10일만에 죽으니 모두들 열녀라 하였다.

전라도 광주의 김덕령(金德齡:31世)은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명령을 받고 형인 덕홍(德弘:31世)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니 6천여명이나 모였다. 고경명과도 연합하여 잔라도로 침입한 왜적을 무력화 시켰으며 익호장군의 호를 받고 모악 '권율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진해, 고성지방에 상륙하는 왜군을 물리쳤고 홍의장군 곽재우와도 협력하여 곳을 가리지 않고 왜군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의병장이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가 전쟁터에서는 항상 철퇴 2개를 허리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 근이나 되었다니 팔도에서는 그를 신장이라 불렀고 왜군들은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던 것 같다. 왜장 카토오가 그 명성을 듣고 화공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오게 하여 보고는 "정말 장군이다"라고 감탄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조 30년(1596)에 흥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역적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 순찰사 신경행의 무고로 큰 지혜와 용맹을 펴보지도 못하고 6차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춘산화연곡〉이라는 글을 남기고 29세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운명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왜병들은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부터 양호(전라 충청도)는 걱정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덕령장군은 사후에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의열사에 제향되었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도 받고 최근에는 광주 시내 중앙에 충장로라 명명된 거리가 있고 무등산에 충장사를 지어 그 일대를 성역화하고 추모하고 있다. 동생인 덕보(德普:31世)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니 이들 형제는 충절 3형제로서 의열사에 같이 배향되었다. 충장공의 부인인 흥양이씨 또한 여장부로서 부군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친정어머니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고 정유재란 때는 담양 추월산으로 피난하다가 왜적의 위협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크게 꾸짖으며 절벽 아래로 투신 순절하였으니 그 석벽에 이 내용이 각자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김덕휴(金德休:31世)는 임진왜란에 훈련원 주부로 종형 김덕령 장군을 따라 항상 군중에 있으면서 많은 협조를 하다가 장군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면서 적진에 돌격하여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서하당 김성원(金成遠:30世)은 하서 김인후의 문인이며 선조조에 효행으로 침랑(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에 제원찰방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으로서 군량미를 조달하여 의병들을 도왔고 종질인 김덕령 장군에게도 군량과 병기를 조달해 주었다. 정유재란때에는 노모를 업고 동보 모후산으로 갔다가 왜적을 만나 모녀가 같이 희생되었다. 한편 의병장 고경명의 막하에서 활약한 김득종(金得宗:25世)과 김 각(金 珏:27世)이 있었는데 득종은 용강현령 김숙진(金叔珍:20世)의 후예로 제봉 고경명과 같이 금산에서 순절하였고 각은 고경명 막하에서 종사하다가 정략 장군이 되었다. 이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을 한 곳에 묻은 무덤이 칠백의총으로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으며 지금도 후손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또한 만취당 권율 원수의 막부에서 활약한 김 온(金  :26世)은 적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을 세웠으나 계모와 동생 김 갑(金  :26世)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진중에서 전해 듣고는 놀라서 병을 얻으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충주에서는 김시척(金時 :25世), 김시성(金時省:25世) 형제가 난동하는 왜군에 잡혀가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3모자가 함께 적의 칼날에 참혹하게 죽으니 나라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왕명으로 삼강행실록에 수록케 하고 정려를 내렸다.
한편 경상도 안동의 근시재 김 해(金 垓:24世)는 왜란이 일어나자 안동 유림의 추대를 받아 경상좌도 의병대장이 되고 종형인 김 기(金 圻:24世)가 정재장겸 소모사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낙금헌 이정백과 금역당 배용길을 좌우부장으로 삼고 출전을 하니 종제인 설애 김 강(金 堈:24世)과 극재 김 평(金 坪:24世) 형제와 족손인 도봉 김득렴(金得 :26世)과 쌍벽당 김언구(金彦球:25世)의 손자인 김백웅(金伯熊:27世) 또한 이에 따랐으니 순식간에 수만명의 의병이 모여들어 경상좌도 의진이 편성되었다.
이 때 유림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니 굳건한 충의로 뭉쳤기에 함창의 당교전투와 예천의 용궁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특히 당교 전투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순찰사였던 몽촌 김수에게 바치니 '전도내 의병중 첫째라'고 칭찬하였다. 이어서 예천 송구천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많은 적병과 적장까지도 죽인 큰 전과를 올리고 이듬해 5월에는 밀양으로 내려가는 적군을 추격하다가 경주의 진중에서 전사하니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호는 근시재이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그가 남긴 향병일기에는 의병으로 활약한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버금가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갈봉 김득연(金得硏:26世)은 서애 유성룡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청취헌 김득의(金得議:26世)와 같이 창의하여 의창을 설치하니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장무덕(張懋德)이 크게 감탄하여 그의 덕행과 충의를 칭찬하며 영천과 경주사이에 공의 인품과 공적을 찬양하는 비를 세우려고 까지 했으나 명군이 퇴각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후에는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저서로 갈봉문집 2권과 한글로 된 〈지수정가〉와 〈산중잡곡〉이 전해지고 있다.
그 동생인 만취헌 김득숙(金得숙:26世) 또한 백담 구봉령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나 영남좌우도 선비들이 모여 재주를 겨루었는데 나중에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를 제치고 수위에 뽑히는 재주를 가져 대성할 것을 기약했으나 요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득의의 아들 김광원(金光源:27世)은 호가 석당인데 학행과 문장이 사우들 중 뛰어나 향천에 올랐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은거하며 영재를 육성하고 사림을 계도하여 유풍을 진작하니 문하에서 훌륭한 명사, 이름난 문인들이 많이 나왔으며 담암공부터 아들 손자까지 진사가 계속나와 7대 진사집, 문한가로 명성이 높다.

황해도에서는 4형제 의병장으로 소문난 김만수(金萬壽:26世)가 동생 천수(千壽:26世), 백수(百壽:26世), 구수(九壽:26世)와 함께 봉산에서 의병 9백명을 모아 대장이 되었으며 장단에서 일어난 유극량의 군사와 합세하여 임진강에서 북상하는 왜적과 싸웠지만 처음에는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우인 백수가 전사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남은 두 아우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황해도 일대의 적을 추격하니 이번에는 적을 많이 격파하였다. 특히 부차벌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으나 여기서는 도총부 도사이던 아들 광협(光鋏:27世)을 잃는 불행을 또 겪었다. 선조 26년(1593)에는 진도군수에 임명되어 한산도의 통제사 이순신 군대와 광주의 의병대장 김덕령의 군대에 군량미를 보급해 주었다. 왜란이 끝나고도 시기하는 자들 때문에 공록을 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어 봉산에 있는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이때 전라도 고창에서는 김 계(金 繼:24世)와 김 위(金 緯:23世)등 6형제가 모두 나서서 의병을 모집하고 장성현감을 지냈던 오봉 김제민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벼슬이 부장과 병절교위가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해남에서 왜적과 싸워 전과를 올리고 왜란이 평정된 뒤에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장성에서는 백곡 김홍우(金弘宇:24世)와 모남 김광우(金光宇:24世), 양촌 김덕우(金德宇:24世)의 3형제와 만옹 김기수(金麒壽:24世), 국재 김성진(金聲振:24世)등 한 집안과 서석 김언욱(金彦 :27世), 김언희(金彦希:27世) 형제등 많은 광김의 뜻 있는 이들이 남문에서 창의하고 역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고창과 장성은 물론 직산, 용인, 소사 등지로 옮기며서 왜적과 싸워 전과를 올렸고 군량미를 모아 행재소와 강화도로 보내는 등 그 공적이 매우 컸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나주의 죽헌 김 부(金 溥:27世)는 훈련원정으로 남원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어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일심재 김 명(金 溟:27世) 또한 의병으로 참전하였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였으나 쉬지 못하고 적의 침입이 우려되어 형수와 조카 그리고 자기 가솔을 이끌고 피난 중 적에게 잡히어 처참하게 살해되었으니 이를 본 부인과 형수가 분격하여 강물에 투신 자살 하였다.
이 때 살아남은 아들의 나이 15세였는데 그 어머니가 투신 자살한 곳에 여막을 짓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하여 6년 목을 추가하니 나라에서는 이 두 형제 내외의 충절과 아들의 효도를 기리기 위하여 한 집에서 3강을 다 지켰다는 일문삼강의 정려를 내렸다. 지금도 오산 창의사에는 당시의 의병으로 궐기한 사람들의 공이 현저하다 하여 72위의 공신을 배향하고 있는데 이중 우리 광산김씨가 13위로 앞에 설명한 모든 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서석 김언욱(金彦 :27世)에게는 맏형으로 김언익(金彦益:27世)이 있었는데 선무랑(종6품)이었고 언욱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중 왜란이 일어나 전국을 짓밟으니 장성으로 달려가 동생 창영 김언희(金彦希:27世)와 함께 군량미 수십석과 유지들 80여명과 같이 의거를 도모하였다. 언욱은 어가를 따라 호종한 공로로 선무원종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의정부좌참찬(정2품)에 증직되어 구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언희는 전란 중 군량미 조달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명나라 지원군이 남하할 때 의병 6백여명과 함께 진주로 가서 고종후(고경명의 아들)장군 휘하에 들어가 육박혈전 하다가 운명하니 장예원정(정3품)에 증직되었다.

도천 김윤국(金潤國:25世)는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고 임진왜란때는 관양관으로 영천군수를 지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의 접반관이 되었고 선산부사에 승진되었으며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김은휘(金殷輝:26世)는 선조 15년(1582)에 호조좌랑으로 있을 때 아전들이 올리는 회계장부를 살펴보고 어느 물건은 얼마가 남아 있고 아무 물건은 얼마가 모자란다고 지적하니 아전들이 처음에는 불복했으나 정산한 결과 모두 처음 지적과 같으니 그 때부터 아전들이 두려워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왜란이 일어나자 익위를 제수 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체찰사인 송강 정철과 함께 군무를 계획하여 여러번 군공을 세우는 등 이대의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느나 뒤에 사헌부 감찰과 형조정랑을 거쳐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입휘(金立輝:26世)는 지혜가 총명하여 경학에 밝아 일천으로 함열현감을 거쳐 장예원 사의를 지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고 그의 아우인 김공휘(金公輝:26世)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전과 예학을 강구하였고 파주목사를 지냈다. 선조조에 율곡의 추천으로 찰방 벼슬을 비롯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고 정여립의 난을 토평하여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그후에도 아산 현감을 비롯하여 파주 목사까지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치적이 현저하였고 사후에는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위의 계휘, 은휘, 입휘, 공휘 4형제를 가르켜 황강4파라 한다.

지천 김공희(金公喜:28世)는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종사관, 영광군수,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기양사에 철향되었다.
임란 직전에 무과에 급제하였던 금은 김수연(金壽淵:24世)은 정유재란때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세부득하여 아들인 사은 김몽룡(金夢龍:25世)등 4형제와 같이 순절하였고 부인과 자부까지도 뒤따라 순절하였으니 7명의 한가족이 몰살하는 참변을 당하였다. 뒤에 예조에서 충·효·열행을 장계하여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그밖에도 순절한 집과 각 지역에서 의분에 못 이겨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기록이 많이 있으나 이 자리에서 일일이 다 나타내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여길 뿐이다.

선조 8년(1575)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감정문제로 벌어진 동서의 분당이 그 참혹한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더니 북인들끼리 또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서 당파싸움이 드디어 왕위계승 문제와 엉키어서 광해군의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우리 광산김씨에서도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그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위할 때 폐모 불가론을 이론적으로 논책한 이는 용계 김지남(金止男:25世)인데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였다. 지남은 선조조에 사헌부 장령을 거쳐 암행어사로서 관서지방을 두루 살폈고 우리 광산김씨의 최초 족보인 용계보를 만든 주인공으로 이름이 남아 있다. 약산 김위남(金偉男:25世)은 이이첨 등의 간신들이 백관들을 협박하면서 의견을 말하도록 하는 자리에서 모두들 말이 없었으나 "이 일은 신하된 자로서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반대했으며 그래도 결행을 하니 그 후부터 식음을 전폐하면서 자결하고야 마는 절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김원록(金元祿:25世)도 선조조 식년시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겪다가 선조가 승하하자 통례원 통례로서 태묘에서 선조임금의 3년상을 마친 뒤 그 신주를 태묘에 모시는 예를 마치자 광해군으로부터 관복을 하사 받았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부당함을 지적하여 반대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으며 인조반정 후에 돈녕부 도정을 제수하였으나 그 때도 나아가지 않았으니 임금이 위로의 은전을 베풀고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종2품)를 제수하였다.
한편 청파 김효성(金孝誠:27世)은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간신배들을 처형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유배되었으며 인조반정후에 청주목사에 이르렀고 그 뒤에는 대사헌(종2품)에 추증되었다.

소봉 김대덕(金大德:26世)은 선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광해조에서는 통정대부로 승차하여 천추절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였으며 인조가 즉위하자 대사간이 되었고 이괄의 난에 임금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한성부 좌윤까지 지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과 같이 적의 포위를 받고 있을 때 척화신들을 적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 상소하여 임금이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하였다. 뒤에 형조참판에 이르렀고 문장과 명필로 당대의 이름이 있었으며 특히 초서와 해서를 잘 써서 국조필원에도 올랐다.
김태우(金泰宇:24世)는 간신배들이 폐비의 일로 청류들에게 화를 입히자 말하기를 "인륜이 무너지는데도 선비가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무엇으로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랴"하고 김효성과 더불어 이이첨, 정조, 윤인등 삼적의 머리를 베이고 오리 이원익을 불러드릴 것을 상소했다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김태정(金泰廷:24世)과 송고 김태국(金泰國:24世)은 형제인데 형인 태정은 서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참판일 때 인성왕후(인종비)의 복제를 기년으로 주장하다가 대세에 몰렸으나 당시 사류들은 정론이라 동조하였고 동생인 태국은 음직으로 고부와 금산군수를 지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공빈김씨(광해군의 생모)를 종묘에 배향함을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조야를 놀라게 하였으니 이렇게 절의가 곧은 형제도 있었다.
김영구(金永耉:28세)는 광해조때 정조, 윤인 등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으로 유폐시켜 폐모론을 주장하니 이때 공이 홍무적과 같이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위의 두 사람을 주살 할 것을 주청하였다.
벼슬은 인조때에 전주판관을 지냈다. 이 밖에도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한 이로 추담 김우급(金友伋:26世), 시서 김 선(金 旋:26世)등 여러 사람이 더 있었으니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는 광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찬성하는 쪽이 있었다고 무고 되어 억울한 죽임까지 당한 이가 있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재 여류시인으로 소문난 허난설헌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은 자기와 교류하던 서자 출신인 박응서 등이 계축옥사로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당시의 권신이던 대북파의 관송 이이첨에게 아부하면서 폐모론을 주장하여 왕에게까지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계획을 진행시켰다가 발각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능지처참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약관 22세에 성균관 생원이 된 김상하(金尙夏:27世)는 교산 허균의 역모사건에 가담하였다고 무고되어 국문을 당하였는데 모진 고문에도 불복하고 항변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한 바 있었다. 그의 아들 김종길(金宗吉:28世)은 숙종조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광해조에 벼슬한 쌍오 김질간(金質幹:26世)은 선조조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외직으로 출발하였으나 광해군이 등극하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기주관이 되었고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는 서장관이 되어 중국을 다녀온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시집 쌍오문집 진본이 전해지고 있다. 말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종2품)에 까지 이르렀고 세조의 영정을 영변에서 봉안한 공로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앞에 설명된 김상하와는 당숙질간이다.

덕암 김상양(金尙養:27世)은 광해조 사마시에 합격하여 통훈대부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인조반정의 공로로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광해조에 승정원 주서로 있었던 계암 김 영(金?:24世)은 북인들이 농간을 부림으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예안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사표를 수리하지 낭ㅎ고 승정원 일기를 계속 쓰라고 독촉을 하니 부득이 상경은 하였으나 성밖에서 일기를 써서 올리고 돌아왔다. 인조반정 후 그동안 북인들에게 피해를 본 관리들을 승진시켜 높은 벼슬을 제수하면서 복귀토록 종용하였으나 병을 핑계삼아 계속 사양을 하였는데 그 까닭은 전왕이 비록 폭군으로 몰락은 했다 하나 그의 녹을 받은 벼슬아치로 새 왕의 녹을 받지 못하겠다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보인 표본으로 평가되어 숙종조에 도승지(정3품)로 추증되고 순조조에는 양관대제학에 가증되어 문정(文貞)의 시호와 함께 세상에서는 계암선생이라 칭송을 받게 되었다. 영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대를 이어 배출되었으니 그 중에서도 손자인 초당 김 용(金 鏞:26世)과 현손인 지애 김 협(金 협:28世), 6대 손인 일일재 김시찬(金是찬:30世)이 더욱 돋보인다.

귀래정 김효신(金孝信:27世)은 귀성 중군으로 출정하여 반란군과 싸워 숙천에 이르렀을 때 반란군인 강작이란 자가 졸지에 효신을 치니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적의 머리를 베어 원수부에 보내는 전과를 올려 가선대부에 가자되어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고 진무원종훈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김인방(金仁邦:26世)의 공로가 인정되어 진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고 벽류정 김운해(金運海:25世)는 광해조에 무과 급제하여 이괄의 난에 어가를 모시고 공주로 호종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추증하였고 충청도 조방장 일때는 공로가 있어 임금으로부터 말과 갑옷을 하사 받는 특례도 남겼으며 시은 김신길(金愼吉:27世)도 공주로 어가를 호종하는데 공이 있고 송암 김여강(金汝剛:25世)과 호봉당 김곤보(金坤寶:28世)는 의병을 일으켜 병기와 군량미 수송등 일익을 담당한 이들도 있다.

또한 인조조에 벼슬길에 오른 긍구당 김중정(金重鼎:27世)은 청백리로 뽑힌 공안공 김겸광의 5대손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나 이괄의 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진안으로 내려가 와룡암이라는 서재를 짓고 충효사상과 근검정신을 지표로 삼고 후학을 지도하고 산수와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며 세상을 멀리하였다. 긍구당 유고가 있고 와룡암과 긍구당은 건축양식이 특이하여 지방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 후 조선 왕조에서는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안으로 전후 복구사업에 노력하는 한편 대외정책에서는 명과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에 대하여 중립 외교정책을 썼다. 그것은 중국대륙의 명나라가 점차 쇠퇴해지고 만주의 후금이 크게 강성해지는 상황에서 그들간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심산에서 나온 정책이다.
이 때 명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후금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여 토벌하였는데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해 왔다. 광해군은 할 수 없이 내촌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고 1만 3천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중국땅 건주위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곧 패전하고 후금에 항복하고 말았는데 이때 김동립(金東立:25世)과 김원복(金元福:25世)도 출전 하였다가 심하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의하여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부터는 외교정책의 방향이 바뀌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정책이 의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하고 후금은 오랑캐의 나라이니 배척해야 한다면서 명에 대하여 친선정책을 폈으니 후금을 배척하는 것이 되어 그들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인조 5년(1627)에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침략하였다가 물러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이때 남곡 김정립(金廷立:28世)은 어영 아관으로 강원도 금화에서 적과 싸워 수백을 참하고 적장의 투구와 철갑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김 진(金 搢:26世)은 광해조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정언을 지냈고 인조 5년(1627)에 정주목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곳 능한산성 싸움에 대장으로 항쟁하였으나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인조 8년(1630)에 송환되어 예안현감이 되었으나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같은 무렵 삼육재 김정망(金廷望:28世)은 사계선생의 문인으로 효우하고 근신함을 가상히 여겨 천거되어 현감에 이르렀는데 손바닥에 효우 두 글자를 써서 항상 실천하였으므로 연산과 은진 두 고을 유생 60여명이 모여 도백에게 맹종(孟宗)과 왕상(王祥)과 같은 효자라고 상신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김여성(金汝聲:25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광해조 계축사화에 연루되었으며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 김장생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에서 세자를 배알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아들 남식을 보내어 나라에 충성을 다하게 하였으니 남한산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 갔음을 듣고서는 북망 통곡하였으며 학행으로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병조호란에 관련된 광산김씨를 살펴보면 ...
이조참판을 지냈던 허주 김 반의 둘째 아들로 창주 김익희(金益熙:29世)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건주위의 청태종이 즉위식을 올리려는 참이었다. 그들은 이 식전에 조선의 사신을 참석시키고자 간계를 썼고 이곽은 참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국내에서는 즉위식에 참석한 이곽 일행을 나라에 오명을 입힌 자라고 여론이 대단하였다. 이윽고 이곽과 나덕헌이 청국 서신 용골대(龍骨大) 등과 같이 귀국하였는데 김익희는 그의 아우 김익겸(金益兼:29世)과 더불어 "이곽, 나덕헌을 죽여 8도에 효수하고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상자에 넣어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야 한다"고 상소를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이와 같은 소문을 듣고 객관을 몰래 빠져나가 저희 나라로 도망쳤고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호란 중 창주 김익희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는 독전어사로 싸우면서 척화를 주장하였고 조선조에 광산김씨로는 처음으로 양관 대제학을 지내신 분이다.
그의 아우 김익겸은 어머니인 연산 서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소수의 선비들로 군대를 편성하여 싸우다가 강화도가 점령됨에 원임대신인 선원 김상용과 함께 강화도의 남성루에서 자폭 순절하였다.
이 때 형조좌랑으로 있던 만취당 김수남(金秀南)도 함께 분사하였는데 뒤에 승지(정3품)로 추증되었고 강화 충렬사에 익겸 신망과 같이 광김에서 세 사람이 배향되었다. 익겸의 어머니이자 허주공 반의 부인인 연산서씨는 강화도에서 피난 중 왕후와 세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아들과 함께 순절하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충정공 김익겸의 부인 정경부인 해평윤씨는 선조의 사위인 문목공 신지의 손녀로서 부덕을 겸비하고 문장이 출중하여 신사임당과도 비 길만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강도로 피난했다가 시어머니인 연산서씨와 남편을 여의고 해평윤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잉태중 만삭이었고 큰 아들 만기 역시 다섯 살인 유아였으므로 죽지 못하고 돌아오는 배안에서 둘째인 만중을 출산하였다. 친정으로 돌아와 두 아들을 법도로 가르쳐 소학, 사략, 당시 등을 직접 가르칠 때 공부하는 과정은 지극히 엄격하였다. 항상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으니 남보다 한층 더 노력해야 겨우 남과 같을 것이다"하고 "사람들은 행실이 모자라는 자를 꾸짖을 때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라 하니 너희들은 뼈에 새겨 들어라"하였다. 형제가 허물이 있으면 손수 매를 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너희 형제를 내게 부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너희가 만약 이와같이 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너희 아버지를 대하겠느냐? 학문을 하지 않고 살려면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스스로 미망인이라 일컫고 종신토록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큰 아들 만기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비로소 잔치와 음악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가문의 경사요 내 한 몸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다"고 했다. 만중 또한 과거에 급제하고 형제가 모두 양관 대제학이 되었을 때 비로소 웃으며 "네가 이제 지하에 가서라도 너희 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섰다"고 하였다.

정묘호란때 사계 김장생(金長生:27世)은 80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양호 호소사로 임명되었는데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이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격문을 보고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우리 광김의 화양당 김 현(金 현:27世), 수우당 김성하(金聲夏:26世), 김숙남(金淑南:25世) 등도 이때 응소되어 많은 활약으로 업적을 남겼다.

장흥의 해은 김유신(金有信:27世)은 광해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척화신인 청음 김상헌을 따라 심양에 다녀왔다. 김유신이 정묘호란 때는 임금을 강화섬으로 호종하여 위성원종훈에 책록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우산 안방준과 같이 의병을 모아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여산에 이르니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벽에 대명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청자가 든 글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 아들인 만절당 김후경(金後慶:28世)과 김 오(金 墺:28世)도 장성하였기에 같이 출전하였다가 돌아왔으며 고흥의 모헌 김취지(金就砥:25世)도 안방준의 막하로 의병을 모았다. 이때에 한 집안의 김득선(金得善:24世), 김의정(金義精:24世), 김정일(金精一:24世), 김여호(金汝瑚:24世)와 김덕보(金德普:31世)까지 그 대열에 합세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담양의 죽계 김존경(金存敬:28世)은 사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조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강진현감과 삼척부사로 재임중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현존하며 정묘호란 때는 왕실이 강화도로 파천하고 왕세자가 분조하여 완산으로 남하할 때 호위한 공이 있으나 공훈 기록을 사양하였고 천추사 서장관 및 성절사오 연경을 다녀왔다. 그 후 강원관찰사(종2품)로 선정을 하였으나 노년에는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사우들과 풍류와 독서로 여생을 보내었다.
또한 이때 어가를 호종한 김득신(金得信:26世)과 김재관(金在寬:27世)이 있었는데 전후에 그 공로로 호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한편 매원 김광계(金光繼:25世)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임진왜란때 경상좌도 의병대장이던 근시재 해의 아들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는데 청군이 에워싸서 위급함이 알려지자 병대장이 되고 아우인 야일재 김광악(金光岳:25世)을 참모로 삼고 종제인 두문자 김요형(金耀亨:25世)과 조카인 김 초(金 礎:26世)의 도움을 얻어 의병을 일으켜 출병을 하였으나 죽령에 이르니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서향 통곡하고 돌아 왔으니 임진, 병자 양난에 부자 의병대장으로 충절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 중 김자빈(金自빈:27世)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추천으로 종사관이 되어 숙부인 김덕란(金德鸞:26世)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광주(廣州)로 출전 하던 중 번천에서 접전을 하다가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혔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고로 숙질이 같이 화를 당하였다. 논산에 있는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매죽헌 김득남(金得男:28世)은 광해조때 무과 급제하여 인조반정 일으켰을 때는 공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고 병자호란때는 철곶첨사로서 세자 일행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호송하던 중 오랑캐의 습격을 받아 같이 가던 선비와 부녀자들이 많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부평에 있는 계양산 밑에 까지 추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포로가 되어가던 무리들을 찾았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달아나던 적을 계속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강화도의 충렬사와 무안의 묘충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懿)이다.

봉곡 김동준(金東準:25世)은 광해조 증광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광해군의 폭정 하에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홀로 찾아 뵈었고 정묘호란때는 세자를 호종하여 전주로 남하하였으며 병자호란에는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는데 척화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호란 후에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황명처사라 자처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쓴 고로 호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죽헌 김 설(金 渫:25世)은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고창의 토성산 밑에 송죽을 심고 정자를 지어 영취(永翠)라 하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의촌 김남식(金南式:26世)은 신독재의 문인으로 아버지인 송와 김여성(金汝聲:25世)의 명을 받들어 고창에서 김남철(金南哲:26世)과 같이 의병을 일으키니 따르는 자가 수백 명에 으르렀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출전하다가 청주에서 오랑캐의 무리 90여 명을 참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려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했다. 그 후 과거에 뜻을 버리고 정읍의 계령산 아래에 옥산정사란 강학당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니 수백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나라에서 충신의 정려를 받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은 김이성(金履成:27世)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과거를 폐하고 화헌정사를 지어 후진 양성을 했으며 효행이 탁이하여 효자의 정려를 받았으며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할 때 당계 김화준(金華俊:27世)은 충절을 다한 고로 보연(寶硯:벼루)을 하사 받았고 수졸헌 김익제(金益濟:27世)도 어가를 호종하였다가 전쟁이 멎자 향리로 돌아와서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외에도 호종공신으로 더 많은 사람이 기록에 나타나나 일일이 이 자리에 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세한재 김성일(金成一:29世)은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아우인 사호 김성구(金成九:29世)와 같이 아버지의 원수인 종놈 김이란 자를 죽이고 관가에 가서 자수하니 인조임금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특사하였다. 성일은 병자호란 때에 군공을 세워 삭주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의 정려를 내렸고 담양에 있는 증암사에 배향되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지은 '형제복수전'이라는 글도 전한다고 한다.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한 우리 광산김씨는 별로 많지는 않으나 미산 김여옥(金汝鈺:27世)은 인조조에 식년시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고 정묘호란에는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고 환도 후에 봉교, 전적, 예조와 병조좌랑, 지평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함평현을 수비하다가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였으나 강화가 성립된 뒤에 해산하였다. 이어서 밀양부사, 한성부우윤이 되고 부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효종조에서는 병자호란 때 겪은 굴육을 설욕할 밀명을 받았으며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두 번씩이나 평안도 관찰사를 배수 받아 실천에 옮기려 했으나 불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김익견(金益 :29世)을 북벌의 선봉장으로 쓰려고 송시열이 효종에게 천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효종이 진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스스로 마음을 굳히고 효종께 사은숙배 하러 갈 즈음에 효종이 승하하므로 북벌은 계획에만 그치고 실천이 안된 허사가 되어버린 사건으로 남았다.

긍구당 김세환(金世煥:29世)은 유일재 김언기(金彦璣:25世) 둘째 아들인 만취헌 김득숙(金得숙:26世)의 증손으로 의지가 깊고 도량이 넓었으며 경사에도 밝아 창설 권두경, 우헌 류세면 등 유현들과 사귀어 수갑계를 맺어 성현의 경전을 강독하고 임천에서 선대의 유지를 계승하여 문호를 빛냈다.

김진원(金振遠:27世)은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 경학을 통달하였고 충효의 사적도 많이 읽어 충신열사의 풍토가 있었다. 효행 또한 탁이하여 인조조에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음에 임금이 거듭 부르므로 부득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부임하였다. 숙종조에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고 효자의 정려도 받았다.
또한 효종조에 활약한 이를 더 들어본다면 탁계 김우인(金宇仁:27世)은 진보현감을 지냈고 효종조에 엄선한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문도가 100여 명이 모였는데 문하에 학문을 성취하여 문과 급제자가 10명,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이가 40여 명이나 되어 문명을 떨쳤다. 교관임기를 마칠 무렵 동기 문하생이 탁계 동문록을 간행하여 선생의 음덕을 추모하였다.

기오당 김우형(金宇亨:27世)은 효종조 증광시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시독관으로 임금 앞에서 대학을 강론하였고 서장관으로 중국도 다녀온 외교통이며 공조판서를 거쳐 기로소(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이는 곳)에 들어 갔으나 기사환국을 개탄하면서 녹을 받지 않았다. 예서에 능하였다고 하고 저서로는 옥산유고를 남겼으며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숙종 6년(1680)에는 경신대출척이 있었다.
이 때 우리 광김은 7대제학을 배출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인맥을 살펴보면 허주 반의 맏아들 학주 김익열(金益烈:29世)은 인조조에 선공감 가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모았으며 그 후에 남원부사(정3품)를 지냈고 둘째인 김익희(金益熙:29世)는 호가 창주인데 남한산성 독전어사로서 척화신으로 이름이 높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정2품)와 양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셋째인 김익겸(金益兼:29世)은 병자호란 때 강화수성에 실패하자 순절하여 광원부원군(정1품)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넷째인 김익훈(金益勳:29世)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가 의금부 도사부터 시작하여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가 세워졌고 그 뒤에도 여러 벼슬을 거쳐 경기총융사겸 어영대장을 제수받아 광남군(光南君:정2품)을 봉작받았다. 경신대출척때 남인을 출척했다가 뒤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잡으니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다섯째인 김익후(金益煦:29世)는 인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정9품)을 지냈고 이조참판(종2품)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김익경(金益炅:29世)은 현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종2품)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학덕이 높았으니 그의 자손들이 역사를 빛낸 가문으로서 이때 초석을 다져 놓았다.

익겸의 아들 만기는 뒤에 영의정과 국구가 되었고 만중은 국문학의 대가인 서포로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등을 저술하였다.
서석 김만기(金萬基:30世)는 다섯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아버지인 김익겸을 잃어버리고 어려서부터 숙부인 창주 김익희에게 수학하다가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효종 3년(1652) 사마시를 거쳤고 그 이듬해에 별시 문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수찬, 정언, 교리를 역임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딸이 세자빈(숙종비인 인경왕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 숙종이 즉위하니 국구가 되어서 광성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정1품)에 승진되었다. 그 후 문곡 김수항의 천거를 받아 대제학에 올랐으며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으로서 공을 세워 보사 1등공신이 되었다. 사후에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석의 아우인 서포 김만중(金萬重:30世)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조에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각종 벼슬을 두루 거쳐서 예조판서겸 양관대제학을 지냈는데 숙종 임금께 아뢰기를 장희빈에게 은총을 줌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과 남해등지로 유배되었다. 서포는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윤씨부인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시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돌아오는 도중 배 위에서 만중을 낳아 길렀다. 그러한 사연이 있는 서포 였기에 유배도중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

서석 만기와 그의 아들인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와 진규의 아들인 건암 김양택(金陽澤:32世)은 어느 문중에서도 드문 3대 대제학을 지냈고 또 경대 김상현(金尙鉉:36世)과 하정 김영수(金永壽:37世)가 대제학이 되었으니 7대제학 모두가 사계선생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문형을 배출하였으니 놀라지 않는 이가 없다.

이 시대에 활동한 광산김씨로 몇 사람을 더 든다면 오헌 김 총(金 총:26世)은 현종조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를 미롯하여 정랑, 수찬 등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때 시관이 되었는데 시사에 연루되어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왜국의 사신접위사로 동래공관의 임지에서 졸 하였다.
전곡 김익렴(金益廉:29世)은 효종조에 문과 급제하였고 사헌부 집의를 거쳐 사간원 사간과 명사를 겸하니 효종이 기재라 예찬하였으며 종성부사를 지냈고 판서에 추증되었다. 역사 김우화(金愚華:29世)는 숙종조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각 고을의 수령과 부사를 지냈으며 기사환국 때에 중전을 구호하는 장계를 올렸다. 김정봉(金廷鳳:29世)은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평안도 장시도사가 되고 황해도도사, 춘추관 기주관, 봉상시정, 승문원 판교를 지냈다. 입지당 김우철(金愚喆:29世)은 숙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노론 4대신의 신원할 것을 주청하였고 장령을 거쳐 형조참의에 승진하였다.

김자건(金自鍵:27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스승을 따라 도학을 강하였으며 벼슬과 명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인조조에 향천으로 선공감역, 빙고별감을 지냈으며 현종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읊으며 말년을 지냈다.
김자남(金自南:27世)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자질이 뛰어났는데 벼슬길이 여의치 않아서 인조의 국상 때 초사로 영사전 참봉이 되었다가 사응원 직장, 군자감 주부로 옮겼고 정선 안응현감을 거쳐 예빈시정에 이르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익화(金益華:28世)는 현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창락, 대동찰방, 예조좌랑, 사헌부 감찰을 거쳐 함창, 보령, 강진현감을 지냈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치적이 있어 보령 고을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숙종의 첫 왕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31世) 김씨인데 서석공 김만기의 딸이다. 조선왕조 5백년동안 광산김씨로는 오직 한 분뿐인 왕비였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아쉬울 따름이며 뒤를 이은 인현왕후 민씨마저 왕자를 낳지 못하였다.

현종 초기부터 경종 말기까지 약 70년간은 당쟁이 극에 이르렀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보복 또한 처참하였으니 희생이 연속이었다. 이와같이 당쟁이란 이념이 친족이란 혈연도 초월하고 사생결단을 하고 있다는 슬픈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와중에 만기의 아들이자 인경왕후의 오라버니 되는 만구와 김진구(金鎭龜:31世)와 죽천 김진규(金鎭圭:31世) 형제를 먼저 들 수 있다.
형인 진구는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역란을 토제하였으며 호, 병, 예, 형, 공조등 5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었고 어영대장 수어사도 겸직하였고 숭정대부에 승진하고 광은군(종1품)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아우인 진규는 숙종조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으며 갑술옥사로 복관되어 교리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때 소론으로부터 척신으로서 궁중 출입이 잦아 월권행위가 많다고 탄핵을 받아 사직되었다. 그러나 곧 대신들의 천거를 받아 복관되어 우부승지(정3품)가 되었을 때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숙종 33년(1707)에 병조참판에 이르렀을 때 소론이 집권하니 공은 덕산으로 유배되었다. 4년 뒤에는 다시 양관 대제학으로 복관되고 또 2년 뒤에는 예조판서와 좌참찬(정2품)으로 승좌되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서석이 만들었던 광산김씨의 족보를 증보하여 죽천보를 완성한 주인공이며 거제의 반곡서원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김진화(金鎭華:31世)는 숙종조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시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으며 벼슬은 충주목사를 지냈고 김진일(金鎭一:31世) 또한 현릉령과 사제감의 첨정을 거쳐 한성서윤을 지내다가 경종조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낙향 은거하였다.
한편 진구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위에 말한 거듭되는 정변에 정권도 잡아 보고 또한 반대파로 몰려 고초도 겪은 희비의 양극을 고루 체험한 8택을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맏이인 북헌 김춘택(金春澤:32世)은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이름이 높았는데 훈신의 적장자로 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유배되었다. 유배를 당하였어도 인현왕후 민비를 복위하는데 앞장서서 갑술옥사를 일으켜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로 복관 되었으나 그 후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소론의 무고를 당하여 다섯 번이나 영해로 유배되고 세 번이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시와 글씨에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며 종조부인 서포가 지은 한글소설 〈구운몽〉과〈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고종 24년(1887)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충효의 절개를 지킨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판서(정2품)와 광녕군으로 추증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둘째인 척재 김보택(金普澤:32世)은 숙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검열, 정언, 감사를 지냈고 소론의 거두인 약천 남구만 등의 오역을 두둔한 죄를 논박하다가 소론의 미움을 샀으며 경종 2년(1722)에 일어난 신임사화 때 화를 입고 벼슬을 추탈 당하였으나 영조 2년(1726)에 복관되고 고종 5년(1868)에 이조판서(정2품)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셋째인 백운헌 김운택(金雲澤:32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참판이었고 신임사화 때 무고로 영변에 유배된 뒤 다시 반역한다는 목호룡의 무고로 장살되었다. 영조 즉위로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넷째인 죽헌 김민택(金民澤:32世)은 숙종조에 별시문과로 급제하여 교리로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신임사화 때 무고로 연루되어 혹형을 당하여 옥중에서 졸하였고 영조 즉위로 신원되어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다섯째인 평재 김조택(金祖澤:32世)은 경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신임사화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여섯째인 묵헌 김복택(金福澤:32世)은 신임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사면되어 영휘전 참봉으로 부임하였다가 사퇴하고 귀향했으나 신임여흉들의 무고로 다시 투옥되어 옥중에서 졸한 뒤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일곱째 김정택(金廷澤:32世)ds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위도로 유배되었고, 막내인 만죽당 김연택(金延澤:32世)도 공히 신임사화 때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즉위로 모두 신원되는 동일 운명을 겪은 형제들이다.

또 이 무렵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으로 김만년(金萬年:28世)은 숙종조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여 사포서 별검을 거쳐 남행주서를 역임하였고 문학과 행의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기사환국 때 친우인 이사명은 죽고 공은 온성에 유배되어 죽었는데 이듬해에 복작되었다.

김이수(金以壽:30世)는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전적을 지냈다. 우암이 유배되자 병을 청탁하고 두문자정 하였으며 폐호간서(閉戶看書)를 좌우명으로 삼고 학구에 전념하였다.

김응휘(金應輝:30世)는 장녕전 참봉으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였을 때 여러 날 동안 석고대죄 하여 왕비로 복위할 것을 계정하였고 문행으로도 당세에 명성이 높았다.

미암 김위재(金偉材:33世)는 신임사화로 신지도로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사면되어 향리인 서산으로 귀환한 후 한강을 건너지 않고 학행에 있어 감역과 부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영조 말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서간 김선재(金善材:33世)는 신임사화 때 정의로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상의원 첨정, 한산군수를 역임하였다.

김상현(金尙鉉:28世)은 재주가 뛰어나 정주의 학문에 힘을 기울렸다. 풍류에도 취미가 있어 명소를 다니며 글을 짓고 읊었다. 숙종조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익상(金翊相:30世)은 숙종조에 무과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용천부사에 승진되고 이어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및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승지에 이르렀다.
오헌 김성택(金聖澤:32世)은 숙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예산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육오당 김영택(金令澤:32世)은 벼슬은 대흥군수였고 사복시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우 김경택(金慶澤:32世) 또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송재 김용택(金龍澤:32世)은 신임사화 때 화를 입고 영조 때 신원 되었으며 순조 때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동생인 존오재 김광택(金光澤:32世)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중 신임사화로 여주 우만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원되었고, 그의 아우 김경택(金京澤:32世)도 같이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이술지와 같이 무주로 유배되었다가 21세로 요절하였다.

산천재 김덕재(金德材:33世)는 훈신의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 예에 따라 대호군을 배수하고 신임사화 때 제주도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졸하였다. 이때 동생들인 행정 성재(聖材:33世), 희암 준재(俊材:3世), 후재(厚材:33世), 대제(大材:33世), 양재(養材:33世), 득재(得材:33世), 낙재(樂材:33世), 명재(命材:33世)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졸와 김중백(金重白:31世)은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학문이 성취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신임사화 때 숙부 김일관(金一觀:30世)과 함께 구검 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니 석방되었고 저서로 졸와 유고가 있다.

음오당 김 근(金 瑾:28世)은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세상에 알려져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서 후진양성에 힘썼고 산수를 즐겼는데 인왕산 낭떠러진 언덕 사이에서 성삼문의 신주를 찾아내어 왕에게 품계하여 사육신의 원혼을 위안하는 한편 우암에게 신반실당(神返室堂)의 의미를 물어서 홍주 노은동 옛터에 사우를 세워서 향사케 하였다. 벼슬은 통덕랑을 지냈다.

운성 김재정(金在精:27世)은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우암이 화를 입고 귀양을 가니 양호지방의 유생과 함께 대궐 밖에서 풀어 줄 것을 진정하다가 다 같이 멀리 귀양을 갔다. 동몽교관에 제수되었고 유고가 있다.

칠매당 김 오(金?:30世)는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양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묘 배향 할 것을 제일 먼저 상소하였고 우암 송시열의 무고 때 통탄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글을 올리다가 혹독한 고문 끝에 흉변을 당하였다.
유고가 있고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소암 김계환(金啓煥:29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좌승지와 대사간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을 지냈다.

 이 시대에 같은 혈족이면서 반대 입장에 섰던 인물도 있었으니 소론쪽의 거두인 아계 김일경(金一鏡:31世)이다. 일경은 숙종조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중시에도 거듭 장원급제하여 승지로 있으면서 왕세제(뒤의 영조)의 책봉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이진유, 이명의, 박필몽 등과 함께 목호룡을 시켜 노론 일파가 왕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한 후 노론 4대신을 위시하여 김용택을 잡아 죽여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 후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영조 즉위 후에 전일의 무고죄로 목호룡과 함께 잡히어 끝까지 왕에게 불복, 공모자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고 처형당했다. 사후 83년째인 을사보호조약이후 순종 2년(1908)에 신원되어 복작되었으며 저서로 아계유고까지 남겼다.

그 외에도 이 때에 벼슬한 이들이 많았으니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한편 사계의 증존자로 김만균(金萬均:30世)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향할 것을 소청하여 이룩하게 하였고 자신은 승정원의 좌부승지에 올랐다. 둔촌 김만증(金萬增:30世)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교관을 배수하고 세자익위사 벼슬과 안동부사 등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만길(金萬吉:30世)은 현종조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숙종조에 강원,전라 양도의 관찰사를 거치는 동안 훌륭한 치적이 나타나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에 이르렀고 김만재(金萬재:30世)는 숙종조에 참봉으로 있다가 남원으로 유배되었는데 사면되어 부평부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만채(金萬埰:30世)는 대사간과 강원도 관찰사 및 개성유수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졸재 김광수(金光洙:31世)는 숙종조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였다. 경종조에 종제인 김팔화(金八華:31世)와 같이 왕자공 사당 건립 통문을 경향 각지에 보내니 제족들이 성원하여 주었다.
만취당 김낙룡(金洛龍:32世)은 숙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벼슬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에 승진하고 동부승지에 이르렀다가 초산부사로 외직으로 나가 서적을 구입해서 제생을 가르치니 북방풍속이 개선되어 문장의 선비가 많았다.
온재 김진옥(金鎭玉:31世)은 이때 감역으로 벼슬길에 올라 강원관찰사를 지냈고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도와준 보답으로 명나라 황제 3위(태조, 신종, 의종)를 위한 대보단을 비원안에 축단하고 제사를 지냄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조정 중신들이 그의 의견에 따르게 한 공로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김신망(金莘望:31世)은 호가 경희당으로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뛰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인재를 길러낸 바 있었고 김요경(金堯鏡:31世)은 숙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경종조에 평안도 관찰사와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쳤다.
김천여(金天與:30世)는 숙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천안군수를 지냈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김천록(金天祿:30世)은 영조조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학문과 덕행으로 동산서원에 봉향되었으며 김천상(金天相:30世)은 영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개풍군수 재임시에는 실전한 문숙공의 묘소에서 지적을 찾아 봉축하였다.

김진용(金晉鎔:25世)은 제주 입도조 김윤조(金胤祖:17世)의 8세손이며 어모장군 김귀천(金貴泉:21世)의 현손으로 어려서부터 마침 제주에 유배되어온 간옹 이익선생에게 수학하여 인조조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령전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귀향하여 학당을 지어 후학을 지도하니 제주도의 유학발달에 기여하였고 명도암(明道庵)에서 수학하였다. 하여 명도암 선생이라 불리어졌고 향현사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의 아들 김계륭(金繼隆:26世)은 현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고 김계창(金繼敞:26世)은 현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전적을, 조카인 김계흥(金繼興:26世)은 숙종조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김계중(金繼重:26世) 또한 현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을 지내 4인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 유학발달에 기여하였고 가문도 빛내었으며 이때 김계무(金繼武:26世), 김계홍(金繼洪:26世)도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 벼슬을 지냈다.

특히 우리 광산김문의 선조중에는 사계(沙溪), 신독재(愼獨齋) 두 분의 대현(大賢)이 부자간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광을 얻었다.  
또한 네분(益熙, 萬基, 萬重, 鎭圭)의 대제학(大提學)과 우의정(右議政: 克成) 한 분을 배출했다.
특히 임진, 정유의 양대 왜란에는 만수(萬壽), 4형제와 만수의 아들, 그리고 의병장 덕령장군(德齡將軍)이 분전(奮戰)하여 왜적을 섬멸(殲滅)하는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에는 수남(秀男), 득남(得男), 익겸(益兼)이 장렬하게 순절(殉節)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중기야말로 학행(學行)과 절의(節義)와 충효(忠孝) 등에 뛰어난 현조(顯祖)가 많이 나와서 광김(光金)의 문중을 빛내줌으로서 도덕(道德)과 예학(禮學)의 종가(宗家)로서의 진면목(眞面目)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