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광산김씨의 시조(始祖)

    우리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는 신라(新羅) 왕자공(王子公) 휘(諱) 흥광(興光)이시다. 시조공께서 통일신라말기에 나라안이 어지러워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지(預知) 하시고, 경주를 떠나 광산현(光山縣) 서일동(西一洞) (현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하시어 광산김씨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평장동 입구 안내석 평장동 광일문 평장동世守事蹟碑. 시조공 유허비각

    시조공(諱 興光)께서 살던 서일동은 고려의 후손들에 의해 8명의 평장사(正2品職)가 배출되자 사람들이 마을의 이름을 평장동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시조공 단소(클릭하면 확대) 시조왕자공의 단소 시조왕자공의 신도비

 

    *祠宇:[소재지: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단향일 : 음력 10월 1일)]※ 2002년 단소의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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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광산김씨의 유래(由來)

    광산(光山)은 전남 북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서기 757년(경덕왕 16)에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 때는 견훤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나  918년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칭하였다.
    성종 때 와서 해양현(海陽縣)으로 불리우다가 공민왕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조선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府)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이 되었으며. 1935년 광주가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광일문(클릭하면 확대)

    김흥광(金興光)이 통일 신라말기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 국가 사직이 위태로움을 느끼고 경주(慶州)를 떠나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현재 담양군(潭陽郡) 평장동(平章洞))에  은거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光山金氏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문(家門)의 하나다. 광산김씨는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이라기보다 대대로 석학.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한 명문(名門)이다.

    5개파(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직장공파)중 양간공파의 후손이 현재 전국의 약 70%로 제일 많으며, 그 후손에서 많은 명현들이 배출되었다.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태두요 성리학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은 광산김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은 유학(儒學)의 입문이요 맺음이라 할 예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죽은후에 동국18현(東國18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동국18현 : 우리나라 역사상 최치원. 안유. 정몽주 등과 같이 학문과 도덕이 깊어 온 백성이 겨레의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18명의 명헌을 말하며 문묘 배향은 일문 일대만이 아니라 대대손손의 영광이요!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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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광산김씨의 대사

    광산김씨 정유대동보(光山金氏丁酉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평장동의 역사)

    1세 시조 흥광(興光)의 아들 2세 식(軾)이 신라에서 각간(角干:최고관급)을 지냈고, 3세 손자 길(佶)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워 삼중대광 사공(三重大匡 司空)에 이르렀다.

    4세 준(峻)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左僕야:정2품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준의 아들 5세 책(策)은 964년(광종 15)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한 과거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니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어 급제를 축하하고 특별히 의봉문을 열어 말(馬)을 하사하면서 마부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출입케 하여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으며, 벼슬은 좌복야(左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책의 아들 6세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정6품이나 종5품 또는 감찰사의 정6품 벼슬)를 거쳐 1055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의 관직), 1057년 11월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의 정2품 관직)에 올랐다.

    7세 양감(良鑑)은 정준의 아들로 문종5년에 급제하여 상서어사를 거쳐(서기 1070년) 문종 24년 상서우승, 좌간의대부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를 지내고, 이듬해에 상서좌승겸 어사대사가 되어 1072년(문종 26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사은사(謝恩使:나라에 베푼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외국에 보내던 사신)가되어 송(宋) 나라에 가서 종래 등주로 거치던 송나라의 왕래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항로 변경하여 명주를 정박지로 하는데 합의를 보았으며 태묘(太廟)와 태학을 도안하고 유학에 대한 종지를 깊이 연구한 후 1074년(문종 28년)에 귀중한 자료를 가지고 귀국 하였다. 이 해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부원사 참지정사, 판 상서병부사를 거쳐 1083년 좌복야에 올랐다. 선종(宣宗)초 문하시랑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1087년(선종 4년) 판상서호부사를 거쳐 수태위에 올랐으며, 사도진흥(斯道振興)에 공헌한바 큼으로 이학지종사(理學之宗師)라 일컬었다. 1957년 전북 고창의 화동서원에 철향(綴享)되었다.

    그의 아들 8세 약온(若溫)은 고려인종때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한후 중서사인 합문사 지추밀원사 참지정사등을 거쳐 서기 1122년 (인종 즉위) 중서시랑 평장사에 검교사도(檢校司徒), 수사공(守司空), 상주국(上柱國)이 더해지고 문하시중이 되었다. 국구(國舅) 이자겸과 내종지간이면서도 아부하지 않고 청빈한 자세로 일생을 보냈다.

    8세 의원(義元)은 양감의 아들이며 약온의 동생으로 17歲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부음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23세에 수어도감 판관이 되고, 감찰사로 연천을 지킬 때 여진족을 쳐서 큰 공을 세웠다.서기 1122년 병부시랑이 되고 이어 호부상서 지추밀원사를 거쳐 늙어 사직하니 특진 금자광록대부(特進 金紫光祿大夫)에 제수 되었다. 형님 약온과 같이 국구 이자겸과 내종지간이면서도 아부한 적이 없이 청빈하게 살았다.
    그의 아들
    9세 광중(光中)은 의종때 간의대부(諫議大夫:고려 문하부의 관직)와 비서감(종3품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중의 아들 10세 체(?)는 순안현령을 지냈다.
    11세 위(位)는 삼사사(三司使)이고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에 추봉 되었으며, 상서령(尙書令)에 皇追封 되었다.
    그의 아들 원의(元義)는 벼슬이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태전(金紫光祿大夫 守太傳)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이고  상장군 판병부사(上將軍 判兵部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간공(景簡公)이다.

    문숙공파 파조인 14세 주정(周鼎)은 충렬왕때 문신으로 몽고군(蒙古軍)의 침입을 받아 여원연합군이 편성될 때 지도첨의 부사로 부원수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출장입상 하였으며, 1278년(충렬왕 4)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충렬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공을 세웠다. 광정대부 도첨의사사 보문각태학사 동수국사 판삼사사(匡靖大夫 都僉議使司 寶文閣太學士 同修國史 判三司事)이다.

    15세 지숙(之淑)은 元義의 증손자로서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상장군(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將軍)이며,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치사(致仕) 받았으며, 시호는 광절공(匡節公)이다
    그의 아우 지(祉)는 금자광록대부 문하평장사(金紫光祿大夫 門下平章事)요 상장군(上將軍)이다.
    16세 인연(仁沇)은 추성보절익찬공신(推誠補節翊贊功臣)이며,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 都僉議贊成事)이고 시호는 경열공(敬烈公)이다.
    그의 아우
    인연(仁衍)은 벼슬이 상서(尙書)이고 封 광산군(光山君)이다. .  
    원명(元命)은 仁沇의 아들로서  삼사좌사 상호군(三司左使 上護軍)이다.
    속명(續命)은 원명의 아우로서  삼사우사 첨의평리(三司右使 僉議評理)이며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13세 대린(大鱗)의 아들 14세 연(璉)은 양간공파 파조(良簡公파 派祖)이며, 충렬왕(忠烈王)때 문신으로 경상도 도지휘사로 동정(東征:일본정벌)하려 할때 출정을 앞둔 어느날 밤 차고 있던 금어(金魚)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하기를 “내 몸에 계급이 떨어졌으니 패전의 징후다”하고 출정장군을 사퇴한 명신으로 그후 첨의시랑찬성사 (僉議侍郞 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14세 규(珪)는 郎將公派 派祖로서 충렬왕 때의 무신, 여원연합군에 들어가 낭장동정이 되어 전공을 많이 세웠다.

    14세 이(珥)는 충렬왕 때 제안 황대전고(提按 黃臺典誥)를 지냈으며, 광산현 제영시서(光山縣 題詠詩序)를 지었다.

    14세 수(須)는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御史)를 거쳐 영암부사를 지내고 1271년(원종 12) 진도(珍島)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고려 최씨 집권 시대에 특수하게 조직된 군대)가 제주(濟州)로 몰려들자 안찰사 권단(權但)의 명으로 200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 태현(台鉉)은 문정공파 파조(文正公派 派祖)이며 12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1302년(충렬왕 28)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 황후 생일날에 축하하러 가던사신)로 원나라에 갔을때 원나라 황제가 모든 진공사는 연경(燕京)에서 기다리라고 하자 원나라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대궐을 멀리 떠나 거동할 때에 임시 머무는 곳)에 가는것은 우리 군주(君主)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중서성(中書省)의 허락으로 행재소에 가게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는 그 충성을 크게 치하하였다.
    또 충렬왕 부자지간에 불화가 있을 때 공평하게 처리하여 화해케 하였으며 충렬, 충성, 충숙의 세왕조에 걸쳐 관직을 역임하면서 백성을 잘 다스렸고 역대의 전례와 고사에 정통 하였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동국문감을 만들었다. 삼중대광 문하시중 수문관대제학 판전리사사(三重大匡 門下侍中 修文館大提學 判典理司事)이며,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15세 심(深)은 충렬왕때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지낸뒤 딸이 원나라 무종제(武宗帝)의 왕후가 되었으며 벼슬이 수성수의협보충량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판총부사 상호군(輸城守義協輔忠亮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都僉議右政丞 判摠府事 上護軍)이며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에 封해 졌다.
    유(流)는 심(深)의 아우로서 충목왕 때 문신, 兄 충숙공 심(深)과 함께 같이 벼슬은 문하시중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지냈다.

    15세 사원(士元)은 충렬왕 때 문신이며, 벼슬은 삼중대광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三重大匡 匡靖大夫 僉議侍郞贊成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경공(貞景公)이다.
    그의 아우 사형(士亨)은 충렬왕 때 문신으로 兄 貞景公 士元을 도와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6세 광재(光載)는 충선왕(忠宣王)때인 13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에 갈때 호종한 공(功)으로 사복시승(司僕侍承)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올랐다가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등을 역임하고 충정왕(忠定王)때 참의평리 삼사우사 전리판서(參義平理 三司右使 典理判書) 및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등을 지냈다.
    공민왕(恭愍王)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거상하자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로 정표를 세우게 하였다.(아버지 文正公 태현, 兄 文敏公 광철과 같이 文字 諡號를 받아 二代 文字 諡號 및 兄弟 文字 諡號를 받고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17세 광리(光利)는 章榮公의 아들로 공민왕 때 봉익대부 전리판서 영 삼사사(奉翊大夫 典理判書 領三司事)를 지냈다.
    그의 아우 영리(英利)는 공민왕 때 통의대부 판군기감사(通議大夫 判軍器監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
    18세 정(鼎)은 공민왕 때 전라도찰방(全羅道察訪)을 하고 계속하여 추성좌리공신 중대광 광성군(推誠佐理功臣 重大匡 光城君)에 책록되었다.
    산소는 남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묘소로서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617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享祀는 매년 음력 10월 1일이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白家)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회조(懷祖)의 아들로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지냈으며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교정하고 의례(義禮)에도 정통했다.
    조선 개국후 여러 청환직을 거쳐 예조전서로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을 겸임. 1404년(태종 4년)우군총제가 되었다. 뒤에 참지 의정부사등을 역임했다.

    18세 인우(仁雨)는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고, 1361년 홍건(紅巾)의 난(亂)에 호종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다.
    그의 아들 승길(承吉
    )은 함종현령(咸從縣令)이요, 麗運이 다하자 야은 제현(冶隱 諸賢)으로 義理를 같이 했다.

    19세 약채(若采)는 光城君 鼎의 아들로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의(左司議)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충청동 도관찰출척사(忠淸道 都觀察黜陟使)를 지냈다.
    그의 아우 약항(若恒)은 호는 척약재( 若齋)이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초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표전문(表箋文) 사건으로 명나라에 불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죽었다.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追贈)하고 광산군(光山君)에 추봉(追封)하면서 청백리(淸白吏)에 녹찬되었다.
    그의 아우 약시(若時)는 우왕 때 太宗과 더불어 동방 급제하여 봉상대부 전의부령 진현관직제학(奉常大夫 典儀副令 進賢館直提學)이시며, 麗運이 다 함에 廣州에 은거하면서 李太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청맹(靑盲)을 핑계하고 이씨조선에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칠십이현)

    21세 한로(漢老)는 아버지는 자빈이고 1383년(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예의좌랑이 되었다. 1404년(태종 4년) 이조전서, 이듬해에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딸이 양녕대군과 혼인하자 좌군 동지총제에 오르고 다음해 판한성부윤이 되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판서, 대사헌, 참지의정부사, 예문관대제학 겸 판의용순금사사를 거쳐 1417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 해 세자 양녕대군에게 천한 여자를 바친죄로 죽산에 부처 되었으며, 세자와 옹서간의 인연이 끊기고 청주, 연기등에 유배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에 추증되고 광산군에 추봉 되었다.

    21세 예몽(禮蒙)은 1432년(세종 1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440년 부사직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다녀오고, 집현전 부교리를 지냈다. 1447년 문과증시에 급제한 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1460년(세조 6년) 흥주목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66년 발영시에 급제하여 이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행 동지중추부사(行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22세 국광(國光)은 감찰(監察)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어 감찰, 지평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세조(世祖)가 죽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고 우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1등이 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일찌기 세조의 명으로 서거정, 강희맹,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여 이를 완성하고 1469년에 반포하였다. 시호는 의정공(議政公)이다.
    그의 동생 겸광(謙光)은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평안 감사를 거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3등에 책봉되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으며, 청백리에 녹선되다.

    23세 여석(礪石)1465년(세조 10년) 별시문과에 급제, 경연관을 거쳐 군자시 주부에 올랐다. 그 후 도승지, 충청도의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등을 역임하고 1493년(성종 24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앞서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 중 성리학에 관한 책을 간행하여 학문진흥에 공이 컸다 하여 왕의 포상을 받았다. 무주의 도산사(道山祠)에 배향 되었으며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24세 구(絿)는 사온직장공(司 直長公 英)의 7세손으로 시호는 문의공(文懿公), 호는 자암(自庵), 조선 초기 한호(韓濩), 양사언(楊士彦),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4대 서가(書架)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을 역임한 계문(季文)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를 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 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불렀다. 어느날 옥당에서 숙직을 하며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뜻밖에 중종(中宗) 임금이 별감에게 술병을 들려 문앞에 서있자 놀라 엎드리니 중종이 말하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찾아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禮)가 필요 있으리오, 친구로서 서로 대함이 마땅하도다”하고 술을 함께 즐겼다고 한다.
    그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만수(萬壽)는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25세 언기(彦璣)는 호가 유일재(惟一齋)이며, 퇴계 이황과 같이 학문하며 서당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 하였으며, 안동(安東) 문학융성의 창도자로 칭송되며 그의 제자 문인들이 보덕단(報德壇)을 세워 사림불천지위(士林不遷之位)를 매년 3월에 향사하고 있다.

    27세 장생(長生)은 대대로 석학(碩學)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가(大家)며, 광산 김씨의 우뚝선 인물이다.
    1548년(명종 3)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禮學)을 전수받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예론(禮論)을 깊이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 예학(朝鮮禮學)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명의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벼슬은 형조참판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쳤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1717년(숙종 43년) 문묘(文廟)에 배향 되었고, 안성의 도기서원과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등을 비롯한 10여개 서원에 배향 되었다.
    그리고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集)은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에 이르러 광해군(光海君)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되어 지평(持平), 집의(執義)를 거쳐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올랐으나 공서(功西: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장생의 아들 반(槃)은 집(集)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左郞)등 여러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여섯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때 대사성(大司成:정3품)을 지내고 효종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南韓山城)이 포위되어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1674년(현종 15) 예조참판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設: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兩性)에 유배되었다.

    익겸의 아들 만기(萬基)는 1653년(효종 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수찬, 교리, 정언등을 역임했다. 1671년(현종 12년) 딸이 세자빈이 되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9國舅0로서 영동녕부사가 되어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 졌다. 총융사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며, 1680년 경신대출척때 훈련대장으로 공을 세워 보사공신이 되었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우리 광김의 최초 족보인 서석보(瑞石譜)를 1677년(숙종 3년)에 만들었다.

    그의 아우 만중(萬重)은 조선의 이름난 소설가로서 익겸(益兼)의 유복자로 태어나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충청 남북도, 전라 남북도, 경상 남북도)의 정사(政事)를 조사하였고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주위의 탄핵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어머니를 위로 하기위해 전문을 한글로 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하여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706년(숙종 32) 그의 효행에 대하여 나라에서 정표(旌表:선행을 칭찬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사씨남정기, 서포집, 서포만필, 고시선등이있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31세 덕령(德齡)은 봉섭의 아들이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성혼(成渾)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號)를 받아 1594년(선조 27)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았으며 고성(固城)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후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 하였으나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하여 1661년(현종 2) 관직이 복구되고 뒤에 병조참의에 추증 되었으며 벽진서원에 제향 되었고 뒤에 병조판서에 가증되고, 의열사에 제향되었다. 정조 때에 좌찬성에 가증되었고 지금은 광주 무등산 충장사에 제향되어 있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다.

    한편 만수(萬壽),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  4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광운(光運)과 두남(斗南)은 진주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을 빛냈다.

    고종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를 역임한 영덕(永悳)은 1877년(고종 1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1885년 여주목사를 거쳐 동래부사, 감리 부산항 통상사무(釜山港 通商事務)등을 역임하고 판서에 이르렀다. 한일합방이 되자 통탄하고 자결 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 등은 가문의 기백을 굳건히 지킨 인물들이다.
    특히 일본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왜적의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지조를 지키다가 자결한 지수(志洙)등 수많은 인물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광산 김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결과에 의하면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남한에 총 174,912가구, 750,7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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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광산김씨의 집성촌  

    취사당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일원

    전남 나주군 왕곡면 옥곡리

    충남 논산군 일원

    경북 안동군 풍천면 신성동

    전북 고창군 일원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난산리

    전남 보성군 겸백면 용산리

    황해도 봉산군 서종면 대한리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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