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의 약사(略史)


조선말기의 광산김씨 (고종∼8·15광복까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지 10년만에 물러나고 왕비를 중심으로 민비세력이 집권하면서 대외 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적극적으로 조선에 접근해 와서 마침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구실로 삼아 강화도 조약을 고종 13년(1876)에 체결하니 이것이 외국과 처음 체결한 조약이 된다. 이를 계기로 개화정책을 쓰게 되었는데 이어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나라들과 차례로 조약을 맺게 되었으나 모두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시대에 활약한 우리 광산김씨로는 7대제학 중 마지막 대제학을 지낸 하정 김영수(金永壽:37世)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영수는 고종 7년(1870)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초기의 벼슬이 합천군수를 거쳤는데 그 때 선정을 한 고로 지금도 합천읍 영창리에 선정비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에 규장각의 요직을 거쳐 병조판서에 재직중 임오군란을 맞아 진압한 공로로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거쳐 정1품인 보국에 까지 승자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건국 후에는 장례원경, 의정부참정을 지냈다.

한편 김보현(金輔鉉:36世)은 헌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지만 대원군에게 추방되었다. 그러나 민씨일파의 척족으로 곧 이조와 형조판서, 통상당상과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지만 임오군란 때 궐내에 뛰어든 난군들에 의해 선혜청 당상을 지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정 김기석(金箕錫:34世)은 현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다가 정경, 승정원 좌우승지, 병조참의, 형조판서, 의정부 어영대장 총융사, 도통사, 해방사, 좌우포장, 내무독판기기 총관을 거쳤고 외직으로는 수안군수, 안동영장, 신도첨사, 경상좌수사, 수원중군, 강화유수를 거쳐 숭록대부에 승진되었으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출장입상의 표본으로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김진수(金鎭秀:37世)는 담략이 뛰어나 궁마와 무술을 익혀 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갑신정변 이후에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분사하니 조정에서는 충절을 가상히 여겨 충무위사과 겸 부장에 추증하였다.
김재은(金在殷:36世)은 고종조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김주현(金疇鉉:36世)은 한말에 갑오경장후의 내무대신을 지낸 바 있다.

▣ 동학 농민운동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민의 생활이 더 어려워져 갔으나 정부는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이에 농민들이 그들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혁을 주장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키려는 대규모의 농민운동이 고종 31년(1894)에 일어났으니 이를 가르켜 동학 농민운동이라 한다.
동학의 교리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고 나섰으니 동학은 밀물처럼 농촌사회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교주 최제우를 잡아 처형하니 기세가 꺾이는 듯 하였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계승하여 그의 노력으로 동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그 세력중 한 줄기인 동학교도가 전봉준을 앞세워 궐기하니 이것이 동학 농민운동이다.

우리 광산김씨의 일부 김재일(金在一:35世)이 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와 같이 연담 이운규에게서 수학하여 종래의 성리학 차원을 넘어서 유학의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여 서경과 역경을 중심으로 정진하였다. 저술로는 역학과 도학 전통을 계승하여 정역쾌를, 그리고 이어서 '정역'이라는 대역서를 완성하여 이 나라 정역의 대가가 되었고 동문중 한 분은 동학의 창시자가 된 셈이다. 또한 전봉준의 동학군이 전주로 쳐들어갔을 때 전라감사로 있던 김문현(金文鉉:36世)도 우리 광김이었다. 문현은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병방비장을 시켜 병정 50여명을 출동시켰지만 모두 동학군에게 생포되었으므로 인책 파면 당하고 거제로 유배되었다.

김병돈(金秉暾:33世)은 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11년째에 동학의 교도가 난을 일으키니 군관이 되어 초토사인 홍주목사 이승우를 따라 관군을 통솔하여 나가서는 싸워 이기고 돌아와서는 다시 계책을 세워 적군을 무찔러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왕이 그의 전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등용코자 하였으나 예산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통정대부 군무참의에 추증되었다.

▣ 근대국가 운동과 대한제국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내정 개혁을 실시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조정의 내정개혁에 간섭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되자 그 해에 조선은 도원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 한다.
갑오개혁에서는 홍범 14조에서 그 정신이 나타나 있듯이 정부의 조직을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새로운 관리 임용법과 사법제도도 고치고 신분제도와 도량형도 통일하는 등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으나 일본의 간섭 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우리 광산김씨로 을미의병에 참가한 이는 충남 논산 출신의 김기수(金冀洙:38世)가 연산지구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수차 교전하여 적을 괴롭혔으나 그 해 12월에 가야곡면 풍덕마을 전투에서 진두 지휘하다가 장열한 전사를 당하니 15세의 젊은 나이였고 경북 봉화의 김도수(金道洙:38世)는 그곳 삼계서원에서 대향회를 개최하여 원근 각향에서 일제 토죄의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그 휘하에서 의병장교로 출정하여 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국모인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성재 김재풍(金在豊:35世)은 시해 주동세력에 의해 구성된 내각을 살해함으로서 국모 복수를 하고자 모의하였다. 그는 그의 숙부였던 필동장신이라 불린 어영대장인 우정 김기석 휘하의 군관들을 설득하여 혈맹을 지키기로 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미리 내통해 두었던 시위대장 이진호의 변심으로 대궐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공격을 가해 왔기에 쿠데타는 실패하고 김재풍은 잡히어 무기도형의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유배지에서 풀려 나온 김재풍은 친로파 세력에 의해 허덕이는 국권을 보다 못해 이를 회복코자 다시 정변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사는 못하였다.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 경쟁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갑신정변의 실패 후 겨레의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민족운동이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하여 한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자주 독립운동, 국민의 민족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민권운동,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는 자강개혁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던 고종이 1년만에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고 연호를 광무라 부르며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니 비로소 자주국가의 면모는 갖추게 되었다. 이 때가 고종 34년(1897)인데 광무 1년이라 불렀다.

이 무렵에 활동한 김학수(金學洙:38世)는 고종 12년(187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고종 27년(1890) 함창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동부사로 있었는데 안핵사가 되어 난을 진압하였고 그 후 감찰을 거쳐 갑오개혁 때 김홍집 내각에 의해 외무참의가 되었다.
김영덕(金永悳:37世)은 고종 14년(187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목사를 거쳐 동래부사 및 감리서 부산항 통상사무를 거쳐 판서에 이르렀는데 경술국치 후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고, 김영직(金永直:37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가선대부 직각을 지냈고, 서운 김영운(金永運:37世)은 '효제충신'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실천하였고, 1910년 충정공 묘소를 찾는데 큰 공헌이 있었고 유고가 있다.

계월재 김건수(金建洙:38世)는 국치 때 자중하다가 1929년 평장동 단소 원장 수축시 자력으로 공사를 마쳤고 전곡유사로서 위선하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문학과 행의로 향중에 추증을 받았다.
도계 김철수(金哲洙:38世)는 고종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비서랑을 지냈으며 유고가 있고 그 외에 유물도 다수 있는데 지방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김용원(金容元:39世)은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좌부승지 경주부윤을 지냈다.
김용덕(金容悳:39世)은 고종조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비서랑, 규장각 시제 시독을 거쳐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 망국의 한


광무 8년(1904)에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니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독점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일제는 거리낌없이 한국의 내정간섭을 시작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광무 9년(1905)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이완용 매국정부를 조직하고 1천만원 차관을 강요함으로써 본격적인 식민지 통치작업에 착수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애국지사들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거나 자결하기도 하였다.
을사 5조약이 체결된 후에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은 청사에 길이 남으려니와 장지연의 한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명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최익현이 일으킨 유생들의 의병진에 김기균(金箕均:34世)과 김재관(金在寬:35世), 김용구(金容求:39世)가 참가하였다.
김기균은 한말 대한제국의 육군부위로 있었는데 면암 최익현이 호남지방에 내려와 창의하니 그 막하에서 의병을 모병하여 순창에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때 세 부족으로 최익현은 잡혀 일본의 대마도로 갔고 공은 총상으로 잡혀 옥고를 치루었고 김재관은 최익현의 의병에 처음부터 그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에는 기삼연의 호남의병 창의대와 합동하여 고창전투에 참가하여 5, 6차 전투를 치루었고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장의 직책을 맡아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용구는 영광 사람인데 융희 1년(1907) 기삼연과 함께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통령이 되었다. 그 후 장성, 영광, 고창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흥덕의 안치재 싸움에서 크게 이겼으나 아들 김기봉(金起鳳:40世)을 잃었다. 그 후에 무주싸움에서 총탄에 맞아 전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각지를 순회하면서 의병의 항전의식을 고취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다.

이 밖에도 호남에서는 김직순(金稷舜:36世)이 고흥의 의병장이 되어 보성, 광양의 의병장 안규홍과 손잡아 수많은 왜병을 섬멸하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김영엽(金泳燁:37世)은 호남창의회맹소를 세우고 의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장성, 순창에서 일어나 공격해 오는 왜병 70여명을 사살하고 백양사에 유진하던 중 내부에 숨어든 반적에 의하여 살해되었고 충청도에서 일어난 의병중에는 민종석 부대가 규모가 컸는데, 김익수(金益洙:38世)는 민종석등 88인과 결의동맹을 맺고 400여명의 의병으로 시작하여 부여, 서천에 이르는 동안 1천명의 의병으로 늘어났고 익산, 군산의 왜병을 무찌르고 돌아오다가 논산에서 체포되었으나 거기서는 탈출하였는데 그 뒤 폭도 대토벌작전에 기어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사망하였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울진의 김용욱(金容旭:39世)이 의병을 창의하여 불영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평해, 영양, 봉화의 의병세력까지 합치니 그 수가 5백이 넘었으며, 축지법을 쓰는 '노랑장군'으로 통하였다. 이듬해에는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 부대와 합세하니 그 수가 더욱 커졌고 무기도 다량 갖추게 되어 청송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안동, 영주, 영양, 울진, 삼척, 강릉까지의 적을 완전 소탕하고 경북 북부와 영동까지의 왜적은 발도 못 붙이게 하여 놓고 태백산맥으로 본진을 옮겨 1921년까지 활동했으니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한 의사였다.

한편 경술국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자헌대부 벼슬에 있던 김영덕(金永悳:37世)과 통사랑 벼슬에 있던 심암 김지수(金志洙:38世)는 학행으로 도천에 올라 처음 벼슬이 통사랑, 선공감, 가감역 이었으며 중추원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경술국치 후 자택에서 자결을 하여 선비의 지조를 보였다. 광복 후 순국선열의 포장을 받았고 유고가 있다.
김영숙(金永肅:37世)은 경술국치 후 즉각 만주땅으로 망명하여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북로 군정서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 교주 윤세복과 함께 단군의 얼을 심고 이극로와 함께 민족교육을 통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광복 직전 소련군의 진주로 목단강성 감옥에서 풀려 나와 해방 후에 단군전 봉건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낭산 김익수(金益洙:38世)는 경술국치 직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합방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태백산, 소백산 지대에 잠입하면서 독립자금 거출 활동을 하였다. 이때 국내에서는 의병으로 활동한 광김은 고흥의 김성택(金晟澤:32世)과 김직순(金稷舜:36世)이 왜적과 싸우다가 투옥되고 전사하였고 제주에서는 조설대에서 12동지가 집의계란 조직을 만들어 일제와 싸웠는데 김좌겸(金佐謙:33世)을 비롯하여 김석윤(金錫允:34世), 김석익(金錫翼:34世) 형제와 김병로(金炳潞:35世), 김병구(金炳龜:35世) 종형제 등이 적극성을 띤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읍의 김재규(金在圭:35世)는 경술국치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을 따라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며 광주의 김영오(金玲午:35世)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김창보의 군막에 들어가 왜적 격멸에 앞장 섰으나 아산전투에서 패전하여 분산되었으나 분통하여 자결하였다.

▣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나라가 일본에 합병된 후 일제의 삼엄한 무단 통치하에서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부터는 광복단, 조선국권 회복단 등의 단체가 결성되어 지하 운동을 벌렸고, 국외에서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대동단결선언서(1917)와 무오 독립선언서(1918)를 발표하였고 일본의 도쿄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1919)를 발표하여 침략자에 대한 민족의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해외 독립 운동자들과 학생들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의암 손병희 등 국내 인사들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니 이것이 1919년의 3·1운동이다.

1919년에 일어난 2·8선언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먼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김마리아(金瑪利亞:36世)는 1906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여자이면서도 근대 교육의 선구자로 일본에 건너가 히로시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메지로(東京目白)고등여자학원에 유학도중 2·8선언을 주동하였으며, 그 선언문을 국내에 운반하는 책임을 무사히 수행하여 3·1운동의 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3·1운동 후에는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직을 맡아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오현주의 배신으로 비밀조직이 탄로 나서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복역중 병 보석으로 풀려나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대의원직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파아크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뉴욕에서는 신학을 수학하고 1932년에 귀국하여서는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는 등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바쳤다. 이 거룩한 정신은 광산김씨의 피를 이어받은 힘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더 있었다. 김순애(金淳愛:36世) 역시 황해도 장연 사람으로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졸업 후 부산에 있는 초량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몰래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우리 역사를 가르치다가 탄로가 나자 1911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난찡(南京)에 있는 중화명덕 여자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월 김규식과 결혼하여 상하이(上海)로 옮긴 뒤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고 헤이룽장(黑龍江) 국립여자사범학교 학감,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20년에는 백범 김구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배부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자금 모금도 하여 일본정부 대신 및 친일파를 암살할 목적으로 대의용단(大義勇團)을 조직하였다. 1923년에는 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34년에는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간부로 활약하다가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그리고 2·8독립선언에 또 한사람의 인물이 더 있었으니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김양수(金良洙:38世)이다. 양수는 해방 후에 이룩된 광산김씨 대종회의 회장직을 여러번 지냈고,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역임한 분이다.

다음으로 국내에서 3·1운동에 참가한 우리 광김의 투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남 함평의 김기택(金箕澤:34世)과 김재문(金在文:35世)은 문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지방민을 동우너하여 독립만세 집회를 갖고 미리 준비한 대창으로 무장하여 일본 헌병 파견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왜병에 대항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경기 안성에서는 김봉현(金鳳鉉:36世)이 군내 전역에서, 김영주(金永柱:37世)와 김영희(金永凞:37世)는 주로 양성면과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전북 고창에서는 김영완(金永琓:37世)과 김상수(金相洙:38世), 김용표(金容杓:39世)가 합세하여 고창 장날 만세운동을 지휘하였고 양은 김용준(金容俊:39世)은 보성에서 참가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광복후에는 대종중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김영필(金永弼:37世)은 진안에서 김호현(金浩鉉:36世)은 진동에서 그리고 김영기(金永騏:37世)는 합천(陜川), 김구현(金九鉉:36世)은 의령, 김영창(金永昌:37世)은 안동에서 각기 고장은 다르나 그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이다.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되어 활약한 우리 광김으로는 김익현(金益鉉:36世)과 김영두(金永斗:37世)를 들 수 있는데 두 사람이 공히 경술국치를 당하자 한을 품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김희인(金凞仁:36世)은 3·1만세 운동 때 임시정부에 가담하려고 상하이로 밀항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뜻을 못 이룬 이도 있는가 하면, 김 수(金 銖:36世)는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정신을 전달하기 위하여 137명의 유림들만이 서명한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하였고, 김석룡(金碩龍:38世)은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대학을 졸업하고 임시정부의 병인의용단 단장의 요직을 맡고 일제의 요인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으며 순종의 인산때 국내에 잠입하려다가 황포강 입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석방 후 다시 망명하였다가 광복 후 해공 신익희, 성재 이시영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환국하여 건국준비 요원으로 활약한 요인이었다.

또한 김현수(金玄洙:38世)는 중국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휘를 받아 왜군 헌병과 밀정들을 저격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환국하여 광복군 국내지대를 조직하여 부사령관을 역임한 독립투사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 항일 투쟁을 한 광김의 투사들을 열거한다면 먼저 전북 부안 출신의 김철수(金철洙:38世)와 창수(昌洙) 형제를 들 수 있는데 형인 김철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에도 한국 유학생들은 물론 중국, 인도, 대만에서 온 유학생들과 뜻을 모아 반일독립운동을 쟁취하기 위하여 신아동맹당을 결성하고 투쟁하다가 귀국 후에는 국내에서 3·1운동을 맞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후 강력한 독립운동은 사회주의적인 방법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화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성재 이동휘 중심의 연해주 한인 사회당과 협력하여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으니 1921년의 일이었다. 또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집행기구로 개조하여 도산 안창호, 김동삼, 해공 신익희 등 좌우익 애국지사들을 총망라하는 국민대표 회의를 소집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성공을 못 거두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게속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그러나 그는 통일 정부수립이 안되고 남북 또는 좌우의 분열이 심해지자 실망한 나머지 정치활동을 멀리 하였다. 아우인 김창수는 항일운동을 하던 중 M·L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렀으나 해방 후 3대 국회의원에까지 당선된 정치가이다.

한편 우전 김남수(金南洙:38世)는 경술국치 후 한학을 수학하다가 동산 유인식 선생이 주재한 협동학교에서 신문학을 익혔다. 3·1운동 후 신민회에 참여하고 소작조합과 노동조합의 조직에도 참여하면서 경성고무공장의 파업투쟁을 주도하다가 투옥되는 등 일제 타도를 위해서 김준연과도 손잡고 투쟁하였다. 이어서 형평사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양반출신이면서도 천민들의 권익 옹호에 힘을썼다.

같은 지역의 김상한(金相漢: 일명 麟根:34世)은 10대 후반부터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예안의 청년동맹과 신간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으나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1931년 7월에 이 조직으로는 진전이 없다고 판단하자 안상윤과 더불어 〈안동콤클럽〉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그 산하조직으로 예안노동직접행동대를 낙동강변에 있는 석빙고와 영낙정을 거점으로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전남 담양 출신의 김제중(金濟中:40世)은 3·1운동을 계기로 상경하여 남부5도(경기, 충청, 강원, 전라, 경상) 대표단 5인중 한사람이 되어 남부 각지를 순회하면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였고 그 후 대동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전남지구를 담당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겪은 독립투사였다.

우당 김용필(金容弼:39世)은 고종 말기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한말이었으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일제하에는 유지를 이어받아 호적에도 들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3·1운동 후 1924년에 왜인이 동국 18현을 모셔진 사당에 치제하료 하자 엄중히 꾸짖어 치제치 못하게 하니 왜인이 불경죄로 서울에 압송하여 옥고를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3천리 강산에 둘도 없는 선비이며, 18가문 중 제1인자로 백세의 표준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일에(1926)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규모가 3·1만세 운동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침체되었던 국내의 민족운동에 커다란 활력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때 광김으로서 활동한 투사는 경남 의령출신의 김응현(金應鉉:36世)을 들 수 있다. 3·1운동사의 자료에 의하면 김응현은 3·1만세운동 때는 종형인 김구현(金九鉉)과 의령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복역하였고 다시 6·10만세 운동 때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할 것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1920년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쟁운동에 참가한 이는 아래와 같다.
당시 광주고보 4학년이던 김채중(金采中:40世)은 주동자로 지목되어 퇴학 투옥되었고, 김기수(金麒洙:38世)는 2학년이었는데 참가했으나 퇴학되었고, 김봉수(金鳳洙:38世)는 광주농고 4학년이었는데 농고의 주동자로 참여했다가 퇴학 당하였고, 조카인 김용숙(金容淑:39世)은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나 광주로 내려와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만보산 사건에 교내에서 동맹휴학을 선동하다가 3학년 때 퇴학을 당하였다.

김보석(金寶錫:36世)은 광주 제일고등학교 2학년때 참가했다가 역시 퇴학되고, 김돈수(金燉洙:38世)는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참가하여 투쟁하였다. 이것이 발상지인 광주에서 있었던 사실이고 그 여파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때 평북 선천(宣川)에서 김석숭(金碩崇:38世)은 왜경을 구타하여 구속되었고, 동생인 김석호(金碩虎:38世)는 신의주에서 고보사건, 철도 호텔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항일의 용감한 형제가 되었다. 석숭, 석호, 형제가 임시정부의 요인을 지낸 김석룡의 동생이었으니 혁명가의 집이라 우러러 봐야 할 것이다.

▣ 8·15 광복


1930년 이후 한국에 있어서 식민지화가 안정되어 가는 것을 기화로 일제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대륙 침략의 야망을 품고 전쟁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1931년에 만주침략을 감행하고 우리의 독립군 소탕작전을 벌렸으며,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까지 침략하였다. 일제는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쟁을 더욱 확대시켜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1941년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민족과 그 문화를 멸살하려하였으며 나아가 한민족을 그들의 전쟁에 앞장서도록 강요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이러한 식민지 정책으로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커다란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한민족은 민족 존폐의 위기에서 민족을 보존하고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학계와 교육계, 종교계와 예술계 등 각 분야에 걸쳐 민족의 주체의식과 민족문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민족은 일제의 통치 기간중 국내외에서 꾸준히 항일 및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으나 우리의 힘만으로 일본을 물리친 것은 아니며 일본이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드디어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1945년 8월15일에 드디어 광복을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은 곧 독립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 소 두 나라의 군대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진주하면서 광복의 기쁨은 잠까니었고 다시 남북 분단이 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제 말기에 우리 광산김씨가 항일 투쟁을 하면서 겪은 고초의 사례를 몇 몇 가지 들어본다면 그 당시 우리나라 안에서 독립투쟁을 한 양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충남 부여출신의 김영기(金永驥:37世)는 도쿄대학 동문화학원 본과를 졸업하고 1932년부터 대구사범학교의 조선어와 한문 교사였는데 정규시간 뿐만 아니라 문예부를 중심으로 '다초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우리 역사를 틈틈이 가르쳐 학생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자각케 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길렀으며 이러한 비밀 독서회 사건이 탄로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그 후 개성에 있는 사립 송도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원로교육자로 대우를 받으면서 대구 시내 여러 중,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포상을 받았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영헌(金永憲:37世)은 팔탄과 시초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몽양 여운형 지도하에 독립동지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학생과 그곳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광복 전년인 1944년에는 종로의 광화문 일대에 민족궐기의 전단을 살포하다가 피검되어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광복을 맞아 출옥한 투사이다. 황해도 장연출신의 김필례(金弼禮)는 도쿄(東京)여자학원 고등부를 졸업하고 서울정신여자중학교 교유로 재직하면서 3·1독립운동을 겪었고, 1922년에 그 학교의 교감이 되면서 김활란, 유옥경과 함께 대한여자기독교 청년연합회(Y.W.C.A)를 창립하고 총무가 되어 일제하의 농촌운동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활동에도 힘썼다. 그 후 도미하여 네스칼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대학원을 수료하고 광주 스피아 여중의 교감이 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동교의 교장이 되었고 다시 서울의 정신여중 교장을 거쳐 동교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 교육자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전남 강진출신의 김용근(金容根:39世)은 영광군 소재지에 있는 개량서당의 훈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패전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발각되어 복역한 사례들은 모두 교육계에서 있었던 항일 사건들이다.

한편 전북 익산의 김용해(金容海:39世)는 침례교회 목사로 봉직하면서 민조의식을 고취하다가 전국 32인 구속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종교계의 항일 사례이고, 충남 청양출신의 김창현(金昌鉉:36世)은 일제의 지원병 강요에 반항을 했고, 전남 화순의 김영남(金永南:37世)은 징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화약고 폭파계획을 세우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징병 거부의 항쟁에 앞장섰다.

그밖에도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헌병대 습격을 기도한 전북 고창의 김영수(金永壽:37世), 조선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된 전남 보성의 김용규(金容圭:39世),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경기 화성의 김선기(金善琪:41世), 창씨개명에 불복하여 계자손십자훈(戒子孫十字訓)을 남긴 김용각(金容珏:39世)등 이렇게 다양하게도 내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일제와 싸운 우리 광김들의 뜨거운 피가 용솟움치는 광산인들의 모습을 보니 정녕 조국의 광복은 이러한 분들이 흘린 피땀과 받은 고초로 이룩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항상 후손들은 자랑스런 광산김씨의 후손임을 잊지말고 새로운 21세기에도 항상 조국을 위해, 그리고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지도자의 위치에서 조국의 횃불이 되어주길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