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장동(平章洞) 단소(壇所)와 취사당(聚斯堂) 변천사


   지금 전남의 광주(光州) 지역은 백제 시대에 무진주(武珍州)였고, 신라 때는 무주(武州)였는데 시조(始祖) 왕자공이 옮겨 거처한 서일동은 현재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이다. 시조공 단소(壇所)가 있는 이곳은 지관(地官)들이 만고대지(萬古大地)라 일컬은 바 천하의 명당(明堂)으로 알려진 곳이다.

노령산맥의 태조봉(太祖峯)을 주산(主山)으로 서남으로 수백리를 뻗어 내려온 기맥(氣脈)이 응결(凝結)한 불대산(佛臺山) 소조봉(小祖峯) 아래 너른 터전에 광주의 명산 서석산(瑞石山)을 안산(案山)으로 하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의 명당으로 문무(文武)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끊임없고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하늘이 점지하여 문장(文章)과 거유(巨儒)가 많이 나올 뿐 아니라 대과급제자(大科及第者)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배출되는 길지(吉地)라 한다.

 

그곳이 시조공 복거하신 곳이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충렬왕 33년(1307) 정미(丁未) 6월에 당시 제안(提按) 황대전고(黃臺典誥) 벼슬에 있던 휘 이(珥)의 광산현제영서(光山縣題詠序)라는 글이었다. 그 글에는 그 곳 평장리가 신라 때 무주의 서일동이고 시조공이 장차 난리를 예견하여 은거한 곳인데, 왕자공은 각간(角干) 휘 식(軾)을 낳고, 휘 식(軾)은 휘 길(吉)을 낳았는데,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이었고, 휘 길(吉)은 좌복야(左僕射) 휘 순(順)을 낳았으며, 휘 순(順)은 문정(文貞) 평장사(平章事) 휘 책(策)을 낳았으며, 휘 책(策)은 평장사 휘 정준(貞俊)을, 휘 정준은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을 낳았는데, 특히 문안공은 희녕(熙寧) 갑인년(1074) 송(宋)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문묘(文廟)의 제도를 처음 도입하여 돌아올 때 소동파(蘇東坡)가 시(詩)를 지어 전송하였다 하였고, 휘 양감이 평장사 충정공(忠貞公) 휘 의원(義元)을 낳았는데, 휘 의원은 황대전고의 현조(玄祖, 五代祖?)가 된다 하였다. 또 시조공이 살던 곳으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평장사가 다수 배출되었으므로 후세 사람이 동리 이름을 평장동이라 하였다고 기록한 것에 덧붙여 자신의 현조 충정공의 음덕으로 제안(提按)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보니 평장동 한 고울이 옛날과 다름 없더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광산현제영서에 밝혀진 선계(先系)가 『흥광興光→식軾→길吉→순順→책策→정준貞俊→양감良鑑→의원義元』인 것과는 달리 현재 우리 광김의 대동보 이하 파보들에 나타나는 선계(先系)는 주지하듯이 『흥광興光→식軾→길佶→준峻→책策→정준廷俊→양감良鑑→의원義元』인데, 이는 1910년에 발견된 충정공 휘 의원 공의 묘지명(墓誌銘)에 따라 1939년 기묘 장성보(長城譜) 이후 고친 결과였다.

이후 조선 성종 2년 신묘년(1471)에 시조공의 후손으로 당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벼슬에 있던 휘 현뢰(賢賚)께서 지은 평장동유허서(平章洞遺墟序)라는 글이 남아 전하는데, 그 글에서는 앞서 설명한 황대전고의 글을 인용하면서 선대의 강학(講學) 오유(娛遊)턴 유적으로 동일동(東一洞), 서일동(西一洞)과 안심사(安心寺), 인월암(印月菴), 화암(花巖), 조계정(棗溪亭), 관덕정(觀德亭), 관대정(冠帶亭) 등이 남아 있어 평장동의 촌토척지(寸土尺地)가 선조들의 세전(世傳) 기물(器物)이 아닌 것 없는데, 후손들이 유지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들어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숙종조(1675-1720) 초기에 서석(瑞石) 휘 만기(萬基)께서 힘을 모아 유지(遺址)를 회복한 적 있으나 다시 남의 손에 들었다가 영조 13년 정사(1737) 4월에 사계(沙溪) 선생 현손으로 당시 부제학(副提學) 퇴어자(退漁子, 휘 진상鎭商)께서 전국 일가와 더불어 왕자공 유허비의 건립을 발의하여 영조 15년(1739)년에 준공하였는데, 유허비의 음기(陰記)를 퇴어자 공이, 그리고 명문(銘文)은 통덕랑(通德郞) 휘 회풍(會豊)이 찬(撰)하였다.

이후 정조 10년 병오(1786)에 사당(祠堂)을 세웠고, 정조 20년 병진(1796)부터 문안공(文安公, 휘 良鑑)을 봉향(奉享)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 정사(丁巳)에 시조공의 위(位)를 문안공의 윗자리에 모셔 봉향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헌종 15년 기유(1849)에 당시의 사계 선생 종손 휘 재경在敬) 공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시조공의 유허를 보존하기 위한 당직(堂直)의 집을 마련하였고, 고종(高宗) 22년 을유(1885)년부터는 휘 재경 공의 아들인 휘 윤현(胤鉉) 공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여 종회소(宗會所)로 사용할 본당 10칸과 고사(庫舍) 8칸, 문랑(門廊) 5칸을 지었는데, 대제학(大提學) 판서(判書) 휘 영수(永壽) 공이 당호(堂號)를 취사당(聚斯堂)이라 하였으며, 윤현(胤鉉) 공은 그 후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있던 고종 28년 신묘(1891, 숭정(崇禎) 기원, 명(明) 의종(毅宗) 원년<조선 인조 6년, 1628> 이후 5 신묘년)년에 취사당의 서문(序文)을 썼다. 그 후 1920년에는 왕자공 단비(壇碑)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1일에 단향(壇享)을 봉행하기 시작하였고, 1925년에는 평장지(平章誌)를 발간하였다.

1957년에는 경모재(敬慕齋) 3칸을 건립하여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이 유서깊은 평장동 취사당과 재각이 많이 퇴락하고, 경내에 진입로가 협소함을 통감한 당시 대종회 회장이며 취사당 대종중 도유사 용순씨가 1983년에 제안하여 취사당 대종중임원과 대종회 임원 및 각시도 종친회장을 총 망라하여 평장동 취사당 중수추진위원회를 구성 중수위원장에 용순씨 부위원장에 취사당 대종중 이사회 의장, 부유사및 대종회 임원과 중수집행위원장에는 희수(대종회현회장)씨, 신임 도유사 관순씨로 구성하였다.

이와같이 거대한 위선사가 결행된다는 소식이 대종회에서 발간하는 종보에 홍보된 것을 알고, 대우그룹회장 우중씨가 거금 3,500만원의 헌성금을 낸것을 시발로 전국일가분들의 정성어린 성금이 답지되어 일차 사업으로 취사당 경내에 있는 민가 3가구를 매입하고, 경내 확장과 평장동 진입로  포장공사를 끝냈으며, 경모재, 비각, 장수각 등의 번화수리에 이어, 1985년 10월 취사당과 문곽의 확장공사를 3년이란 오랜 기간에 거대한 사업을 완성했다.

그리고 1985년 음력 10월 1일 단향일에 중수사업에 참여한 전 임원과 전국에서 1만여 이상의 종손들이 참석하여 취사당 대종중의 중수낙성식을 마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삼한갑족의 후예답게 시조 왕자공 단향제를 거행 하였다.

"최근에는 다시 13세까지의 선대 단소를 설치할 것을 발의하여 추진되었으니 우리 광산김씨는 21세기를 맞아 한 대의 묘사도 궐사하지 않는 예문종가의 후손으로 명실공히 이 나라의 으뜸가는 명문으로 굳혀 갈 것이 분명하니 이래서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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