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山金氏

 

§ 姓氏의 연원(淵源)

光山金氏의 연원은 경주시림의 김알지(金閼智:大輔公)의 탄강설화에서 비롯되니, 신라 제4대 탈해왕 9년(서기95)

3월에 王이 金城서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나뭇가지에

金빛 찬란한 작은 궤(櫃)가 걸려있고, 그 밑에서 닭이 울고 있거늘 호공이 돌아와 王에게 아뢰자, 王이 사람을

보내 그 금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그 속에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외모가 매우 출중하였다. 王이 기뻐하며 이르되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 아니냐”하고 거두어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특출하니 이름하여 閼智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姓)을 金氏라 하였다.

또 始林을 고쳐 鷄林이라 하고 국호를 삼았다. 알지가 후에 대보벼슬에 올랐고, 자손이 이어져 7世 김미추(金味鄒)

가 신라왕조 11대 조공왕(助賁王)의 사위가 되고, 왕통(王統)을 이으니, 제13대 미추왕으로 金氏王朝가 이때부터

시작되어 신라왕조 56왕 가운데 金氏가 38大王을 계승하여 신라의 宗姓이 되었다.

우리 光山金氏의 始祖 王子公(諱 興光)은 憲康王 三子설과 神武王 三子설이 있으나 정확한 고증이 없고,

근거하기 어려워“新羅王子 興光으로 한다”고 정묘대보(丁卯大譜)에 기록되어 전해져온다.  

 

시조 왕자공께서 신라말기에 종국(宗國)이 어지러워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金城을 떠나

武州 西一洞 에 은거하시니 무주는 지금의 光州이다.

이로 인해 관적(貫籍)을 光山으로 하였고, 고려조에 와서 후손에 평장사(平章事:현 장관급)가 많이

배출되니 西一洞의 동명을 平章洞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곳 평장동은 시조 왕자공께서 개기(開基)하시니, 지세와 형국이 아름다워 노령산맥 태조봉을 주산으로

하여 서남으로 수 백리를 뻗어내려 산맥의 정기가 불대산 소조봉에 응기하여 크게 넓고, 힘차게 펼쳐지면서

기치창검(旗幟槍劍)이 칼을 세워놓은 듯한  형상으로 서른여덟개의 장군봉으로 나누어져 웅장하게 옹위하고,

수 백리를 흘러온 黃龍江물과 서로 만나 평장동을 싸고돌아 山水의 정기가 빼어나 한곳으로 뭉쳐서

응기(凝氣)하니 만고대지(萬古大地)로 일컬어진다.

 

시조 왕자공의 사우에서 안대(案對)한 瑞石山은 멀리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웅장하며, 長江이 서로

만나 합류하니, 산맥(山脈)과 수맥(水脈)의 줄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형국을“비봉포란형”이라 하는데,

시조공께서 이곳 천하 명기에 개기하신 음덕으로 유구한 千載의 역사 속에 혁혁한 명문화벌로 면면히 이어져서

三世 김길(金佶:司空公)께서 고려왕조의 통합 시에 기위(奇偉)한 계책으로 창업을 도와 공신이 되시고

5世 김책(金策:文貞公)은 문호를 열었고, 7世 김양감(金良鑑:文安公)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로

유학(儒學)의 터전을 열었으며, 김의원(金義元:忠貞公)이 여진족(女眞族)정벌에 수훈을 세우니, 모두

선세(先世)의 현조(顯祖)이다.

 

고려조에 김태현(金台鉉:文正公)과 아들 김광철(金光轍:文敏公)과 김광재(金光載:文簡公) 三부자가 문자(文字)

시호를 받아 가문을 빛냈고, 김주정(金周鼎:文肅公), 김 심(金深:忠肅公), 김석견(金石堅:化平府院君)과

절의(節義)의 김종연(金宗衍)과 김 연(金璉:良簡公), 김사원(金士元:貞景公), 김 진(金稹:章榮公)3대의

영화가 광김(光金)의

문호를 크게 빛나게 하였다.

 

고려조와 조선조의 천여년 역사 속에 고관대작(高官大爵)과 문장절의(文章節義) 그리고 거유석학이

대대로 계승하여 淸白吏 4인, 대제학 7인, 부조묘(不祧廟)가 13인, 蒙諡한 분이 59인, 문과급제 265인과

특히 동국 18현에 沙溪, 愼獨齋 양 선생이 문묘에 배향되어 禮學의 태두로 추앙되어, 光金이 예문종가가 되었다.

 

 

§ 本貫地의 연혁(沿革)

관적지 광산(光山)의 유래는 평장동에 연원하였으니, 이곳은 본래 백제의 武珍州인데 景德王16년(752)에 武州로

개칭하였고, 고려 太祖23년(1228)에 光州라하고, 그 후 海陽縣이라 하였다가 또 고쳐서 羅州의 속현을 삼았다.

高宗46년(1259)에 翼州事로 승격하고 그 후 武珍州로 승격하였다가 다시 낮추어 光山縣을 삼고, 忠宣王때

化平府를 삼고 뒤에 翼陽郡으로 고치고, 恭愍王11년(1362)에 武珍州로 고쳐서 牧使를 두었다.

 

조선조 世宗12년(1430)에 武珍郡으로 강등하고 그 후 州로 복구하였으며, 成宗20년(1489)에 瑞石縣으로

강등하였다가 燕山7년(1501)에 다시 光州로 개칭하여 목사(牧使)를 두고 仁祖20년(1489)에 또 光山縣으로

강등하였다.

숙종 27년(1701)에 현(縣)으로 숙종33년(1707)에 光州로 복구하니, 일제(日帝)강점기부터 행정구역 개편으로

全南 潭陽郡 大田面 平章里의 동명으로 되어 지금에 이른다.

 

始祖王子公이 新羅의 국운이 기울자 이곳 武珍州(평장동)에 정착하여 자손이 세거함으로 이곳이 관적 즉

본관이 되니, 역사적 지명인 光州 海陽, 光山, 化平등은 모두가 光山의 관적에 속하게 된다. 平章洞의 지명유래는

왕자공 후손에 평장사가 많이 배출되어 이로 인해서 동명을 평장동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시조 왕자공의 유지(遺地)가 오랜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타인소유가 되어 한동안 왕자공이 거처한 옛 터전이

수호되지 못하고 전설로만 전해져 왔으나, 조선조 成宗2년(1471)에 김현뢰(金賢賚:감찰공)가 유허서(遺墟序)에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肅宗朝에 김만기(金萬基:瑞石)가 힘을 모아 옛 터를 찾았으나, 그 후에 또다시 타인 점유가 되었는데 景宗2년

(1722)에 진사 김광수(金光洙)와 김사정(金泗鼎) 二公이 힘써 사우(祠宇)를 세우려다가 중지되고

김진상(金鎭商:退漁子)이 유허비각을 세웠고, 김진동(金鎭東:知樞公)이 김복택(金福澤), 현감 김성택(金聖澤)과

함께 입비통문을 해 3년 뒤에 준공하여 통덕랑 김회풍(金會豊)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 重要 世居地의 변천

앞에서 설명한 5파를 중심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설명한다면 주로 문정(文正), 문숙(文肅)공파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연원지인 광주(光州)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에 골고루 퍼져 살고

있으며 양간(良簡)공파는 충청남도(忠淸南道) 논산(論山)을 중심으로 전북 고창(全北 高敞)과 경남 합천(慶南 陜川)

및 경북 안동(慶北 安東)으로 퍼져 나갔으며, 낭장(郎將)공파는 광주(光州)를 중심으로 사온직장(司醞直長)공파는

충북 충주(忠北 忠州)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세거하였으나 지금은 각파 공히 조선시대의 양대 변란과 일제(日帝)강점기

등의 수난을 극복하고자 세거지를 떠나 이북 땅까지 우리나라 전역과 타국까지 퍼져나갔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首都圈)에 집중적으로 옮겨와 사는 고로 전국 어느 고을 할 것 없이 백만종인(百萬宗人)이

골고루 분포되어 살고 있으니, 이와 같은 것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생을 유지하기 위하여 옮겨 사는 사례라 본다.


§ 氏族史의 개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가문으로서 삼한갑족(三韓甲族)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가문임이

틀림없으며 예문종가(禮文宗家)로 그 이름이 널리 퍼져있다. 먼저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족보 유래를 살펴본다면

朝鮮조 中期에 김지남(金止男:龍溪)이 수집 발간한 용계보(龍溪譜)가 있는데 전해지지 않고, 그 후 肅宗朝에

김만기(金萬基:瑞石)가 발간한 서석보(瑞石譜)와 아드님인 김진규(金鎭圭:竹泉)가 발행한 죽천보(竹泉譜)가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그 후에 김진동(金鎭東)이 肅宗13년(1687)에 발간한 지추보(知樞譜=일명 丁卯大譜)로 전17권이

발간되었고, 그 후 高宗13년(1876)에 발간된 것이 丙子大譜로 전29권이요, 1939년 己卯에 발간된

長城大譜 전48권은 1910년에 충정공(忠貞公:金義元)의 묘지명(墓誌銘)이 발굴된 후에 발간되었다.

 

광복 후, 1957년 丁酉에 발간된 한성대보(漢城大譜)가 전35권이니, 대동보(大同譜)는 丁卯, 丙子, 己卯,

丁酉 네 차례에 걸쳐 발행된 光山金氏의 大同譜이다.

 

광산김씨 족보에는 고려조에 시작되어 始祖 김흥광(金興光:王子公)과 김식(金軾:角干公)은 新羅때 기원(起源)하여

3世 佶이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에 기위(奇偉)한 계책으로 창업을 도왔고, 5世 김책(金策:文貞公)이

우리나라에서 과거제도가 생기자 초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었고, 7世 김양감(金良鑑:文安公)이 사은사로 宋나라에

가서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의 도본(圖本)을 그려가지고 와서 이학(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어 더욱 문호를 빛냈으며,

아드님은 김약온(金若溫:思靖公)이요, 차자(次子)인 김의원(金義元:忠貞公)은 女眞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그 후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무신들의 반란으로 文臣들의 참화가 가혹하여 중간 년대의 기록이 멸몰된 것이 많았다.

 

족보에 의하면 11世에 位와 珠永 두 계보로 분계되니, 11世 位, 12世 光世, 13世 鏡亮, 14世 김수(金須:監察御史公)의

아들 김태현(金台鉉:文正公)과 그의 삼촌 김주정(金周鼎:文肅公)으로 분파된다.

또 일파(一派)는 11世 김주영(金珠永)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12世 光存, 13世 大鱗, 14世 김연(金璉:良簡公)과

김규(金珪:郎將公)으로 분파되고 있다.

 

이에 각파별로 개요를 말한다면 문정공(文正公)파의 파조 김태현(金台鉉)은 삼별초난을 평정하다가 제주에서 순직한

감찰어사공 김 수(金 須)와 102세의 수복을 누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고씨의 아들로 고려 충렬왕조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필을 요하는 직책으로 등용되어 최고벼슬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는데, 김광식(金光軾)은 총부의랑(摠部議郞)으로 후손들이 寶城, 羅州, 高興등

주로 全羅南道권에 세거하고 김광철(金光轍:문민공)은 화평군(化平君)에 봉군되고 후손들이 靈光, 松炭, 咸平, 全州,

光州등지와 堤川, 瑞山, 康津, 淳昌, 海南등지에 정착하고 김광재(金光載:문간공)는 전리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였고 후손들은 濟州島에 정착하여 세거하였고, 김광로(金光輅)는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로 후손들은 潭陽,

光山, 和順, 羅州등 光州권역에 주로 세거, 문호를 열었고, 문정공의 후손으로 봉군(封君)된 해양군 김회조(金懷祖)와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으로 추대된 김도탁(金都卓)이 있는가하면 신돈(辛旽)의 난정에 항거하다가 죽은

김흥조(金興祖)와 그 사건에 연루된 김윤조(金胤祖)는 제주도의 입도조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사에 밝아 제자백가(諸子百家)로 통한 김 첨(金 瞻)은 조선이 건국되자 처음에는

밀려났으나, 태종 때에 다시 출사하여 아악(雅樂)을 정비하였으며, 태종이 왕위를 잇는데 공을 세우고, 판서를

지낸 김계지(金繼志)등이 조선조에서도 인맥을 이어간다. 벼슬길보다 학문을 익히고, 효도를 으뜸으로 실천한

김처겸(金處謙:육행당), 후학지도에 힘을 기울인 김언우(金彦瑀)와 김언거(金彦琚)형제, 그리고 불모지이던 제주에

성리학의 기반을 닦은 김진용(金晉鎔), 호란 후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후학지도를 한 김동준(金東準 :鳳谷)은

유학자로 맥을 이어 호산서원(湖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숙공파의 파조인 김주정(金周鼎)은 元宗5년(1264)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장군(大將軍)등 여러 관직을 거쳐

마지막으로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은 충숙왕조(忠肅王朝)에 협보공신(協輔功臣)으로

군(君)의 봉작을 받은 김심(金深:忠肅公)과 수문전 태학사(修文殿 太學士)를 지낸 김유(金流:侍中公)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으로 국가에 혁혁한 공적을 남겨 군(君)에 봉작된 김석견(金石堅)의 후손은 寶城, 順天, 羅州, 扶安등

全羅道권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세거하였고,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낸 김승사(金承嗣)의 후손은 羅州, 長城, 黃龍등

光州근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있고, 상호군을 지낸 김승진(金承晉)의 후손 역시 光州근역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판서벼슬을 지낸 김승노(金承魯)의 후손은 全南 光州를 중심으로 筏橋, 羅州, 順天, 潭陽등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세거하였고,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김중간(金仲幹)의 후손은 羅州, 海南, 長城, 光州 등지로 맥을 이어갔고,

김윤장(金允臧)은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후손은 保寧, 大川을 중심으로 忠淸권과 黃海권에 정착되었다.

 

돌산 만호로 왜구를 격퇴한 김문발(金文發)과 요승 신 돈(辛 旽)의 난정에 항거하다가 죽은 상호군 김 정(金 精)과

고려(高麗)의 멸망과 운명을 같이한 도만호 김성우(金成雨)와 상장군 김종연(金宗衍)이 굳건하게 절의를 지켰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태종(太宗)의 명을 받고, 전라도 절제사로 김제(金堤)에 관개용 저수지인 벽골제를 만든

김 방(金 倣), 정국공신으로 우의정에 오른 김극성(金克成:靑蘿)과 평장동에 유허서를 써서 후세에 전한

사헌부 감찰 김현뢰(金賢賚)등 모두가 문숙공의 후예로 정충고절(精忠高節)과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성으로

찬란한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양간공파의 파조인 김 연(金 璉:良簡公)은 고려 중ㆍ후기의 문신으로 고려 高宗때

시어사(侍御史), 병부시랑 추밀원부사, 형부상서를 거쳐 충렬왕 25년(1299)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900척을 만드는 총지휘관이 되었다.

공이 어느 날 허리에 찬 금어대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하되, 신장이 내 몸에서 떠났으니, 머물 수

없다하여 사직하고,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良簡이다.

 

양간공의 아들은 김사원(金士元:貞景公)이니, 권간세신(權奸世臣)들의 농권(弄權)을 물리쳤고,

김 진(金稹:章榮公)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지춘추관사 상호군(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고, 충혜왕(忠惠王)때 지공거(知貢擧=試官)가 되어 많은 인재를 뽑아 치적이 많았다. 시호는 章榮이다.

 

김광리(金光利)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고, 김인우(金仁雨)도 전리판서로 공의 후예는 坡州, 開城을 비롯하여

京畿근역에 터전을 열어 세거하였고 김갑우(金甲雨)는 麗末의 공마(貢馬)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이로 인해

형제와 자질들이 모두가 비운을 맞았다. 김인우의 후손 중 일파는 김승길(金承吉:沙隱)이니, 여말의 절신으로

김오행(金五行:梅隱)과 함께 한 많은 여생을 보냈는데, 공의 후손들은 高敞, 全州등의 全北권과 慶南권을 중심으로

문호를 열었다.

김기서(金麒瑞:敦睦齋)와 김경희(金景熹:蘆溪) 부자는 문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후학장려에 힘썼다.

노계공의 아들 김홍우(金弘宇:白谷)와 여러 형제가 임진란에 창의하여 무훈(武勳)을 세우니 공의 후손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한파인 김삼우(金三雨:尙書公)와 김남우(金南雨:典書公)의 후예는 慶南山淸, 陜川, 忠南扶餘 등에 정착 세거하였다.

김 유(金 維:中郞將)와 端宗의 절신(節臣)인 김효종(金孝宗)과 壬亂에 倡義한 義兵大將 김만수(金萬壽) 4형제가 무훈을

세웠고 후손들은 京畿와 仁川권역에서 크게 문호를 열어 忠義로 빛냈고, 김백겸(金伯謙:光原君)이 李施愛亂 평정에

공으로 적개공신이 되니, 시호는 양호(襄胡)로 공의 후예는 京畿 楊平, 黃海 延白에 세거하였다.

 

김영리(金英利)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벼슬을 지내고, 문정공 신현(申賢)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화해사전(華海師全) 편찬에 참여하였다. 김정(金鼎)은 重大匡을 지내 光城君에 봉군되고, 아들 3형제 김약채(金若采),

김약항(金若恒), 김약시(金若時)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어머니 연안이씨는 숙신택주(肅愼宅主)로 봉해지는 은전을

받았다.

 

김약채(金若采)는 충청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지내고, 조선조 초기에 사병양성의 병폐를 근절시키는데

양촌(陽村:權近)과 함께 기강을 세우는데 유공하였고, 忠南 論山市 連山面 高井里에 터전을 열어 크게 문호를 빛내니,

世祖 成宗朝의 相臣으로 李施愛亂 平定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이 된 김국광(金國光:議政公)은 成宗朝에 左議政을

지내고 經國大典 편찬에 유공하여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김국광(金國光)의 아들이 모두 현달하였는데, 맏아들은 大司諫을 지낸 김극뉵(金克忸)이요, 다음이 漢城左尹을 지낸

김극니(金克怩)이고, 그 다음이 忠勳府經歷을 지낸 김극수(金克羞)요, 水軍節度使를 지낸 김극괴(金克愧)와

김극침(金克忱)은 江華經歷을 지냈다. 맏아들 大司諫 김극뉵(金克忸)의 후손이 번성하고 많은 인물을 배출하니,

김계휘(金繼輝:黃岡)는 大司憲이요,

김 개(金 鎧:獨松亭)는 판서로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김계휘의 아들 김장생(金長生:沙溪)은 禮學의 종장(宗匠)으로

아들 김집(金集:愼獨齋)과 함께 부자분이 높은 학문으로 文廟에 配享되는 은전을 받았으며, 예학을 정립시켜서 光金이

예문종가로서 추앙을 받았다.

 

사계선생(沙溪)의 아들 김 반(金 槃:虛舟公)은 참판을 지냈고, 아들 6형제가 모두 현달하니, 맏아들 김익열(金益烈)은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김익희(金益熙:滄洲)는 양관대제학에 文貞公의 시호를 받았고, 김익겸(金益兼)은 江華에서

殉節하여 忠正公의 시호를 받았다. 충정공의 아들 김만기(金萬基:瑞石)는 영돈영부사(領敦寧府事) 광성부원군

(光城府院君)이니, 肅宗의 장인으로 양관대제학에 현종묘정에 종향되고, 아우 김만중(金萬重:西浦)은 예조판서에

양관대제학이요, 숙종묘정에 종향된 형제 대제학이요, 국문학적 문헌으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와 구운몽(九雲夢)의

작가로서 높이 평가 되고,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와 문효공(文孝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김만기(金萬基)의 맏아들 김진구(金鎭龜)는 어영대장과 호조판서 光恩君에 景憲公의 시호를 받았고, 둘째 아들

김진규(金鎭圭:竹泉)는 예조판서 양관대제학에 文淸公의 시호를 받았고, 공의 아들 김양택(金陽澤:文簡公)은

양관대제학에영의정을 지냈고, 瑞石ㆍ西浦가 형제대제학이요, 또한 瑞石ㆍ竹泉ㆍ健菴은 3대 대제학이며,

김상현(金尙鉉:經臺)과 김영수(金永壽:荷亭)가 모두 대제학으로 光金에 大提學 일곱 분이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에서 나왔다.

김진구(金鎭龜:晩求窩)의 아들 8형제가 모두 뛰어난 재주로 영달하니 김춘택(金春澤), 김보택(金普澤),

김운택(金雲澤), 김민택(金民澤), 김조택(金祖澤), 김정택(金廷澤), 김연택(金延澤)으로 光金의 8택(八澤)이라

이르며 모두가 영달하였다.

 

어영대장을 지낸 光南君 김익훈(金益勳)은 보사(保社)공신에 충헌공(忠獻公)의 시호를 받았다. 공의 손자 김진상

(金鎭商:退漁子)과 김상악(金相岳)은 문간공(文簡公)의 시호를 받았고, 김상현(金尙鉉)은 문헌공(文獻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조카 김영목(金永穆)은 문헌공(文憲公)의 시호를 각각 받았다. 김기성(金箕性:頤吉軒)은 英祖의

부마요, 김재창(金在昌:孝憲公)은 貞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익경(金益炅)의 손자 김진동(金鎭東)은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丁卯大譜 知樞譜를 발간한 주인공이다. 김낙현(金洛鉉:文敬公)과 김상휴(金相休:文簡公), 김기은(金箕殷:淸獻公),

孝文公 김재현(金在顯:孝文公), 김보현(金輔鉉:文忠公)은 모두 都憲公 김익경(金益炅)의 후손이다.

김익희(金益熙)의 후손에 강원감사를 지낸 김진옥(金鎭玉)과 영의정을 지낸 김상복(金相福:文憲公), 우의정을 지낸

김 희(金熹:芹窩)이다. 그 외에도 많은 대관(大官)과

유현(儒賢)이 배출되었는데, 김정묵(金正黙:過齋), 김상정(金相定)등 명현 달사(名賢達士)가 모두 사계 김장생의

후손에서 나왔으며, 김 규(金 槼:豆溪) 여러 형제도 사계의 아들로 명망이 높았다.

 

김겸광(金謙光:恭安公)은 청백리에 녹선되어 좌리공신 광성군에 봉군되었다. 아들 김극핍(金克愊:平靖公)은

좌찬성으로 光嶽君에 봉군되고, 아들 김명윤(金明胤)은 左贊成, 김홍윤(金弘胤)은 大司憲을, 김의윤(金懿胤:

市隱公)은 道學이 높아 花潭 서경덕(徐敬德)과 道義交를 맺었으며,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不就한 청렴한

도학자이다.

 

예조참판을 지낸 김극개(金克愷)와 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中宗의 駙馬로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한말의 김기석(金箕錫:貞武公)은 어영대장으로서 훈업을 남겼고, 학행으로 김중정(金重鼎:肯構堂)과

김상연(金尙埏:棄棄齋)을 비롯해 후손에 많은 유현(儒賢)을 배출하였다. 공의 후손이 論山 連山과 扶餘, 燕岐,

抱川, 楊平, 水原, 沃川, 鎭安 등 忠淸道일대와 京畿 서울권에서 세거하였다. 교서관(校書館) 판교를 지낸

김경광(金景光)의 후손은 경기도와 서울 근역권에서 세거하였다.

 

관찰사 김약채의 맏아들 김 문(金 問:檢閱公)이 요졸하자 정경부인 陽川許氏가 청상(靑孀)으로 정절을

지켜 그 후덕한 음덕이 자손에 드리워져 光山金氏가 해동 명문이요, 삼한갑족, 예문종가의 명망을 얻게 되었다.

 

관찰사의 셋째 아들 김 한(金 閑)은 中軍도총부 부총제를 지냈고, 임진란 원종훈 김면(金沔:莊悼公)은 적개2등

공신으로 光川君에 봉군되었고, 자손이 利川, 陰城, 安城, 燕岐, 龍仁등 京畿圈과 豊德 등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관찰사의 막내아들 김열(金閱:退村)은 문장이 명세(鳴世)하였고, 증손 김여석(金礪石:忠穆公)은 판서와

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子孫이 春川, 抱川, 茂朱, 尙州, 論山등지에 세거하였고, 김용석(金用石:潭庵公)은

장안(長安)의 명사로 연산혼정(燕山昏政)을 예지하고, 安東으로 낙향하였다.

 

김득렴(金得磏:道峰公)은 九潭에서, 김언구(金彦球:雙碧堂)는 奉化에서 문호를 열어 후손에 많은 유현을 배출하였고,

김언기(金彦璣:惟一齋)는 학문이 크게 성취하여 문하에 많은 유현(儒賢)과 명사(名士)를 배출하여 안동문학

(安東文學)의창도자(唱導者)로 추앙되어 향중(鄕中)에서는 退溪 先生과 惟一齋 先生 두 분이 우뚝 솟아 추앙된다고

하였다.

 

아들 김득연(金得硏:葛峰)은 학문이 높고 壬辰亂때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安東守城에 유공하니,

유성룡(柳成龍:西厓)이말하되,“安東이 유독 完全함은 葛峰 때문”이라 하였고, 葛峰公은 止水亭歌와 最長文의

한글가사와 한글 시조를 창작하여한글문화 연구자료를 남겼고, 김광원(金光源:石塘)은 南州의 高士로 안동

영호루기(映湖樓記)를 써서 文名을 떨쳤다.

유일재의 후손은 安東 臥龍, 醴泉, 英陽, 奉化 등 慶北일원에 분포되어 있다.

 

사헌부 執義를 지낸 김달전(金達全)과 장악원정을 지낸 김지(金漬:道南公)와 김호문(金好文:愚齋)이 명망이 있었고,

후손은 陜川, 宜寧, 居昌, 咸陽 등 慶南一帶에 널리 분포되었다. 막내아들 김달도(金逹道)는 영흥판관을 지내고, 아들

관찰사를 지낸 김호(金浩)와 아들 김우서(金禹瑞:舍人公)를 비롯해 儒賢을 배출하였는데, 金浦와 仁川일원에 세거하여

문호를 열었다.

 

김약항(金若恒:惕若齋)은 청백리에 녹선되고, 표문관계로 明나라 天子의 노여움을 사 중국 雲南省에 유배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恨을 남기니, 아들 사재감정을 지낸 김허(金虛)와 서령을 지낸 김처(金處)는 부친이 억울하게 謫所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恨으로 눈물어린 한 세상을 마쳤다. 후손은 서울 근역과 배천, 강진, 개풍등지와 경기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김약시(金若時)는 고려조에 직제학 벼슬을 지내고, 역성혁명으로 이성계가 등극하자 고려조의 유신임을 자처하고,

杜門洞 72현 가운데 한분으로서 경기 廣州 금광리 산중에 은거 청맹이라 이르고, 절의를 지켰다. 조선조 숙종 때 높은

관작을 추증하고, 忠定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김췌(金萃)는 성주목사로 관의 기강을 확립에 기여하였고,

아들 김순성(金順誠)은 평양서윤을 지냈고, 손자 김신동(金神童)과 경상감사를 지낸 김지남(金止男:龍溪)과 평양감사와

부윤을 지낸 김영남(金潁男:掃雪翁)과 홍문관 전적을 지낸 김규(金규 )와 김위남(金偉男:藥山), 김우형(金宇亨:

貞惠公)과 丙子胡亂때 김득남(金得男:忠懿公) 등, 이 외에도 많은 儒賢과 재사가 배출되었고, 김순성(金順誠)의

막내아들 김굉(金硡)은 경상감사에 이조참판을 지냈다. 후손들은 城南, 廣州, 牙山, 瑞川, 洪城, 高興, 禮山, 淸州,

槐山, 鎭川 등 京畿, 忠北일대에 분포되어 세거하였다.

 

김성리(金成利)는 사온승(司醞丞)벼슬을 지내고, 손자 김성옥(金成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후손은 羅州,

光州, 咸平, 務安, 長城등지에 세거하였다.

 

김안리(金安利)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후손에 김자민(金自敏)은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후손이 潭陽,

淳昌, 長城, 光州 등지에서 문호를 열었다.

 

김천리(金天利)는 밀직부사(密直副使) 벼슬을 지냈고, 아드님 김 무(金務)는 제용소감(濟用少監)이니, 두 아들을

두어 김탄지(金坦之)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내고, 김숭지(金崇之)는 목청전전직(穆淸殿典籍)을 지냈고,

평시서령후로 김수항(金秀沆)은 담양부사를 김수변(金秀汴)은 첨사(僉使) 벼슬을 지내니, 자손들이 富川, 瑞川,

始興, 保寧, 洪城, 安東, 醴泉, 扶餘 등지에 산재해 살고 있으니, 또 일파는 김숭지(金崇之)후로 김효로(金孝盧:聾叟)는

安東禮安의 입향조이니, 이후로 크게 문호가 열려 일명 예안파(禮安派)라 부른다. 아드님 김연(金緣:雲巖)은

강원감사를 지내 문명을 떨쳤고, 아우 김 유(金 綏:濯淸亭)는 문행이 있고, 탁청정은 문화재로 유명하며,

4대 명필 한호(韓濩:石峰)가 쓴 현판이 전해진다.

 

운암의 아들에 김부필(金富弼:後彫堂)은 退溪의 명망 높은 제자로 퇴계와 같은 문순(文純)의 시호를 받았고

김부의(金富儀:挹淸亭)도 退溪의 문도로 璇璣玉衡을 만들었으며 탁청정의 아들에 김부인(金富仁:山南)은 兵使로

김부신(金富信:養正堂)과 김부륜(金富倫:雪月堂)등 5종반 모두 李退溪선생의 고제자이다. 정한강(鄭寒岡)이

<烏川一里無非君子>라고 하여 君子里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후손에 김해(金垓:近始齋)는 임진란에 창의하여 慶尙左道義兵大將으로 추대되어 전과를 올렸고

김영(金坽:溪巖)은 光海君이 폐위되자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켜 文貞의 시호를 받았다. 良簡公 이후 3대에 걸친

高麗시대의 호적과, 그후로 한 대도 빠지지않고 교지, 첩지등의 고문서를 잘 보관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단지로 조성되어있다. 후손들은 禮安을 비롯하여 安東, 醴泉, 英陽, 義城등지로 세거하고 있다.

 

김 규(金 珪:郎將公)의 후예에 김지보(金之寶)는 대사성을 지냈고, 손자인 김한로(金漢老)는 예문관대제학으로

광산군에 봉군되었다. 양년대군의 장인이다.

 

김덕령(金德齡:忠壯公)은 임진왜란 평정에 큰 전공을 세우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호칭으로 용맹을 떨쳤다.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으로 29세의 젊은 나이로 웅지도 펴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형 김덕보(金德普)와 사촌 김덕휴(金德休)도 임진란에 순절하였다. 후손은 光州, 潭陽, 高興, 長城, 和順, 寶城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김 영(金 英)의 벼슬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으로 김소(金遡)는 이조참판이요, 김청(金廳)은 지중추부사로

희정공(僖靖公)의 시호를 받았고, 五蒙의 5형제가 모두 문명을 떨치니, 그 가운데 김예몽(金禮蒙:文敬公)은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조선조의 명신으로 추앙받았다.

예문관 제학 김성원(金性源)의 아들 八文이 모두 재주와 문명을 떨쳤는데, 김철문(金綴文), 김말문(金末文),

김내문(金乃文)이 특히 학문이 뛰어나 크게 현달하였다.

 

중종조에 김구(金絿:自菴,文懿公)는 己卯名賢, 삼암(三菴~趙光祖, 金淨, 金絿)中의 한분으로 조선조

4대 명필(仁壽體)로 높이 평가 된다. 김종제(金宗悌)는 한성부윤이요, 김대덕(金大德:蘇峰)은 참판으로 국난평정에

유공하였고, 김강(金綱:宜菴)은 홍문관제학, 김신(金紳)은 황해감사 등 그 외에도 많은 유현을 배출하여 5蒙8文家의

명성을 높였다. 후손은 華城, 忠州, 禮山, 洪城, 驪州, 槐山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일이 열거는 못하더라도 光山金氏의 인맥을 약술하였는데, 다시 요약하여 보면

김알지(金閼智:大輔公)를 연원으로 하고, 신라왕자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우리 민족사의 성씨로서는 가장

오래 된 2천년을 연면(連綿)하게 계통을 이어왔고 3世 佶이 고려조 건국공신으로 등장한 이래 전후기를 통하여

많은 명신들이 민족 통일의 촉진, 문화발전, 외침의 격퇴 등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며, 朝鮮朝에서도 도덕과

학행이 뛰어난 분들이 많이 나와서 유학의 대통을 계승하고 나아가서는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조선사회의

생활순화에 공헌하는 동시에 많은 유현들이 나와 이 나라 학문발전에 전력을 다해 왔다는 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나라를 지키다가 순절분사한 선비와 왕의 난정에 간하면서 낙향까지 하면서도

지조를 지킨 선비가 많았고, 국치를 당하여 자결로써 지조를 지키는가 하면, 한편으로 효도와 열행이 뛰어난

분이 많았으니, 인물 코너에서 시대별, 역할별로 그 인명을 상세히 밝히고자 한다.    [인물 코너 건너가기]